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니와 준하 2
씬 51. 와니집 거실/밤.
펼쳐진 노트북 화면에서는 아주 평범한 화면 보호기가 보이고 책상에 턱을 괸 채 딴 생각에 빠진 표정으로 장식장 위의 프라모델 범선과 유리 항아리의 몽당연필들을 바라보는 준하.
그의 손에서는 담배 연기가 오르고 있다.
밤중에 거실 청소를 하고 있는 준하.
진열장등의 먼지도 털고 걸레로 거실바닥을 오가며 닦고.
씬 52. 와니집 뒷마당/앞마당/오전.
뒷마당에서 준하가 비닐에 덮여있는 오래되어 먼지가 심하게 앉고 녹이 슨 낡은 자전거를 들쳐 낸다. 뜨거운 태양을 올려다보고…….
수세미에 비눗물을 묻혀 세차하듯이 자전거를 닦고 있는 준하.
갑자기 걸레질을 멈추더니 좌측 핸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못으로 긁어 새긴 듯한 영문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
‘Y' 오른쪽 핸들을 스윽 보는 준하.
‘W'가 새겨져 있다.
잠깐 무심히 보고 있더니 이내 다시 걸레질을 한다.
씬 53. 학교 운동장/교문 앞/낮/현재->과거->현재.
자전거를 타고 학교 운동장을 달리는 준하.
힘껏 페달을 밟아 빠른 속도로 달리는 준하.
그런데 어느 순간 화면에는 자전거를 달리고 있는 영민의 모습이 잠깐 스치듯 보인다.
카메라, 운동장 바닥을 중심으로 속도감 있게 준하를 따라 움직인다.
자전거 체인이 벗겨진 모양이다.
나무 꼬챙이를 들고 손에 기름을 묻혀가며 체인을 끼워보려고 낑낑거리지만 여의치 않다.
그러다 화가 나는지 인상을 쓰며 자전거를 팽개치듯 넘어뜨려 버린다.
운동장 가에 있는 옥외 수도장에서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꿀꺽꿀꺽 물을 마시고 있는 준하.
땀으로 젖어있는 준하가 수돗가에 발을 올려놓고 낡은 운동화 끈을 묶고 있다.
준하, 고개를 들어 학교의 전경을 스윽 훑어본다.
깔끔하고 예쁜 학교이다.
이 때 준하만 보이고 텅 비어 있던 학교 안 여기저기에서 여고생들의 웃음소리와 시끌벅적한 수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군데군데에서 실제로 여고생들의 모습이 스르륵 보이기 시작한다.
수돗가에 둘러서서 세수를 하기도하고 물을 마시기도 하는 여고생들.
청소를 하는 여고생들.
놀이에 열중해 있는 여고생들.
책을 읽고 있는 여고생들 등등.
어느새 교내에는 아름다운 여고생들로 가득하다.
그 중 잔디 위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한 무리의 학생들을 보면, 그들 속에 와니와 소양이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다.
미술부인 듯 여기저기 이젤이 펼쳐져 있다.
서로 번갈아 사진을 찍어주느라 왁자한 그녀들의 모습이 밝고 환하다.
준하가 체인이 벗겨진 자전거를 끌고 교문을 나와 경사진 길을 걸어 내려오고 있다.
그 길은 와니와 영민이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던 와니의 학교 앞길이다.
씬 54. 전자상가(용산이나 테크노마트)/낮.
AV매장에서 준하가 DVD플레이어와 리시버앰프, 스피커 등 홈 씨어터 시스템을 보고 있다.
점원에게 가격을 묻는 준하.
준하: 모두 얼마죠?
점원: 260은 받아야 되는데 풀세트로 구입하시니까 250만원까지 해 드리죠.
고개를 끄덕이지만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 표정이 역력한 준하.
씬 55. 거리/낮.
다소 한적한 거리를 걸어오고 있는 준하와 소양.
식료품과 생필품 등을 잔뜩 사서 들고 온다.
대부분 무거운 것은 준하가 가벼워 보이는 작은 짐은 소양이 들었다.
소양: 언니……. 첨에 어떻게 만났어요?
준하: 궁금해요? 뭐 별거 없는데…….
소양: 그래도 말해줘요. 어떻게 만난 거예요?
준하: 시나리오 취재하러 갔다가 만났어요.
소양: 으응, 인터뷰하다가 눈이 맞았군요? 아니면, 일부러 와니 언니를 찍고선?
준하: 반반이죠, 뭐. 대부분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소양: 처음이예요?
준하: 예?
소양: 첫사랑이냐구요?
준하: 아아~, (어색하게 웃으며) 하하하! 뭘 그런 걸 물어보고 그러세요.
소양: 남자들은 이상해. 연애 적게 하면 부끄러운 일인가요?
준하: 아니, 그런 뜻이 아니구요. 음~ 첫사랑이라……. 꼬마 때요, 일곱 살쯤이었나? 동네 남자애들하고도 막 싸우는 왈가닥 여자애가 있었어요. 그 애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랬던 게 지금도 기억나요.
씬 56. 패스트푸드점/낮.
패스트푸드점 창가 쪽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준하와 소양.
탁자 위에는 짐들과 소양의 핸드폰이 올려져 있다.
창밖으로는 뜨거운 열기를 식히려는 듯 패스트푸드점 유니폼을 입은 아가씨가 길거리에 물을 뿌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앞으로 노란 모자를 쓴 꼬마들이 여자 선생님들의 지시에 따라 삼삼오오 줄을 맞춰 지나간다.
맨 뒤에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맨 키기 작은 사내아이 하나가 몹시 더운 듯 헥헥거리며 간신히 일행을 따라가고 있다.
프롤로그에 애니메이션으로 등장했던 꼬마와 닮은.
소양 (목소리): 말은 걸어 봤어요?
고개를 가로젓는 준하.
소양: 뭐야? 그게 무슨 첫사랑이 예요?
준하: 무슨 소리예요? 유치원만 다녀도 인생을 아는데.
소양: 그 뒤엔 어떻게 됐는데요?
준하: 우리 집이 딴 데로 이사를 가게 됐어요. 내 딴에는 마지막으로 인사나 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가슴을 졸이며 그 애 집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우당탕 하면서 문이 확 열리고 그 애가 불쑥 튀어나오는 거예요.
소양: (눈을 반짝) …….
준하: 근데 걔, 옷을 하나도 안 입고 있었어요.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막 울더라구요.
소양: 왜요?
준하: 뭘 잘못한 게 있었는지 엄마한테 쫓겨났나 봐요.
소양: 너무해.
준하: 나는 넘 당황해 가지고 어쩔 줄 모르고 서있는데, 순간 눈이 딱 마주쳐 버린 거예요.
소양: 그래서요?
준하: 왠지 날 원망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노려보는데 무섭더라구요……. 도망갔죠 뭐.
소양: 애걔……. 그게 다예요?
준하: 군대 가기 전에 자전거 타고 여행하다가 문득 그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동네를 찾아봤죠.
소양: 어머! 만났어요?
준하: (피식 웃으며) 아뇨……. 그 애 집도 이살 갔나봐요.
씬 57. 애니메이션 회사 화단 앞/낮.
건물로 들어가려는 와니네 일행, 주차장 구석에서 싸우는 경찰복의 사내 현수와 정우를 발견한다.
수미: 어? 언니 저기 좀 봐요. 정우 선배 아니세요?
와니, 보면 정우와 현수가 크게 말다툼을 하고 있다.
