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025. 1. 12.) 노동전선 정세토론 발제문입니다.
독자적 노동자정치세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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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범들이 꿈꾼 것은 반대세력을 제멋대로 제거하고 한국사회를 폭군과 무속이 지배하는 왕정체제 수준으로 퇴행시키는 것이었다. 국민적 저항과 여타 조건들로 인해 비상계엄이 무산되고 국회에서 탄핵이 의결된 후에도, 내란세력은 필사적으로 결집⋅저항하고 있다. 즉 내란은 진행중이다. 그러나 현존 국가권력체계가 붕괴되고 내란이 공공연한 내전으로 전환되지 않는 한, 조만간 내란세력은 분열⋅위축되고 제압당할 것이다. 심각한 돌발 변수가 없다면, 조기대선을 통해 민주당이 집권하리라고 예상된다.
내란으로 인해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들의 정치적 요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선 실질적 민주주의 구현, 즉 절대다수 노동자민중이 자본독재를 극복하고 국가권력의 주인이 되는 민주국가⋅노동자국가 건설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과 공감은 널리 확산되지 않았다. 이런 인식과 공감의 확산에 적극 나서야 할 운동조직들은 기존의 분열을 극복하지 못했고 자본독재 극복을 위한 조직적 운동은 아직 미약하다. 이러한 주체적 조건으로 인해 현정국이 혁명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러나 노동자정치세력이 다시 민주당의 들러리가 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은 상당한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 이 문제의식은 노동자정치세력이 기존의 분열상태를 극복하고 독자세력으로 성장할 출발 동력이 될 수 있다. 제국주의적 자본독재로 인한 극심한 양극화와 고용불안, 진행중이거나 코앞에 다가온 전쟁과 환경재앙 등의 위기 극복을 위해 대안사회 건설은 절박하게 필요한데, 자본독재 극복은 민주당의 역량과 전망을 넘어서는 문제다. 이 또한 독자적인 노동자정치세력화의 당위성을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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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세력이 집결하여 내란을 내전으로 바꾸겠다고 달려드는 현상황에서, 내란세력의 제압은 화급한 사회적 과제이며 노동자정치세력은 내란제압 투쟁에 앞장서야 한다. 이 투쟁은 자본독재의 양대분파인 민주당과 국힘당 사이의 권력투쟁을 넘어서, 반공⋅반북⋅반중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종일⋅종미 기득권 파쇼세력과 노동자민중세력의 사활을 건 전쟁의 현국면이다. 내란제압 투쟁에서 민주당이 수행하는 역할은 양면적이다. 민주당은 국회에서 계엄을 해제함으로써 초기에 내란세력을 상대로 기선을 잡는 데에 기여했다. 또 눈앞에 다가온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내란 주동세력의 복귀를 저지할 것이다. 그러나 집권을 위해 미국과 자본권력의 요구에 부응하여, 혹은 국정을 책임질 수 있다는 대중적 이미지를 만들고자, 내란공범인 국힘당 및 대행체제와의 협력관계를 도모하고 있다. 대선국면에 들어서면 국정안정을 더욱 강조하고, 착취에 맞서는 노동자민중의 반제⋅반자본적 요구들에 대해서는 미온적이거나 거부적인 태도를 취할 것이다.
따라서 민주당을 상대로 하는 공조⋅압박⋅차별화는 불가피하다. 내란이 격화되고 있는 지금은 공조와 압박이 우선적인 시점이다. 내란범 처벌과 내란공범 국힘당 해체를 타협없이 요구하여, 민주당이 미국이나 자본권력보다 노동자민중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또 윤석열 구속⋅탄핵과 연결해, 김건희⋅명태균 게이트 등으로 드러나고 있는 권력형비리에 대한 처벌도 지속적으로 요구할 필요가 있다. 비리카르텔을 이루어 국가권력의 비호를 받아온 내란세력의 실체를 폭로하고 제대로 처벌할 경우 그들은 궤멸 수준으로 내몰릴 것으로 보인다. 물론 윤석렬과 김건희의 체포와 구속으로 간단히 내란세력이 소멸하지는 않겠지만, 그들의 분열과 위축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란세력이 위축되는 시점부터는 비정규직 철폐, 양극화 해소, 노동권⋅농업권 보장, 무상교육⋅무상의료 확대, 국보법 폐지, 전작권 회수 등 노동자민중의 요구들을 강력하게 전면에 내세우면서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민주당과의 차별화를 본격화할 필요가 있다.
