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3.연중9주간 수요일 묵상글>
<마르12,26-27>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억누른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무의식에 자리를 잡고서 현재의 내 행동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칩니다(가족을 소홀히하는 아버지가 어쩌다 수박을 사오셨는데 그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억눌러서, 커서 결혼 후 수박 사오는 남편에게 화를 냄./어릴적 자신을 괴롭혔던 형수에 대한 분노를 억눌러서 형수 닮은 탤런트가 나오면 가족들이 보고 있어도 채널을 돌려버림).
이것만이 아닙니다. 억눌린 감정은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줍니다. 이를테면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편견’, ‘나만의 틀’이라는 다양한 이름의 옷을 입고 각종 인간관계에서 건강하지 못한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들이 밖에서 놀다가 “엄마, 00가 밀어서 넘어졌어. 무릅에서 피가 나?” 하고 울면서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엄마들이 뭐라고 할까요? “어디 보자, 우리 아들 많이 아프겠네”라고 하면서 감정에 공감을 해주기 보다는 “뚝, 사내녀석이 돼서 울긴 왜 울어”라며 판단의 말을 먼저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면 아이는 친구 때문에 다친 억울한 마음을 표현할 엄두도 못 내고 마음속에 얼른 눌러 담으면서 눈물을 그칩니다. 설상가상으로 마음속에 넣어버린 감정은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선입견으로 재탄생됩니다.
아이가 아침밥을 먹다가 “엄마, 나 밥 먹기 싫어. 그만 먹을래”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엄마가 “이 녀석아! 밥이 몇 숟갈이나 남았다고 그걸 남겨. 어서 마저 먹지 못해.” 라고 말하며 엄마가 아이의 감정에 공감을 해주지 못하면, 아이는 왜 밥을 먹기 싫은지에 대한 자기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억지로 남은 밥을 꾸역꾸역 먹어댈 것입니다.
공감을 받기보다 비난이나 판단을 받게 되어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억눌러버린 감정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저절로 사라지지 않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밥을 남기면 안 된다”는 선입견, 즉 나만의 규칙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러다 보면 어른이 되어서도 밥을 남기거나 음식을 남기는 아이들을 볼 때 편안하게 대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가장 큰 문제는 한 두번의 경험에 의해 생긴 선입견을 살아가면서 나와는 다른 경험을 한 모든 사람에게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들을 보면 크든 작든 대부분이 선입견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내 마음과의 거리는 10분 입니다,강현숙, 궁리, 2019, p.115-120)/
이처럼 억눌러진 감정은 없어지지 않고 선입견으로 재 탄생됩니다. 그리하여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과거의 감정억압이 선입견을 만들었으니, 선입견의 원인이 된 그 감정을 이루고 있는 기억들을 불러내어서 현재 내가 하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이나 사람들에게 설명해서 그 감정이 공감을 받게 되면 풀립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 일에 관계되는 사람들을 기도 안에서 다 떠올려 하느님 앞에서 그 사람들을 고발하고 그 사람들의 표정과 말 하는 것을 기도 안에서 들어보고 주님 앞에 머무르게되면 무의식은 그것이 현실로 인식하여 그 감정이 공감을 받고 눈 녹듯이 사라지게 됩니다.
따라서 40세 이후에는 사람이 바뀌지 않는데, 기도와 정화하는 사람은 바뀝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이 유일한 성서로 받아들이는 모세 오경의 한 구절을 인용하시는데,”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선택과 선택된 이들에 대한 그분의 성실성을 상기시킵니다. 이 선택과 성실성은 인간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느님 안에서 영으로 살아있기에 조상들의 이름이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 계속 언급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과거의 경험에서 억눌러진 감정에 의해 형성된 선입견은 무의식 안에 숨어서 우리에게 현재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잘못 선택하게 하고 영향을 주지만, 하느님 안에서 보면 이 모든 것은 그분께 봉헌해드리지 않고 나를 향해 움켜쥠으로써 고착된 나의 자아의 일그러진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을 영원히 살아계신 하느님께 봉헌하게 되면 어렸을때의 생명력 있는 모습을 다시 회복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 그분들께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나의 하느님으로 살아계시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내가 나로서 살 수 있게 하는 힘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내가 나로서 올바로 서 있을 때 그 배우자가 세상의 배우자이든 아니면 영혼의 짝인 예수님이든 상관없이 온전히 사랑할 수 있고 죽어서도 하느님 사랑으로 하나될 수 있을 것입니다.
<Mark12,26-27>
26 As for the dead being raised, have you not read in the Book of Moses, in the passage about the bush, how God told him, 'I am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27 He is not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You are greatly misled."
—//—
<책 소개>
2.감정 억압이 선입견을 만든다고?
