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밤새 울부짖던 게일 (gale; 영국에 특히 겨울철에 자주 불어오는 돌풍) 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이 횟비의 아침은 햇살이 밝았다.
코레오는 하이 스트리트에 들러 오래간만에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고 내친김에 바닷가로 나왔다.
원래가 항구를 끼고 형성된 곳이라서 바닷가라야 하이 스트리트에서 불과 몇 분 거리에 있었다.
바닷가를 따라 온갖 음식점들이며 기념품 가게, 심지어 요란한 전자음을 연신 울리는 오락실 등 각종 놀이기구를 늘어놓은 유흥장까지 즐비하게 늘어서서 코레오가 기대했던 한산한 바닷가의 정경들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바닷가를 따라서 난 길로 사람들이 빽빽하게 밀려다니는 것이 도착하던 날 저녁에 봤을 때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외진 바닷가 고장으로 왔을까? 아니면 날씨가 좋아서 이 고장 사람들 모두가 몰려나온 것이기라도 한 것일까? 그러나 관광객풍의 사람들의 차림으로 보아서는 외지 사람들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부둣가에 넘치는 인파에 당황하여 잠시 갈 곳을 몰라 하던 코레오는 멀리 바다 쪽으로 뻗어 나간 커다란 방파제를 보고 그 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향했다.
북적거리는 바닷가에서 멀리 벗어나 방파제 위를 걸으면서 코레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차가운 북해 바다의 높은 풍랑을 몸으로 가로 막으며 길게 누워있는, 상상을 초월한 거대한 규모의 방파제를 바라보며 코레오는 이곳에 오기 전 횟비를 '외딴 조그만 어촌'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생각이 크게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
B & B의 노리스 영감님이 이곳 횟비는 일찍이 바이킹이 상륙했던 곳이었으며 한때는 고래잡이 항구로 그게 번성했던, 지금도 이 일대의 중심이 되는 어항이라고 설명해 주었을 때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코 들었는데 방파제 위에서 눈길의 끝 간 데까지 한없이 펼쳐지는 망망대해의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코레오는 '그렇다.
여기가 세상의 가장 북쪽에 있다는 바다로구나! 정말 고래잡이 어항답구나!'하고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겨울날답지 않게 바람도 없고 햇살이 눈부신 맑은 날임에도 불구하고 큰 파도로 밀려와서 방파제를 부서져라 때리는 야성적인 거친 바다가 코레오의 마음에 꼭 들었다.
가슴이 탁 트이는 이 방파제가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쯤 자신은 보따리를 싸서 다시 여기를 떠나려고 마음먹고 있을 런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코레오는 바다를 향하여 가슴을 활짝 펴고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방파제에서 돌아오면서 코레오는 B & B로 가는 길목에 있는 펍에 들렀다.
카운터에서 기네스 (Guinness; 맛이 유난히도 씁씁하고 진한 아일랜드 흑맥주) 를 한 잔 사들고 돌아섰을 때 낯익은 얼굴이 자신을 향해서 손을 흔들었다.
묵고 있는 피시즈 헤드의 바깥주인인 노리스 영감님이었다.
자신의 집에서는 어제 저녁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쳤을 때 코레오의 인사에 인자한 미소로 답하며 낯선 여행객에게 횟비에 대하여 간략히 설명해 주었을 뿐, 이것저것 꼬치고치 캐묻던 할머니와는 달리 같이 저녁을 먹는 내내 과묵하기 그지없던 영감님이 웬일인지 먼저 손을 흔들어 아는 체를 하는 것이 이상했다.
"옆에 와서 앉게나. 마침 나도 혼자 일세."
노리스 영감님은 코레오가 옆에 앉을 때 들어올 수 있도록 비좁은 자리를 비켜 앉으셨다. 영감님은 벌써 여러 잔째인 모양으로 얼굴이 불그레하셨다.
"여보게 한잔 받게나. 기네스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같은 것으로 가져 왔는데 괜찮겠나?"