헌재의 탄핵결정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이러한 노동자민중의 요구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탄핵 요구와 함께 광장을 채울 수 있다. 이 기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그러한 요구들을 사회적 의제로 각인하고 독자적 노동자정치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을 넓혀갈 필요가 있다. 대선국면에 들어서면 독자노선은 민주당 및 친민주당 세력으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대응논리를 충분히 마련하여 널리 공유할 필요가 있다. 그 핵심은 제국주의적 자본독재로 인한 노동자민중의 생존위기 및 이와 관련한 민주당의 근본적 한계를 밝히고, 자본독재를 지양할 구체적 대안정책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정치적 총파업은 이 지점에서 가장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때 내란세력 제압 투쟁의 성과도 독자적 노동자정치세력의 활동공간을 넓히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이 점에서도 특히 지금은 내란세력 제압을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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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정치세력이 대안세력으로 성장하고 노동자민중의 요구들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조직적 단결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각각의 노동⋅진보 정당과 조직들이 설득력 있는 제안과 적극적 선전활동으로 특정 이슈에서 대중의 지지를 얻고 구성원을 배가하는 것도 의미있지만, 개별 단위로 머물러서는 지금의 역동적 조건 속에서조차 대안세력으로 발전하기 어렵다. 그 동안의 분열상을 고려하면 자본독재에 맞설 통일된 당조직을 일거에 건설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사회대개혁을 위한 비상행동’이나 ‘세상을 바꾸는 네트워크’는 조직적 단결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비상행동’의 경우 헌재의 탄핵이 결정되고 대선국면으로 들어서면 친민주당 성향의 조직들과 함께 가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때까지의 짧은 기간에 이 조직들을 상대로 독자적 노동자정치세력화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을 얻기도 어려울 것이다. ‘네트워크’의 경우에는 그보다 좀더 가능성이 커 보이지만, 여기서도 노동을 여러 사회적 이슈 가운데 하나로 축소해온 관행을 극복하고, 독자적인 반자본독재 노동자정치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그렇더라도 이 연대체들을 통해 다양한 요구들이 내부 검증을 거쳐 사회적 과제로 부각된다면 개별 조직의 목소리에 확성기를 제공하고, 향후의 집권세력에게도 일정한 압력을 가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그러한 요구들 가운데 착취의 효율성과 지속성을 높이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은 집권세력의 정책에도 반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적 자본독재로 인해 야기되는 노동자민중의 생존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근본적 요구들은 반영될 수 없다. 이 과정에서 그러한 요구들이 노동자민중의 광범한 공감을 얻는다면 집권세력의 정치적 한계와 독자적 노동자정치의 필요성이 명확해질 것이다. 그러나 ‘네트워크’도 자본독재를 전제로 하는 의회주의⋅개량주의에 경도될 수 있다. 노동자정치세력은 이런 경향에 맞서 현실성 있는 변혁전략을 통해 ‘네트워크’ 전체의 반자본독재적 성격을 명확히 규정해가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자본독재에 정면으로 맞서는 노동자정치 연합를 구성하여 노동자민중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노동자정치 연합의 원동력은 계엄 이전에도 매일이 계엄이었던 압도적 다수 노동자민중의 생존권과 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다. 이 반자본독재 노동자정치 연합의 규모와 역량이 커짐으로써 ‘네트워크’나 ‘비상행동’의 성격을 바꿔갈 가능성도 미리 배제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반자본독재 투쟁에서 노동자민중이 차지하는 중심적 의의를 부정하는 세력과의 무조건적 통일은 지난 탄핵 촛불의 무의미한 반복으로 귀결될 것이다. 