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료예약 상담문의 02-900-8276
체질 다이어트 / 디스크, 관절염/ 체질진료/전통 침
스마트 한의원(4호선 쌍문역 3번)
제23장 개벽(開闢)과 혁명
1. 근대성의 기준
우리가 이 강의를 시작한지 꽤 오래된 거 같다. 벌써 오늘로서 2000년의 마지막 강의가 되는 거 같고, 오늘 2번 더 강의를 하면, 100강의 4분의 1이라고 하는 엄청난 분량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 거 같다.
저는 처음에 강의를, 시작할 때는 워밍업 시간이 있어서, 뒷 강의가 대개 재미가 있다. 그런데 뉴스라인을 30분 보시고, 2번째로 진입을 실패하시는 분들이 많은 거 같다. 아무래도 11시 30분부터 시작하는 것의 시청률이 앞 강의보다 떨어지는 거 같다. 저는 항상 아이러니컬하게 뒤쪽 강의가 재미있게 된다. 워밍업이 되어서 재미가 있는데, 이 재미난 강의를 상당히 많은 분들이 놓치신다는 이야기를 한다.
지난 번 크로즈미 교수가 와서 한 내용에 대해, 시중의 상당히 좋은 기업 사장이 나한테 전화를 걸어왔다. 자기는 비즈니스 계에 있으면서, 일본 사람들하고 우리가 분명히 뿌리가 같은데, 일본에 가보면 많이 달랐다고 한다. 일본은 우리보다 선진국이 되었고,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나? 그런 것에 대해 설명이 안 되었다고 한다. 평생을 살면서, 5, 60살이 되도록,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고민거리였는데, 지난 번 한 번의 강의로, 평생 품어왔던 모든 숙제가 싹 풀렸다고 한다. 그럴 정도로 명 강의였다. 그 강의는 일반적인 문화 유형론에 대한, 상당히 개념적인 강의였다.
그리고 지난번에 우리가 제사 문제와 관련되어 동학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강의에 대해서도 그 반응이 전국적으로 폭발적이었다.
동학이라는 게 그렇게 위대한 것인 줄 몰랐다. 정말 그런 거냐? 해월이라는 사람을 뻥 튀겨 놓은 게 아니냐? 정말 그런 분이 있었냐? 자기들은 놀랐다. 이런 반응이었다. 그런데 사진이 나오니깐 믿지 않을 수도 없고, 교과서에서만 배운 우리 역사 지식이 얼마나 빈곤한 것인지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제 강의가 이렇게 여러분들과 호흡할 수 있는 것은 동학 이야기가 우리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제가 요새 조영남 씨하고 친하게 지내지는데, 그 분은 미국에 가서 제대로 공부한 미국 목사다.
조영남(趙英男, 1944~)
충남 예산 삽교 출신. 서울대 음악대학에서 공부(64년 입학). 미국 플로리다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음(79년).
그 사람은 자기가 목사지만, 평생 성령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 번 동학 강의를 들으면서 성령이 무엇인지를 처음 깨달았다고 한다. 몸에 전율이 오면서, 성령을 받는 거 같았다고 한다. 지난번 강의의 진실한 이야기에 感接이 될 적에 오는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이런 것이 성령이 아니겠느냐?’ 하고, 자기는 성령이라는 것을 그렇게 진실하게 해석해볼 기회를 얻었다고 한다. 그런 말씀을 했다.
그래서 이번에 그냥 지나가기가 아깝고, 많은 분들이 조금 더 동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다고 해서, 이번 강의는 동학에 대해 부연 설명하는 것으로 꾸며보려고 한다.
그런데 동학을 이야기하기 전에, 제가 여러분들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다. 제가 지난 시간에 동학이라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근대성의 출발이라는 말을 했다.
예를 들면, 근대적 인간, Modern man이라고 하면 좋은 뜻이다. 그런데 사람이 좀 보수적이면, ‘넌 왜 그렇게 전근대적이냐?’라는 말을 한다. 사고가 전근대적이라는 말은 상당히 나쁜 말이다. 전근대적이라는 말을 봉건적이라는 말로 쓸 때도 있다. 하여튼 여러 가지 어법이 있다.