성재: 정우형 지금 경찰하고 싸우는 거지?
수미: 누가 말려야 되는 거 아니야?
와니: 들어가자.
수미: 언니, 상대는 경찰이라구요, 경찰.
다들 쭉 늘어서 구경하는데 입장이 곤란한 와니도 엉거주춤 서서 정우의 싸움을 구경한다.
언성을 높이던 경찰복의 현수가 차로 걸어가더니 그대로 차에 올라타 출발해 버린다.
떠나는 차의 뒤에다 큰소리를 지르는 정우.
‘야! 정현수. 정현수’
그리곤 화를 삭이지 못하고 근처의 쓰레기 더미를 힘껏 차고는 사무실 입구 쪽으로 걸어 들어온다.
성재: (수미의 팔을 잡아끌며) 야, 온다. 들어가자.
수미: 무슨 일인지 물어나 봐야죠.
와니: (약간 큰소리로) 들어가자니까.
와니의 반응에 놀라 계면쩍은 얼굴을 보이며 마지못해 들어가는 수미.
그리고는 정작 와니 자신은 서서 걸어오는 정우를 바라보고 있다.
어디선가 ‘타닥타닥’
타이프 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씬 58. 서재/낮/과거.
타이프 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가운데 뿌연 담배연기가 보이고 영민은 조그마한 상에 앉아 타이프 된 원고를 읽고 있다.
원고를 읽다가 가끔 연필을 들어 수정을 한다.
맞은편 큰상에 앉아 입에는 담배를 물고 타이프를 치며 때때로 멈추는 아버지.
그러다 막히는지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한 팔을 턱에 괴고 원고를 내려다보는 모양이 된다. 아버지는 담배를 물고, 영민이는 연필을 물고.
카메라 뒤로 물러나면 두 부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와니.
손에는 깎다만 과일과 칼을 든 채로.
와니는 서로 닮은 아빠와 영민을 보면서 자신과 영민의 현실을 느끼고 있다.
조금 후, 원고에서 고개를 드는 아버지, 와니가 쳐다보는 것을 보고는.
아버지: 어! 미안!
아버지, 얼른 와니 앞으로 가는 담배연기를 손으로 흩뜨려 자기 쪽으로 오게 한다.
아버지: 아무래도 환기를 좀 시켜야겠지?
그리고는 곁에 놓인 선풍기를 돌린다.
철망이 촘촘한 현대식이 아닌 요즘 장식용으로 쓰이는 구형 선풍기가 털털거리며 돌아간다.
창문으로 가 창밖을 향해 서서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다가 시선을 느끼고 영민을 보는 와니.
영민은 와니를 보고 있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다시 고개를 떨구고 원고에 열중하는 척 한다.
말없이 사과를 깎고 있는 와니의 자태가 무척 곱다.
햇빛을 받아 빛나는 목선이며 꼭 다물고 있는 입술 등이.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는 아빠.
빛이 가득 들어오는 서재의 풍경.
여전히 말이 없는 와니와 영민.
하지만, 서로에게 신경은 집중되어 있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벗겨져 나가는 사과 껍질과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씬 59. 과거 와니의 방/새벽/과거.
동이 터 오는, 아직은 어두운 새벽녘.
와니는 이불도 덮지 않고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있다. 와니, 자고 있진 않은 듯, 몸을 뒤집어 오른팔에서 왼팔로 바꿔 베고 눕는다.
이때 누군가 이층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오래된 마룻바닥에 사람의 체중이 실려 ‘삐걱’대는 소리.
와니, 눈을 뜨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발소리가 와니의 방문 앞에까지 오다 잠시 멈춘다.
가만히 누워 긴장된 얼굴로 온통 그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와니.
문 바깥쪽의 영민도 조용히 와니의 방문 앞에 서있는 듯하다.
잠시 동안, 정적…….
잠시 후 이어지는 발소리, 점점 와니의 방에서 멀어져 간다.
한숨과 함께 눈을 조용히 감는 와니.
그 때 비트가 강한 커다란 음악 소리가 터져 나온다.
반짝 눈을 뜨는 와니.
씬 60. 와니집 외경/새벽/과거.
커다란 음악 소리는 영민의 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고 창가에 서서 밖을 보고 있는 영민이 보인다.
화면 더 커지면, 동네가 시끄럽도록 울리는 음악소리에 이웃집의 불이 하나 둘 켜진다…….
씬 61. 동네골목/낮.
태양이 작열하고 있다.
골목은 후끈거리는 열기로 일렁여 보인다.
씬 62. 와니방/낮.
밤샘 작업을 했는지 잠을 자고 있는 와니.
커튼을 쳤지만 워낙 강렬한 햇빛이 매트리스 위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와니에게로 환하게 비쳐지고 있다.
갑자기 거실에서 큰소리가 들려온다.
잠을 깨는 와니.
씬 63. 거실/낮.
방문을 열고 나오는 와니.
거실에서는 준하와 소양이 DVD플레이어와 서라운드 시스템 설치를 마치고 돌비 디지털 사운드를 들어보고 있다.
극장에서처럼 슈우우우웅 하고 온 집안을 휘감는 놀라운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빈 박스들이 가득하고…….
와니: 지금, 뭐하는 거야?
자다가 깬 부스스한 와니.
약간 놀란 듯 한 얼굴에 감정이 묻어난다.
옆에 서서 불안하게 눈치를 보고 있는 소양.
준하: (스피커에 귀를 대고 있다가 와니를 보고 과장되게) 어……. 6개월 할부로 샀어. 뭐, 그 때까진 계약 할 거니까. 그리고 앞으로 난, 하루에 세끼만 먹을거구. 또……. 두배로 열심히 쓸거구.
와니: (담담해 보이지만 애써 감정을 누르며) 소리 좀 줄여 줘. 나, 자야 되잖아.
문을 ‘탕’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와니.
준하, 맥이 빠진 듯 잠시 서 있더니 DVD와 앰프의 전원을 꺼버리고 언제 관심이나 있었냐는 듯 리모컨을 ‘툭’ 소파에 던져 버린다.
소양: 언니, 화난 것 같은데…….
준하: (빈 박스들을 정리하며 무뚝뚝하게) 화라도 실컷 냈으면 좋겠는데 별론 거 같은데요.
‘무슨 소린가’
싶어 준하를 쳐다보고 서 있는 소양.
씬 64. 버스 정거장으로 가는 길/버스 정거장/낮.
걸어오는 준하와 와니.
와니는 피곤한 기색이 완연하다.
두 사람, 다소 서먹한 분위기로 말없이 걷다가.
와니: 새삼스럽게 무슨 배웅이야? 들어 가.
살며시 와니의 손을 잡는 준하.
하지만, 와니는 그 손을 스윽 빼버리고…….
민망해진 준하, 그 자리에 멈춰 서는데 와니는 계속 걸음을 옮겨 앞서 간다.
그 뒤에 대고.
준하: 화난 거야?
와니: 아냐.
준하: 말해봐. 화난 거 같은데.
와니: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화를 낸다) 아니라니까.
움찔하는 준하.
와니, 자신의 감정을 누르지 못해 스스로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다시 말없이 걷고만 있다.
머쓱해진 준하도 말이 없다.
와니: 얼마야?
준하: 응? 내가 알아서 할께.
와니: (약간 차갑게) 나도 볼 거잖아. 시나리오 계약할 때 까진 내가 할부금 낼게.
