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11:16-33절) 증인(證人)의 고통(苦痛)
미국에는 악(惡)한 사람의 나쁜 행동(行動)을 증언(證言)하기 위해 법정(法定)에서면, 악(惡)한 피고인(被告人)이 사람을 시켜서 죽일 수도 있기 때문에 *증인보호법(證人保護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증언(證言)한 사람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살게 하고, 증언(證言)하고 난 뒤에 신분(身分)을 바꾸어 살게 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훈련(訓練)시키는 방법(方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 (代表的)인 예(例)가 군대(軍隊)에서 신병훈련(新兵訓練)을 훈련(訓練)시키는 방법(方法)일 것입니다. 군대(軍隊)에서는 신병(新兵)에게 무조건 상관(上官)의 명령(命令)에 복종(服從)하도록 교육(敎育)시키고, 그 말에 따르지 않으면, 기압(汽壓)으로 고통(苦痛)을 주어 복종(服從)하게 합니다.
의과대학(醫科大學)에서는 레지던트(resident)라고 해서 의사(醫師)가 된 후(後)에도 담당 교수(敎授)밑에서 도제식(制度的)으로 교육(敎育)을 받게 하는데, 요즘 일부 교수(敎授)가 제자(弟子)들에게 욕설(辱說)을 퍼붓고, 때리고, 비인격적(非人格的)으로 대(對)했다고 해서 사회적(社會的)으로 물의(物議)를 일으킨 일이 있습니다.
대학(大學)이나 대학원(大學院)에서는 학생(學生)들이 교수(敎授)의 강의(講義)를 들어야 하고, 리포트(report)를 제출(提出)하고, 시험(試驗)을 봐서 교수(敎授)가 요구(要求)하는 수준(水準)까지 올라가야 성적(成績)을 받거나, 학위(學位)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세계(全世界) 어느 곳에서도 선생(先生)이 제자(弟子)들의 발을 씻긴 적은 없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제자(弟子) 훈련(訓練) 방법(方法)은 특별(特別)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弟子)들에게 결코 어떤 수준(水準)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강요(綱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祈禱)하는 데 있어서도 자신(自身)이 먼저 모범(模範)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나라의 어느 여행가(旅行家)가 나이가 들어 미국으로 유학(留學)을 가서 공부를 했습니다.그런데 그에게 한 가지 후회(後悔)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수업(受業)시간에 교수(敎授)에게 제대로 질문(質問)을 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중학교를 다닐 때, 수업(受業) 시간(時間)에 질문(質問)했다가 *건방지다'고 엄청 야단을 맞고 난 뒤에는 주눅이 들어서 다시는 질문(質問)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외국에 가 보니. 학생들이 얼마나 자유(自由)롭게 질문(質問)하고, 교수(敎授)의 말에 반박(反駁)하는지, 교수(敎授)가 화(禍)를 낼 법한 도전적(挑戰的)인 질문(質問)이나. 대답(對答)도 스스럼없이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自己)는 질문(質問)할 것이 있어도 입을 꾹 다물고, 아무 질문(質問)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敎人)을 가르치고, 양육(養育) 방식(方式)은 그야말로 인격적(人格的)이었고, 사랑이 가득 찬 교육(敎育)이었습니다. 그는 집에서 부모(父母)가 아이들을 가르치듯 고린도 교인(敎人)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떠난 뒤에 새로운 목회자(牧會者)들이 고린도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세상적(世上的) 지식(知識)으로 무장(武裝)한 사람들이었는데 사도 바울의 교육방식(敎育方式)이 너무나 유치(幼稚)하고, 지적(知的)수준(水準)이 떨어진다고 해서 당시 유행하던 *고린도와 아테네, 유대의 교육방식(敎育方式)을 교회(敎會)안에 도입(導入)"했습니다.
그들은 목회자(牧會者)라기보다는 세상(世上)의 학자(學者)같았고, 세상적(世上的)인 학위 (學位)를 자랑했으며, 세상적(世上的)인 방법(方法)으로 교인(敎人)들과 청년(靑年)들을 가르쳤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가르칠 때, 강압적(强壓的)인 방법(方法)을 썼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敎人)들은 이런 세상적(世上的)인 교육방식(敎育方式)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自身)들이 *점점 똑똑해지고 있다"고 생각(生角)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로 치면, 제자양육(弟子養育)이나, 교사대학(敎師大學)같은 것을 만들어 교수(敎授)들이 와서 강의(講義)를 하고 수료(修了)하면, 가운을 입혀주고 사진(寫眞)을 찍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敎會)에 온 사도(使徒)들은 교인(敎人)들을 거의 종 부리듯 부려먹었고, 어느 때는 잡아먹을 듯 소리를 질렀고, 뺨을 때리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敎人)들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그냥 따라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교육(敎育) 전문가(專門家)이고, 지적수준(知的水準)이 높은 선생(先生)님이라고 생각(生角)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敎人)들에게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종이 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Ⅰ.교회(敎會)에 세상(世上)을 끌어들인 사람들(상)
가정(家庭)은 기본적(基本的)으로 사랑이 있고, 어린 아이와 청소년(靑少年)이 보호(保護 )받고, 이해(理解)받는 곳입니다. 이런 가정(家庭)이 군대(軍隊)로 변(變)한다면, 어린 아이들은 불행(不幸)해질 것입니다.
