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남부구치소
정혜영
벚꽃이 피고 있다
벚꽃이 지고 있다
이펜하우스아파트 상공으로 대한항공 비행기가 천천히 날아간다 구치소 앞의 현수막이 봄바람에 흔들리고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현수막 아래로 걸어 들어오는 젊은 여자의 청바지며 해맑은 낯빛
457, 한 사람이 숫자로 호명되고
자신의 죄명조차 모르는 한 젊은이
면회시간을 기다리는
그의 발걸음은 초침과 분침 사이를 숨 가쁘게 오간다
그의 옷차림은 아직 겨울이고
구치소 상공으로 장난감 같은 비행기가 햇빛 속을 날아간다 시시각각 사라지는 푸른 하늘빛, 457의 손끝이 허우적거린다
구치소 상공을 지나가는 탑승객은
제 마음에 감옥 한 채 지닌 채
창밖을 내다보고
457과 비행기의 13A, 구치소 앞마당의 나, 세 사람이 하나의 풍경 안에 갇혀 있다
내 마음의 감옥을 열면
거기 앉아있는 얼굴, 낯익은 듯 낯선 수의를 입고 있다
나는 나를 의심하고, 눈앞에 솟은 아파트의 창틀을 의심하고, 오늘처럼 눈부신 봄날을 의심하고, 룸밀러에 비친 나의 눈을 의심하고
노란 민들레가 잡초들 사이에서 고개를 들고 있다
누군가의 기억에서 떨어진 단추처럼 집 나온 치와와가 노란 향기에 코를 박고 있다
-정혜영,「서울남부구치소」《예술가》, 2022년 겨울호, 전문
구치소에 수감되어 번호로만 호명되는 “그”는 현존성을 상실한 이를 나타낸다. 어떤 사연인지 “죄명조차 모르는 그”는 과거와 현재, 인과의 고리로부터 떨어져나온 상실된 자아다. 이름도 역사도 지워진 그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실체는 없다. 그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의 처지 그대로 감옥일 뿐이다. 분간 없이 영어囹圄된 그에게 삶은 “초침과 분침 사이를 숨 가쁘게 오가”는 초조한 그것일 따름이다. “옷차림"이 "아직 겨울"인 점은 현실로부터 소외된 그의 모습을 뚜렷하게 말해준다.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그를 면회 온 “젊은 여자”는 그의 소외를 더욱 시리게 한다. 위 시에서 제시되고 있는 그의 실상은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극한의 상황을 가리킨다. 모든 것이 지워져 있고 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는 그는 살아 있으되 부재하는 부조리한 삶을 대변한다.
구치소에서 만난 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흥미롭게도 시인이 주목하고 있는 대상은 “457"과 대비되는 “13A” 라는 존재를 포함한다. “13A”는 “457”과 달리 자유로운 자이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는 “탑승객” 이기 때문이다. 여행자인 그는 어찌 보면 일상 가운데 가장 자유로운 상태에 놓여 있는 자라 할 수 있다. 상징적으로 말해서 그는 구속된 "457”의 대척점에 있는 자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457”과 “13A”를 동일한 성격의 존재로 보고 있다. “13A”라는 익명으로서의 명명이 그 점을 짐작하게 한다. 시인의 눈에 둘은 본질적으로 같다. 그리고 그 동질성에 화자인 “나”도 합류한다.
이러한 시인의 관점에는 삶에 대한 특수한 인식이 담겨 있다. 그것은 삶의 보편적 비극성을 나타낸다. 그것이 외적인 것이 되었든 내적인 것이 되었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모두 구속된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른 어떠한 조건도 크게 작용하지 못한다. 그가 아무리 영화를 누리며 부귀롭게 살지라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위 시에서 이러한 인간의 동질성에 비해 이질적인 것으로 그려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벚꽃”이다. 위 시에서 “벚꽃”은 “피고” “지”기를 무심히 반복하면서 유한하고 구속되어 인간의 모습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하 중략)
『예술가』2023 봄호 계간시평(김윤정) 중에서
[출처] 서울남부구치소/정혜영 시인|작성자 이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