그리고는 마침 다가오는 버스에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서 오르는 와니.
버스 안의 많은 사람들에 가려 와니가 잘 보이지 않는다.
곧 부릉거리며 멀어져 가는 버스의 뒷모습.
준하, 약간 심각한 표정으로 거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쌩~ 쌩~ 지나가는 거리의 차들…….
씬 65. 거실/해질녘.
거실 창가에 마당을 향해 앉은 준하.
유리 항아리를 옆에 두고 등을 보이고 있는 하는 뭔가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갑자기 움찔하더니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빠는 준하.
칼에 베인 듯 다른 한 손으로 손가락을 움켜쥐고 일어서 와니의 방으로 들어간다.
씬 66. 와니방/해질녘.
와니의 책상서랍을 여는 준하.
위에서부터 차례로 열어본 끝에 제일 마지막 서랍에서 구급상자를 찾아낸다.
구급상자를 꺼내던 준하, 그 밑에서 뭔가를 발견한 눈치.
와니의 만화뭉치다.
씬 67. 만화 그림.
1. 와니의 목덜미에 얼굴을 대고 와니의 체취를 맡는 영민.
2. 가로등 아래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영민과 와니. 와니는 영민의 등에 얼굴을 기대고 있다.
3. 와니와 영민의 입맞춤. 눈이 동그래지며 숨이 막히는 와니의 생생한 표정…….
(비록 만화 그림들이지만, 약간씩 움직임을 주면 좋겠다. 특히 와니 표정의 생생함이 살아날 수 있는 포인트들은)
와니의 그림뭉치를 보고 있다가 그 옆에 있는 열쇠뭉치를 집어 드는 준하.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도로 집어넣고 서랍을 닫는다.
씬 68. 몽타주.
1. 멀리서 구릉거리며 몰려오는 먹구름.
2. 심상치 않은 바람에 흔들리는 가로수들.
3. 메마른 아스팔트 위로 투둑거리며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들.
4. 비어있는 동네 놀이터에 쏟아지는 빗줄기.
5. 저녁거리에 예쁘게 켜져 있는 빨갛고 파란 신호등불.
6. 비 내리는 거리에 삼삼오오 퇴근하는 사람들…….
씬 69. 동화부실/저녁/비.
일을 하고 있는 와니.
직접 시범을 보이며 코치를 한다.
특정 움직임(예: 총을 꺼내서 쏘는 킬러의 동작)의 자연스런 모습을 실연해 보이며 움직임의 포인트를 지적해준다.
일을 하는 와니의 표정은 진지하고 어른스러워 보인다.
한 쪽에서는 영숙이 성재의 초상을 그려주고 있다.
성재는 얌전한 자세로 꼼짝없이 앉아 미소를 짓고 있고 영숙은 열심히 성재의 얼굴을 그려주고 있는데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이 질투가 나는지 수미가 입을 삐죽대고 있다.
씬 70. 야경이 보이는 카페/저녁/비.
카페에 준하가 프로듀서와 얘기를 나누며 앉아있다.
준하의 손가락에는 살색 밴드가 감겨있다.
비가 내려 통 유리 바깥의 야경은 온통 일렁여 보인다.
프로듀서: 우리로선 제일 믿음이 가는 감독이거든. 사장님하고 신 감독 사이가 보통 사인가?
준하: 신 감독님 생각은 뭔데요?
프로듀서: 한마디로 멜로는 누르고 선 굵은 액션라인만 살리겠다는 거야. 그리고……. 환타지 스타일을 버리겠대. 주인공 직업도 바꾸고.
준하: 그렇게 까지요? 그건 거의 새로 쓰는 거나…….
프로듀서: (말을 자르며) 사장님도 신 감독 생각이 괜찮다고 하셔.
준하: 저한테 직접 주문하시면 안 됐나요?
프로듀서: 내가 얘기 안 해 봤겠어? 소용없어. 알잖아. 신 감독, 박기환이 하고만 작업하는 거. 자네도 데뷔해야지. 어차피 원작에는 자네 이름이 나갈 테고. 신감독이야 워낙 베테랑이니까 믿어도 될 거야.
준하: 이미 결정된 일이군요? 저한테 허락 받으러 오신 것도 아니구요.
프로듀서: 미안해. (계약서를 내밀며) 여기다 도장만 찍으면 돈은 통장으로 입금될 거야.
준하, 비 오는 창밖의 야경을 한참 바라보다 프로듀서를 보고.
준하: 생각할 시간 좀 주세요.
프로듀서: 김준하씨! 이런 기회도 놓치고 나면 아쉬운 거야. 일단 데뷔 하는 게 중요하잖아.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는 준하.
씬 71. 와니의 회사 근처 공중전화박스/밤/비.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공중전화박스 안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 준하.
와니의 회사가 건너다보인다.
준하: 응? 뭐라구? 그럼 언제 들어와? 아냐, 그냥 나왔다가 생각나서 전화해본 거야. 응, 비 많이 온다, 야. 자는 데 춥진 않지? 그래, 수고해.
전화를 끊고 잠시 멈추어 서서 한숨을 쉬고는 불 켜진 동화부실 창문을 허탈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옷이 거의 다 젖어있고 옆에는 물이 흥건히 흐르고 있는 우산 한 개가 있다. 길거리에서 막 산 듯 한 조잡한 비닐우산이다.
씬 72. 와니의 동네 버스 정류장 근처 조그만 술집/밤/비.
준하와 소양이 비를 피해 술집에 들어선다.
주인아주머니가 준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넨다.
아주머니: 아이구, 소설가 선생님 오셨네?
준하: 저기……. 아주머니 제발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그리고 저는 소설가 아녜요.
아주머니: 아니, 글쟁이는 소설가고 환쟁이는 화가고 뭐가 아녀? 어따? 오늘은 그 화가 애인은 워처커롬하고 딴 처자네?
소양을 째려보는 아줌마. 난처해하는 준하.
킥킥거리는 소양.
소주를 마시고 있는 준하와 소양.
소양: 두 분은 자주 오시나 봐요?
준하: 그냥……. 뭐, 집에 가는 길이니까…….
소양: 부럽다. 약속하지 않아도 기다려 주고 집에 오다 술도 같이 먹구…….
준하: 영민이랑은 그렇게 데이트 안 했어요?
소양: 우린 좀 웃겨요. 주로 셋이었거든요.
준하: 와니?
소양: (고갤 끄덕이며) 물론 그 땐 나름대로 재밌었지만……. 생각해 보면 둘만의 추억 같은 게 너무 없어서…….
준하: …….
약간 굳어지는 얼굴.
소양: 근데 셋이 같이 있으면 꼭 내가 두 사람 사이에 낀 거 같은 거 있죠? 남매란 게 저런 건가? 부럽기도 하고 왠지 질투가 나는게……. (씁쓸히 미소 지으며) 나, 웃기죠?
준하: (정색을 하고) 아뇨.
씬 73. 애니메이션 회사 동화부실/밤/비.
준하가 준 시나리오 뭉치를 읽고 있던 와니, 문득 고개를 들어 비 내리는 창밖을 쳐다본다.
수화기를 들고 있는 와니.
‘뚜우~’ 신호음만 울리고 받지 않는 전화.
씬 74. 와니집 거실/밤/비.
거실 통유리 창은 활짝 열려져 있고 앉은뱅이책상 위에는 준하의 노트북과 종이뭉치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뚜루루루루’ 혼자 울리고 있는 전화.
