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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단어 'ㅈ’ 에 해당하는 단어들
1. 정의 2. 진리 3. 주 4. 지혜 5. 죽음 6.정죄하다 7.준비하다 8. 죽다
9.저주 10. 전도 11.절제하는 12. 접붙이다 13. 진노 14. 정욕 15.지키다
1. 정의(Righteousness) 성경사전에서 발취
*일반적으로는 바른 마음을 가리키며,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체다카’(tsedakah)는‘진실을 말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성경에서 말하는 정의란, 공동체 내에서 자기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도록 돕는 사람들의 도덕적 자세를 의미한다. 이것은 단지 인간과의 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렘 4: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의롭고 공평하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셨는데.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렘 22:3)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그 정사[정사:원,시작,처음, 권위,지배,통치,통치자,2.정치상의 일]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특별히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죄악들을 지적하면서 이스라엘 국가와 사회 안에 공법과 정의가 실종되었음을 고발하였으며.“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암 5:7)그와 동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 공법을 강물같이 흐르게 하고 정의를 계곡의 시냇물처럼 흐르게 하라고 외쳤다.“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 의를 참고하라.
2. 진리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 진리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진리’로 번역된 헬라어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는 ‘진실한, 진리를 사랑하는, 진리를 말하는, 참된, 진실된’이라는 뜻을 가진 ‘알레데스’(ἀληθής)에서 유래된 단어로 ‘진리, 객관적인 진리, 주관적인 경험적 진실’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알레데스’(ἀληθής)가 부정적 불변사로서 ‘아’(ἀ)와 ‘숨기다, 감추다, 깨닫지 못하다’라는 뜻을 가진 ‘란다노’(λανθάν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점에서 ‘진리’(ἀλήθεια)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속뜻은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누구나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로써의 참된 이치 또는 도리’라는 것과는 다른 ‘숨겨지고 감추어진 것이 밝히 드러남,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됨’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의 히브리어 단어는 ‘확고함, 충실함, 진실’이라는 뜻을 가진 ‘에메트’(אמח)인데 이를 파자하면 ‘하나님 말씀의 완성’이라는 의미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에서 ‘진리’(ἀλήθεια)가 충만(플레레스: πλήρης – 완성된)하신 분,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에메트’(אמח)가 ‘처음’(א=Ἄ)과 ‘나중’(ח= Ω) 되시는 ‘말씀’(מ)이라는 의미에서 처음과 나중 되시며 말씀이신 예수님은 스스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에고에이미 토알파 카이토 오메가: Ἐγώ εἰμι τὸ Ἄλφα καὶ τὸ Ω.’(계1:8)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진리’(ἀλήθεια)이신 예수님은 항상 ‘진리’(ἀλήθεια)안에서 가르치셨으며 (마22:16)“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진리’(ἀλήθεια)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눅4: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막12:14)“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진리’(ἀλήθεια) 안에서 할 것을 당부하셨다.
성경은‘진리’(ἀλήθεια)가 없는 자를 가리켜 ‘욕심’(에피뒤미아 : ἐπιθυμία)대로 행하는 자, 처음부터 살인한 자,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하고 있다(요8:44).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진리’(ἀλήθεια)를 아는(γινώσκω) 자이며, ‘진리’가 된(γινώσκω) 자이고, 지금 그리고 여기(Now and Here)에서부터 영원히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자인 것이다(요8:31-32)“31.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리고 그가 진리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께 갈 수 있는 것이다(요14: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 : 진리]
3. 주 알케고스(ἀρχηγός) : 주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임금, 주’로 번역된 헬라어 알케고스(ἀρχηγός)는 신약에서 4회 사용되고 있는데 사도행전5장 31절에서는 ‘임금’으로, 사도행전 3장 15절과 히브리서2장 10절과 12장 2절에서는 '주’로 번역되었다. 알케고스(ἀρχηγός)는 알케(ἀρχή)와 아고(ἄγω)에서 유래되었다.
알케(ἀρχή)의 뜻은 ‘시작, 첫 자리, 원인, 기원, 시작하는 사람, 통치’이며, 아고(ἄγω)는 ‘이끌다, 안내하다, 하루를 보내다, 절기를 지키다, 축하하다, 출발하다’라는 뜻이다.
정리하면, 알케고스(ἀρχηγός)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요1:1)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요1:14) 창조주 하나님이신 주, 오늘도 다스리며 섬기시는 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알케고스(ἀρχηγός)의 의미를 좀더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이 단어가 쓰인 용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단어는 예수님과 관련해서만 사용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하나님이 예수를 임금(ἀρχηγός)으로 삼으셨다(행5:31)’에서는 ‘하나님의 오른손(δεξιός)으로 세우신 최고의 왕’으로서의 예수를 말하고 있다. 참고로 오른손으로 번역된 덱시오스(δεξιός)는 ‘의로운, 의인, 의’의 뜻을 가진 디카이오스(δίκαιος)를 의미한다. ‘생명의 주(ἀρχηγός)’(행3:15)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완전한 생명(ζωή) 그 자체이며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또한 ‘구원의 주(ἀρχηγός)’(히2:10)에서는 ‘영원한 사망에서의 완전하고 영원한 메시야로서의 구원(σωτηρία)’이신 구원자로서의 예수를 말하고 있으며, ‘믿음의 주(ἀρχηγός)’(히12:2)에서는 ‘하나님은 믿음이시다(πιστός)(고전1:9)와 똑같은 의미인 믿음(πίστις)이신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의(δίκαιος), 생명(ζωή), 구원(σωτηρία) 그리고 믿음(πίστις)이신 하나님 본체로서의 알케고스(ἀρχηγός)이신 것이다. [알케고스(ἀρχηγός) : 주]
4. 지혜 솝히아(σοφία) : 지혜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지혜’로 번역된 헬라어 ‘솝히아’(σοφία)는 ‘현명한, 지혜로운, 숙련된, 노련한 교양 있는 학식 있는’의 뜻을 가진 ‘솝호스’(σοφός)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특별히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과 관련되어 사용된 용례를 보면,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σοφός)가 충만하며’(눅2:40), ‘예수는 지혜(σοφός)와 키가 자라가며..’(눅2:52), ‘이 사람(예수)의 이 지혜(σοφός)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마13:54) 그리고 ‘이 사람(예수)이 받은 지혜(σοφία)’(막6:2)로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지혜’(σοφία)는 하나님의 ‘지혜’(σοφία)이다(눅11:49).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지혜’(σοφία)가 감추어져 있다.“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2:2-3)고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선물인 은사(카리스마 : χάρισμα)를 이야기하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σοφία)의 말씀을 주신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그 ‘지혜’(σοφία)는 오직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라고(약3:17) 말하면서 하나님께 ‘지혜’(σοφία)를 구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아래의 세상에는 참된 ‘지혜’(σοφία)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헬라인이 이 땅에서 ‘지혜’(σοφία)를 찾는 것처럼(고전1:22)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혜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이 세상의 지혜를 찾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σοφία)는 없애버리고(아폴뤼미 : ἀπόλλυμι – 완전히 파괴하다) 똑똑하다는 자들의 식견을 물리치리라’(공동번역 고전1:19)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솝히아’(σοφία)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지혜’라는 뜻의 ‘호크마’(חכמה)인데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써의 지혜(חכמה)를 파자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것으로 전환되어 그 말씀을 배워 살아가는 실존’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충만히 가지고 있었던 ‘지혜’(σοφία),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지혜’(σοφία)가 바로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고 그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지혜’(σοφία)는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이라는 세상의 ‘지혜’(智慧/知慧)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늘도 하나님의 ‘지혜’(σοφία)에 목 말라해야 하며 그러기에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σοφία)를 날마다 구하여(αἰτέω)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또한 진리의 말씀을 배우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솝히아(σοφία) : 지혜]
5. 죽음 다나토스(θάνατος) : 죽음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죽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다나토스’(θάνατος)는 신약성경에서 ‘육체의 죽음, 영과 육의 분리, 죄로 인해 야기된 영혼의 비참함, 죽은 악한 자들의 지옥에서의 비참한 상태, 죄로 인해 야기된 모든 비참함을 포함하는 죽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사망하다, 영적으로 죽다’는 뜻을 가진 ‘드네스코’(θνῄσκω)에서 유래되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죽음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부정적 의미로써 그 단어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생명(ζωή) 안으로(εἰς) 옮겨진 하나님을 믿는 자는 ‘죽음’(θάνατος)을 통과한(ἐκ) 자라는 의미에서 볼 때 그 죽음은 성도에게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할 필연적인 과정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70인역에서 ‘다나토스’(θάνατος)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인 ‘무트’(מוּת)를 통해서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무트’(מוּת)는 ‘죽다, 죽이다, 사형집행을 하다’라는 뜻이지만 문자로서 파자를 하면 ‘진리의 완성’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다시 말하면 ‘무트’(מוּת)의 죽음은 받아서는 안 될 하나님의 심판으로서의 죽음이라는 의미보다는 언약의 말씀으로 보아 진리의 완성이라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죽음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인 ‘반드시 죽으리라’(모트 타무트 : תּמוּת תוֹמ)는 의미는 ‘반드시 죽여 진리로 완성시키겠다’는 언약의 말씀, 은혜의 말씀인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θάνατος)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화목하게 되었으며(롬5:10),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θάνατος)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사는 자로 살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그리스도로 사는 삶, 진리의 삶은 다나토스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여정에 반드시 필요한 참 좋은‘죽음’(θάνατος)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원하는대로 사는 삶이 아닌 진리, 말씀에 이끌려 살 수 밖에 없는 자기부인의 삶, 다나토스(θάνατος)의 죽음이야 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죽음’(θάνατος)이 되는 것이다(요21:19).