전근대(pre-Modern) 봉건제
근 대(Modern) 자본제 -서양역사의 경우-
그럼 우리 철학자는 근대의 기점을 어디로 잡느냐? 역사를 볼 때 과연 어디가 고대고, 어디가 중세고, 어디가 근대인가? 살기는 마찬가지인데, 왜 고대인들은 고대인들이라고 하고, 우리는 왜 근대인이라는 말을 붙이냐? 그리고 어디가 중세냐? 그럼 왕건은 중세 사람인가? 이런 말들이 사실 상당히 애매한 말이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설명하기에 매우 어려운 말이다. 역사학에서 소위 시대구분론과 관련되는 것이다.
고대 중세 근세 등의 개념은 시대구분론(historiography)의 한 유형일 뿐이며 절대적인 역사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철학적으로 근대적 인간을 규정하고 있는 기준이 무엇이냐? 그 근대적 인간을 규정하는 추상적인 속성을 ‘근대성’이라고 부른다. Modernity라고 부른다.
근대성(Modernity)
근대적 인간(Modern Man)을 규정하는 추상적 속성, 서양의 경우 근대성은 이성주의(Rationalism)와 관련되어 있다.
서양 사람들은 철학사에서 근대의 아버지를 보통 데카르트라고 한다. 데카르트는 ‘I think therefore I a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내가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고 하는 말의 반대는 무엇일까? 그 전에는 그러한 말을 인간이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사유의 주체인 내가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있다고 하는 말을 중세에는 할 수 없었다. 서양에서 말하는 중세라는 것은 기독교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이 주신 나의 본질을 엣센스라고 그러는데,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나의 본질은 나의 실존에 앞선다고 한다. 하나님이 생각하셔 주셨기 때문에 내가 있지, 내가 생각해서 내가 있을 수가 없다.
엣센스(essence) 나의 존재를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본질, 본질은 신에게서 부여받는 것으로 중세인들은 생각했다.
실존(Existence)이 본질(essence)을 앞선다는 사르트르(J.P.Sartre,1905~1980)의 말은 근대성의 한 표현이다.
그러니깐 어떤 의미에서 서양에서는 중세에서 근대의 이행이라고 하는 것은 신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중세(신 중심사고)-----> 근대(인간 중심사고)
그래서 과거에는 신을 중심으로 인간이 포진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인간을 중심으로 세계가 구성된다는 것이다. 신이고 뭐고, 인간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이다.이것을 서양철학사에서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는 말을 한다.
코페르니쿠스적 혁명(Copernican Revolution)
칸트 인식론을 기술한 표현,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듯이 세계가 인간중심으로 새롭게 인식되는 변화를 가리킴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이다. 그전에는 천동설이었다. 과거에는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였던 세상이 태양 중심으로 바뀌었다. 이런 획기적 전환을 빗대어,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인식의 변화가 생긴 것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한다.
저번에 말씀드린 向壁設位(향벽설위)에서 向我設位(향아설위)로 바꾸어 생각하는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민족사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다.
향벽설위(向壁設位)에서 향아설위(向我設位)로의 변화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며 우리 근대성의 출발이다.
귀신 중심으로 생각했던 것을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귀신이 곧 ‘나’니깐, 내가 제사상을 차려놓고 내가 먹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먹는다고 하는 그 자체가 바로 하늘님이 잡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상이 소위 말해서 동학의 인내천이다.
2. 개벽
논어를 보면서 계속 내가 논어주에 언급하고 있는 인물이 누구인가? 다산이라는 인물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저 강진에 유배당해 그 많은 책을 쓰셨다. 논어고금주라는 명저도 남해 바다를 바라보시면서 강진에서 쓰셨다. 다산은 1836년에 돌아가셨다. 그러니깐 19세 초반에 돌아가신 분이다. 영정조 시대 때 정조의 선생을 하셨다.
이 다산 선생과 수운이나 해월 선생 같은 분은 어떻게 다르냐? 아주 다르다. 뭐가 다르냐 하면, 다산선생은 논어 고금주를 쓰면서 조선왕조를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조선왕조체제의 모든 유교적 가치관과 질서를 어떻게 해서든 재해석해서 바로잡고, 탐관오리들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그래서 목민심서를 쓰셨는데, 여기서 목민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왕조의 구조 속에서의 목민이었다.