씬 75. 술집/밤/비.
약간 취한 듯 한 소양.
탁자에 턱을 괴고.
소양: 작가 선생님! 시나리오 쓰는 건 재미있나요?
준하: 재밌을 때도 있고, 대부분은 힘들고…….
소양: 정말 좋아하는 건 일로 하는 게 아닌데……. 그냥 순수하게 즐길 때가 진짜 좋은 거라구요.
준하: 그 말, 와니가 한 거죠?
소양: 난, 영민오빠한테 들은 건데…….
준하: (약간 민망해진 준하, 말을 돌린다) 아주머니. 술 더 주세요.
소양의 잔에 술을 따라주고 있는 준하.
가득 채워진 소주잔 두 개.
소양: 난……. 오빠가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준하: (끄덕끄덕)
소양: 오빠가 언니를 더 많이 좋아하는 거 같아요.
준하: 그런가?
소양: (끄덕끄덕) 넘 잘해주지 말아요. 그러면 상대는 마음이 꼭 그만큼 뒤로 물러나더라구요.
준하: 그렇게 생각해요?
소양: 옙.
준하: 상대가 날 조금 좋아한다고 나도 조금만 주는 그런 거 사랑이 아니죠. 난, (가득 채워진 자기 잔을 소양 앞으로 턱 놓으며) 이만큼 주고 또 (소양의 잔을 자기 앞에 내리며) 이만큼 받고 싶어요.
소양: 그렇게만 되면 좋죠. 하지만……. 사람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준하: 소양씨, 영민이 많이 사랑했으면 아예 따라가거나 못 가게 하거나 그러지 그랬어요?
소양: 말없이 가버린 걸요.
준하: 소양씨한테 말도 없이 유학 가버렸다구요?
소양: 오빠 입원이 몇 달씩 계속 됐기 때문에 그 사이에 떠날 준빌 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준하: 병원이요? 어디 아팠어요?
소양: 와니 언니가 얘기 안했어요?
준하: ?
소양: 하긴……. 아저씨하구 오빠, 언니가 같이 타고 가다가 차사고가 났거든요. 언닌 다행히 큰 상처가 없었지만…….
준하: 아! 아버님이 그 때…….
소양: (고개를 끄덕하는 소양) 언니, 많이 힘들어했어요. 장례식장에서 울다가 까무러치고 또, 깨어나면 울다가 기절하고. 몇 번씩이나 그랬어요. 아빠가 죽은 게 자기 때문이라면서…….
준하: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밝아지려고 농담조로) 소양씨! 그 동안 영민이 많이 원망스러웠겠다. 그렇게 가서 3년 동안이나…….
소양: (꽤 취한 소양은 정색을 하고 준하의 말을 끊으며) 그거 아세요? 난, 그 사람 사랑했지만 그 사람은 날 사랑하지 않았던 거.
썰렁해진 분위기.
준하: (소양을 보고)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소양: …….
준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준하: …….
마주보고 있다.
긴장감이 흐른다.
소양: (눈을 피하며) 사랑하는 사람 따로 있다고 했어요. 아니, 꼭 그렇게 말한 건 아니지만……. 그런 거 같았어요.
씬 76. 애니메이션 회사 동화부실/낮.
하품을 하며 창밖으로 눈을 돌리는 와니.
밤을 꼬박 새웠는지 몹시 피곤한 기색이다.
씬 76-1. 애니메이션 회사 전경/낮.
간밤에 내린 비는 맑게 개어 등나무들이 한층 싱그럽다.
다시 연거푸 하품을 하는 와니.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 ‘작가님, 누가 왔어요!’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보는 와니.
‘누구야?’ 하고 묻기도 피곤하고 귀찮은 얼굴이다.
일어나서 터덜터덜 나가는 와니.
그 뒤를 향해 아까 그 목소리 ‘남잔데요?’
그 소리에 일제히 돌아보는, 피곤에 지친 얼굴들…….
그러나 와니는 이미 문 밖에 나가고 없다.
씬 77. 애니메이션 회사 앞/낮/과거.
애니메이션 회사 1층 유리문을 열고 나오는 것은 그러나 현재의 와니가 아니라 단발머리 스타일에 대충 아무렇게나 인 복장의 23살 시절의 와니이다.
역시 밤샘을 한 흔적이 역력한 모습의 와니.
햇살에 눈이 부신지 손으로 눈 위에 차양을 만들고 눈살을 찌푸리며 누군가를 찾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씬 78. 회사 근처 공원/낮/과거.
벤치에 앉아 있는 영민과 와니.
영민은 22살의 대학생.
부스스한 와니는 연신 하품을 해대고 있다.
영민: 세수는 했어?
와니: 왜? 안한 거 같아?
머리를 벅벅 긁는다.
영민: 일은 어때?
와니: 아무래도 난, 재능이 없나봐. 나만 아직 반도 못했어.
잠시 말이 없는 두 사람.
바람이 불고, 정적이 감돌고…….
머리카락을 넘기는 와니의 해맑은 귓불.
잠이 오는지 스르르 감기는 두 눈.
영민: 후회돼? 대학 안간가.
와니: (졸린 눈을 껌벅이며) 아니.
영민: 정말 좋아하는 일은 직업으로 하는 게 아냐. 그 일이 싫어진 다구.
와니: (쇼핑백을 가슴에 안은 채 고개를 푹 숙이며) 몰라. 아무 생각 없어. (고개를 들고) 넌, 그럼 결혼도 두 번째로 좋아하는 여자랑 하겠다.
와니의 뼈있는 말에 영민은 표정이 굳어진다.
쏴-아- 파도 같은 바람소리.
좌우로 천천히 흔들리는 나무들…….
이윽고.
영민: 저기……. 할 말이 있는데?
그런데, 그사이 와니는 꾸벅 꾸벅 졸더니 영민이 와니에게 고개를 돌리는 순간, 영민의 어깨에 기대 잠들어 버린다.
그리고 이내 와니의 몸이 무너지듯 영민의 무릎위로 풀썩 떨어진다.
와니는 완전히 곯아떨어진 것 같다.
잠시 와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민이 아예 와니의 다리를 들어 벤치 위로 올려 주려고 몸을 굽힌다.
씬 79. 공원/낮.
와니의 다리를 들어 벤치 위로 올리며 몸을 드는 모습이 앞씬과 몰핑화면처럼 스르륵 겹치면 화면은 어느새 영민이 아닌 준하로 바뀌어 있다.
와니는 준하의 허벅지를 베고 길게 누운 모습이다.
사람들이 힐끔거리고 지나간다.
준하는 물끄러미 자는 와니의 얼굴을 쳐다보다 손을 들어 천천히 와니 머리를 쓰다듬는다.
꿈틀하며 귀엽게 얼굴을 찌푸리는 와니를 보며 한순간 웃음을 짓지만 준하의 표정에는 씁쓸함이 가득하다.
준하는 먼 곳으로 시선을 옮기며 무표정하고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된다.
바람에 나뭇잎이 바스락거리고 있다.
태양이 이동을 하는 바람에 나무 그늘은 사라지고 햇볕이 두 사람을 내리쬐고 있다.
준하가 뒤늦게 알아차리고 손바닥으로 와니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 준다.
그러다 여의치 않은 듯 아예 허리를 깊숙이 숙여 와니의 얼굴을 가린다.
와니의 얼굴에 거의 맞닿아 있는 준하의 가슴팍.