"아니, 영감님! 이러시지 않아도 되는데."
불쑥 자기 앞으로 파인트 (1pint(0.568L) 잔을 내미는 노리스 영감을 보며 코레오는 당황했다.
말수가 없는 영감님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이 자기 역시도 다른 생각에 골몰하여 영감님이 옆에 있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니네. 괜찮네. 어차피 나도 한 잔 더 해야 했는데, 보니까 자네 앞에 잔이 비었기에. 가는 길에 한 잔 더 들고 왔을 뿐이니까."
"감사합니다. 영감님. 제가 갖다 왔어야 했는데요."
"그런데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었나?"
"아, 아닙니다."
"혹시 고향 생각이라도? 한국에서 왔다고 했던가?"
"아닙니다. 저는 이태리에서 살다가 며칠 전에 영국으로 건너 왔습니다."
"이태리라고?"
노리스 영감님은 의외라는 듯이 되물었다.
"예. 이태리 로마에서 살다가 왔습니다."
"음, 이태리라."
"영감님도 이태리에 가 보신 적이 계시겠지요? 혹 여행이라도?"
"나는 아직 이태리에 가보지 못했네. 이곳에서 태어나서 횟비를 떠난 적이 없었지. 하지만 내 아들이 마지막으로 엽서를 보낸 것이 이태리의 베니스였네."
"예? 마지막이라니요?"
"그래, 마지막이었지. 그리고 아주 아름다운 그림엽서였지. 베니스의 멋진 검정색 곤돌라 배가 그려진."
검정색? 그래 베니스의 곤돌라는 검정색이라고 리베라가 말했었지.
어렸을 때 왈을 따라서 베니스에 갔을 때 들은 이야기라면서 옛날 흑사병으로 도시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었을 때, 매일같이 죽은 사람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 장례용으로 검정색을 칠했던 것이 그대로 전통적인 곤돌라의 색깔로 굳어 버렸다고 했었지…….
"우리 아들이 베니스에 기항했을 때 보낸 엽서에는 선원생활이 얼마나 자유롭고 즐거운 것이며 얼마 후에는 휴가를 받아 영국에 들르겠다는 글이 써 있었지. 그러나 우리 애 대신에 찾아온 것은 선박회사에서 날아 온 우리 아들이 술에 취하여 갑판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사망소식이었어."
"안 되셨군요. 노리스 영감님."
코레오는 쓸쓸해 보이는 노리스 영감님의 옆얼굴을 보면서 위로하며 말했다.
"이미 다 오래 전 일이야. 하지만 지금도 가끔씩은 그 여자가 원망스럽기는 하
지."
"그 여자라뇨?"
"길 건너 펍에서 일하던 여자지. 내 아들의 아내이자 손자 녀석의 엄마이기도 하고."
"……."
"나는 원래가 어부였네. 내가 배를 타지 않기 시작한 것이나 할멈이 B & B를 시작한 것은 다 얼마 안 되네. 고깃배 하나를 가지고 평생을 횟비 앞바다에서 고기만 잡으며 살아왔지. 우리 애는 착한 아이였네. 나를 따라서 열심히 고기잡이를 하던 고분고분한 아이였지. 그런데 어느 날 길 건너 펍에서 일하던 버밍햄에서 온 아가씨와 사귀게 되면서 결혼하여 어린 아들을 하나 두고 있었지만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는지 둘 다 술에 취해 싸우는 날이 잦아졌었지.
그러던 어느 날 아들 녀석이 화물선의 선원으로 취직이 되었다며 '나는 아버지처럼 횟비에서 고기잡이나 하면서 평생을 썩기는 싫다'고 돈을 벌러 간다며 훌쩍 집을 떠나 버렸네. 그 뒤 아들의 사망소식을 듣고 그 여자는 그리 놀라지도 않았고 배 회사와 쉽게 합의를 하고는 이곳을 떠나서 버밍햄으로 돌아갔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아이를 보내달라고 연락이 왔더군. 새로 결혼을 했는데 남자가 아이를 데려와도 좋다고 했다면서."