또한 대학(大學)은 자유(自由)로운 분위기(雰圍氣)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군대(軍隊)처럼 선배(先輩)가 후배(後輩)를 때리거나, 기압(氣壓)으로 고통(苦痛)을 주고, 교수(敎授)가 제자(弟子)들은 종 부리듯 한다면, 그 대학(大學)은 좋은 대학(大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틴 루터가 살던 때, 학교(學校)에서 아이들은 매 맞는 것이 하루 일과(日課)였습니다.즉 라틴어 선생(先生)들은 매를 옆에 놓아두고, 라틴어 격변화(格變化)를 외우지 못하는 아이들은 피가 날 정도로 때렸다고 합니다.
루터도 어린 사절. 처음 학교(學校)에서 무엇을 외우지 못했다고 *열 대 넘게 맞았다"고 했습니다. 당시 주인(主人)들은 종을 묶어놓고, 매로 죽도록 때리기도 했는데, 어느 때는 칼로 혀를 자르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 고린도에 있는 세상(世上) 학원(學園)도 이런 사회적(社會的) 악습(惡習)을 그때로 답습(踏襲)했던 것 같습니다. 즉 선생(先生)들은 제자(弟子)들이 대답(對答)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공부를 못하면, 뺨을 때리기도 하고, 종처럼 부려먹기도 하고, 잡아먹을 듯 소리도 지르고, 욕도 했던 것 같습니다.
문제(問題)는 사도 바울이 떠난 뒤, 고린도에 온 거짓 사도(使徒)들이 교회(敎會)의 수준(水準)이 *이래서는 안 된다. 교회도 어느 정도 세상과 맞춰가야 한다.'라고 하면서 기존(旣存) 의 시스템(system)을 다 뜯어고쳤는데, 교회(敎會)를 세상적(世上的) 학교(學校)처럼 바꿨습니다.
그래서 교인(敎人)들로부터 비싼 수업료(授業料)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종처럼 부려먹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상황(狀況)에 따라 뺨을 칠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놀라운 점은 고린도 교인(敎人)들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세상(世上) 학교(學校)에서 다 그렇게 하고 있으며, 이것이 수준(水準)이 높아지는 길이라고 생각(生角)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이용(利用)해서 거짓 사도(使徒)들은 고린도 교인 (敎人)들을 철저하게 종으로 부려먹었습니다.
이 소식(消息)을 들은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敎人)들에게 *교회가 왜 세상(世上)과 달라야 하는지' 이렇게 설명(說明)하고 있습니다.
11:16절)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사도 바울은 지금 이상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自身)을 어리석은 자로 생각(生角)하지 말라"고 하면서 *좀 어리석은 말을 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적(世上的)으로 볼 때, 그의 말이 아주 유치(幼稚)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볼 때,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위대(偉大)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보는 관점(觀點)에 따라서 세상적(世上的) 가치관(價値觀)과 하나님의 가치관(價値觀)은 극 (極)과 극(極)에 자리한 듯. 너무나도 달라서 함부로 판단(判斷)할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敎會)에 새로 온 거짓 사도(使徒)들은 세상(世上) 교육(敎育)을 받은 자들로,
그들이 보기에 사도 바울이 가르쳤던 진리(眞理)는 너무 체계(體系)가 없고, 지적(知的)수준(水準)이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自身)들이 유대에서 배우고, 아테네나. 세상(世上)에서 배웠던 교육(敎育) 방식(方式)을 교회(敎會)안에 도입(導入)했습니다. 즉 그들은 교회(敎會)안에 학교(學校)를 세웠고, 그곳에서 교수(敎授)나 학자(學者)로 불렸으며, 세상적(世上的)인 방식(方式)으로 교인(敎人)들을 강하게 훈련(訓練)시켰습니다.
그런데 교인(敎人)들은 그런 교육(敎育)을 잘 받아들였고, 좋아했습니다. 자신(自身)들의 교육(敎育) 수준(水準)이 높아지고, *엄청 똑똑해지고 있다"고 생각(生角)했기 때문입니다.
