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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3:31-36절) 등기 우편으로 배달된 하나님의 편지 사람들이 우편물(郵便物)을 보낼 때, 어떻게 합니까? 단순한 안부편지인 경우에는 보통으로 보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아주 중요한 것이어서 꼭 본인이 받아 보아야 할 것은 등기(登記)로 보냅니다. 즉 보통 재산에 관계되는 중요한 내용인 경우에는 반드시 등기로 보냅니다.
그러나 재산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면, 즉 그 사람의 생명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더욱 더 등기로 보내야 되겠지요. 이런 중요한 편지는 집배원이 그냥편지 함에 그 편지를 넣고, 돌아가지 않습니다. 반드시 본인을 만나서 그의 서명(書名)을 받아서 돌아갈 것입니다.
만약 서명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그 편지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거부(拒否)한 것입니다. 가끔 중요한 편지가 본인이 받기를 거부해서 돌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에 어느 책을 보니까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정치인에게 자신의 생명에 관계되는 중요한 정보가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피곤하다고 하면서 그 편지를 받지 않고, 다음날 보자고 했습니다. 그날 밤, 그는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한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그 편지는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단순한 안부(安否)편지가 아닙니다. 이것은우리가 멸망 받느냐? 아니면 영생하느냐? 는 영원한 생명이 달려 있는 내용의 편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서신을 보통 편지로 보내지 않으시고, 특별한 사람을 통하여 보내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친아들을 이 서신의 사자(使者)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 서신을 받아 본 자는 자신의 서명을 하게 하셨습니다. 결국 서명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서신을 거부(拒否)한 것입니다. Ⅰ.서명이 필요하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복음을 보통 편지로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냥 듣기만 하지, 거기에 서명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통 편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등기처럼 특별한 서신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는 사람은 반드시 거기에 서명을 해야만 합니다. 3:32-3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을 참되시다는 것을 인 쳤느니라.”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자기 철학이나 자기 견해가 아닙니다. 이것은 전부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였습니다.
즉‘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아들에게 주신 말씀이고, 아들 자신이 친히 그런 결정을 하는 데 참가하여 직접 결정을 내린 내용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랍비들이 가르쳤던 것처럼 생각나는 대로 떠들어대는 궤변(詭辯)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말씀을 전하고, 자신이 친히 결정에 참가했던 그 내용을 가지고 전하는데도 그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자가 없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무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말일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제법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앞으로도 계속 듣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에 서명(書名)을 하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그냥 듣기만을 원했습니다.
즉 그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보낸 등기 편지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아. 정말 대단한 설교 말씀이야 나는 다른 데서 이런 설교를 들은 적이 없어 앞으로 계속적으로 나는 이분의 설교를 듣겠어. 그리고는 끝입니다.
이들은 이 말씀을 자신에게 온 하나님의 서신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그저 누구에게나 하는 평범한 말들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자는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서명(書名)이 없는 것은 그 증언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수령 거부로 해서 다시 천국으로 되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그럼 그 증언을 받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33절 말씀처럼“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는 도장(印)을 찍어야 합니다. 그 도장은 물론 자기 이름이 새겨진 도장이어야 합니다. 도장의 내용은‘하나님은 참되시다’는 것입니다. 즉 누구든지 이 복음(福音)을 받는 자는 자기 입으로‘하나님은 참되시다.’라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런 고백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서신을 거부한 자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고백(告白)이 없는 자는 진정으로 복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그 복음을 거부한 것입니다.
즉 자기 생명에 관계 되는 이 중요한 등기 편지를 수령 거부한 것입니다. 그럼‘하나님은 참되시다. 라는 고백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온전히 참되시며 다른 모든 것들은 다 거짓되다.’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없이 살아온 그 모든 삶이 전적으로 거짓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영원히 우리가 옳은 줄 알고, 살았을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전부 피상적(皮相的)인 것들임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약간씩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무엇인가 노력을 하면,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위안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히 파산(破算)했으며, 완전히 망해 버린 자이며, 철저하게 버림받는 자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 너무나도 철저하게 썩어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선(善)한 것이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별로 대수롭지 않은 병인 줄 알고,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런데 검사를 하고 났더니, 의사들이 전부 다 모여서 회의에 회의를 거듭합니다.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이처럼 긴 회의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리고 담당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나와서 가족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그만 가족은 통곡을 합니다. 그의 병은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삼위(三位)하나님의 회의(回議)가 있고, 그리스도가 보내심을 받기까지 인간들은 행복했습니다. 아무도 자신들의 병이 이렇게 심각한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에게는 전혀 가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내용을 말씀하시는데도 그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자가 없습니다. 아무도‘하나님은 참되십니다.’라면서 자신의 인(印)을 치는 자가 없었습니다. 즉 애통해 하면서 이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없었습니다. 전부가 예수님의 말씀에는 무엇인가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우리들을 오해하셨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이것을 진실하게 받아들이는 자가 없었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면서 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우리를 그런 식으로 본다는 것은 대단한 오해야’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설마 그럴 려고.’라는 식으로 넘어갔지,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자기 죄를 자백하면서 그 무서운 죄를 치료받기 위하여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는 서명(書名)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들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복음을 듣고, 틀림없이 내가 이것을 나의 것으로 받았다고 서명(書名)하는 것입니다. 즉 나의 도장을 찍어야 합니다.