"……."
"허허허. 그런데 말이야, 젊은이. 나도 꼭 한번은 외국에 갔던 적이 있었지. 그날도 이 횟비에서 고기잡이를 나갔는데 말이야. 바다에서 심한 폭풍우를 만났었네. 게다가 배가 엔진고장까지 일으켜서 표류하다가 네덜란드 경비정에 구조되어 로테르담 (네덜란드의 북해바다에 있는 큰 국제적 항구 도시) 에 입항했던 일이 있었네. 그 때 말고는 나는 한번도 이 횟비를 떠난 적이 없었네."
"영감님은 이곳을 아주 좋아하시나 보군요?"
"그럼, 이곳은 조상대대로 내가 살아온 곳이지."
"영감님은 원래가 돌아다니시기를 싫어하시나요?"
"아니야, 내가 왜! 고깃배를 타고 보통은 이 횟비 앞바다에서 고기를 잡았지만 더 젊었을 때는 때때로 네덜란드나 덴마크가 건너다보이는 먼 바다나 더 멀리 노르웨이 근처까지도 가본 적이 있었네. 나는 이래봬도 자랑스러운 바이킹의 후손이라네."
"영감님이 바이킹의 후손이라고요?"
"그래. 그렇다니까! 나의 조상들은 몇 백 년 전에 스칸디나비아에서 배를 타고 이곳에 당도했었네."
"자랑스러운 바이킹의 후예라고 말씀하셨죠. 바이킹의 피가 섞였다는 것이 자랑스러운가요? 다른 영국 사람들과는 다르더라도요.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정말 죄송합니다만, 어떤 사람들은 바이킹에 대해 해적이라는 나쁜 인상을 갖고 있지 않나요?"
"어쨌든 나는 지금은 영국 사람이네. 그리고 우리 조상은 정복자로서 이 땅에 왔었네."
"아! 그렇군요. 정복자로서 이곳에 오셨군요. 그 점이 바로 그들과 다른 점이었군요."
"뭐라고?"
"아닙니다. 미안합니다. 제가 잠깐 딴 생각을 했었나 봅니다."
노리스 영감님이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을 때, 코레오는 자신이 쓸데없는 생각에 괜한 말을 꺼낸 것을 느끼고 얼른 사과했다.
바이킹은 동화되어 자취를 감추었지만 집시들은 사회에 격리되어 그들만의 전통을 고수하며 기름에 물 돌듯이 살고 있구나! 핍박과 냉대를 받는 것이 그들의 운명인 것처럼…….
"자네를 만나서 이렇게 얘기하다보니 문득 나도 죽기 전에 우리 아들이 그렇게 좋다고 말했던 베니스에는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
"저도 베니스에는 못 가봐서 뭐라고 말씀드리기 힘들지만 며칠 있어보니 여기도 아주 좋은 곳이군요. 영감님이 평생 이 곳을 떠나시길 싫어했던 심정을 알 것도 같군요."
"그래 좋은 곳이었지. 옛날에는 지금보다도 훨씬 좋았어. 이제 얼마나 더 이 바다를 바라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노리스 영감님의 눈길을 쫓아서 펍의 창문유리 너머로 바다 쪽에 눈을 던졌지만, 이미 밖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해서 시커먼 바다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코레오는 바다에서 무언가 번뜩였다고 느꼈다. 파도가 밀어닥치면서 튕겨 오른 하얀 물거품이었을까? 아니, 잘못 본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고 쳐도 바다에는 여전히 파도가 출렁거리고 하얀 물거품이 일고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리베라가 눈앞에 보이지 않게 되었어도 이 세상 어딘가에 살고 있는 것처럼…….