어느새 눈을 뜨고 있는 와니.
깊이 숨을 들이쉰다.
준하의 체취를 맡으려는 듯.
와니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흐르는 것 같다.
씬 80. 소양강 변/오후/과거.
강가에 차를 세워 두고 벤치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 와니와 영민.
영민: 나, 유학 갈까 해.
와니: …….
무표정한 얼굴이 순간 움찔한다.
와니, 아무런 댓구 없이 가만히 앞만 바라본다.
영민, 와니를 쳐다보는데 그래도 와니는 고집스럽게 앞만 바라본다.
매미 소리와 열기를 품은 바람 소리 뿐이다.
와니,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두 팔로 어깨를 감싸 안으며.
와니: 바람이 좀 으슬으슬하다. 오한이 나. 가자.
성큼 성큼 걸어서 차로 가는 와니.
씬 81. 거리/낮.
나란히 걸어오고 있는 와니와 준하.
와니: 나, 잠만 자버렸네. 모처럼 왔는데. 근데 무슨 말 하려고 한 거 같았는데?
준하: 어? 아냐. 그냥 오늘따라 네가 보고 싶더라구.
발밑을 보며 걷던 와니, 밴드를 댄 준하의 손가락을 본다.
와니: 다쳤어?
준하: 어?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살짝 베었어.
새삼스럽게 준하를 쳐다보는 와니.
준하: (그런 와니를 보며) 괜찮다니까. 뭐 이런걸 가지고…….
와니: 그새 머리가 많이 길었다.
준하: (계면쩍게 웃고는) 지저분해?
와니: 아니, 그런 게 아니구. 좀 다르게 보여서.
준하: 어떻게 보이는데?
와니: 미장원 같이 가줄까?
준하: (힘없이) 들어가다 자르지 뭐……. 들어가.
와니: 준하야.
준하: ?
와니: 지겹지 않니?
준하: 뭐가?
와니: 나랑 사는 거.
가만히 와니의 눈을 들여다보는 준하.
준하: 왜 그런 말을 해?
와니: (준하와 눈을 마주보고 있다가 눈을 피하며 담담하게) 그냥……. 혹시 그렇지 않을까 해서. 만약, 내가 싫어지면 얘기 해. 부담주고 싶진 않아.
와니를 바라보는 굳은 얼굴의 준하.
와니의 말에 화가 나는 모양이다.
씬 82. 와니의 방 안/해질녘/과거.
갑자기 방문이 덜컥 열린다.
방문 쪽으로 등을 돌리고 외출복을 벗던 동작 그대로 멈춰서 가만히 있는 와니.
문을 연 것이 영민이라는 걸 알고 있는 듯 그가 무슨 말을 하기를 기다리고 서 있다.
그러나 영민, 아무 말 없이 와니의 등만 보고 서있다.
와니: 나, 옷 갈아입잖아.
영민: …….
와니: (벌컥 화를 내며)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건데, 잘 생각했어. 가서 열심히 해. 그럼 되는 거니?
영민: 같이 가.
와니: …….
속옷만 입은 상체를 가릴 생각도 전혀 없이 영을 똑바로 보고 돌아서는 와니.
마주치는 두 사람의 눈.
두 사람 아무 말 없다.
긴장된 분위기…….
씬 82-1. 국도/낮.
도로위로 액체 자국을 남기며 모퉁이를 돌아 나가는 승용차.
그 위로 끼익~ 굉음과 함께 ‘터억’
하고 뭔가 둔탁한 소리가 들린다.
씬 83. 거리/낮.
승용차가 급정거하면서 길을 지나던 고양이가 부딪쳤고 준하와 와니는 바로 그 곁에서 앞의 긴장 상태 그대로 서 있던 참이다.
고양이의 시체를 보고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 있는 와니.
승용차의 운전자가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며 내려선다.
운전자: 야, 나중에 다시 전화하게. 귀찮은 일 생겼다. 알았어. (와니를 보며) 이거 댁 고양이에요?
와니: 아뇨, 그렇진 않아요. 하지만 좀 천천히 운전 하셨으면…….
운전자: 에이 씨. 바빠 죽겠는데. 도둑고양이잖아. 이거 봐요. 괜히 남의 일 나서지 말고 가던 길이나 가쇼.
하면서 다시 차에 타려한다.
와니, 무안해져서 서 있는데 인상을 쓰며 서 있던 준하, 운전자에게.
준하: 이거 봐. 내가 주인이야 왜?
준하를 쳐다보는 와니.
운전자: (못 믿겠는지 와니와 준하를 번갈아보더니) 씨발 다짜고짜 반말이네? 얼마야?
준하: 전화질하다가 사고 내놓고 이게 지금 미안한 태도야?
운전자: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이거 봐. 내가 지금 사람 치었어? 죽은 건 고양이잖아. 솔직히 당신 고양이란 것도 안 믿기지만 물어준 대는데 씨발, 얼마냐구?
준하, 잠시 화를 참으며 운전자를 노려보고 있다가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운전자의 손에 있던 휴대폰을 빼앗아 길바닥에 내동댕이를 친다.
‘빡’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나는 휴대폰.
준하: 됐어. 가!
어느새 몰려든 구경꾼들. 와니도 약간 당황스러운 듯하다.
운전자는 준하의 행동에 황당하다는 듯 눈만 껌벅거리고 있다가.
운전자: 이거 미친 새끼 아냐? 하아~ 참. 이거 진짜 웃기는 새끼네.
준하: (화를 내며 큰소리로) 뭐라구? 미친 새끼? 웃긴 새끼? (멱살을 잡으며) 너, 말 다했어? 고양이 죽은 건, 뭐? 아무 것도 아냐? 너 오늘 죽어볼래?
경찰 백차가 한 대 서 있고 구경꾼들이 몰려있는 가운데 나이 지긋한 경찰 한 명이 나서서 아직도 씩씩거리는 준하와 운전자를 말리고 있다.
다른 젊은 경찰은 죽은 고양이 시체를 비닐 같은 걸로 싸서 경찰차에 싣고 있다.
젊은 경찰관은 현수이다.
와니가 잠깐 현수를 보고 있다.
고참 경찰: (사람들을 향해) 자~ 자! 여러분들도 이제 그만 가세요. 이렇게 모여 있으면 길 막히잖아요.
운전자: 에이~ 씨발. 오늘 재수 옴 붙었네. (준하에게 대고) 그래, 니가 그렇게 사랑하는 고양이 죽여서 정말 미안하다. 씨발 놈아.
그리고는 휙 차를 타고 이내 승용차는 출발해 버린다.
준하: 야 이 새끼야. 너 안 내려? 이 개자식아, 내려.
사람들 웅성거리며 제 갈 길을 가고, 경찰 백차도 떠난다.
남겨진 준하와 와니. 준하, 아직 화를 못 참겠다는 듯 씩씩대고 있다.
그 옆에 와니, 서 있다가 슬며시 준하의 팔을 잡는다.
준하: (벌컥 화를 낸다) 건들지 마.
깜짝 놀라는 와니.
준하도 스스로 화를 내고 당황해 한다.
하지만 굳이 사과하지 않고.
준하: 간다.
그러고는 휙 돌아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우뚝 멈춰 서서 뒤돌아보고.
준하: 너, 그런 말 그렇게 쉽게 하는 거 아냐. 꼭 내가 싫어졌다는 소리로 들려.
다시 몸을 돌려 화난 걸음으로 걸어 가버린다.