그러나 동학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왕조를 포기하자는 것이었다. 입장이 다르다. 이미 이러한 구질서 속에서 우리는 살 수가 없다. 이거는 이미 오백년으로 끝난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학인들은 개벽이라는 말을 쓴다. 내가 동학을 보는 가장 중요한 관점 중에 하나인 개벽을 주장한다. 그럼, 개벽이라는 말은 무엇인가?
우리는 보통 ‘참 천지가 개벽할 일이여.’라는 말을 쓴다.
개벽이라는 말은 우리 동양의 우주관으로 본다면, 태초에는 渾元之一氣가 있었다고 한다. 믹스가 된, 혼원된 一氣가 있었는데, 여기 渾元之一氣에는 음양의 구분이 없다. 음양의 구분이 없이 혼원한 한 기로 구분이 안 된다.
혼원지일기(渾元之一氣)
음, 양이 구분되지 않는 가장 원초적인 우주의 혼돈상태
이 혼원지일기가 양기와 음기로 나누어진다. 陽氣는 경청자라고 했다. 아주 가볍고 청한 것이다. 그래서 경청자는 위로 올라간다. 음기(陰氣)는 중탁자다. 아주 무겁고 탁한 놈이다. 이 중탁자는 무거우니깐 아래로 내려간다.
淸輕者上爲天, 濁重者下爲地.(청경자상위천, 탁중자하위지.)
- 현대 초기의 작품, [易緯]로부터-
그래서 경청한 것과 중탁한 것이 분리되어서 나뉘는 게 천지개벽이다. 처음에 음양도 구분도 안 되던 시대에서 음양이 구분되어서 나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음과 양이 생기고, 해와 달이 생기고, 밤과 낮이 생기고, 이런 구별이 생겨난다. 그것을 원래 한대(漢代) 철학에서 개벽이라고 불렀다.
개벽(開闢)
하늘(天,陽)과 땅(地,陰)이 갈라지는 우주 최초의 질서의 탄생
동학 사람들은 선천개벽 후천개벽, 이런 말을 쓴다. 선천개벽 오만년, 후천개벽 오만년이라고 한다. 이 사람들은 개벽이 되어서 오늘날까지 온 역사를 오만년의 역사라고 한다.
천지개벽이라는 것은 우주론을 포괄해서 인간의 역사의 시작까지 다 포괄하는 거 같다. 오만년의 선천개벽세가 있는데, 이 선천개벽세는 타락과 완전히 잘못된 세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근원적으로 다시 개벽해야 된다고 한다. 선천개벽 오만년의 운세가 다 끝나고, 이제 후천개벽 오만년의 시작이 다시 시작될 때가 왔다고 한다.
선천개벽 5만년(어둠의 세계)이 끝나고,
후천개벽 5만년(밝음의 세계)이 시작한다.
이게 정감록 사상이라든가 하는 것을 수운 선생이 참고하신 거 같다.
내가 항상 하는 이야기는, 동학사상은 혁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혁명이라는 것은 단순히 명(命)을 바꾸는 것이다. 즉 정권의 교체에 지나지 않는다. 김씨 왕조가 이씨 왕조로 바뀌고, 이씨 왕조가 무슨 왕조로 바뀌는 그러한 것들은, 사실 우리에게 비극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별 의미가 없다.
동학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사고가 바뀌고, 삶의 방식이 바뀌고, 천지가 아주 새롭게 다 개벽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학사상이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정치적인 변화만을 노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사고와 삶의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다시개벽’이라는 말을 썼다.
하늘님 하신말씀 개벽후 오만년에
네가또한 첨이로다 나도또한 개벽이후
노이무공 하다가서 너를만나 성공하니 [용담가]
3. 무극대도
그리고 이 사람들이 동학에 대해 한 말이 있다. 사실 동학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은 분명히 서학에 빗대서 한 말이다.
교조신원운동을 하기 위해서, 공주 삼례에 모여도 안 되니깐, 서울 광화문 앞길에서 복합 상소를 냈는데, 거기에 하신 말씀이 있다.