바로 앞장에서 우리는 표현하지 못하고 억누른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무의식에 자리를 잡고서 현재의 내 행동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여러 사례들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억눌린 감정은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줍니다. 이를테면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편견’, ‘나만의 틀’이라는 다양한 이름의 옷을 입고 각종 인간관계에서 건강하지 못한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선입견은 ‘과거에 내가 한두 번의 경험을 통해 갖게 된 고정된 사고의 틀’로서 투명한 안경(내 마음과의 거리는 10분 입니다,강현숙, 궁리,2019,p.115)/
이 아니라 내 경험의 안경을 쓰고 이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빨간색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온통 빨간색으로 보이듯이, 내 경험의 안경으로 생긴 선입견은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내 경험에 의해 생긴 선입견을 살아가면서 나와는 다른 경험을 한 모든 사람에게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들을 보면 크든 작든 대부분이 선입견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머리를 염색한 학생을 볼 때 어떤 사람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머리염색을 한 학생=날라리”라는 선입견을 품고 있기 때문인데 이런 사람은 과거에 머리염색을 한 학생이 날라리였던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머리염색을 했다고 해서 모두 날라리는 아닌데도 우리는 자기가 개인적으로 경험했던 것을 머리염색을 한 모든 학생에게 적용해버립니다. 이런 선입견은 현실에 맞지 않는 과잉 일반화라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선입견은 내가 과거에 한두 번의 경험을 해서 갖게 된 생각의 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일반화시켜 모든 사람(내 마음과의 거리는 10분 입니다,강현숙, 궁리,2019,p.116)/
에게 적용하다 보니 관계 속에서 갈등의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가 가진 선입견들은 의외로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가진 선입견 중에서 몇 가지 예를 들면 “남자는 울면 안 된다”, “미인은 팔자가 세다”, “외동은 버릇이 없다”, “생머리가 젊어 보인다”, “계모는 무조건 나쁘다”, “가방끈이 길어야 성공한다”, “키가 큰 사람은 싱겁다”, “여자는 결혼해야 행복하다”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선입견과 관련하여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례도 있습니다.
어느 날 대학 4학년인 딸이 미팅을 하고 왔습니다. 딸은 오랜만에 괜찮은 남자를 만났다며 흥분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엄마에게 자랑합니다. 그런데 엄마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만나지 말기를 바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딸이 미팅한 남자는 K대 학생이었습니다. 이 엄마 또한 30여 년 전 대학생이었을 때 K대 학생과 미팅을 한 적이 있었는데 애프터 신청을 받지 못하고 끝나버렸습니다. 그 때 이후로 왠지 K대 학생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K대 학생은 별로다’라는 선입견을 품게 된 것입니다.
이런 틀과 선입견을 품고 있으면 관계 속에서 상대방에 대해 쉽게 판단을 내리고 또 단정 짓는 말을 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상대방이 감정을 표현할 때 상대방의 처지에서 바라보(내 마음과의 거리는 10분 입니다,강현숙, 궁리,2019,p.117)/
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판단으로 반응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감정을 표현한 데 대해 공감을 하지 못하고 판단이나 충고, 비난의 말로 반응하게 됩니다. 그 결과 관계는 계속 어긋나고 갈등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양햔 관계 속에서 가장 성숙한 모습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인데 선입견은 그렇게 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그렇다면 선입견이 만들어지는 관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어린아이들이 밖에서 놀다가 “엄마, 00가 밀어서 넘어졌어. 무릅에서 피가 나?” 하고 울면서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엄마들이 뭐라고 할까요? “어디 보자, 우리 아들 많이 아프겠네”라고 하면서 감정에 공감을 해주기 보다는 “뚝, 사내녀석이 돼서 울긴 왜 울어”라며 판단의 말을 먼저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면 아이는 친구 때문에 다친 억울한 마음을 표현할 엄두도 못 내고 마음속에 얼른 눌러 담으면서 눈물을 그칩니다. 설상가상으로 마음속에 넣어버린 감정은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선입견으로 재탄생됩니다.
선입견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내 마음과의 거리는 10분 입니다,강현숙, 궁리,2019,p.118)/
습니다. 아이가 아침밥을 먹다가 “엄마, 나 밥 먹기 싫어. 그만 먹을래”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엄마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반응1
“이 녀석아! 밥이 몇 숟갈이나 남았다고 그걸 남겨. 어서 마저 먹지 못해.”
: 엄마가 아이의 감정에 공감을 해주지 못하면, 아이는 왜 밥을 먹기 싫은지에 대한 자기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억지로 남은 밥을 꾸역꾸역 먹어댈 것입니다.
반응2
“우리 00가 밥을 먹기 싫은가 보구나, 왜? 벌써 배가 부르니?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
: 엄마가 아이의 감정에 공감을 해주면, 아이의 마음이 풀릴 뿐만 아니라 왜 밥을 먹기 싫은지에 대해 그 이유까지 엄마에게 말을 할 것입니다.
여기서 반응1 처럼 공감을 받기보다 비난이나 판단을 받게 되어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억눌러버린 감정은 시간(내 마음과의 거리는 10분 입니다,강현숙, 궁리,2019,p.119)/
이 지난다고 해서 저절로 사라지지 않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밥을 남기면 안 된다”는 선입견, 즉 나만의 규칙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러다 보면 어른이 되어서도 밥을 남기거나 음식을 남기는 아이들을 볼 때 편안하게 대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내 마음과의 거리는 10분 입니다,강현숙, 궁리,2019,p.120)/
나만의 감정노트11
1)내가 가지고 있는 나만의 선입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적어보고 그 선입견이 생기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찬찬히 생각해봅시다.
2)그런데 1번에서 나만의 선입견이 생기게 된 계기를 알게 되었다면, 이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이라도 내가 그 당시 느꼈지만 표현하지 못했던 내 감정을 위로하고 공감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나만의 선입견이 만들어졌을 당시 표현하지 못한, 내가 느꼈던 감정을 충분히 위로하고 또 공감해주는 글을 적어봅시다.
(내 마음과의 거리는 10분 입니다,강현숙, 궁리,2019,p.121-122)/
첫댓글 아멘!
"하느님 사랑으로 하나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