멀뚱히 서서 준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와니.
자신의 잘못으로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 같다.
씬 84. 동화부실/낮.
와니가 일에 집중을 못하고 끄적이고만 있다.
팔을 뻗어 전동 연필깎이에 연필을 집어넣는다.
윙하는 파열음이 크게 울리는데 시선은 책상에 붙박아 둔 채로 팔만 쭉 뻗어 연필을 깎고 있다. 윙 큰소리가 계속 이어지자 애니메이터들 일제히 와니를 쳐다본다.
그래도 와니는 자신이 계속 연필을 깎고 있음을 의식 못하는지 그러고 있다.
씬 85. 영민 방/해질녘.
영민방의 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서는 준하.
그리곤 문가에 서서 가만히 방안을 보고 서 있다…….
‘쾅’
소리 나게 닫혀지는 문.
아무도 없는 빈 방안.
카메라, 책상 위에 붙어 있는 사진들로 다가가면 이가 빠진 듯 없어진 한 장의 사진.
그것은 와니가 해수욕장에서 모래사장에 풀썩 주저앉으며 카메라를 올려다보던 바로 그 사진이다.
씬 86. 애니메이션 회사 화장실/밤.
칫솔질을 열심히 하고 있는 와니.
불안한 마음을 다스려보려는 표정이 역력하다.
세면대 가득 담긴 물속에 얼굴을 담그고 가만히 있는 와니.
물속에 잠긴 와니의 얼굴…….
씬 87. 와니의 집 2층 베란다/집 마당/오후.
베란다에 나와 앉아 차를 마시는 소양.
대문 열리는 소리가 ‘철컹’ 하고 들리고.
소양이 내려다보면 와니가 퇴근하여 들어오고 있다.
대문가에 흩어진 여러 가지 광고 전단들을 하나씩 챙겨 일어나는 와니.
소양과 눈이 마주친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채로 아무런 말도 없이 잠시 그렇게 정지해 있는 두 사람.
무표정한 두 사람이지만 묘한 적대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곧 눈길을 피하고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소양.
잠시 후 와니도 집안으로 들어간다.
난간 위에 남아있는 소양의 찻잔.
씬 88. 와니집 거실/오후.
소양이 들고 왔던 트렁크를 들고 2층에서 내려오고 있다.
와니, 거실에 우두커니 서서보고 있다.
소양: 인사는 하고 가야될 거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어.
와니: 집으로 가는 거야?
소양: (고개를 끄덕이며) 어차피 부딪쳐야 될 일인데 뭐.
그런 소양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는 와니, 그리고는 몸을 돌려 먼저 현관을 나선다.
소양: 어. 언니! 그냥 혼자 갈게. 나오지마.
씬 89. 춘천역/낮.
기차 시간이 남는 모양이다.
와니와 열차표를 들여다보는 소양, 역사 입구를 나와 건물 옆의 공터로 걸어간다.
뒤로는 철로가 보이고 자전거들이 세워져 있고 나무가 시원하게 흔들리는 그늘 아래엔 노인들이 모여서 한담을 나누기도 하고 바둑을 두기도 한다.
어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함께 수박을 나눠 먹으며 즐겁게 웃고 떠든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수작을 걸기도 하고…….
그 어디쯤엔가 자리를 잡고 음료수를 마시는 두 사람.
소양은 그다지 더워 보이지 않는데 와니는 손수건을 꺼내 연신 흐르는 땀을 닦고 있다.
소양: 언니, 더위 타나 보다. 무슨 땀을 그렇게 흘려?
와니: 아냐. 하나도 안 더운데…….
소양: (와니의 말을 농담으로 들었는지 피식 웃으며) 준하오빠처럼 엉뚱한 소리하네. 안 그래도 언니, 준하오빠랑 참 잘 어울려 보여. 친남매 같이…….
소양을 스윽 보는 와니.
소양도 무심코 나온 자신의 말에 약간 당황한 듯 말을 돌린다.
소양: 아! 준하오빠한테는 인사 못하고 가서 미안하다고 전해줘. 아침에 나갔나봐. 금방 들어 올 줄 알았는데…….
와니: (불쑥) 여기, 영민이 때문에 왔었니?
소양: 응? 어……. 으응.
와니: 영민이 돌아오는 거 알고 있니?
소양: 음.
와니: (부드러운 말투) 영민이 오면 그 때 오지 왜 지금 왔어?
소양: 그냥……. 언니도 보고 싶고 또…….
와니: …….
소양: …….
두 사람 잠시 말이 없다.
매미 소리는 요란하고, 역 앞을 오가는 사람들 보인다.
소양: (불쑥) 나, 확인하고 싶었어. 지금 언니는 어떻게 사는지…….
와니: …….
소양: 이런 생각 정말 하기 싫었지만……. 난, 언니가 오빨 보낸거라고 생각했어. 만약 언니가 잡았다면 오빤 떠나지 않았을거라구…….
와니: (소양의 말이 약간 충격적이지만 크게 동요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와니) …….
소양: 언니가 무슨 말이든 해줬으면 좋겠어.
와니: (잠시 후 고개를 들고 눈을 돌려 먼 곳을 응시한다) 영민인……. 내 동생이잖아……. (소양을 보며 단호하게) 그게 다야.
얼핏 와니의 말은 이제 영민은 정리가 되었음을 시사 하지만 한 편으로는 동생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의 감정의 앙금이 여전히 남아 있는 뉘앙스다.
어쨌든 의외로 담담한 와니의 태도에 그저 가만히 와니를 바라보고 서 있는 소양. 그 때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플랫포옴으로 들어서고 있다. 소양, 문득 스스로 다짐이라도 하듯 와니를 향해.
소양: 잘 모르겠어. 언니가 무슨 생각하는지……. 하지만 나, 그 사람 정말 사랑해……. 그것만……. 언니가 알아줬으면 좋겠어.
기차는 떠나가고 플랫폼을 걸어 나오고 있는 와니.
와니의 얼굴엔 이상하리만치 많은 땀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와니는 무표정하지만 무척 지친 모습이다.
어디선가 음악이 들리기 시작한다. 음악 소리는 아빠와 와니와 영민이 타고 가던 승용차에서 들리던 그 음악.
떠나는 기차 소리와 맞물려 점차 커지며 울려 퍼진다.
씬 90. 국도/낮/과거.
국도를 달리고 있는 승용차의 밑 부분에서 액체가 새어나와 도로에 자국을 남기고 있다.
아빠와 영민과 와니가 승용차를 타고 간다.
아빠: 무슨 일 있니?
영민: …….
아빠: 영민아!
영민: 아뇨. 아무 일도 없어요. 아무 일도…….
썰렁해진 차 안.
무표정하게 창밖만 내다보는 와니.
영민과 아빠도 말없이 앞만 쳐다본다.
음악, 상승 부를 치닫고 있다.
달리고 있는 승용차 밖으로 나와 있던 와니의 손이 안으로 들어가고 찌이익 승용차의 유리문이 올라간다.
차 밑 부분에서 줄줄 새고 있는 액체…….
아빠가 운전을 하고 영민이 옆에 타고 와니가 뒤에 탄 어색한 분위기의 승용차 안.
와니가 문득 말한다.
와니: 저, 좋아하고 있어요. (아빠,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 영민 이를 사랑해요. 같이 유학 가게 해주세요.
놀라는 아빠.
긴장하는 영민.