거기에 손천민이 뭐라 썼냐 하면, ‘동학은 동학이 아니다.’라고 한다. 내용적으로는 서학에 빗댄 동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말은 동학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무극대도(無極大道)다.’라고 한다. 극이 없는 무한한 대도가 우리 동학이라는 것이다.
동학은 동학이 아니다.
그것은 無極大道일 뿐이다.
- 1893년 2월 11일 고종에게 올린 복합상소문
4. 동학을 바라보는 2가지 관점
‘동학은 무극대도이다.’, ‘동학은 개벽이다.’ 나는 이 두 가지 말로 동학의 본질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고 본다.
동학은 동학이 아니라 무극대도다. 동학은 혁명이 아니라 개벽이다. 이것은 나 도올이 동학을 바라보는 두 개의 관점이다.
그런데 여태까지 동학이라고 하면, 전부가 피상적으로 어떠한 정치사상으로만 알고, 혁명사상으로만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해월선생의 사상을 충분히 이해 못하고 피상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5. 수운, 공자, 예수
최수운이라는 사람의 일생을 보면 굉장히 공자하고도 공통분모가 많다. 공자는 아버지가 70세 때 낳은 아이라고 했다. 최수운선생도 아버지 근암공이라는 사람이 63세에 낳은 아들이다.
그것도 세 번째 부인의 아들이다. 첫째 부인이 죽고, 둘째 부인이 죽고, 아들이 없으니깐 양자를 하나 들였는데, 나중에 어떻게 어떻게 해서 주변의 제자들이 과부를 들여보냈다. 근암동이라는 사람은 학문이 있었던 사람이라 제자도 있었고, 시골에서 과거도 보았던 사람이다.
그러니깐 수운 선생은 재가한 과부의 아들이다. 당시 재가녀의 아들은 서자보다도 더 낮았다. 재취도 아닌 삼취에다가, 들어온 여자가 재가녀였다. 즉 결혼했던 여자였다. 그렇게 낳은 아들이니깐 정말로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다.
아버지 근암공(近庵公)은 과부였던 韓씨를 셋째 부인으로 맞이하여 수운을 낳았다(1824년). 수운은 재가녀(再嫁女)의 자손이다.
그런데 10살 때 모친이 돌아가시고, 17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세상이 다 변해버린다. 그리고 19살 때 밀양 박 씨와 결혼을 한다. 이런 것이 상당히 공자와 비슷하다. 공자도 17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9살 때 결혼하여 잉어를 낳았다.
그리고 수운 선생은 21세부터 36세까지 기나긴 방황을 한다. 이것도 공자와 비슷하다.
또 예수하고도 비슷하다. 수운 선생은 1860년에 득도를 하고, 1861년부터 포교를 하다가, 이 양반이 1864년 3월 대구장대에서 돌아가셨다. 결국 이 분은 한 3년 정도 공생애를 보내고 순교를 했다.
예수(십자가형) --> 사도바울이 전도
수운(참수형) --> 해월 최시형의 전도
예수는 십자가형을 당한다. 십자가형이라는 것은 로마 사람들의 일반적인 사형방식이다. 별개 아니다. 수운 선생은 참수를 당하였다. 목을 잘렸다.
6. 수운의 마지막 교시
그런데 수운의 참수형 1주일 전인 3월 3일의 일이다. 해월 선생이 영덕도인 유상호라는 사람한테 백 냥을 얻었다. 백 냥이면 아주 큰돈이다. 그래서 그때는 부패했으니깐, 그 돈으로 수운을 구하려고 한다.
이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관계와 동일하다. 소크라테스가 혹세무민했다는 이유로 옥에 갇혔는데, 플라톤이 다 구워삶아서 나갈 수 있게 했다. 그때는 폴리스라는 희랍의 도시국가 같은 것은 그냥 산 하나를 넘으면 딴 나라였다. 그러니깐 그냥 나가면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피하지 않고, 자기는 아테네의 법에 따라서 죽겠다고 하고 돌아가셨다.