"자네가 처음 쓸쓸한 모습으로 내 집으로 들어오던 날 호기심을 느꼈네. 저 낯선 동양의 젊은이는 무엇 때문에 아무도 찾지 않은 이 겨울에, 이 외딴 북녘항구에 혼자서 찾아왔을까 하고서 말이네."
북녘? 노리스 영감님의 말에서 코레오는 자신이 아주 북쪽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도에서 볼 때는 이곳 횟비가 그저 영국의 동해안 중간 위쪽에 있는 항구라고 생각했었는데. 영국의 높은 위도로 볼 때 여기는 거의 지구의 북쪽 끝에 가까운 곳이 아니던가?
"그래요. 영감님 말씀이 맞군요. 이곳이 북쪽이군요."
"그럼, 북쪽이고말고. 여름철이면 대구를 쫓아서 노르웨이 앞바다를 향해 올라가곤 했지. 거기서 조금만 더 곧장 올라가면 북극일세."
그렇다! 방파제에서 바라다 보이는 망망하게 뻗어나간 북해 바다를 따라 올라가면 북극점에도 다다를 수 있지 않겠는가?
자신도 모르게 너무 멀리까지 와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에 코레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로 방황하는지 나에게 말해줄 수 있겠나?"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그래, 그런 것 같았네. 젊은이들에게 최고로 관심이 있는 것은 사랑이지."
"제 얼굴에 써 있기라도 했나요?"
코레오는 멋쩍어 하면서 물었다.
"아닐세. 얼굴이 아니고 자네의 눈빛에서 읽었네. 사랑을 쫓는 사람의 눈빛은 그 어떤 다른 것을 쫓는 사람의 눈빛과는 틀리지. 돈이나 명예, 야망이나 성공 같은 그 어떤 다른 것을 쫓는 사람들과는……."
"그럼 영감님도?"
"나 같은 사람이 무슨. 할망구와 함께 그저 같은 날 죽기만을 기다리며 살고 있을 뿐일세. 젊었을 때는 환희하고 고뇌하며 사랑이 다인 것 같고, 희망에 넘쳐 돈이다 성공이다 하여 그것이 인생의 전부이고 마치 영원할 것처럼 매달리지만 세월이 지나면 다 부질없네. 내 나이 벌써 칠십이 훨씬 넘었네. 볼품없이 변해버린 나의 육신을 보게나. 젊을 때는 탄력 있고 힘이 넘쳐서 영원히 아름다울 것만 같았는데 이제 늙어서 쭈그러지고 오그라들어 버려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변해버리고 말았지 않았나?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나도 이 육신을 내다 버리고 여길 떠날 걸세. 선박도 세월이 흘러서 녹슬고 부서지면 결국 내다버리지 않나? 저기 부둣가에 버려져 있는 어선처럼."
어느덧 불이 밝혀졌는지 전선줄에 매달린 전등들이 바람에 출렁이며 춤을 추는 아래로, 노리스 영감님의 말대로 부서지고 녹슨 어선 하나가 부둣가에 버려져 있는 것이 창밖으로 보였다.
코레오는 노리스 영감님을 쳐다보았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부로 바닷바람과 싸우며 평생을 보내와서 인지 그의 피부는 과연 그의 말대로 유난히도 주름이 깊어서, 어렸을 때 동해안의 시골마을에서 본, 잘못 내말려 푸르등등하게 곰팡이가 핀 오징어와 같이 쭈글쭈글해 보였다.
나이보다도 훨씬 더 늙어 보이는 그의 얼굴이 고단했던 인생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영감님,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 고깃배가 버려졌어도 어딘가에 저 고깃배에 관한 추억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보이지 않게 될지라도 그 사랑의 추억은 바래지 않고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쎄, 그럴까 자네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도 같군."
자신을 향하여 희미한 웃음을 던지는 영감님의 얼굴이 환히 빛나 보인다고 코레오는 생각했다.
뿌옇게 흐려오는 펍의 유리창 너머로 북녘의 겨울밤은 서릿발처럼 얼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