아빠가 차를 세우려고 브레이크를 밟는다.
하지만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새고 있는 액체.
차의 속도가 줄어들지 않는다.
당황하는 아빠.
동그래지는 와니의 두 눈.
와니의 시점으로 굴렁쇠를 굴리며 달려오는 아이들이 승용차와 스쳐 지나가는 것이 순간, 보인다.(슬로우모션)
멀리, 구부러진 국도 위에 굴렁쇠를 굴리며 달려오는 아이들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승용차.
승용차가 커브 길을 돌아 화면에서 빠져나간 뒤…….
‘쿵’
하는 둔중한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아이들, 소리나는 방향을 향해 돌아보고 서 있다. (실루엣으로 보인다) (화면 아주 커지면,)
아이들이 시선을 두고 있는 먼 곳에서 자동차가 가로수에 충돌하여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씬 91. 동네 골목길/낮.
태양이 엄청나게 내리쬐는 한 낮.
매미소리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열기로 일렁이는 골목길. 한 낮의 풍경들…….
집 앞에 물을 뿌리는 아낙.
빨가벗은 꼬마들이 뛰어가고, 담벼락 밑의 강아지는 축 늘어져 있다가 담장 위로 고양이가 휙 지나가자 으르릉 거리고…….
씬 92. 와니의 집 전경/해질녘.
마치 조종(弔鐘)처럼 처량하게 울리는 풍경 소리.
노을빛을 받아 붉게 물들어 있다.
씬 93. 와니집 부엌/거실/밤.
식탁에 앉아 저녁밥을 먹고 있는 준하와 와니.
말없이 밥만 먹고 있다.
서먹한 분위기다.
잠시 후.
준하: 마감 언제 끝나? 이렇게 와 있어도 돼?
와니: 응? 어……. 가 봐야지. 곧 끝날 거야.
준하: 소양씨는 왜 갑자기 갔어?
와니: 음……. 그냥 아빠한테 솔직히 말씀 드리겠대.
준하: (괜히 고개만 끄덕끄덕한다) …….
와니: …….
눈만 멀뚱히 뜨고 있다.
어색한 가운데 수저 소리만 가끔씩 달그닥 거린다.
그 때 거실과 방에서 동시에 전화가 울린다.
‘때르르릉’
‘뚜루루루루’
와니와 준하가 동시에 스윽 고개를 돌려 거실 전화기를 쳐다본다.
‘때르르르릉’
‘뚜루루루루’
두 사람은 눈이 마주치지만 이내 준하는 모른 척 고개를 숙여 밥을 먹는다.
‘때르르르릉’
‘뚜루루루루’
그 사이에도 계속 울리던 전화기가 자동 응답기로 돌아간다.
‘삐이’
영민(전화 속 목소리): 나야.
어느새 다가온 와니가 수화기를 집어 든다.
와니: 여보세요.
카메라, 수화기를 들고 있는 와니를 보여 주다가 천천히 반원을 그리며 와니의 뒤로 돌아가면, 와니의 앞에는 영민이 앉아 있다.
영민의 뒤로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준하가 보인다.
그렇게 세 사람은 한 공간에 있다…….
영민: 잘……. 지냈어?
와니: 그래…….
영민: 나, 두 달 뒤엔 들어 갈 거야.
와니: 그래. 엄마한테 들었어.
그 때, 밥을 다 먹었는지 준하가 전혀 영민을 의식하지 못하고 척 척 걸어와서 TV를 켠다.
거실에 가득 울리는 커다란 TV 소리 때문에 영민과 와니의 대화는 잠시 중단된다.
와니는 그럼에도 준하에게 소리를 줄이라고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
영민: …….
와니: …….
잠시 후 준하가 자신이 너무 크게 듣는다는 걸 스스로 인식하고 황급히 볼륨을 줄인다.
영민: 미안해.
와니: 뭐가?
영민: 나는 결국 유학이란걸 와 버렸지만, 누난……. 많이 힘들었을 거야. 혼자 남겨 졌으니까…….
와니: 아주 들어오는 거니?
영민: 당분간은……. 아무래도 제대로 준빌 안 해서 그런지 한계가 많아. 시간이 지나고……. 그 때 다시 오고 싶어.
와니: 소양이 여기 있다 갔어. 흠. 흠.
목이 갈라지는지 헛기침을 한다.
영민: 아……. 그랬어?
와니: 니 방, 치워놓을까?
준하가 그 말을 들었는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은 눈으로 와니 쪽으로 스윽 고개를 돌린다.
준하는 와니의 말을 오해했음직하다.
준하의 시점으로 와니를 바라보면, 영민은 없고 와니가 처음처럼 수화기를 들고 있다.
영민(전화 속 목소리):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친구랑 있을 거야. 그보다……. 대신 인사 전해줘. 만나보고 싶어 한다구. 분명 좋은 사람일거야. 그렇지?
와니: 국제 전화잖아. 조금씩 자주해.
영민(전화 속 목소리): 그래…….
와니: 끊는다…….
와니,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준하, 리모컨을 들고 TV 화면에서 무언가 셋팅을 다시 하고 있다.
시간 설정을 바꾸고 있다.
준하의 얼굴 표정은 무심해 보이지만 복잡한 심정인 듯 진지하고 숙연한 분위기가 흐른다.
다시 볼륨을 높여 거실에 크게 울리는 TV 소리.
준하는 노트북 화면의 시나리오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고 와니는 헤드폰을 낀 채 TV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준하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여전히 어색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준하의 노트북 화면을 다시 보면, 준하가 시나리오 파일을 지우려고 하는지 삭제 확인을 묻는 화면이 띄워져 있다.
마우스를 쥔 손을 까딱거리며 신중한 얼굴로 화면을 노려보고 있는 준하, 잠시 후 ‘젠장’ 하는 느낌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씬 94. 골목 길/밤.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는 와니.
그 옆에 호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말없이 걷고 있는 준하.
‘컹 컹’
동네의 개들이 짖기도 하고 자전거를 탄 학생이 지나쳐 가기도 하고…….
문득 고개를 들어 앞을 보는 와니.
씬 94-1. 골목길/밤/안개.
텅 빈 골목.
밤안개가 스멀스멀 몰려온다.
가로등 아래의 나방이나 벌레들이 기승을 부리며 불빛 속으로 뛰어들고 있다.
와니: 아! 비 올려나 보다. 들어가자.
그리고는 오던 길을 돌아가려는데.
준하: 저기…….
와니: …….
준하: 나……. 당분간 서울 가 있을게.
와니: (놀란 듯) 왜?
준하: 아무래도 그게 좋겠어.
와니: 무슨……. 말이야?
준하: 시나리오……. 아니, 그보다 혼자서 정릴 좀 해야겠어.
와니: (아무 말 없이 준하를 바라보고만 있다) …….
준하: 시간이 좀 걸릴지 몰라…….
와니: …….
준하: (와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한 번 안아 봐도 돼?
와니: (놀라고 당황스런 표정이다) …….
준하가 와니를 살며시 껴안는다.
와니의 표정은 불안해진다. 잠시 그러고 있던 준하는 와니를 놓으며 어색하고 서먹하게 말을 한다.
준하: 먼저 들어가. 담배 사러 갔다 올게.
와니: (다급하게) 저기, 준하야!
뒤돌아 걸어가려다가 돌아보는 준하.
와니, 뭔가 말을 하려고 숨을 들이쉬지만 차마 말은 못 하고 그저 준하를 바라보고만 있다.