그러기에 성도는 ‘없음’이라는 자신의 처음자리를 깨닫아 우리로 하나님의 성전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여정가운데 반드시 있어야할 은혜의 선물인 ‘다나토스’(θάνατος)의 ‘죽음’을 통과한 자들인 것이다.
[다나토스(θάνατος) : 죽음]
6.정죄하다 카타크리노(κατακρ?νω) : 정죄하다 (condemn)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8:11)
'정죄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크리노'(κατακρ?νω)는 ‘아래, 통해서, …에 의하여, 향하여, 따라서’의 뜻을 가진 전치사 ‘카타’(κατ?)와 어원적으로 ‘구별하다, 결정하다, 언도하다, 정죄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나누다, 여기다, 결정하다, 결심하다, 법령을 정하다, 재판하다, 통치하다, 싸우다, 소송하다, 언도하다, 결말짓다, 정하다’의 뜻을 가진 ‘크리노’(κρ?ν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불리한 판결을 하다, 처벌 할만 하다고 판결하다, 선고하다, 정죄하다, 저주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명사형은 ‘불리한 선고, 정죄, 죄를 씌우는 선고, 유죄선고’의 뜻을 가진 ‘카타크리마’(κατ?κριμα)이다.
구체적으로 ‘카타크리노’(κατακρ?νω)는 ‘…를 향하여(κατ?)죄가 있다고 단정하다’라는 의미로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너는 죄가 있다’고 단정해 버리는 의미에서의 ‘정죄하다’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인간을 향하여 ‘너는 어두움이다(요1:5), 너는 죄인이야(롬3:23), 너는 허물과 죄로 죽은 자야(엡2:1)’라고 말할 때 이것은 인간이 행한 어떤 행위에 근거해서 그것 때문에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인간의 처음자리가 죄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성경이 말하는 '정죄하다’(κατακρ?νω)의 의미는 세상의 도덕과 윤리에 근거하여 서로를 향하여 또는 세상의 재판관이 죄가 있다고 단정하는 것과는 의미상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정죄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으로 오신 예수님도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향하여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κατακρ?νω) 아니한다’(요8:11)고 말씀하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은 그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고(행2:36)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셨으며(롬8: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κατ?κριμα)이 없는 것이다(롬8;1). 이 모든 일도 내가 어떤 의로운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인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며(롬1:17) 성경은 그 의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롬3:22)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스스로의 노력과 의로운 행위에 의해서 하나님의 정죄하심(κατακρ?νω)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15:10)라고 고백한 바로 그 고백을 하는 자이며,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오늘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엡2:22) 자이다. [카타크리노(κατακρ?νω) : 정죄하다 (condemn)]
7.준비하다 카타스큐아조(κατασκευ?ζω):준비하다 (equip)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11:7)
‘준비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스큐아조’(κατασκευ?ζω)는 ‘아래, 통해서, …에 의하여, 향하여, 따라서’의 뜻을 가진 전치사 ‘카타’(κατ?)와 ‘그릇, 도구, 장비, 기구, 가정용 기구, 돛과 밧줄에 사용되는 배의 도구들, (은유적으로) 선택된 도구로 사용되는 우수한 사랑, 행악의 조력자’의 뜻을 가진 ‘스큐오스’(σκε?ο?)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완전히 준비하다, (함축적 의미에서) 짜맞추다, 창조하다, 짓다, 마련해 주다, 설비하다, 채비를 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준비하다’라는 뜻을 가진 또 다른 헬라어 ‘헤토이마조’(?τοιμ?ζω)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τοιμ?ζω)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막1:3),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τοιμ?ζω)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12:20) 그리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τοιμ?ζω) 가노니(요14:2)’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내적이고 은유적 의미에서의 준비하다’라는 뜻이다.
반면에 ‘카타스큐아조’ (κατασκευ?ζω)는 ‘방주를 준비하여(κατασκευ?ζω)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히11:7), ‘예비한(κατασκευ?ζω) 첫 장막이 있고’(히9:2) 그리고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κατασκευ?ζω) 동안…’(벧전3:20)에서 알 수 있듯이 ‘외형적인 것을 연상하게 하는 구체적인 의미에서의 준비하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집마다 지은(κατασκευ?ζω)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κατασκευ?ζω) 이는 하나님이시라’(히3:4)는 말씀에서 이러한 구체적이고도 완전한 준비는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만이 하시며 오직 그 분만이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엡1:4)에 따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며 결국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3:16)고 말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지으심 (κατασκευ?ζω)을 받았으며 또한 그렇게 우리로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완전한 준비하심 (κατασκευ?ζω) 만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준비할(κατασκευ?ζω) 일이란 이미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준비하신 (κατασκευ?ζω)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 밖에 없다. 그것은 곧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만이 전부입니다’ (I am nothing! Christ is everthing!)라고 나의 처음자리를 고백하고 오늘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only by grace)만을 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카타스큐아조(κατασκευ?ζω) : 준비하다 (equip)]
8. 죽다 아포드네스코(?ποθν?σκω):죽다(todieoff)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죽다’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드네스코’(?ποθν?σκω)는 는 ‘(합성어로 쓰일 때) 분리, 출발, 중지, 완성, 역전’의 뜻을 가진 전치사 ‘아포’(?π?)와 ‘(문자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죽다, 사망하다, (은유적으로) 영적으로 죽다’의 뜻을 가진 ‘드네스코’(θν?σκ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완전히 죽다, 죽음으로 완성하다’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죽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헬라어에는 ‘죽음’라는 뜻을 가진 또 다른 단어가 여러 개가 있다.
‘생명이 없는, 영적으로 죽은, (상징적으로) 죽은’의 뜻을 가진 ‘네크로오’(νεκρ?ω)는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엡2:1)를 말하는 것으로써 선악과를 먹고 선악의 주체가 되어 그 속에 내용으로 담겨져 있는 진리의 말씀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 처럼 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육체의 죽음, 영과 육의 분리, (은유적으로) 죄로 인해 야기된 영혼의 비참함, 죽은 악한 자들의 지옥에서의 비참한 상태, 죄로 인해 야기된 모든 비참함을 포함하는 죽음, (상징적으로) 죽음’의 뜻을 가진 ‘다나토스’(θ?νατο?)는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고 죽어야 하는 죽음을 말하는 것으로써 그러한 인간의 처음 자리를 깨달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특별히 이 단어가 ‘죽음으로 완성하다’의 뜻을 가진 ‘드네스코’(θν?σκω)에서 파생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나의 처음자리를 깨닫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 하나님 처럼의 내가 죽는 죽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내 스스로 그 죽음(θ?νατο?)을 죽을 수 없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 (?ποθν?σκω)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다(롬5:8). 그래서 ‘다나토스’(θ?νατο?)을 가리켜서 참 좋은 죽음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에 의해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혜(only by grace)인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믿는 자 곧 ‘나 하나님 아니네요, 나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으면 존재도 아니네요’라고 고백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진 자는 그렇게 죽음으로(?ποθν?σκω) 산다(요11:25)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씨가 죽지(?ποθν?σκω) 않으면 살 수 없다(고전15:36)는 사실을 알았기에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ποθν?σκω)’(고전15:31)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나토스’(θ?νατο?)의 죽음을 통과한 자로서 오늘도 이 땅에서 여전히 하나님 처럼의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자임을 폭로당하면서 날마다 죽는(?ποθν?σκω) 자의 삶을 사는 자이다.