마찬가지로 해월 선생도 곽덕원이라는 사람의 고용인으로 변장해서, 백 냥을 가지고 옥리들을 다 구워삶았다. 그때 우리나라는 한없이 부패했으니깐 100냥이면 충분했다.
3월 3일 해월 선생은 나졸로 변장을 해서, 밥상을 들고 수운 선생이 있는 감옥에 들어간다. 감옥이라는 데가 흙바닥에 거적이 하나 깔려 있고, 거기에 수운 선생이 앉아계셨다.
그래서 상을 받쳐 들고 들어가서, 엎드려 절을 하면서 소근 대었다. ‘이제 준비를 다 해놓았으니깐, 나가시죠.’라고 한다. 그런데 수운 선생이 의연히 앉아서 아무 말도 안하고 있다가, 옆에 있던 곰방대를 상 위에 올려놓으셨다. 그리고 아무말없이 그걸 가지고 그냥 가라는 몸짓을 한다. 해월 선생은 수운 선생의 말을 절대적으로 받드는 분이니깐, 그대로 상을 물려서 나왔다.
그래 가지고 곽도원네 집에 돌아왔는데, 사람들이 왜 곰방대를 거기다 놓으셨는지 이상하다고 해서, 그 곰방대를 깨어보니깐, 그 안에 똘똘 말린 종이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러니깐 수운 선생은 다 알고 준비해 두셨던 것이다.
거기에 수운 선생이 쓴 시가 있었다. 수운 선생의 마지막 시다.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동학을 살아간 사람들의 이런 이야기를 몇 마디만 해 드리려고 한다. 내가 지난번에 너무 열을 내서 했기 때문에 오늘은 편하게 하려 한다.
燈明水上無嫌隙
등불이 물위에 틈없이 밝았다.
柱似枯形力有餘
기둥은 죽어 말라야 오히려 힘이 있으니
여기서 뭐라 했냐 하면, ‘등명수상무혐극 주사고형력유려’라고 한다. 이게 해석이 참 어렵다.
‘燈明水上無嫌隙’
내가 생각하기에, 무슨 경회루 같은 누각이 있고, 그 밑에 물이 있는 곳을 연상하면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그 물 위에 연등회 때 쓰는 등을 띄운다고 생각해 보자. 그 등이 물 위에 밝게 비치는데 한 치의 틈이 없다는 것이다. 이해가 잘 안 간다. 마치 암호 같다.
柱似枯形力有餘
기둥은 썩어 말라비틀어진 모습을 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고 한다. 여기서 거꾸로 아이러니컬한 해석이 된다. 기둥은 오히려 썩어 말라비틀어진 모습을 하고 있어야 오히려 그 힘이 난다고 한다. 기둥이라는 것은 비어가지고 송진이 굳어갈수록 힘을 낸다.
‘등명수상무혐극’이라고 하는 것은, 수운 선생이 평생 자기가 밝힌 진리를 이 세상에 완벽하게 밝혔다는 것이다. 자기 삶을 통해서 밝혔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은 오히려 썩어 없어져야 더 힘을 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신이 살기를 구하면 일이 안 된다는 그런 이야기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게 중요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 젊은이들한테 이런 말씀을 한 번 내가 꼭 소개하고 싶다.
吾順受天命(오순수천명)
나는 하늘님의 부르심을 받겠노라.
汝高飛遠徒(여고비원도)
너는 높이 나르고 멀리 뛰어라.
‘오순수천명’ 나는 천명을 순순히 받겠노라. 여기서 나는 말라 썩어야 오히려 내 기둥은 힘이 난다. 나는 천명을 이제 순순히 받겠노라. ‘여고비원도’ 너는 높이 나르고 멀리 뛰어라! 고비원주하라.
우리 민족의 젊은이들은 정말로 높이 나르고 멀리 뛰는 수밖에 없다. 생각을 해 보자. 우리나라에 석유 한 방울이 나오나? 우리나라에 무슨 물자가 있나?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하지만, 그야말로 산밖에 없다. 70%가 산이다.
그러니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높이 나는 수밖에 없다. 이 조그만 땅덩어리에서 뭘 하겠나? 우리 인간은 머리를 가지고 높이 나르고 멀리 뛰어야 한다.