불안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와니.
준하, 그런 와니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
그런 그의 눈빛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안타까운 표정이 되는 와니.
어느새 밤안개가 가득 메워 희미해진 골목길을 돌아서서 걸어가는 준하.
‘구르릉’
거리며 멀리서 낮게 들리는 천둥소리.
안개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는 준하의 뒷모습을 따라가 보는 와니의 시선.
하지만, 이내 준하는 사라지고 휑한 골목엔 한줄기 바람이 불어 담뱃갑의 비닐 껍질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반짝이며 날린다.
씬 95. 와니 회사 앞 길/아침/안개.
멀리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지나가고 있다. 아침안개가 거리에 자욱하다.
카메라 아래로 내려오면, 와니가 회사를 향해 걸어오고 있다.
담담한 표정이지만 생각에 잠긴 듯 한 모습으로 걸어오는 와니.
씬 96. 동화부실/낮.
각자의 작업에 열중인 애니메이터들.
몹시들 열심인 모습이다.
성재가 중앙에 서서 작업현황을 체크하고 있다.
성재: 다들 내일 오전까지 끝낼 수 있지?
두어 명의 사람들만이 작은 소리로 ‘네에’하고 대답한다.
성재: 왜 대답들이 없어. 조수경 몇 장 남았어?
수경: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스무 장요.
성재: 오수미.
수미: 열다섯 장요.
성재: 김영숙!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마는 영숙.
성재가 다가가 영숙의 책상 위에 있는 분량을 확인한다.
성재: 이게……. 다야? 반도 못 했잖아? 너 임마 그림 실력 좋은 건 알지만……. 아니, 이건 물 먹이려고 작정한 것도 아니고 미리 말을 하든가, 마감 맞추는 건 기본이잖아 새꺄. 인제 어떡할 거야?
영숙을 좋아하는 성재,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억지로 화를 내고 있는 모습이 약간 코믹하고 귀엽다.
몇몇 애니메이터들, 성재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는 듯 킥킥거리며 웃는다.
하지만, 와니는 전혀 눈치를 못 채고 나름대로 영숙을 위해주려는 듯.
와니: 이 성재. 그만하구 니 자리로 가. (영숙에게로 가서) 김영숙! 고개 들어. (남은 분량을 손에 들고) 내일 오전까지 니가 할 수 있는 양만큼 가져가.
영숙이 와니의 손에 들린 원화의 반을 가져간다.
와니: (화를 내는 척 하며) 너, 이거 제대로 못하면 다신 나 볼 생각하지 마.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는 영숙.
손에 남은 원화를 들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와니.
몇몇 애니메이터들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어버린다.
와니: (의아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왜에?
도석: 그거 작가님이 다 하실려구요?
와니: 그래야지, 뭐.
도석: 성재 형 주세요.
와니: 왜?
웃음을 터뜨리는 애니메이터들.
피곤한 얼굴들이지만, 이 순간은 즐거운 모습이다.
언제 왔는지 정우가 문간에 서서 와니를 보고 있다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다.
씬 97. 회사 옥상/낮.
옥상의 평상에 앉아 있는 와니와 정우.
와니는 손에 생수 통을 들고 있다.
정우: 이럴 땐 정말 맹하네. 보면 몰라?
와니: 와아~. 둘이 언제 그렇게 됐지? 정말 몰랐네. (정우를 귀엽게 째려보며)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자기는 왜 그 모양이야?
정우: (갑자기 풀이 팍 죽으며) 그러게 말이다. 에~ 휴~~. 어떻게 된 게 이놈의 연애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힘들어지냐?
와니: 현수씨, 아직……. 안 들어 왔어?
정우: (그러자 약간 진지해져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처음엔 막 화가 나더라. 이 자식 두고보자. 니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뭐 그런거 있잖아.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정작 참을 수 없는 게 뭔지 알아? 내가 정말 현수를 사랑하는 건지 모르겠더라는 거야.
와니: (불쑥) 그런 거 알려고 하면 더 불안해지지 않을까?
정우: 무슨 소리야?
와니: 정말 사랑하는지 알게 되면……. 그래서 이제 난, 이 사람을 떠날 수 없겠다 싶은데 그만 상대가 떠나버린다면…….
그 땐 정말 못 견디지 않을까?
와니는 자기 자신에게 얘기하듯 그렇게 담담하게 말하며 들고 있던 생수통의 물을 꿀꺽꿀꺽 마시고 정우는 그런 와니를 쳐다보고 있다가.
정우: 배부른 소리야. 정말 사랑하는지 알게 되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 있어? 까짓 거 떠나 버리면 어때? 내가 정말 사랑했다면 그걸로 된 거지.
새삼스런 얼굴로 정우를 스윽 보는 와니.
와니: 선밴 그렇게 한 번 지나간 사랑엔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없어?
정우: (옛날 생각이 나는지 혼자 웃으며) 어떤 여자를 죽도록 사랑한 적이 있었다?
와니: 선배가? 여자를?
정우: 물론 그 땐 내가 여잘 사랑할 수 없는지 몰랐지. 그러니까 착각한 거야. 재밌는 게 뭐냐면 내가 여자를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안 순간 그토록 가슴 아프게 사랑했던 그 여자한테서 아무 느낌이 없는 거야. 대체 언제 그랬냐 싶더라니까. 사람 맘이 그렇게 간사한 거야. 그러니까 지나간 사랑은 잊으려고 하지 말고 다른 맘으로 바꿔 간직하면 돼. 추억 같은걸 루. 그래서 옛사랑과 쿨하게 마주할 수 있게 되면 그 때 또 새로운 사랑이 온다구.
와니: 새로운 사랑이 왔는데 못 잡으면?
정우: 너, 지금 누구 놀리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 현수 보냈다고.
와니: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아니. 나한테 하는 소리야.
정우: (놀란 눈으로 와니를 보며) 무슨 일 있니?
씬 98. 동화부실/밤.
마감 막바지의 굉장히 열심히 그리고 있는 애니메이터들.
물론 와니도 집중해서 그림에만 열중해 있다.
윙 윙 거리는 전동연필 깎는 소리들.
씬 99. 동화부실/새벽.
군데군데 엎드려 잠들어버린 애니메이터들.
어떤 이는 군용야전침대를 펴놓고 아예 드러누웠다.
와니가 잠을 깨려고 세수를 했는지 어깨에 수건을 걸친 채 얼굴에는 물기가 남은 채 들어오고 있다.
와니의 시선으로 보이는 영숙과 성재와 수미 등은 아직 열심히들 그림을 그리고 있다.
와니는 오른손이 아픈지 왼손으로 계속 주물러주고 있다가 자리에 앉으면서 손을 주무르던 동작을 멈추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손을 주물러주던 준하 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고개를 들어 준하의 캐릭터 그림을 한 번 쳐다본다.
씬 100. 애니메이션 회사 현관/잔뜩 흐린 오후.
현관을 나서는 동화부원들.
그 뒤로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 와니.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오고, 곧 비라도 내릴 것처럼 하늘에 먹구름이 덮인다.
동화부원들, 각자 ‘우산 가져가야겠다. ‘또 비야?’
등 떠들어대는데, 와니는 그냥 말없이 버스정거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수미: 어머, 언니! 비 올 거 같은데 괜찮겠어요? 제 우산이라도…….
와니: 괜찮아, 그 전에 집에 도착할 거야.
모두에게 인사하고 걸어가는 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