[아포드네스코(?ποθν?σκω) : 죽다 (to die off)]
9. 저주 아나데마(?ν?θεμα) : 저주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저주’로 번역된 헬라어 ‘아나데마’(?ν?θεμα)는 ‘나타내다, 제출하다, 전달하다, 알리다'의 뜻을 가진 ‘아나티데미’(?νατ?θημι)에서 파생된 단어로 ‘(종교적) 금지령, (구체적으로) 파문당하는 것 또는 사람, 파문, 저주, 설치물 또는 금지를 위해 놓아둔 것, 맞바꿀 수 없는 하나님께 바쳐진 것(짐승이면 죽여야 함), 멸망 받을 운명에 놓인 사람이나 파괴될 물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나티데미’(?νατ?θημι)는 ‘(본래적 의미에서) 위에, (합성어에서 접두어로 쓰일때는) 반복, 강렬, 역전, 한가운데로, 중앙에, …의 복판에’의 뜻을 가진 전치사 ‘아나’(?ν?)와 ‘배치하다, 놓다, 얹다, 두다, 내려놓다, 정박하다, 만들다, 세우다, 고정하다, 수립하다, 정하다’이 뜻을 가진 ‘티데미’(τ?θημι)의 합성어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또한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의 수평적 배치와 질서의 개념이 ‘위로 배치하다, 위로 세우다’라는 의미로 바뀌면서 수직적 배치와 질서의 개념인 ‘위로 세우다, 위로 서다, 확고한 마음을 가지다’의 뜻을 가진 ‘히스테미’(?στημι)와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아래로 배열된 땅적 차원의 것들(성전, 율법, 예수, 나를 포함한 세상의 보이는 모든 것)은 그 속에 담겨진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지 깨달아 반드시 하늘적 차원의 것들로 세워져야 함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늘적 차원으로 세워지면 땅적 차원의 것들은 마땅히 사라지고 없어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나데마’(?ν?θεμα)가 말하는‘저주’(詛呪)는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남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도록 빌고 바람 또는 그렇게 하여서 일어난 재앙이나 불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땅적 차원의 것들을 통해서 하늘적 차원의 것을 알았기에 다시 말하면 확고한 영원한 생명을 가졌기에 그토록 귀하게 여기는 땅적 차원의 것들은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멸망 받을 운명에 놓인 사람이나 파괴될 물건’으로써의 ‘아나데마’(?ν?θεμα)는 하나님 처럼 되어 스스로 살아보겠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파괴되어 없어지는 것이기에 그래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졌다고 생각하는 ‘저주’일 수 밖에 없지만(롬9:3), 그 죽음(θ?νατο?)으로써의 ‘저주’가 ‘진리의 완성’임을 알아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아나데마’(?ν?θεμα)의 삶은 이 땅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15:31)고 고백한 사도 바울과 같이 내가 부정당하고 삭제되어 가는 삶을 사는 것이기에 결코 쉽지 않으며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자들에게서 저주받은 자라는 말을 들을 수 밖에 없고 그저 오늘도 묵묵히 생명의 말씀에 목말라하며 진리의 말씀에 끌려가는 삶인 것이다. [아나데마(?ν?θεμα) : 저주]
10. 전도 케뤼그마(κ?ρυγμα) : 전도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전도’로 번역된 헬라어 ‘케뤼그마’(κ?ρυγμα)는 ‘(공적인 선포자로서) 전하다, (특히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다, 사자가 되다, 사자로서 직무를 수행하다, 발표하다, 공개적으로 선언하다, 복음을 선포하다’의 뜻을 가진 ‘케륏소’(κηρ?σσω)에서 파생된 단어로 ‘(함축적으로 복음 자체를 의미하는) 복음 전파, 전령이나 공포자가 선언한 것, 포고자에 의한 선언,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사자들에 의한 메시지나 선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사상을 가르치고 권면하며 교육하는 것을 ‘디다케’(διδαχ?)라고 한다면 ‘케뤼그마’(κ?ρυγμα)는 신약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낸 하나님의 구원 행위, 즉 복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고전2:4)라는 선포하는 행위와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롬16:25)라는 선포된 내용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이며 구체적으로 주님으로부터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를 의미한다.
‘케륏소’(κηρ?σσω)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부르다, 선언하다, 선포하다, 외치다’의 뜻을 가진 ‘카라’(???)이며 이를 파자하며 ‘파괴하고 다시 세움으로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된다는 것이 바로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다시 세워져 살게 된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선악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 자아를 확장시키려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전도’는 미련한 것이 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나를 살리셨다는 사실을 믿는 자에게 있어서는 그 ‘전도’는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바울도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 (κ?ρυγμα)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 될 수 밖에 없다’ (고전15:14)고 고백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케뤼그마’(κ?ρυγμα)란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내가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갈2:20) 그 죽음에서 부활하시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 넣어 주시는(에크 투 다나투 에이스 텐 조엔 : ?κ το? θαν?του ε?? τ?ν ζω?ν) 하나님의 은혜(요5:24)를 말하는 것이다. [케뤼그마(κ?ρυγμα) : 전도]
11.절제하는 넵할레오스(νηφ?λεο?) : 절제하는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딤전3:11)
‘절제하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넵할레오스’(νηφ?λεο?)는 ‘금주하다, 분별있다, 술 취하지 않다, 침착하다, 냉정하다, 신중하다, 지켜보다, 근신하다’의 뜻을 가진 ‘넵호’(ν?φω)에서 파생된 단어로 ‘술취하지 않은, 침착한, 자지 않고 지키는, 삼가는, 절제하는’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절제’라는 뜻을 가진 또 다른 헬라어 ‘엥크라테이아’(?γκρ?τεια)라는 단어가 있는데 내 뜻과 내 생각으로써의 내 말을 통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생명의 말씀에 이끌려 모든 일에 진리의 말씀으로 인하여 진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의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침착한, 지배하는, 조종하는, 일에 힘이 있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갈5:23).
