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이’의 지나친 건강 (2002. 5.28.)
‘건강이’는 우리 집 병아리다. 한 달 전쯤 선빈이가 학교 앞에서 사왔는데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며칠 전 아이들이 병아리 이름을 지어주자며 이름을 공모했는데, 선우는 눈이 말똥말똥하다고 ‘말똥이’, 선빈이는 건강하다고 ‘건강이’, 선형이는 삐약삐약 한다고 ‘삐삐’를 제안했으며, 그 중 병아리 주인의 의견에 따라 ‘건강이’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이 놈의 ‘건강이’가 정말 제 이름처럼 너무(?) 건강한 것이다. 날개에는 벌써 깃털이 다 났고 지금은 꼬리가 자라고 있어 병아리 태는 이미 벗었다. 몸집도 삼계탕 용으로는 조금 작을까 싶은 정도의 중병아리 크기가 되었다. 모이도 좁쌀은 더 이상 시시해서 안 먹고 쌀, 밥, 야채 등 가리는 것이 없다. 나는 선빈이가 엄마 몰래 쌀을 퍼다 주는 것을 벌써 여러 차례 보았다. 그리고는 그 놈을 마치 매사냥꾼이 매 다루듯이 제 팔뚝 위에 올려놓고는 집안을 돌아다닌다.
목하 아내와 나의 걱정은 조만간 ‘건강이’는 큰 장닭이 될 터인데 그때 어찌 할까 하는 것이다. 잡아먹기도 그렇고, 계속 키우기도 그렇고...... 그래서 나는 요즘 닭의 자연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한데, 그것도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혹시 여러분 중에 ‘건강이’의 장래에 관해 좋은 의견이 있거나, 적어도 닭의 수명만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란다.
(* 십자매, 병아리 말고도 열대어까지 새끼를 8 마리를 낳아 그 놈들도 건강하게 잘 자라는 바람에 열대어 어항도 비좁을 정도가 되었을 뿐 아니라, 선형이가 유치원에서 올챙이라고 받아온 것이 알고 보니 도롱뇽이어서 그 놈까지 물병에 넣고 걷어 먹이려니 갈수록 나만 더 바빠지고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은 어류(바다 고기와 열대어), 양서류(도롱뇽), 조류(십자매와 병아리), 포유류(인간들) 등이 모두 모인 작은 동물 농장인 턱이다. 파충류만 빠진 것이 아쉬우니 이번 참에 뱀이나 이구아나를 한 마리 구해볼까?)
예수 병아리 (2002. 6.10.)
내가 금강산에 다녀오느라고 집을 비운 사이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내가 금강산 만물상 등반으로 한참 땀을 빼고 있던 6월 4일(화) 오후 우리 병아리 ‘건강이’가, 그 건강하고 튼튼하던 병아리가 아파트 16 층인 우리 집에서 땅으로 자유 낙하했다는 것이다.
그런 어이없는 비극이 일어나게 된 과정을 rewind해 보면, 마침 이불을 볕에 말리느라고 베란다의 창과 방충망까지 열려있는 상황에서, 좁은 집 - 아직도 사과 박스에 살고 있다. - 이 답답했던 건강이가 푸드득하고 밖으로 나왔고 그 후 이리저리 모이를 찾다가 밖의 풍경이 궁금했던지 베란다 난간에 앉아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위험하다고 판단한 아내가 아이들에게 잡아 들여놓으라고 지시했으며, 그 지시에 따라 아이들(선빈이와 그의 친구 상헌이(20층 아이. 4 학년))이 살금살금 다가가 잡으려고 했고, 그러자 주인의 배려를 이해하지 못한 건강이가 자신을 잡으려는 주인의 손을 피하려다가 발을 헛디뎌 ‘어어 -’ (실은 삐약삐약) 하다가 그만 밖으로 떨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당황한 아이들이 창밖을 내다보니 병아리는 이미 저 밑에서 축 늘어져 있고, 그때부터 선빈이는 대성통곡을 하면서, 애초에 그런 지시를 한 엄마에게 “건강이를 살려내라”, “그것이 안 되면 다른 병아리라도 내놓으라”며 생떼를 쓰기 시작했으며, 병아리가 안됐기도 한 한편 선빈이의 요구에 당황하기도 한 아내는 상헌이(선우는 그때까지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함.)에게 고양이가 물고 가기 전에 일단 병아리를 묻어주고 보자고 부탁하였는데, 그 말을 듣고 밖으로 나간 상헌이가 너무도 빨리 돌아오는데 보니까 아, 글쎄 우리 건강이가 삐약삐약하면서 살아있더란 것이었다.