이것이 해월 선생에게 수운 선생이 한 마지막 교시였다. 그래서 해월은 거기서부터 수운 선생을 더 이상 구원하지 않고 튀었다. 고비원주했다. 그래서 해월은 평생 도발이꾼이 되었다. 그리고 이 엄청난 역사를 만들어 내었다. 마지막으로 받은 말이 고비원주였다.
7. 검결
재미난 것은 수운 선생을 어떠한 죄목으로 다스렸냐 하는 것이다.
신유년이라고 그랬으니깐, 수운 선생이 1861년에 검결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목검으로 검을 만들어서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다. 수운 선생은 한문으로 쓴 동경대전과 한글로 쓴 용담유사라는 것도 남기셨다. 이 양반의 검결(劍訣)이라는 시는, 우리 국민이 알아야 될 정말 아름다운 시다. 수운이라는 사람의 기개를 나타낸다.
그때 대구감사 서헌순이 재판을 한 걸 보면, 수운을 때려잡을 근거가 없었다.
서헌순(徐憲淳) : 최수운을 심문·판결한 대구감사(大邱監司)
무극대도를 포교하면서, ‘수신정기’하라는 게 어떻게 죄목이 되겠는가? 그런데 이 검결을 가지고 죄목으로 삼았다. 검을 가르쳐서 사람들의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었다.
以劍歌, 國政謀叛
- 1864년 2월 29일 조정으로부터 내려온 처형문 내용
사실 ‘검결’이라는 시는, 자신이 깨달은 개벽의 기쁨을 노래한 춤이다. 쌍칼을 들고 춘 춤이다. 검결을 소개해 드릴 테니깐, 얼마나 멋있는 노래인지 보기 바란다.
時乎時乎 이내時乎
不再來之 時乎로다
내가 쓴 천명이라는 작품을 보면, 전봉준이 춤을 추면 나오면서 ‘시호’라고 외친다. 시호라는 것은 ‘때다!’라는 뜻이다. ‘때다, 때다. 다시 안 올 때로다!’ 그런 뜻이다. 이 세계가 오만 년 개벽의 운세가 끝나고 이제는 때가 왔다. 새 시대가 왔다고 외치는 말씀이다.
萬世一之 丈夫로서
五萬年之 時乎로다
만세에 한 번 태어날 장부로서 오만 년만에 맞을 때다.
龍泉劍 드는칼을
아니쓰고 무엇하리
용천검은 옛날 중국의 신화에 나오는 보검이다. 그런데 사실 용천이라는 말은 용담에 연원이 있기 때문에 쓴 말이다.
舞袖長杉 떨쳐입고
이칼저칼 넌즛들어
무수장삼은 춤을 출 때 입는 소매가 넓는 옷이다.
浩浩茫茫 넓은 天地
一身으로 비껴서서
멋있지 않은가? 무수장삼을 입고 이칼저칼 넌즛들어 호호망망 넓은 천지를 한 몸으로 마주선다는 말이다.
칼노래 한곡조를
時乎時乎 불러내니
용천검 날랜칼은
日月을 희롱하고
날랜 칼은 동적인 세계를 말한다.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혀있네
날랜 칼은 동적으로 다이내믹한데, 게으른 무수장삼은 느리게 움직인다고 말한다.
萬古名將 어데있나
丈夫當前 無將士라
만고의 명 장군이 어디 있느냐? 바로 이 장부 앞에 또 다른 장사는 없다는 말이다.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身命 좋을시고 (辛酉, 1861년작)
이것이 수운 선생의 검결인데, 이것이 이 분의 주요한 죄목이었다.
이걸 우리나라 민중 예술에서 아주 중요하게 쓰고 있다.
8. 甁中有仙酒
수운선생의 시를 하나 더 소개한다.
甁中有仙酒, 可活百萬人.(병중유선주, 가활백만인)
병속에다가 신선 술을 담아놓았다. 그런데 이것은 백 만 인을 살릴 수 있다.
釀出千年前, 藏之備用處.(양출천년전, 장지비용처)
이것은 천 년 전에 빚었는데, 그것을 크게 쓸 때가 있어서 숨겨 두었다.