반면에 ‘넵할레오스’(νηφ?λεο?)가 말하는 성경적 의미의 ‘절제’는 다른 말이 섞이지 않고 진리의 말씀만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술 취하지 않는,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품고 있기에 비진리의 말을 분별할 수 있는 냉정하고 신중함이 있다는 의미에서의 ‘절제하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딤전3:11), 이런 의미에서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정도에 넘지 아니하도록 알맞게 조절하여 제한함’이라는 뜻의‘절제’(節制)와 비교해 볼 때도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ν?φω)’ (살전5:6)고 말하면서 비진리라는 어두움 속에서 그것이 빛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진리인양 착각하는데서 진리의 말씀을 잘 분별하여 그 말씀으로 깨어 정신을 차릴 것을 말씀하고 있다. 또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ν?φω) 기도하라’ (벧전4:7)는 말씀에서는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구하며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해주는 기도(프로슈케 : προσευχ?)를 통하여 근신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탐심의 마음인 두 마음이 죽고 하나의 마음인 하나님의 말씀, 비 진리의 말이 섞이지 않은 생명의 말씀만 있는 술 취하지 않은(νηφ?λεο?) 자이며, 진리의 말씀과 정반대의 비 진리인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 때에 진리의 말씀으로 흔들리지 않고 그 말씀을 정신 차리고(ν?φω) 지키는(keep) 자(벧전5:8)라는 점에서 진정으로 근신하여 절제하는(νηφ?λεο?) 자인 것이다. [넵할레오스(νηφ?λεο?) : 절제하는]
12. 접붙이다 엥켄트리조(ἐγκεντρίζω): 접붙이다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롬11:24)
‘접붙이다’로 번역된 헬라어‘엥켄트리조’(ἐγκεντρίζω)는‘안에, 의하여, 가지고'의 뜻을 가진 전치사 ‘엔’(ἐν)과 ‘따끔하게 찌르다’의 뜻을 가진 ‘켄테오’(kenteo)의 명사형인 ‘솜, 쇠막대기, 따끔하게 함, 일침을 놓음’이라는 의미의 ‘켄트론’(κέντρον)이라는 단어와의 합성어에서 유래된 단어로 ‘찔러 심다, 접목하다, 접붙이기 위해 잘라내다, 접종하다, 이식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가시채’(행26:14)로 번역된 ‘켄트론’(κέντρον)은 가축을 모는데 쓰는(특히 소를 부리는데 사용) 뾰족하게 된 한쪽 끝에 쇠붙이를 댄 막대기로 상징적으로 ‘독, 하나님의 자극’이라는 뜻으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엥켄트리조’(ἐγκεντρίζω)는 로마서에서만 4회 등장하는 단어로 사도 바울은 ‘꺾인 가지와 같은 유대인들도 그들의 불신앙만 버린다면 접붙임(ἐγκεντρίζω)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ἐγκεντρίζω)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돌감람나무였던 여러분이 거기서 잘려서 참감람나무에 접붙임(ἐγκεντρίζω)을 받았다면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을 본래의 참감람나무에 접붙이는(ἐγκεντρίζω) 일이야 얼마나 더 쉽겠습니까?’(현대인의 성경, 롬11:23,24)라고 말하면서 내 믿음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열심으로 누구든지 접붙임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일반적 접붙침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에다 좋은 열매를 맺는 나뭇가지를 접붙이어서 진액이 통하게 하므로 그 나무 전체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맺게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유대 사람이 저들의 풍속에 의하여 감람나무를 접붙이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방법이란 여기에 좋은 참감람나무가 있고, 저기에는 열매를 제대로 맺지도 못하는 야생의 돌감람나무가 있을 때에 좋지 않은 돌감람나무의 가지에서도 좋은 열매를 맺히게 하기 위하여, 그 가지를 잘라 좋은 감람나무의 가지를 잘라낸 자리에 붙여 놓고(ἐγκεντρίζω) 진액을 통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좋은 참감람나무의 진액이 좋지 않은 돌감람나무의 가지로 올라가면서 그 가지도 좋은 감람나무로 변하게 되어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성도는 이와 같이 돌 감람나무로써의 내가 꺽이고 참 감람나무의 뿌리인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ἐγκεντρίζω)을 받은 자이다. 그래서 이제는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의 섬김만을 받으며 말씀을 품고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로 열매 맺는 삶, 다른 말로 그리스도를 그려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엥켄트리조(ἐγκεντρίζω) : 접붙이다]
13. 진노 올게(?ργ?): 진노 (wrath)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진노’로 번역된 헬라어 ‘올게’(?ργ?)는 ‘자신을 뻗치다, 잡거나 만지려고 손을 뻗다, 소망하다, 탐하다, 돈에 대한 사랑에 빠지다, (열망하여) 도달하다’의 뜻을 가진 ‘오레고마이’(?ρ?γομαι)에서 파생된 단어로 ‘(마음의 흥분으로) 열망하다, 난폭한 열정, 영혼의 움직임이나 동요, 복수, 분노, 진노, 처벌을 나타내는 진노, 징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서 ‘본질상 진노(?ργ?)의 자녀’(엡2:3)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있는 ‘분’(?ργ?)을 버리고(엡4:31, 골3:8), ‘성내기’(?ργ?)를 더디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에게 하나님의‘진노’(?ργ?)가 있으며(요3:36),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진노’(?ργ?)가 나타나고(롬1:18) 누구도 앞으로 있을 ‘진노’(?ργ?)를 피할 수 없다(눅3:7)고 말하고 있다.
‘올게’(?ργ?)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가 ‘분노, 격한 불쾌감, 화, 불만, 독’의 뜻을 가진 ‘헤마’(???)와 ‘코, 콧구멍, 얼굴, 분노’의 뜻을 가진 ‘아프’(??)이다. ‘헤마’(???)를 파자하면 ‘잘못된 말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이며 ‘아프’(??)를 파자하면 ‘하나님의 호흡, 말’이란 의미로 이 단어는 ‘노하다, 거칠게 숨쉬다, 불쾌하다’의 뜻을 가진 ‘아나프’(???)에서 파생된 단어로 파자하면 ‘하나님이 아래에서 호흡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리하면, ‘올게’(?ργ?)가 말하는 ‘진노’는 단순히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성을 내며 노여워함 또는 그런 감정’이라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선악의 주체가 되어 더 이상 진리의 말을 하지 못하고 비진리의 말만 하는 하나님 처럼 된 인간이 내 뱉는 모든 호흡으로써의 실존 그 자체를 의미하는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될 수 밖에 없으며 아무도 ‘진노’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선악과를 먹은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진노’(?ργ?)인 ‘정녕 죽으리라’(모트 타무트 : ?????? ???)는 말씀은 ‘반드시 진리로 완성시키겠다’는 의미이며 그래서 그것은 반드시 죽어야 할 죽음이요, 참 좋은 죽음인 ‘다나토스’(θανατο?)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창조(바라: ???)의 목적을 이루시는 창세전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진노’(?ργ?)에 대하여 율법을 지킴으로 그 ‘진노’를 피해보겠다고 애를 쓰는 하나님 처럼 된 인간의 처음 자리를 고백하므로 허물과 죄로 죽은 자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것임을 알아 하나님의 은혜(only by grace)만을 구하는 자이며 그런 자에게 하나님의 언약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θανατο?)을 통과하여(thorugh) 참 생명 안으로 들어간 자(요5:24)인 것이다. [올게(?ργ?) : 진노 (wrath)]
14. 정욕 파데마(πάθημα) : 정욕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롬7:5)
‘정욕’으로 번역된 헬라어 ‘파데마’(πάθημα)는 기본적으로 ‘불행, 재난, 폐해, 고통, 마음의 고통, 감동, 애정’의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지나친 사랑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사욕, 정욕’이라는 의미로 쓰인 ‘파도스’(πάθος)에서 파생된 단어로 ‘고통, 불행, 재난, 폐해, 고뇌, 인내, 견디기, 참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파도스’(πάθος)는 ‘영향을 받다, 느끼다, 감각 경험을 가지다,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다, 몹시 병을 앓다, 곤경에 처하다, 고난을 당하다’ 라는 뜻을 가진 ‘파스코’(πάσχω)의 변형에서 유래된 단어이며, ‘파데마’(πάθημα)와 동일어 에서 파생된 ‘감수할 수 있는, 고통에 대한 수용력을 부여받은, 느낄 수 있는, 고통의 필연성에 종속된, 고통 받도록 운명 지어진’ 의뜻을 가진 ‘파데토스’(παθητός)라는 단어가 있다.
성경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의인은 하나도 없기에(롬3:10)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가 없으며 율법은 다만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뿐이라고(롬3:20) 말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죄의‘정욕’이요 결국 사망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롬7:5). 바로 율법지킴의 ‘정욕’(πάθημα)을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신 것이다(갈5:24)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해 보겠다고 하며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 모든 것이‘정욕’
(πάθημα)이라면, 반대로 창세전 언약에 따라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을 살리기 위한(엡2:1) 하나님의 구원의 열심히 말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던져버리셨고(파라디도미)그리고 그죽음을 감당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의 결정체라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고난’(πάθημα)이라볼 수 있다. 그래서 ‘파데마’(πάθημα)라는 단어는 인간의‘정욕’과 그리스도의 ‘고난’ 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아는 자이며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자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만을 받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해 보겠다고 율법을 지켜보려는‘나의 헌신, 나의열심, 나의사랑’이라는 율법 지킴의 ‘정욕’(πάθημα)으로 가득찬 내가 죽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열심히만 가득찬 그리스도로 사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순종함으로 받는 것이 육신의 눈으로는 ‘고난’으로 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참사랑인 그리스도의 고난(πάθημα)에 참여하며 즐거워하는 자(벧전4:13)가되는 것이다.
[파데마(πάθημα) : 정욕]
15. 지키다 테레오(τηρέω) : 지키다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지키라’로 번역된 헬라어‘테레오’(τηρέω)는 ‘주의 깊게 살핌’의 뜻을 가진 ‘테로스’(teros)에서 유래된 단어로 ‘지키다, 관찰하다, 저장하다, 조심스럽게 시중들다, 돌보다, 보호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테레오’(τηρέω)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지키라’라는 의미는 단순히 자신에게 손해가 없도록 자신의 안전을 위해 소극적으로 보호하고, 감시하는 의미에서의‘지키라’그리고 복종하고 순종한다는 의미에서의‘지키라’라는 뜻을 가진 ‘휠랏소’(ὑστερέω) 와는 분명히 다르다.
