고성 이씨(固城 李氏)증시자: 10명(고려 3) 시주: 4명
이존비(李尊庇)1233년(고종 20)∼1287년(충렬왕 13). 고려의 문신.
시호: 문희(文僖) 문중자료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인성(仁成), 자는 지정(持正).
부인은 좌복야 한림학사(左僕射翰林學士) 이주일(李湊一)의 딸이며, 아들은 이우(李瑀)‧이정(李精)‧이숙(李璹)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 백문절(白文節)에게 글을 배워 문장과 예서(隷書)에 능하였으며, 유경(柳璥)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유학에 밝았다.
1260년(원종 1) 과거에 급제한 이후 내시(內侍)에 입적되었으며, 이어 비서교서랑(秘書校書郞)‧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호부(戶部)‧병부(兵部)‧이부(吏部)의 시랑을 역임하고 1275년(충렬왕 1) 상서우승(尙書右丞)‧예빈경(禮賓卿)을 거쳐 좌승지에 올랐으며, 이때 필도지(必闍赤)의 일원이 되었다.
1279년 밀직부사로서 장군 정인경(鄭仁卿)과 함께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원나라에 사행하였으며, 이듬해 지밀직사사‧세자원빈(世子元賓)에 오르고, 1282년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하였다.
1284년 감찰대부(監察大夫), 1287년에는 경상도‧충청도‧전라도의 도순문사가 되어 여몽군(麗蒙軍)의 일본정벌을 위한 병량(兵糧) 및 군선(軍船)의 조달을 담당하였는데 제반조치가 적의하여 민원을 사지 않았다.
그뒤 벼슬이 판밀직사사에 이르러 죽자, 그의 죽음에 대하여 특히 세자가 울면서 심히 애석해하였다고 한다.
묘지명이 현재 전하며 회당화상(晦堂和尙)에게 보낸 칠언율시가 《동문선》에 실려 있다.
돌아가신 봉익대부 동판밀직사사 좌상시 문한학사승지 세자원빈
(奉翊大夫 同判密直司事 左常侍 文翰學士承旨 世子元賓) 이공(李公) 묘지
정해년(충렬왕 13, 1287) 정월 초7일에 추판(樞判) 이공(李公)이 임시로 거처하던 곳[僑寓]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5세이다. 빈소를 집으로 옮기고, 윤2월 23일 갑신일에 채전산(菜田山) 동쪽 기슭에 장례지냈다.
공의 이름은 인성(仁成)이었으나 뒤에 존비(尊庇)로 고쳤다. 자는 지정(持正)이며, 고성군(固城郡) 사람이다. 아버지 진(瑨)은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하지 않았고, 어머니 백씨(白氏)는 85세로 지금까지 건강한데 본관은 남포(藍浦)이며, 외조는 예부낭중(禮部郞中) 경선(景瑄)이다.
공은 사람됨이 마음의 본바탕이 평온하고 조용하여 흔들림이 없었다.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고, 욕심 없이 담담하게 지냈다. 비록 재보(宰輔)의 지위에 이르렀어도 항상 귀한 손님을 접대하기를 마치 서생(書生)과 같이 겸손하게 하였다. 19세에 남성시(南省試)에 합격하고, 28세에 예부시(禮部試)에 합격하여 내시[星閨]에 적을 두었다. 32세에 권무직(權務職)을 받고, 여러 번 옮겨 비서교서랑 액정내알자 대학박사 겸 직한림(秘書校書郞 掖庭內謁者 大學博士 兼 直翰林)이 되었으며, 정당(政堂)에 불려 들어갔다. 36세에 참직(叅職)에 들어가 권지각문지후(權知閣門祗候)가 되었다. 37세부터 역임한 관직은 전중내급사 호부원외낭중 중서사인 병부·이부시랑 대자문학 내직랑 보문대제 지제고 동궁시독학사 응선부우첨사(殿中內給事 戶部員外郞中 中書舍人 兵部·吏部侍郞 大子文學 內直郞 寶文待制 知制誥 東宮侍讀學士 膺善府右詹事)이고, 품계는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올랐다. 43세에 남성시(南省試)를 관장하고, 조정·조의·중산·중대부 상서우승 예빈경 좌·우사의대부 비서윤 판예빈시사 충사관수찬관 밀직사우부승지 우승지 좌승지 삼사사 지군부사사(朝靖·朝議·中散·中大夫 尙書右丞 禮賓卿 左·右司議大夫 秘書尹 判禮賓寺事 充史館修撰官 密直司右副承旨 右承旨 左承旨 三司使 知軍簿司事)를 역임하였다. 47세에 비(批)를 내려 중의대부 밀직사부사 판도판서 문한학사(中議大夫 密直司副使 版圖判書 文翰學士)로 임명하고, 곧 봉익대부 동지밀직사사 지밀직 동판밀직 문한학사승지 세자원빈 감찰대부 좌·우상시(奉翊大夫 同知密直司事 知密直 同判密直 文翰學士承旨 世子元賓 監察大夫 左·右常侍)를 제수하였다.
