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대회 지음 _ 커피집을 하시겠습니까
최고의 커피가 있는 곳
_ 콜롬비아 살렌토
누군가 나에게 그동안 마셨던 커피 가운데 가장 맛있었던 커피기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 중 산장에서 마신 ‘우리나라 인스턴트커피’라고 답할 것이다. 배고플 때 먹은 음식이 가장 맛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무리 산해진미라 할지라도 소화불량으로 고생 중이거나 이미 다른 음식으로 배가 부른 상태라면 입에 대기도 싫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맛있게 마신 커피와 가장 훌륭한 커피는 다른 의미다. 전자는 커피에 대한 갈급함이 주된 요인이고, 후자는 커피의 질을 말하는 것이다.
살렌토 Salento. 이름이 지닌 어감만큼이나 아름다운 이 작은 마을은 내가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마주친 수많은 카페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맛있는 커피를 만난 곳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과 눈이 부시게 푸른 해변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빼어난 휴양지, 살렌토와 이름이 같다. 둘 다 아름답고 멋진 마을이지만, 콜롬비아의 살렌토가 해발 2,400m에 위치한 고산마을이라면 이탈리아의 살렌토는 해발 0m의 해안마을이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커피를 만나러 가는 길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콜롬비아의 수도, 산타페데보고타의 북쪽터미널에서 아르메니아행 버스를 타고 열 시간 가까이 간 후에 다시 살렌토행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40여 분을 들어가야 했다.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도로 상태였다. 도심을 벗어나면서 드러난 구불구불한 산길은 버스에서 한순간도 몸을 고정시킬 수 없을 만큼 흔들림이 잔인하다. 더욱이 밤에 출발하는 차라면 한숨도 못 자고 밤을 꼬박 새울 각오를 해야 한다. 나 역시 그러했다. 평소 차멀미가 없는 사람조차도 이 길에 오르면 소화되지 않은 음식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쉬어갈 때는 반드시 차 밖으로 나와서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맨손체조라도 해야 그나마 차멀미를 줄일 수 있다.
거의 열두 시간이 걸려서 도착한 살렌토는 언덕 ‘알토데라크루스’에 오르면 마을이 한눈에 들어올 만큼,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작은 마을이었다.
해발 2,400m에 위치한 마을답게 기후가 시시각각 변하였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다가도 어느새 구름이 하늘을 덮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맑게 개었다. 항상 공기가 촉촉하고 맑아서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도시의 매연으로 찌든 폐가 깨끗하게 청소되는 느낌이었다.
살렌토에 온 이유는 오로지 세계 최고의 커피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플랜테이션 하우스 plantation house'에 가면 영국에서 기업 컨설팅을 하다가 은퇴한 노신사가 운영하는 숙소에 머물며 커피 농장을 체험할 수 있다. 며칠 전부터 예약을 해두지 않으면 방을 구할 수 없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나는 예약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광장 근처에 위치한 호텔 '포사다 델 앙헬 posada del angel'에 여장을 풀었다.
마을 광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탈것이었다. 이곳에서는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아이부터 백발의 노인까지 말을 타고 다녔다.
아이들조차 말을 부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학원에 다니느라 어른보다 바쁠 아이들이건만, 한가로이 동물과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몸으로 배우고 있었다.
광장 북서쪽 한편에는 쌍둥이 형제가 운영하는 커피하우스가 있었다. 심플한 탁자와 의자 외에 별다른 인테리어는 없었으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다름 아닌 수동식 1세대 에스프레소 머신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백년은 된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탈리아 토리노 지방에서 만든 ‘라 파보니’ 머신으로 백 년 가까이 된 것이라고 하였다. 책에서만 보았던 것을 직접 마주하게 되다니.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머신이 아직까지 멀쩡하게 작동한다는 사실이었다. 전설적인 머신으로 추출한 에스프레소를 마셔볼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전동 그라인더가 없어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주인장은 커피 통에서 미리 갈아놓은 커피 가루를 한 스푼 떠서 포터필터에 담았다. 탬핑도 하지 않고 바로 머신에 장착하고는 손으로 레버를 내렸다. 이윽고 추출되는 진한 갈색의 에스프레소는 보기만 해도 그 향과 맛이 전해지는 듯하였다. 머신이 구형이라 크레마는 두텁게 추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깨를 타고 허리까지 매끈하게 흐르는 군더더기 없는 이탈리아 남성 정장 같은 깔끔한 쓴맛과 각선미 좋은 여성의 검은색 긴치마 아래로 보이는 가늘고 하얀 발목 같은 신맛 그리고 커피를 다 마시고 난 다음에도 위에서부터 코까지 치고 올라오는 기품 있는 노년의 잔향까지. 바로 이 맛을 찾았었다. 바로 바닥을 보인 커피가 아쉬워 카푸치노 한 잔을 더 주문하였다. 에스프레소 위에 데운 우유와 거품을 얹은 카푸치노 특유의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무엇이 맛의 차이를 내는 것일까 자못 궁금하였다. 커피 산지에서 생산되는 원두는 두말할 필요 없이 최상이겠지만, 우유는 목장에서 기르는 젖소의 원유를 공급받아 사용하는지 아니면 기제품을 사용하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내 스페인어가 일천하고 카페 주인장의 영어가 서투르니 그저 관찰만 할 뿐 답은 얻지 못하였다.
닷새 동안 살렌토에 머물면서 하루에 세 번 이상 쌍둥이 형제가 운영하는 카페에 들렀다. 형과 동생이 어찌나 닮았는지 정말 유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분간하기 어려웠다. 사흘쯤 지나니까 그 두 사람도 나를 알아보고 내가 주문하지 않아도 알아서 아침에는 카푸치노, 점심에는 에스프레소, 저녁에는 카푸치노를 내왔다. 이래서 단골이 좋은가보다.
떠나기 전날 알게 된 사실인데, 이 카페는 우리나라 모 방송국 여행 프로그램에도 소개가 되었다고 한다. 여느 때와 같이 아침에 들렀더니, 나를 불러 비디오테이프를 꺼내어 녹화된 영상을 보여주었다. 촬영 후 한국에서 테이프를 보내준 모양이었다. 한국인이 이 카페에 들를 때마다 자랑하듯 영상을 틀어주는 것 같았다. 내가 떠나는 날에도 어김없이 TV 화면에는 그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캠코더가 없어 비록 영상으로 남길 수는 없었으나, 닷새 동안 마신 커피 맛은 눈, 코, 혀를 통해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요즘도 한가로이 커피를 마실 때면 때때로 세계 최고의 커피가 있는 곳, 살렌토의 쌍둥이 형제 커피하우스를 추억한다.
주소 44 el balcon de los recuerdos, Carrera 6 #4-77, Salento, Quindío, 콜럼비아 |
최고의 커피가 있는 곳
- 부에노스 디아스, 쿠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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