‘테레오’(τηρέω)로 변역된 히브리어가 ‘솨마르’(שמר)인데 ‘울타리 치다, 지키다, 보존하다, 지키다, 보관하다, 축하하다, 책임지다, 구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솨마르’(שמר)를 파자하면 ‘분석된 진리의 말씀으로 시작하다’라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τηρέω)는 의미는 진리의 말씀을 마음에 둔다, 마음으로 품는다는 말이며 그 말씀을 내 말로 갖는다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שמר) 하시니라’(창26:5)는 말씀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항목 하나 하나를 모두 지켰다는 말이 아니라, 그 말씀을 마음에 두었고 자기 마음으로 품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로써 구약에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שמר)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6)고 말씀하시고, 신약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τηρέω)’(요14:15) 그리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τηρέω)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요14:21)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마음으로 품은 자로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담대하게 ‘믿음을 지켰다(τηρέω)’(딤후4:7)고 고백하고 있으며, 사도요한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지(τηρέω)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다’(요일2:4)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란 ‘말씀을 지키는(τηρέω) 자’이며, 그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품은 자로서 선악의 주체가 된 비진리의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는 자이며, 진리만을 말하는 자인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τηρέω)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τηρέω)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10)[테레오(τηρέω) : 지키다]
원어단어 ‘ㅊ’ 에 해당하는 단어들
1.책망 2.찬송 3.초등학문 4.청결한
1.책망 엘렝크시스(ἔλεγξις) : 책망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책망’으로 번역된 ‘엘렝크시스’(ἔλεγξις)는 ‘유죄를 선고하다, 반박하다, 반증하다, 잘못을 찾아내다, 나무라다, 벌하다’라는 뜻의 ‘엘렝코’(ἐλέγχω)에서 파생된 단어로 ‘책망, 반박, 비난, 논박’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70인 역에서 ‘엘렝코’(ἐλέγχω)로 번역한 히브리어가 ‘증명하다, 결정하다, 재판하다, 질책하다, 책망하다, 고정하다, 옳다’라는 뜻의 ‘야카흐’(חכי)인데 이를 파자하면 ‘밝히 보여주어 넘겨준 죄 또는 생명’ 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엘렝크시스’(ἔλεγξις)가 의미하는 책망은 단순히 ‘잘못을 꾸짖거나 나무라며 못마땅하게 여김’ 이라는 ‘비난’이 아니라 나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밝히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가 바로스스로 빛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어두움이요(요1:5),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면서도 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맹인임(요9:40)을 고백하여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자가 되어 참 생명인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는 그런 의미의‘책망’인 것이다.
그러나 나의 처음 자리를 밝히 보여주어 죄를 깨닫게 하는(롬3:20)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선악의 주체가 되어 오히려 율법으로 보아 그것을 지켜보겠다고, 지킬 수 있다고 하면 오히려 죄 아래 거하게 되는 것이며 죄의 삯인 사망에 이르는 것이다(롬6:23).
그러기에 ‘네 형제가죄를 범하거든 (하말타노:ἁμαρτάνω)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ἐλέγχω) 만일 들으면 네가 내형제를 얻은 것이요’(마18:15)라는 말씀은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만나지 못하여 과녁에서 빗나간 삶을 살고 있다면(ἁμαρτάνω),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보여주어(ἐλέγχω) 참생명을 얻도록 하라는 말씀이 된다.
'악을 행하는 자는 자신이 어두움 이라는 사실을 밝히 보여주는 빛을 미워하는 자이다. 그래서 자기 행위들이 드러나지(ἐλέγχω)않게 하려고 어느 누구도 빛으로 오지 않는 것이다’(요3:20).
그러나 선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빛으로 오지 아니하고 자기 목숨을 스스로 구원코자 하므로 영원히 멸망당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처음 자리를 드러내어(ἐλέγχω)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는 자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아들에게 권하는 것 같은 그러한 꾸지람을 받을(ἐλέγχω) 때에 낙심하지 말아야 하며(히12:5),거짓말하는 자와 악한 짐승과 배만 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보여주어(ἐλέγχω) 그들이 온전한 믿음을 갖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딛1:12,13). [엘렝크시스(ἔλεγξις) : 책망]
2.찬송 에파이노스(ἔπαινος) : 찬송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2)
‘찬송’으로 번역된 헬라어‘에파이노스’(ἔπαινος)는 ‘(속격을 지배할 때) 위에, 가까이에, …에 대한, 대해서, …을’의 뜻을 가진 전치사 ‘에피’(ἐπὶ)와 ‘높이다, 찬양하다, 하나님을 찬송하다, 칭찬하다, 추천하다, 약속하다, 맹세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 ‘아이네오’(αἰνέ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를, …에 대하여) 칭송, 찬양, 찬성, 추천, 칭찬, ‘찬송’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동사형으로는 ‘박수갈채하다, 칭송하다, 찬양하다, 좋게 말하다, 칭찬하다’라는 뜻의 ‘에파이네오’ (ἐπαινέω)이다.
‘아이네오’(αἰνέω)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빛나다, 비추다, 명백해지다, 높이다, 자랑하다, 자랑으로 여기다, 바보로 만들다, 정신없이 지껄이다, 미친 척 행동하다, 어리석다’의 뜻을 가지고 있는 ‘하랄’(הלל)이다. 이 단어를 파자하면 선악의 주체가 된 인간에게 있어서‘허물과 죄로 죽은 실존으로서 더럽고 섞인 말을 배우고 가르치며 순종하다’의 의미라면, 진리가 된 자에게 있어서는 ‘진리를 배워 살아가는 실존으로서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며 순종하다’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의 종들은 시편 기자처럼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הלל, αἰνέω),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הלל, αἰνέω),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הלל, αἰνέω)할지로다. 해 돋는데 에서부터 해지는데 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הלל, αἰνέω)을 받으시리로다’(시113:1-3)라는 고백을 해야 하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여호와를 찬양(הלל, αἰνέω) 할 수 없기(시115:17)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 언약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ἔπαινος)하는 자가 되게 하시며(엡1:12), 그러기에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품은 자로서 그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됨을 보증해 주시며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해 주시기에 그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ἔπαινος)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엡1:14).
그래서 사도바울도 빌립보에 사는 성도들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ἔπαινος)이 되기를 원한다’(빌1:11)고 말하고 있으며, 로마서에서는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αἰνέω)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ἐπαινέω) (롬15:11)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말씀을 선물로 받은 자이기에, 이제는 생명의 말씀을 품은 자로서 그 말씀 만을 배우고 가르치며 순종하는 자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참된 ‘찬송’(ἔπαινος)을 드리는 자인 것이다. [에파이노스(ἔπαινος) : 찬송]
3.초등학문 스토이케이온(στοιχεῖον) : 초등학문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2:8)
‘초등학문’으로 번역된 헬라어 ‘스토이케이온’(στοιχεῖον)은 ‘(군대가 발걸음을 맞추어) 행진하다, (상징적으로 경건과 덕을) 이루다, (질서있게) 걷다’ 순조롭게 가다, 차례차례 가다, 잘 나가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형 ‘스토이케오’(στοιχέω)라는 단어에서 추정된 파생어로 ‘배열에 있어 순서적인 것, 연속적인 근본적 구성, 기본 물질, 제일 원리, 근본원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세상’(코스모스 : κόσμος)이라는 단어와 함께 ‘세상의 초등학문’(호 스토이케이온 호 코스모스 : ὁ στοιχεῖον ὁ κόσμος)으로 쓰여(갈4:3, 골2:8, 골2:20) ‘그 세상’과 동격으로써의 ‘그 초등학문’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ὁ κόσμος)을 말씀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으로 보지(호라오 : ὁράω ) 못하고, 선악의 주체가 되 버린 인간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써의 세상(ὁ κόσμος)을 단순히 표피적으로 보아(에이도: εἶδω) 자기 나름대로 판단해 버린 모든 지식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차례가 있는 데서 맨 처음 또는 맨 아래 등급에 해당하는 지식’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은 이 ‘초등학문’(στοιχεῖον)을 가리켜서 진정한 강함이 되는 하나님을 알아야 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무력하고 병들고 허약한(아스데네스 : ἀσθενῆς) 것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천한(프토코스 : πτωχός) 것임을 말하고 있다(갈4:9).그리고 그리스도가 오시는 그 날에 그‘초등학문’은 파괴되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 모든 것들이 드러날 것이라(벧후3:10)고 말씀하고 있다.