그럼 그 도장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 고백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지금 나의 존재는 완전히 파멸당한 상태라는 것을 시인(是認)하는 것입니다. 즉 도저히 가망이 없을 정도로 황폐해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참되시며,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나에게 하시든지, 그것을 믿고, 따르겠다는 고백(告白)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에는 진정한 고백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만이 참되시며, 나는 전적으로 죽은 자이며, 버림받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더라도 믿고, 순종하겠다는 고백(告白)이 있습니까?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이런 서명(書名)없이 예수를 믿기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일시적으로 달콤한 위안을 듣기 원합니다. 그리고 죄를 설교하면, 표정이 변하면서 떠납니다. 이것은 서명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악(惡)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렇게 참되시 다고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설교만 듣고 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릴 때에 거기서 서명하십시오.
자기 도장을 찍으시기 바랍니다.‘하나님은 참 되십니다! 이 고백이 없는 신앙은 여전히 죽은 신앙입니다.
Ⅱ.하늘로서 오신 자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의 설교를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거나,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지 않았습니다. 즉 요한이‘회개하는 사람은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외쳤을 때, 사람들은 두말하지 않고, 물에 들어가서 자기의 죄를 자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윤리적인 죄를 지적하고, 책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실제로 겪고 있는 문제들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즉 다른 사람들을 구타했거나, 남의 아내를 빼앗았거나, 세금을 과도하게 거둬들여 치부(致富)한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 생각해도 다 죄(罪)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말은 그렇게 잘 듣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는 반응이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쉽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실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가 하는 데서 죄를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3:31절을 보십시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세례 요한은 땅에 속한 자입니다. 그는 한 사람의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증거가 하나님의 말씀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윤리적(倫理的)인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못 사는 것에 대한 책망이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분은 위로부터 오신 분입니다. 그리스도를‘위로부터 오셨다’고 말씀하는 것은 그의 근본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근본적인 부분을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우리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변적인 것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근본적인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윤리적인 책망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근본적인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문제를 두고 말씀하셨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그 당시의 사회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말씀을 하셨더라면, 그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로마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셨더라면, 거부할 수 있는 자가 한 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가를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복음(福音)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일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 차고 넘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명백한 잘못에 대하여 책망해 보십시오. 괴로워하면서도 달게 들을 것입니다.
헤롯 안티파스 같은 사람을 보십시오. 그는 동생의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요한이 그것을 죄라고 책망했을 때, 헤롯은 괴로워하면서도 그의 책망을 달게 들었습니다. 복음(福音)은 우리에게 하늘의 일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그것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나?’라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은 복음(福音)을 듣기 싫어합니다. 이것 때문에 서명(書名)하기를 싫어합니다.
다른 법안을 바꾸는 일을 위해서는 서명하는 자들이 복음에 대해서만은 서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분은 하늘로서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들을 어떻게 하십니까? 3:35절)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아들의 의사(意思)를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아들이 아버지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놓았다고 합시다. 아버지는 이 아들을 사랑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아들이 한 것을 헛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들이 해놓은 것을 인정할 것이며, 이것을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그 모든 것을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아들을 온 세상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보다 더 사랑하는 아들이 이 세상에 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뜻을 전하고, 그 말씀을 온전하게 믿는 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께서 나타나셔서‘이 약속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내가 인정할 수 없다. 너희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런 일은 불가능하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오는 자들의 구원을 결코 취소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아버지께서 이 아들을 온 세상보다 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아버지께서는 이 아들에게 모는 만물에 대한 처분권(處分權)을 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복음의 전달자만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이 구원을 성취시키시는 분입니다. 아들이 한 모든 것을 아버지께서는 실패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결코 무효가 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이고, 그에게 이미 모든 것을 다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제일 먼저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3:34절 보십시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에게 성령을 한없이 부으셨습니다. 그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그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에게는 성령이 항상 넘쳤습니다. 이것은 구약 어느 선지자들에게도 없었던 일입니다. 구약 선지자들에게 부어진 성령은 이처럼 한량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면서도 그 의미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말씀의 능력도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성령은 무제한적이었습니다. 엄청난 성령이 그에게 부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어진 성령이 우리에게까지 충만하게 임하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샤워할 때, 물을 한없이 부으면, 온몸에 물이 떨어집니다. 물이 온몸 전체를 적시고도 남습니다. 커다란 폭포 밑에 머리를 대고 있어 보십시오. 몸 전체가 서늘해지고, 물에 흠뻑 젖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 앞서 먼저 성령을 받으셨습니다. 그것도 충만하게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자신이 우리에게 한없이 성령을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님이 우리에게도 충만히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것으로 여러분 마음을 모두 다 빼앗기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직 우리 중에는 복음을 듣고도 수령(受領)을 거부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복음이 이 세상의 일을 말하고 있지 않아서 졸고 있습니다. 만약 여기서 돈 버는 이야기를 하면, 정신이 번쩍 뜨일 것입니다. 또 병 낫는 이야기를 하면, 기를 쓰고 다른 사람들을 제쳐 가면서 들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서명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참되심을 온전하게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내 생각대로 좀 더 잘 먹과 잘 살아 봐야겠다고 중얼거립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참되심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로부터 충만한 성령을 받는 일입니다.‘하나님을 참되시다’라고 고백하지 않는 자에게는 성령을 주시지 않습니다.