無然一開封, 臭散味亦薄.(무연일개봉, 취산미역박.)
괜히 쓸데없이 한 번 개봉하면, 냄새도 흩어지고 맛도 또한 엷어진다.
今我爲道者, 守口如此甁.(금아위도자, 수구여차병.)
지금부터 내 도를 행하는 자들은 입을 지키기를 이 병과 같이 하라!
상당히 절제된 언어들이다. 해월 선생이 수운 선생의 도(道)를 받아간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9. 조병갑
‘守心正氣’이다, ‘개벽’이다 하는 문제와 관련지어, 우리 역사학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
고부군수 조병갑이라는 놈이 얼마나 지독하게 해쳐 먹었는지 모른다. 만석보를 지었는데, 그게 멀쩡하게 댐이 잘 되었는데, 그것도 모자란다고 그 밑에 신보(新洑)를 만든다며 부역을 동원한다. 그렇게 수리조합에서 새로 만들었으면, 국민한테 득이 가도록 해야 하는데, 물세를 또 받아 처먹었다.
이평면(梨坪面)에 신보(新洑)를 만들어 물세(水稅)라 하여 7백여석을 거두었다.
자기 애비 비각을 세운다고 일천 냥을 거두어들이고, 자기 애비 무슨 잔치라고 몇 만 냥을 받아 처먹었다.
태안군수를 지낸 자기 아버지 비각 세운다고 천여냥을 녹탈함.
기생출신의 서모가 죽었을 때 매호당 한 냥씩 부의금으로 거둠.
不孝, 不睦이라는 죄목으로 끌어갔다. 지금으로 말하면 삼청대로 끌려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불효, 불목하고 잡기가 있는 놈이라고 다 붙잡아 가서, 몇 만 냥을 갹출한다.
不孝, 不睦, 淫行, 雜技 등의 허구의 죄명을 씌워 2만여냥을 강탈.
조병갑은 탐관오리로서 한량이 없었다.
10. 전봉준
그런데 1864년에 수운 선생 모가지가 날아갔다. 그리고 1894년이면 꼬박 30년이다. 이 30년의 역사는 해월의 역사였다. 해월 선생이 만들어간 혁명의 역사였다.
문제는 지금 동학란이라고 하면, 전봉준만을 생각한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아셔야 하는 게 있다.
동학난(東學亂) : 현재 역사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쓰이는 표현은 "갑오농민전쟁", "갑오동학혁명"이다.
동학에는 포접 제도라는 게 있다. 지금 다단계 판매라는 게 말썽이지만, 이런 다단계 판매 조직의 원조가 동학의 포접 조직이다. 동학의 ‘접’이라는 것은 지역이 아니다. 한 사람이 지역과 관계가 없이, 인맥으로 자기 친척 등에 포교를 한다. 그래서 열 명이 있으면 접주가 된다. 그리고 50개의 접주를 관리하는 사람을 ‘포주’ 또는 ‘대접주’라고 한다. 그렇게 지금의 다단계 판매망 식으로 되어 있다.
포접제(包接制) : 동학의 포교를 위한 조직방식. 대접주들의 공식명칭은 보은집회(1893. 3.)에서 확정되었다.
포접제는 해월선생이 한 것이다. 모택동이 공산당을 조직한 거랑 같다. 그렇게 30년 동안 동학을 조직한 것이다.
전봉준이라는 사람은 고부에 있던 김덕명이라는 대접주 휘하의 소접주다. 그런데 이 사람이 동학을 들어온 것은 불과 1891년이다. 그러니깐 전봉준이라는 사람은 동학의 역사에서 본다면, 사실 아주 위치가 박약한 사람이다.
전봉준(全琫準, 1855 ~ 1895)은 금구대접주 김덕명(金德明) 휘하의 고부 접주였다.
전봉준이 동학에 입도한 것은 전봉준 자신이 고백한 [供草] 기록에 의하면 1892년의 사건이다. 동학혁명의 두 해전 일이다.
전봉준이라는 사람은, 전봉준 나름대로 동학을 이용했다고 해도 좋다. 동학이라는 것을 기회로 삼아서 동학도들의 힘을 합쳐서, 고부 조병갑에게 못 견디어서 일어난 것이다.