물론‘초등학문’(στοιχεῖον) 자체가 악하거나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어두움인 인간은(요1:5)은 그 어두움을 통해서 빛을 알아보면 되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의 가장 기초적인 구성(στοιχεῖον)이라고(히5:12) 볼 수 있는 인간에게 주어진 세상의 ‘초등학문’을 통해서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더 이상 ‘초등학문’(στοιχεῖον)에 머물러 있는 자가 아니라 그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마음인 진리의 말씀을 보고 깨달아 모든 것을 선악으로 판단해 버리는 선악의 주체로서의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자(갈2:20),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만을 쫓아 가는 자(골2:8) 그리고 영의 양식으로써의 진리의 말씀인 단단한 음식을 먹는 자(히5:12)인 것이다. [스토이케이온(στοιχεῖον) : 초등학문]
4.청결한 카다로스(καθαρός): 청결한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 임이요’(마5:8)
‘청결한’으로 번역된 헬라어‘카다로스’((καθαρός)는 ‘깨끗한, 정결한, 순결한, 흠없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여기서 파생된 동사가 ‘카다리조’(καθαρίζω)인데 ‘깨끗하게 하다, 정결케 하다, 정확하다, 율법적 의미에서 깨끗하다고 선언하다’라는 의미이다. 영어로는 ‘다른 물질이 섞이지 않아 순수한, 오염되지 않아 청결한’의 뜻을 가진 ‘pure’라고 볼 수 있으며 ‘먼지나 자국이 있지 않아 깨끗한’이라는 뜻을 가진 ‘clean’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흠이 없고 다른 어느 것도 섞이지 않은100% 청결한 자(호 카다로스 : ὁ καθαρός)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καθαρίζω) 수 있는 것이다(요일1:7).
헬라어 ‘카다로스’(καθαρός)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맑고 깨끗한 것, 섞인 것이 없이 순수한 것’이라는 뜻의 ‘자크’(זך)와 ‘바르’(בר)이다. ‘자크’(זך)를 파자하면 ‘대립이 바뀌어 짐’이라는 의미로 이것은 하나님 처럼 되어 하나님과 대립 관계의 자리에 서 있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 즉, 하나님은 창조주 자리에, 인간은 피조물 자리라는 원래의 처음 자리로 바뀌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바르’(בר)를 파자하면 ‘성전으로 시작하다’라는 의미로 선악의 주체가 된 내 말이 죽고 하나님 말씀의 다스림, 섬김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의 섬김을 받아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깨끗한(καθαρός)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καθαρός) 더럽고(미아이노 : μιαίνω – 오염시키다, 불순하게 되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καθαρός)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μιαίνω) 것이다(딛1:15).
그래서 청결한 자(ὁ καθαρός) 만이 하나님을 볼(호라오 : ὁράω) 수 있는 것이다(마5:8).
그래서 성경은 성도들을 향하여서 ‘…주를 깨끗한(καθαρός)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2:22)고 말씀하고 있으며, ‘깨끗한’(καθαρός) 마음인 예수의 마음으로 피차 사랑하라(밷전1:22)’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미 깨끗해진(καθαρός) 자이기에(요15:3) 하나님의 말씀을 품어 날마다 그 말씀에 섬김을 받으며 사는 자이며, 창조주 하나님 앞에 피조물로 서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며 그 은혜로 사는 자인 것이다. [카다로스(καθαρός) : 청결한]
원어단어 ‘ㅌ’ 에 해당하는 단어들
1.타락하다
1.타락하다 파라핍토(παραπ?πτω):타락하다(to fall away)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6:6)
‘타락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핍토’(παραπ?πτω)는 ‘(소유격과 함께) 곁으로부터, (여격과 함께) 근처에, (대격과 함께) …에 근사하게, 반대편에, 가까운’의 뜻을 가진 전치사 ‘파라’(παρ?)와 ‘내리다, (문자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떨어지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다, 밀려 내려가다, 심판에 떨어지다, 서 있는 자세에서 엎드린 자세로 내려가다, 엎드리다’의 뜻을 가진 ‘핍토’(π?πτ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옆으로 떨어지다, (상징적으로) 변절하다, 떨어져 나가다, 옆으로 미끄러지다, 옳은 길에서 벗어나다, 방황하다, 실수하다, 버리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파라핍토’(παραπ?πτω)가 말하는‘타락하다’의 의미는 단순히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잘못된 길로 빠지다, (기독교에서) 죄를 범하여 불신의 생활에 빠지다, (불교에서) 도심을 잃고 속심으로 떨어지다’라는 의미보다는 ‘옆으로 떨어져 있는 상태를 깨닫지 못하고 그것이 올바르다고 확신하다’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인간이 원래는 올바른 상태에 있었는데 어떤 시험을 받아 옆으로 미끄러져 진리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빛과 의를 알아볼 능력이 없는 인간은 어두움으로부터 시작할 수 밖에 없고 불의로부터 시작할 수 밖에 없는데 그래서 그 어둠을 통해서 빛을 깨닫고, 불의를 통해서 의를 깨달아야 하는데 선악의 주체가 되어 버린 인간은 오히려 어두움 속에서 스스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의롭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네가 바로 어두움이란다, 너에게는 진리의 말씀이 없단다’를 말씀하시면서 죄를 깨달아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라는 의미로 율법을 주셨는데(롬3:20), 인간은 그 율법을 지켜보겠다고 그리고 지킬 수 있다고 말하면서 오늘도 열심히 율법 지킴의 수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옆으로 던져주신(파라볼레:παραβολη) 성경, 성전, 예수, 세상 등 이 모든 것 안에 그 내용으로써의 하나님의 마음인 생명의 말씀을 감추어 주셨는데 숨겨진 진리의 말씀은 보지(호라오:?ρ?ω) 못하고 눈에 보이는 껍데기에 묶여 있으면 그것이 바로 어둠에 묶인 것이요, 옆으로 떨어진(παραπ?πτω) 것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그렇게 된 자들을 가리켜 ‘타락한 자’ (παραπ?πτω)라고 말하고 있다(히6:6).
[파라핍토(παραπ?πτω) : 타락하다 (to fall away)]
원어단어 ‘ㅍ’ 에 해당하는 단어들
1,평안==>1p 2. 표적 3. 판단하다
1.평안 에이레네(εἰρήνη) : 평안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요14:27)
‘평안, 평강, 평화, 화평’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이레네’(εἰρήνη)는 ‘결합하다’라는 뜻의 ‘에이로’(eiro)에서 파생된 단어로 ‘평화, 번영, 하나가 됨, 고요, 안식, 다시 하나가 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에이레네(εἰρήνη)의 좀더 깊은 성경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헬라어 에이레네(εἰρήνη)의 뜻을 가진 히브리어 샬롬(שלום)을 살표볼 필요가 있다. 샬롬(שלום)은 ‘완전, 건강함, 행복, 번영, 고요, 안전’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 단어는 ‘완전하다, 건전하다, 완성하다, 마치다, 회복하다, 보답하다’라는 뜻의 솨람(םלש : shaw-lam)을 기본어근으로 하고 있다.
정리하면, 에이레네(εἰρήνη)는 단순히 서로가 평화로운 관계(relationship)나 평화를 유지하려는 태도(attitude)를 말하기 보다는 오히려 평안 그 자체인 완성적 의미에서의 상태(state)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결합되어(eiro) 하나(μονογενης)가 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사야 9:6에 보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고 있는 ‘한 아기’가 바로 평강의 왕, 평강(샬롬 : שלום)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신약에서 그리스도 예수이신 ‘평안’(εἰρήνη)을 우리에게 끼친다고 말씀하고 있다(요14:27).여기서 ‘끼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압히에미(ἀφίημι)는 ‘쫓아내다, 용서하다, 성취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구원의 완성(텔레오: τελέω – 끝마치다, 완전히 하다, 빚을 청산하다)을 이루기 위함이며, 하나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아들을 ‘쫓아냄’, 인간의 죄를 ‘청산함’ 그리고 죄인을 ‘용서함’의 의미가 모두 들어가 있다.
결국‘평안’(εἰρήνη)을 ‘끼친다’ (ἀφίημι)는 예수님의 선포 속에는 ‘너는 평안 아니다, 너에게는 평안이 없다’는 인간의 실존을 폭로하면서 ‘네가 생각하는 평안, 네가 원하는 세상이 주는 평안’인 ‘너’을 파괴해 버리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평안인 ‘그리스도’로 세우시겠다(union Christ)는 하나님의 창조(바라 : ברא)의 목적과 성취가 들어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평안’(εἰρήνη) 그 자체인 것이다. [평안 에이레네(εἰρήνη)]
2. 표적 세메이온(σημεῖον) : 표적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2:11)
‘표적’으로 번역된 헬라어 ‘세메이온’(σημεῖον)은 ‘표시’라는 뜻의 ‘세마’(sema)라는 단어를 어원으로 가지고 있는 ‘신호를 보내다, 신호하다, 지시하다, 알리다, 보이다, 가리키다’라는 뜻의 ‘세마이노’(σημαίνω)의 어간에서 추정된 파생어로 ‘지시, 신호, 표시, 상징, 징후, 전도, 기사, 표적, 기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세메이온’
(σημεῖον)의 동사형은 ‘세메이오오’(σημειόω)인데 데살로니가후서 3장14절에 한번 나오며 ‘지목하다, 표시하다, 표시로 구별하다, 기록하다’라는 뜻이다.