이단들에게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이‘하나님을 참되시다’라고 고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을 바꾸어 놓습니다. 온갖 죄악으로 더럽혀져 있는 중심을 치료하십니다. 마치 주님께서 성령을 한없이 받으셨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충만한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성령님은 생명의 영(靈)이십니다.
죽고 침체된 영혼을 살려 놓습니다. 죄로 침체된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얼마나 생명력이 필요합니까? 우리에게 얼마나 거룩한 영(靈)이 필요합니까? 예수님에게는 성령이 무한히 있습니다.
주님께 간구하기만 하면, 아무리 지치고 상한 심령이라도 한 순간에 새 힘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병든 심령이라도 치료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인정하고, 성령받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Ⅲ.영원한 결과 하나님의 참되심을 인정하는 것은 이 세상의 축복(祝福)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문제입니다.
3:38절이 이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가장 무서운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참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영생(永生)을 맛볼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다녀도 영원한 생명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 위에는 하나님의 진노(震怒)가 늘 머물러 있습니다.
마치 거대한 먹구름 같지 않습니까? 언제 쏟아질지 모르는 소나기구름 같습니다. 하나님의 참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거부하고,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세상일만을 위하여 쫓아다니는 자가 우선은 행복해 보입니다.
즉 좋은 차도 타고 다니고, 돈도 마음대로 쓰고 다닙니다. 아쉬운 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위에는 시커먼 먹구름이 머물러 있습니다. 언제 그의 머리위로 쏟아질지 모릅니다. 머리위에 지옥(地獄)이 있습니다. 뜨거운 유황으로 타는 불 못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고백했습니까? 나의 철저한 죄 성을 고백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의 머리 위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진노(震怒)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의 교만함과 회개치 아니하는 악(惡)한 마음에 대하여 진노(震怒)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고백이 없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에도 진정한 고백 없이 세례를 받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죄 성으로 고민하는 자를 별로 볼 수 없습니다. 단지 예수를 믿어도 빨리 축복(祝福)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로 교회는 채워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아직 하나님과 참된 화해(和解)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합니까? 성령의 사람은 결코 그런 식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자기 자신을 불신자들의 행복과 구별합니다.
그는 마치 하나님의 진노(震怒)가 없는 것처럼 먹고 마시는 데 열중하는 것을 자기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인자와 성실을 영원히 맛보는 것이 인생의 목표(目標)입니다. 그는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맛보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그런 자에게 계속 생명을 주십니다. 주님은 그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맛보게 하십니다. 그런 사람이 영원히 사는 것이지, 늘 자기 욕심을 위하여 살다가 어떻게 갑자기 천국에 들어가겠습니까?
예배드리는 한 시간도 지겨워하는 사람이 어떻게 영원히 그런 분위기에서 살겠습니까? 찬송을 부르는 한두 시간이 지겨운데, 어떻게 영원히 찬송을 부르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여기에서 맛보는 것은 영생(永生)의 일부입니다. 이것은 일시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영원히 누릴 행복의 작은 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서로 속속들이 알고 지낼 것입니다. 여기서 한두 번 만나는 것도 부담스럽다면, 지옥이 훨씬 더 부담이 적을 것입니다. 지옥은 서로 서로 알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서는 찬송도 없고, 예배도 없습니다. 그저 영원토록 고통 가운데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욕지거리를 해가면서 지내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복음을 듣고 거기에 서명(書名)하십시오. 자기 이름을 적고 ‘하나님은 참되시다’라고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자기의 작은 꾀는 모두 다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걸어가십시오.
그리스도는 위로부터 오신 분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참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도 부분적인 진리가 아니라, 온전한 하나님의 뜻이요, 진리의 전부입니다. 그분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듣고 오신 것입니다.
그분 자신이 하나님과 친히 의논하시고, 그 결론을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자신이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화해시키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죽음이 나의 죄(罪)를 대신하는 죽음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성령의 힘으로만 새로워질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러면 신앙을 고백하십시오.‘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나는 늘 교만했고, 악독했다’고 고백하십시오. 기도로 고백하십시오. 성도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용서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제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퍼부어졌던 성령이 여러분들에게 뚝뚝 떨어져서 흥건히 적시고 말 것입니다. 새 힘이 생길 것입니다.
돈이 생기지 않아도, 지위가 올라가지 않아도, 새 힘이 생길 것입니다. 아무리 달려가도 피곤치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가도 넘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모는 일에 생명이 있을 것입니다.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썩지 않고, 남을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에게 부어졌던 그 성령이 우리들에게 부어지는 것뿐입니다. 찬송가 202장*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주일 헌금 온라인 계좌 농협 302-8772-0191-01(헌금 종류) 다음카페 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카톡선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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