11:18-19절)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사실 고린도 교인(敎人)들은 지혜(智惠)있는 자였고, 세상(世上) 훈련(訓練)을 받은 거짓 사도(使徒)들과 지도자(指導者)가 무식(無識)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敎人)들은 오히려 자신(自身)들이 무식(無識)하다고 생각(生角)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敎會)의 목회자(牧會者)들은 사실 성경(聖經)을 가르칠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세상(世上) 신화(神話)나, 세상(世上)에서 배운 것을 가지고 고린도 교인(敎人)들 앞에서 마음껏 자랑할 뿐이었습니다. 당시 그들의 교육(敎育) 방법(方法)은 정말 나쁜 것이었습니다.
11:20절)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 도다.”
거짓 사도(使徒)들은 세상(世上)의 교육(敎育) 방법(方法)을 모방(模倣)해 배우는 자(者)들을 자기(自己) 종으로 삼아 온갖 궂은일을 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제자(弟子)들은 이런 것을 다 배위야 한다고 생각(生角)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敎會)의 선생(先生)들은 제자(弟子)들에게 개인적(個人的)인 심부름도 시키고, 잡다(雜多)한 일도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代價)로 돈을 주기는커녕 스스로 돈을 써 가면서 종살이를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갑질(bossy)입니다.
본문(本文)을 보면 *잡아먹거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맹수(猛獸)가 약(弱)한 *짐승을 통째로 물어뜯어 먹는 것"을 비유(比喩)해서 말한 것입니다. 즉 선생(先生)들은 제자(弟子)들을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제자(弟子)를 잡아먹으려고 했습니다.
또한 본문(本文)을 보면 *빼앗거나''라고 말씀합니다. 제자(弟子)가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냥 가져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높이는 짓을 했습니다.
모든 영광(榮光)과 업적(業績)을 선생(先生)이나. 교수(敎授)가 다 가져간 것입니다. 즉 연구(硏究)는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고, 결과(結果)는 그들이 가져갔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구타(毆打)가 예사(例賜)로 벌어졌는데, 본문(本文)은 *뺨을 칠지라도''라고 말씀합니다. 즉 선생(先生)은 제자(弟子)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예사(例賜)로 뺨을 때렸던 것입니다. 이런 일은 지금도 예사(例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敎人)들은 이것을 잘 참아 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올바른 교육 (敎育)이고,지적(知的) 수준(水準)이 올라가는 비결(祕訣)이라고 생각(生角)했기 때문입니다. 교사(敎師)라는 자(者)들이 자랑했던 것은 고린도 교인(敎人)들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11:22절)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교사(敎師)들은 그리스 지식(知識)만 가지고는 고린도 교인(敎人)들을 끝까지 지배(支配) 할 수 없다고 여겨서 자신(自身)들의 혈통(血統)이나, 뿌리가 이스라엘이며, 아브라함의 후손(後孫)이고, 예루살렘의 사도(使徒)들로부터 지지(支持)를 받는 자(者)임을 내세우며 자랑했습니다.
11:23절)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최근(最近) 우리나라 교회(敎會)는 교인(敎人)들의 지적(知的) 수준(水準)이 아주 높아졌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두 가지 현상(懸賞)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①교회(敎會)가 교인(敎人)들을 엄청나게 훈련(訓練)시킵니다.(그냥 평범(平凡)하게 믿는 것으로는 성장(成長)이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②세상(世上)의 지적(知的) 성향(性向)이 교회(敎會)안에 많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교회(敎會)가 제자(弟子) 프로그램(program)을 가지고, 맹렬(猛烈)하게 훈련(訓練)시키고, 가르치면 불평(不平)이 줄어듭니다.)
왜냐하면 훈련(訓練)을 받지 않으면, 직분(職分)이 주어지지 않고, 아무것도 인정(認定)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개인적(個人的)인 훈련(訓練)이나, 관심(關心)이 신앙(信仰)이 어릴 때는 엄청나게 도움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회의(會議) 중심(中心)의 신앙(信仰)이나, 봉사(奉事) 중심(中心)의 신앙(信仰)은 사람마다 의견(意見)이 다르다 보니까 자꾸만 싸움과 분열(分裂)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교육(敎育)이나 제자(弟子) 훈련(訓練)을 시키면, 이런 성향(性向)을 성경(聖經)공부하는 체질(體質)로 바꿀 수 있어 부흥(復興)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성숙(成熟)하고 난 후(後)에는 또 다시 생명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교회(敎會)나 교인(敎人)들이 *그리스도의 장성(長成)한 분량(分量)까지 자라게"됩니다.아-멘
찬송가 448장 *주님 가신 길을 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