이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메이온’(σημεῖον)의 의미를 단순히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라는 의미의 ‘기적’(奇跡)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초자연적인 능력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드러나는 일이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가르쳐 주고 증거한다는 사실이다.
‘세메이온’(σημεῖον)의 히브리어가 ‘오트’(תוא)인데 구약성경에서도 이 단어는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신호, 문자적으로나 상징적으로 깃발, 횃불, 기념비, 증거, 기적, 증거, 전조, 서명, 상징’ 등의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세메이온’(σημεῖον)이나 ‘오트’(תוא)는 눈에 보이는 이적 그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임을 알아야 하며 신약성경에서 쉽게 오해할 수 있는 ‘이적'(세메이온 : σημεῖον)이라는 단어를 올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표적’(σημεῖον)을 겉으로만 보고(에이도 : εἶδω) 말로는 예수를 세상에 오실 선지자라고 고백하지만 이 땅에서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려고 임금 삼으려 했던 것(요6:14,15)이다. 그래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σημεῖον)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는 것이다(마24:24).
그러나 예수님의 ‘표적’(σημεῖον)은 모두가 그 자신의 영광을 명백하게 나타내시는 것이며(요2:11)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가리키는 선지자 요나의 ‘표적’(σημεῖον) 밖에는 보일 ‘표적’(σημεῖον)이 없다(마12:39)고 말씀하신 것이다.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면 하늘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손가락 끝이나 그 사람을 본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눈에 나타난 현상, 심지어 그것이 상식적으로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기적 같은 것이라도 그 현상 자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인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라(호라오 : ὁράω)는 것이 ‘세메이온’
(σημεῖον)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인 것이다. [세메이온(σημεῖον) : 표적]
3. 판단하다 리노(ἀνακρίνω) : 판단하다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2:15)
‘판단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아나크리노’(ἀνακρίνω)는 접두어로서 합성어에서 ‘반복, 강렬’의 뜻을 가지며 전치사로서 ‘위에, 한 가운데로, 중앙에’의 뜻을 가진 ‘아나’(ἀνα)와 ‘나누다, 선택하다, 판단하다, 중히 여기다, 생각하다, 결심하다, 법령을 정하다, 재판하다, 다스리다, 통치하다, 사우다, 논쟁하다, 소송하다’라는 뜻을 가진 ‘크리노’
(κρίνω)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자세히 조사하다, 재판하다, 판단하다, 결정하다, 구별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크리노’(κρίνω)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재판하다, 통치하다, 처벌하다’의 뜻을 가진 ‘솨파트’(שפט)인데 일반적으로는 옳고 그름을 살펴 심판하는 것, 법률상으로는 소송을 심리하여 어떤 법률을 적용할 것인가를 정하는 일, 실제적으로 개인의 일신의 자유, 사회적 신분, 경제적 이익 등의 구체적 사안에 대하여 분쟁이 있는 경우 제 3자가 판단하는 것과 재판소가 법률상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공권적 판단의 의미를 포함하는 단어이다.
‘솨파트’(שפט)라는 단어를 파자하면‘분석하여 배워 가르침으로 보호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아나크리노’(ἀνακρίνω)는 위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자세히 조사하여 결정하고 판단하다’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ἀνακρίνω)고 기록되어 있으며(행17:11) 또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는데 이것은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다고 말하면서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되기(ἀνακρίνω) 때문이라(고전2:14)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령한 자로서 성도는 그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한마음(모노게네스 : μονογενής)을 가진 자이기에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을 통해서 그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마음인 말씀을 볼 수 있기에 모든 것을 판단할(ἀνακρίνω) 수 있는 것이며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있는 자이기에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ἀνακρίνω) 않는 것이다(고전2:15). 왜냐하면 오직 나를 판단하실 (ἀνακρίνω) 분은 주님 밖에는 없는데(고전4:4) 이것 또한 두마음(딥쉬코스 : δίψυχος)을 가진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기에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사는 자가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갈2;20). [아나크리노(ἀνακρίνω) : 판단하다]
원어단어 ‘ㅎ’ 에 해당하는 단어들
1.회복 2.힘쓰다 3. 행하다 4. 환란 5.회개하다
1. 회복 아포카타스타시스 (?ποκατ?στασι?):회복(restoration)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 3:21) ‘
'회복’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카타스타시스’(?ποκατ?στασι?)는 ‘(건강, 가정, 기구가 다시) 구성되다, (다시) 회복되다, 이전 상태를 회복하다, 이전 상태로 존재하다’의 뜻을 가진 ‘아포카디스테미’(?ποκαθ?στημι)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회복, 재구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포카디스테미’(?ποκαθ?στημι)는 ‘(합성어로 쓰일 때) 분리, 출발, 중지, 완성, 역전’의 뜻을 가진 전치사 ‘아포’(?π?)와 ‘(영원히) 아래에 두다, (상징적으로) 지명하다, 구성하다, 호위하다, 임명하다, 행하다, 만들다, 세우다, 놓다, 얹다, 두다’의 뜻을 가진 ‘카디스테미’(καθ?στημι)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또한 ‘카디스테미’(καθ?στημι)는 ‘아래, 통해서, …에 의하여, 향하여, 따라서’의 뜻을 가진 전치사 ‘카타’(κατ?)와 ‘서다, 서게 하다, 두다, 놓다, 세우다, 확고한 마음을 가지다, 건리를 포기하지 않다, 가져오다, 이룩하다, 고정하다, 참석하다’라는 다양한 뜻을 가진 ‘히스테미’(?στημι)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이렇게 어원을 통해서 볼 때, ‘아포카타스타시스’(?ποκατ?στασι?)가 말하는 '회복’은 단순히 ‘원래의 상태로 돌이키거나 원래의 상태를 되찾음’이라는 국어사전적 의미보다는 ‘땅적 차원의 것을 통해서 하늘적 차원의 것으로 세워짐’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손 마른 자의 손이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는 것(마12:13) 처럼 비정상적인 것이 원래의 정상적인 것으로 되는 표피적인 변화와 '회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리를 깨닫지 못하여 진리가 없는 상태인 손 마른 상태에서 진리를 깨달아 진리를 품은 상태로의 '회복’(?ποκατ?στασι?)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이 단어의 어원 가운데 있는 ‘히스테미’(?στημι)를 통해서 '회복’(?ποκατ?στασι?)의 의미가 하나님의 창조물 속에 담겨진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아는 것이며 그 결과 위로 세워지는 것이며 하늘적 존재로 세워지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악의 주체가 된 인간은 눈에 보이는 자기 나라의 회복만을 위해서 사는 자로서 심지어 말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그 뜻을 이루려 한다(행1:6). 그러나 자기 목숨과 같은 자기의 나라(세상나라)를 세우려고 하면 완전히 멸망한 것이요,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기의 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면 진리의 말씀만 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찾는 것(마16:25)이 진정한 '회복’(?ποκατ?στασι?)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회복’은 반드시 자기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마16:24)인 ‘다나토스’(θ?νατο?)의 죽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 처럼의 내가 죽어 그리스도로 사는 자,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사는 자이며, 오늘도 이 땅에서 내가 주인이 되는 나라인 이 세상의 나라를 부정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다스림이 있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진정한 '회복’(?ποκατ?στασι?)의 삶을 사는 자이다.