아,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크나큰 신의 은총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 아직까지 생명을 가진 것 중에서 죽었다 살아난 것은 장사한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더 있던가? 그렇다면 죽은 지 3 분에 되살아난 우리 건강이도 실은 예수와 같은 반열이란 말인가? 자세한 속은 알 수 없으되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우리 병아리에게도 새 이름을 지어주지 않을 수 없어, 카톨릭에서도 영세를 받으면 ‘요한’, ‘베드로’와 같은 ‘본명’을 새로 받듯이, 부활한 우리 건강이에게도 ‘예수’라는, 경우에 꼭 맞고 뜻 또한 깊은 새 이름을 지어주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남미 어디엔가는 물 위를 뛰어다니는 도마뱀이 있어 그 놈을 ‘예수 도마뱀’이라 부른다는데 그 정도로도 ‘예수’라는 이름을 받는다면, 죽었다 다시 살아난 우리 병아리야말로 그 이름을 열 번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그 뒤로부터 그 병아리는 ‘예수 병아리’라 불리게 되었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마산 해운동 지방에는 날마다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전설 따라 삼천리 ~.
(이 모든 이야기는 조금의 거짓도 없는 100% 진실임을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예수 병아리 건강이’는 지금 이 시간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집 베란다를 돌아다니고 있다.)
예수 닭의 근황 (2002. 7.20.)
지난 6월 4일 16층에서 떨어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우리 ‘예수 병아리’의 근황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어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하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주 잘 살고 있으니 걱정들 마시기 바란다. 이제는 병아리 티를 완전히 벗고 어엿한 중닭이 되었다. (꼭 삼계탕 그릇에 들어있는 놈 크기이다.) 그래서 이름도 ‘예수 병아리’에서 ‘예수 닭’으로 자연스럽게 한 단계 격상되었다. 출신이 양계장이라서 그런가 색깔은 흰색이며(‘레그혼’이라던가?), 벌써 머리 위와 턱 밑에는 붉은 색 벼슬(표준말로는 ‘볏’)까지 그럴 듯 하게 났다. 첫 번째 글을 쓸 때만 하더라도 사과 상자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던 그 놈이 지금은 무려 2 만원짜리 큰 새장에서 호화판 단독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놈이 부활하고 난 뒤부터 심심하면 제 집을 훌쩍 뛰어넘어 베란다의 여기저기에 똥을 싸놓자 아내가 모종의 조치를 취하려는 눈치가 보이기에, 내가 얼른 새집에 가서 그 집에서 가장 큰 새장을 사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 기억을 돌이켜보니 그 날이 마침 우리나라가 스페인과 월드컵 8 강전을 하던 6월 22일(토)이었다. 그래서 내가 오전에 부지런히 돌아다녔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옷걸이에서 빼낸 둥근 막대로 횃대까지 만들어주었다. 가만 관찰해보니 제 놈도 날짐승이라고, 횃대가 없으니 행동거지가 꼭 정서 불안한 애들처럼 영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한 여름이 되어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고 지내다 보니 얼마 전부터 아내는 또 새로운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온 집안에 닭 냄새가 진동하네.”
몇 번은 못 들은 척하고 넘겼는데 오늘 아침에는 꽤나 진지하게 이야기를 걸어와 대화를 피할 수가 없었다.
“당신 도대체 저 닭을 어떻게 할 거예요?”
“뭘 어떻게? 이제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지.”
“그렇지요? 그 방법 밖에 없지요? 안 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 ”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안 되긴 뭐가 안 돼?”
“그래, 잡아먹는 수밖에 없다고요. 우리 고향에서도 늘 그랬었고.....”
“뭐? 잡아먹어? 내 새끼처럼 키우던 놈을 잡아먹어? 어림도 없는 소리. 내가 말한 한 가지 방법은 늙어죽을 때까지 기다린다는 거야.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그래, 잘 났수. 그럼 당신이 냄새 안 나게 잘 해 봐. 뭐? 늙어 죽을 때까지 기다려...... 구시렁, 구시렁.”
그러고 보면 이것도 도시 출신 남편과 농촌 출신 아내 사이의 문화 갈등의 하나가 되겠다. 그러나, 아내는 사실 ‘예수 병아리’라는 이름부터도 마음에 안 들어했다. 독실한 기독교도로서 신성모독이니 불경죄니...... 뭐 그런 걸 생각하는 모양이다(유머 감각도 없지!). 그렇다고 죽이자고 하면 되나? 그러면 자신이 ‘본디오 빌라도’가 되는 건데....... 어쨌거나 이번 일만큼은 나는 가장의 권위로 이렇게 결정하였다. 예수 닭을 죽이긴 죽이되 늙어 죽이기로!
(* 다시 생각해보니, 진짜 예수님과 우리 ‘예수 닭’은 ‘고난 및 죽음’과 ‘부활’의 순서가 서로 바뀌었다.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는데’ 반하여 우리 ‘예수 닭’은 죽었다 다시 살아난 후부터 본격적으로 아내에게 고난을 받기 시작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