신사년(충렬왕 7, 1281)에 상국(上國 : 元)이 조회를 하러 오지 않는 일본(日本)[日域]을 토벌하려고 칙령을 내려, 바다를 건너는 군사의 식량 10만여 곡(斛)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이 임무를 담당하는 것을 모두 피하려고 하였으나, 공은 팔을 걷어붙이고 바로 나가며 두려워하지 않았다. 영남(嶺南)으로 내려가 통솔하자 순식간에 만 척의 배에 실을 만한 식량을 마련하였다. 삼한(三韓)의 편안함이 한 손바닥 안에 있게 되었으므로, 임금이 포상하고 가상하게 여기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임오년(충렬왕 8, 1282)에는 동당시(東堂試)의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공은 두 차례 시험을 주관하였는데, 문생(門生)을 거느리고 은문(恩門)인 시중(侍中) 유경(柳璥)공을 찾아뵈니, 이 일은 천고(千古)의 역사를 쓰는 데 미담이 되었다.
공은 좌복야 한림학사(左僕射 翰林學士) 이주(李湊)의 큰딸과 결혼하여 4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우(瑀)는 근시 낭장(近侍 郞將)인데 지금 상국(上國)의 궁전배(弓箭陪)로 있고, 차남 정행(精行)은 수선사(修禪社)의 제5조(祖)인 원오국사(圓悟國師, 梁天英)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조계종 굴산(曹溪宗 崛山)에서 중[浮圖]이 되었으며, 3남 숙(璹)은 양온승동정(良醞丞同正)인데 아직 관례를 올리지 않았다. 장녀는 근시 예빈주부 겸 직사관(近侍 禮賓注簿 兼 直史館)인 박장(朴莊)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권지국학학유(權知國學學諭) 유인명(柳仁明)에게 시집갔다. 4남과 3녀는 겨우 배냇니를 간 어린아이들이다.
아들과 사위 등이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였으므로, 수락하여 명(銘)을 지어 이른다.
마음은 조용하고 온화하였으며, 꽃다운 행적은 비할 데 없이 훌륭하도다.
네 차례 약계(藥階, 內侍)에 들어가 담비[貂]꼬리 털과 옥귀거리[璫珥]로 관(冠)을 장식하고
한 차례 백서(栢署, 御史臺)에 오르니 해태[豸獬]로 장식한 관(冠)이 사람들을 두렵게 하였다.
두 번 문병(文柄, 知貢擧)을 잡으니 난(鸞)새와 봉(鳳)새가 서로 모여 들고
네 아들이 이어진 구슬처럼 훌륭하게 되어 호랑이와 용과 함께 다투어 달리도다.
자추(紫樞, 樞密院)의 우두머리가 되어 활보하였지만 어찌하여 황각(黃閣, 宰府)에는 오르지 못하였으며
나이가 쉰 살이 지났으나 어찌 머리가 누래지도록 장수하지는 못하였는가.
하늘의 도리는 넓고 아득하니 그것을 힐책할 자가 누구인가.
강물은 졸졸 흐르고 산은 우뚝 솟아 있어서
이 곳에 묻히게 되었으니, 자손은 억만(億萬)으로 불어나리라.
지원(至元) 24년 정해년(충렬왕 13, 1287) 윤2월 23일
李相國墓誌」(題額)
卒奉翊大夫同判密直司事左常侍文翰學士承旨世子元賓李公墓誌
歲丁亥正月初七日樞判李公病卒于僑寓享年五十五移殯于私第越閏二月二十三日甲申葬于菜田山之東麓公諱仁成後改尊庇字持正固城郡人也皇考諱瑨登第未仕妣白氏年八十五至今無恙本藍浦外祖禮部郞中景瑄公爲人心地恬靜無波不營家産居室淡如也雖至宰輔常接賓客如措大時年十九登南省試二十八擢礼部試籍屬星閨三十二受權務累遷秘書校書郞掖庭內謁者大學博士兼直翰林召入政堂三十六入叅爲權知閣門祗候自三十七年內所歷殿中內給事戶部員外郞中中書舍人兵部吏部侍郞大子文學內直郞寶文待制知制誥東宮侍讀學士膺善府右詹事階加朝散四十三掌南省試歷閱朝靖朝議中散中大夫尙書右丞礼賓卿左右司議大夫秘書尹判礼賓寺事充史舘修撰官密直司右副承旨右承旨左承旨三司事知軍簿司事四十七批除中議大夫密直司副使版啚判書文翰學士尋除奉翊大夫同知密直司事知密直同判密直文翰學士承旨世子元賓監察大夫左右常侍歲在辛巳上國討不庭之日域勑備過大洋軍料十万餘斛句當是任皆以計避至公卽扼腕直進無疑出統嶺南咄嗟所辦萬艘載糗三韓之安在一掌中上褒嘉不已授以壬午歲東堂知貢擧公掌試兩度率門生往謁恩門侍中柳公璥是爲千古史筆上美談公娵左僕射翰林學士李湊一女生子四女三胤子瑀近侍郞將時爲上國弓箭陪次子精行詣修禪社第五祖圓悟國師祝髮爲浮啚於曺溪崛山下三子璹良醞丞同正未冠一女適近侍礼賓注簿兼直史館朴莊次女適權知國學學諭柳仁明四子三女才離齔齒云子婿等托予以銘故受而銘之曰
心地恬和茟蹤奇絶四入藥階貂璫珥餙一登栢署豸獬懾物再提文柄鸞鳳交集四子珠聯虎龍」
爭躍魁步紫樞何未登黃閣旣過五旬何未至黃髮天道茫茫詰之者孰有水湲湲有山嶷嶷於爲」
窆爲子孫萬億 至元二十四年丁亥閏二月二十三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