[아포카타스타시스 (?ποκατ?στασι?) : 회복 (restoration)]
2.힘쓰다 프로스칼테레오(προσκαρτερέω):힘쓰다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행6:4)
‘힘쓰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프로스칼테레오’(προσκαρτερέω)는 ‘향하여, 가까이, 함께’의 뜻을 가진 전치사 ‘프로스’(προσ)와 ‘굳세다, 인내하다, 확고하다’라는 뜻의 ‘칼테레오’(καρτερέω) 의 합성어에서 파생되었으며 ‘고집하다, 집착하다, 몰두하다, 계속하다, 변함없이 상냥하다, 끊임없이 돌보다, 한 장소에서 내내 계속하다, 희미해지지 않고 계속하다, 용기를 보여주다, 변함없이 준비하다, 계속해서 기다리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칼테레오’(καρτερέω)가 ‘세력, 힘, 권력, 능력, 통치, 지배권’이라는 뜻을 가진 ‘크라토스’
(κράτος)에서 파생되어 유래된 단어라는 점에서 ‘프로스칼테레오’(προσκαρτερέω)는 어떤 힘과 능력을 가지고 어떤 곳을 향하여 희미해지거나 변함없이 그리고 계속적으로 인내하며 확고하게 한다. 라는 강력한 의미를 가지고 쓰여지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의 용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προσκαρτερέω)’(행1:14)
‘…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προσκαρτερέω)’(행2:42)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προσκαρτερέω)…’(행2:46)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προσκαρτερέω) 하니’(행6:4)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προσκαρτερέω) 빌립을 따라다니며…’(행8:13)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προσκαρτερέω)’(롬12:12)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προσκαρτερέω)’(롬13:6)
‘기도를 계속하고(προσκαρτερέω)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
성도는 더 이상 세상이 합의해 놓은 세상의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니다. 이미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갈6:14).성도가 가지고 있는 힘과 능력이란 오직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불가항력적인 표현을==>[한량없는 주님의 은혜(시편 145:7 새번역)저의 고백을합니다.”] 은혜로 주어진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뿐이다. 그러기에 마땅히 성도는 모여서 기도와 말씀 사역에 힘써야(προσκαρτερέω)하며, 그러한 성도의 열심도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인하여 격발된 열심인 것이다. [프로스칼테레오(προσκαρτερέω) : 힘쓰다]
3. 행하다 포이에오(ποιέω) : 행하다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행하다’로 번역된 헬라어‘포이에오’(ποιέω)는 ‘만들다, 생산하다, 맺다, 저자가 되다, 바르게 행동하다, 수행하다, 축하하다, 약속을 실행하다’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여기에서 파생된 단어에는 ‘만들어진 것, 제작물, 작품, 피조물’이라는 뜻을 가진 ‘포이에마’(ποίημα) (롬1:20, 엡2:10),’만들기, 행위, 행동’이라는 뜻을 가지며 신약성경 야고보서 1장 25절에 한번 나오는 ‘포이에시스’(ποίησις) 그리고 '제작자, 저자, 실행자, 시인’이라는 뜻을 가진 ‘포이에테스’(ποιητής)가 있다.
‘포이에오’(ποιέω)가 의미하는 ‘행하다’라는 것은 ‘공무를 처리하다, 계속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수행하다’의 의미로써 ‘행하다’ 라는 단어 ‘프랏소’(πράσσω)와는 다른 ‘상태에 대하여 또는 하나의 행위를 지칭하여 행하다’라는 의미를 전제로하여 ‘그렇게 되어 행하게 되고 그렇게 되어 열매를 맺게 된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이에오(ποιέω)가 의미하는 행함이란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뜻이 되는(포이에오 : ποιέω)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돼야 온전히 하나님의 일의 열매를 맺을(포이에오 : ποιέω) 수 있는 것이다(요4:34).
‘포이에오’(ποιέω)의 히브리어가 ‘행하다, 만들다, 생산하다, 시중들다, 정하다, …이 되다, 낳다, 효과적으로 행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아싸’(עשה)라는 단어인데, 창세기 6장 22절에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עשה, ποιέω)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עשה, ποιέω)’ 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노아가 하나님의 뜻이 되어(עשה, ποιέω) 하나님의 명하신 모든 것을 준행하게 되었던(עשה, ποιέω) 것이다.
그러기에 성도의 ‘포이에오’(ποιέω)는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포이에마(ποίημα)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상태, 하나님이 만드신 바로서의 걸작품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열매’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렇게 포이에마(ποίημα)가 된 성도는 비로서 진정한 구제를 할(ποιέω) 수 있으며(마6:3), 대접(ποιέω)할 수 있고(마7:12)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을(ποιέω) 수 있는 것이다(마7:17). [포이에오(ποιέω) : 행하다]
4. 환란 들립시스(θλῖψις) : 환란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14:22)
‘환란’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들립시스’(θλῖψις)는 ‘누름, 압박, 핍박, 환란, 압제, 고통, 시련, 고뇌, 곤경, 환란’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들립시스’(θλῖψις)는 ‘들리보’(θλίβω)에서 유래가 되었는데 ‘누르다, 강하게 누르다, 제한되고 좁은, 편협한, 괴롭히다, 학대하다, 걱정시키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들리보’(θλίβω)는 ‘문지르다’의 뜻을 가진 ‘트리보’(tribo)라는 단어를 어원으로 하는 ‘트리보스’(τρίβος)라는 단어의 어간과 유사한데 ‘바퀴자국, 닳아 빠진 흔적’으로써 ‘낡은 길, 밟아서 생긴 길’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들립시스’(θλῖψις)는 ‘문지르는 마찰에 의해 완전히 닳아 빠져 원래의 모습이 사라질 정도의 지극히 심한 환란’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의미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 안으로(εἰς)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θλῖψις)을 통과해야(διὰ) 한다는 것은(행14:22)
이 세상 나라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갈6:14).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남은(휘스테레마 : ὑστέρημα) 고난(θλῖψις)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는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도 마땅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남겨놓은 고난으로 생각하여 그 남은 고난을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온전히 완성이 되지 않고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우리가 남은 고난을 채워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남은’으로 번역된 ‘휘스테레마’(ὑστέρημα)는 ‘늦게 되다, 궁핍하다’라는 뜻의 ‘히스테레오’(ὑστερέω) 에서 파생되었으며, ‘히스테레오’(ὑστερέω)는 ‘후자의, 뒤쫓는, 두번째의 이후에, 마지막으로’라는 뜻의 ‘휘스테로스’ (ὕστερος)에서 파생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리스도의 남은 (휘스테레마 : ὑστέρημα) 고난(θλῖψις)이란 그리스도가 담당했던 것과 똑같은 고난을 우리도 뒤쫓아 따라가야 할 고난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언약의 십자가에서 당한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난(θλῖψις)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이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이 되었으며(갈5:24), 그래서 성도들은 세상에서는 당연히‘환란’
(θλῖψις)을 당하나 이미 예수님께서 ‘환란’(θλῖψις)을 당하시어 세상을 이기시었기에 담대함을 가지고 평안의 누리며(요16:33), ‘환란’(θλῖψις)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들립시스(θλῖψις) : 환란]
5.회개하다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 – 회개하다 헬라어 원어해석(김준남 목사)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
‘마음을 바꾸다, 마음을 더 좋게 바꾸다, 다르게 생각하다, 회개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는 ‘함께, 후에, 뒤에’라는 메타(μετα)와 ‘마음으로 알다, 이해하다, 생각하다, 인지하다’라는 의미의 ‘노에오’(νοέω)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그리고 노에오(νοέω)는 ‘동침하다(마1:25), 절대적 의미로써 알다, 확신하다, 생각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기노스코(γινώσκω)에서 유래가 되었다.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는 단순히 국어사전적 의미인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다’라는 ‘행동양식’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깊이 깨달아 알아버린 마음상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메타노에오는 하말티아(ἁμαρτία)와 연계하여 볼 때 과녁에서 벗어나있는 어두움의 실존을 알아버린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며 그 마음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며 그것을 은혜라고 말한다.
잃어버린 양 비유(눅15:7)에서 주인이 잃어버린 양을 찾고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눅15:10)에서도 주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고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였다’라고 말하며 기뻐하고 있다. 여기서 잃어버린 양과, 드라크마가 한일은 하나도 없고 주인이 모두 한 일이다.
이 것은 계속 연이어 나오는 잃어버린 둘째 아들을 찾으시는 아버지 비유(눅15:11-24)를 통해서 둘째 아들이 스스로 회개하여 돌아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홀로 잃어버린 아들을 찾았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이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마15:24)고 말하고 있다. 모두가 아버지가 하신 일이다.
인간은 스스로 회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불가항력적인 표현을==>[한량없는 주님의 은혜(시편 145:7 새번역)저의 고백을합니다 ”]은혜가 있어야 되는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는 ‘나’자신의 실존이 먼지요, ‘nothing’이며 존재도 아닌 어두움으로서의 처음자리임을 아는(γινώσκω) 것이며 다나토스의 죽음으로 죽는 것이다.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 – 회개하다]
(깨끗하게 정리 2023년 4월 4일 16시 31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