조직들의 연대는 독자적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주요 방법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렇다고 내란국면과 대선과정을 통해 현재의 분열상태를 조금이라도 극복해내지 못한다면, 정국이 안정되는 순간 노동자정치세력은 무기력상태에 빠지기 쉽다. 현시점에서 반제국주의⋅반자본독재라는 기본적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조직들의 노동자정치 연합 구성은 그러한 반복과 무기력에서 벗어나는 현실적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구체적 운영방식에 대해서는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지만, 일단 각 조직의 독자성과 전위성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하여, 사안별 일시적 연대 수준을 넘어서는 상설 연합체로서, 공동의 정책들을 확정해감으로써 대중적 지지를 확대하는 방식이 바람직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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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내란을 기화로 기득권세력들은 대통령중심제의 폐해를 강조하고 내각제를 도입하려는 의중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거대 양당 간의 대립정치를 극복하고 대화와 타협이 가능한 다원적 정치문화를 만들겠다는 것이 그 주요 논거다. 내각제에 대한 국민적 지지율은 높지 않지만, 기득권세력은 오래 전부터 내각제의 변형들, 즉 분권형 대통령제, 책임총리제, 의회권한 확대 등을 추구해왔다. 군소 진보정당들도 선거제 변경을 통해 의석수를 늘일 수 있다는 계산에 따라 개헌을 사회대개혁의 주요 의제로 삼고 싶어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정치구도 속에서 내각제 개헌은 일본의 예에서 보는 바처럼 보수세력의 장기집권을 보장하는 장치로 귀결되기 쉽다. 진보정당들이 그 속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근본적으로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이 엄존하는 자본독재 속에서 정치적 대립 자체를 악마화하는 다원론은 자본독재의 영속화에 기여한다. 자본독재의 양대 분파간의 투쟁이 아무리 격렬해도, 양쪽 모두 자본독재의 털끝도 건드리기를 꺼리며 지배의 효율성을 놓고 싸우는 한, 이는 노동과 자본의 근본 대립을 감추고 유지하는 지배장치의 일부로 기능한다. 노동자정치는 자본독재와의 정면대결, 즉 진정한 대립의 정치를 피하지 않는다. 또한 비록 계급관계와 아울러 계급적 지배장치로서의 국가도 사멸해가는 평등사회를 궁극목적으로 삼더라도, 그 관문으로서 자본독재를 제압하기 위한 국가권력, 즉 노동자국가 건설의 불가피성을 전제한다. 노동자정치는 노동자민중이 우리사회의 압도적 다수를 이룬다는 사실과 정치권력에서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 사이의 모순을 해결할 의무를 지닌다. 이 모순은 노동자민중이 국가권력의 주인이 되는 노동자국가야말로 진정한 민주국가임을 명확히 밝히고, 집권을 목표로 최대한 효율적으로 투쟁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노동자정치가 의회나 선거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고 해서 그 활용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정치 연합이 일정한 규모로 성장할 경우 대선⋅총선⋅지선에 독자적인 노동자후보를 세우는 것도 현실성을 띨 수 있고, 자본독재의 국가기구 내에서 효율적으로 투쟁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때에도 노동자후보 혹은 당선자는 노동자정치의 주요 목적을 위해 헌신할 의무를 지니며, 이를 저버릴 경우 언제라도 소환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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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범들이 상식과 상상을 초월하는 짓들을 벌이는 상황을 감안할 때, 통념을 넘어서 유연하고 신속하게 상황과 지향 목적에 부합하여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가능성은 적지만 헌재의 탄핵 결정 이전에도 내란세력이 과도하게 결집하고 돌발변수로 인해 내전양상이 전개될 때에는 총력투쟁의 일환으로 정치적 총파업이 유효할 수 있다. 민주당이 대선에서 여유 있게 승기를 잡을수록, 노동자정치 독자세력화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시급해질 것이다. 그러나 상황 변화에 따른 기민한 대응과 별도로, 독자적 노동자정치세력화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의 확산과, 이에 앞장설 조직의 확대를 위한 지속적 효율적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하는 만큼 거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