기포시(起包時)에 원민(寃民)과 동학(東學)이 합(合)하였으나, 동학은 소(少)하고 원민은 다(多)하였다.
-전봉준 심문기록-
11. 해월과 전봉준
역사에서 해월과 전봉준의 문제는 큰 문제이다.
해월 입장을 한 번 생각해 보라.
예를 들면, 내가 도올서원에서 몇 십 년 소리 없이 사람들을 키워서, 수천 명의 학생들을 만들어 놓았는데, 최근에 어떤 똘똘한 놈이 도올서원에 와서 ‘이거 못 참겠습니다. 도올서원 학생들 나갑시다! 나가서 때려 부숩시다!’라고 했을 적에 내가 용인이 되겠나? 해월이 이런 입장이었다.
당시 상황이 해월 입장에서 용인이 되겠는가? 당연히 안 된다. 그래서 해월 선생은 계속 전봉준에게 고부사건이래로 계속 통지를 발해서 봉기를 하지 말라고 한다.
經(경)에 이르되 현기(玄機)는 불로(不露)라 물위심급(勿爲心急)하라 하였으니 급한 마음을 두지 말고 후일을 기다리라.
-해월의 1894년 4월2일 경고문
그리고 소위 말해서 남접, 북접이라는 엉터리없는 말을 만들어서 남접의 대장은 전봉준이고, 북접의 대장은 해월이라고 한다. 그리고 남접과 북접이 서로 대항을 했는데, 남접은 민중 편에 서있고, 북접은 반동분자 새끼들이라서 혁명을 부인했다고 한다. 여태까지 이렇게 유치한 동학사를 썼다.
남접(南接)과 북접(北接) 간의 대립정황은 『東學史』를 쓴 오지영(吳知泳)이 자신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하여 좀 과장되게 표현한데서 기인한다. 東學에는 애초부터 남접과 북접의 구분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기술이다. 동학은 분명히 해월 선생이 모두 이끌어간 역사이다. 그러나 전봉준 장군은 전봉준 나름대로 위대한 분이다. 내가 조금도 그분을 폄하할 생각이 없다.
남접, 북접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원래 북접이라는 말은 용담에서 검골이 북쪽에 있기 때문에 북접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해월을 수운이 후계자로 임명하면서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 북접주인(北接主人)이라 명한 것은 용담과 검등골 사이의 지역감각에 기인한 것으로, 남·북접 문제와 아무 관련이 없다.
근본적으로 동학사와 우리 역사에서 이런 식으로 해월 선생을 왜곡해 왔다. 7~80년대 학생운동이 커지면서 전부 전봉준 중심으로 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게 아니다.
12. 봉기
전봉준은 전봉준 나름대로 참을 수가 없었다.. 자기 아버지, 전창혁이라는 분이 관아에 끌려가서 곤장을 맞아 죽었다. 그러니깐 참을 수 있었겠는가?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全彰赫, 全承錄, 全亨錄의 이명이 있음)은 조병갑에게 곤장형을 받고 사망했다.
전봉준도 굉장히 뜻이 있는 사람이고, 그 동네에서 훈장을 하던 사람이다. 원래 무인이 아니었다. 문장도 하고 그러니깐 사람들이 주변에 모여 사발통문을 한 것이다. 참가자의 이름을 동그랗게 쓴 게 그대로 남아 있다.
사발통문(沙鉢通文) :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참가자의 이름을 원으로 둘러 적은 동문. 전봉준의 이름이 보이고.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사"라고 쓰여 있다. 1968년 12월 발견.
그래서 1894년 1월 10일, 고부 군수 조병갑에게 쳐들어갔고, 이놈은 잽싸게 도망을 가버렸다. 해월 선생은 봉기를 끝까지 말렸다.
동학군은 승승장구하다가 4월27일 백산으로 모였다. 그때는 조선 사람들이 흰옷을 입었는데, 전부 죽창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앉으면 죽창이 삐죽 나오니깐, 서면 백산이요, 앉으면 죽산이라고 했다.
일어서면 백산이요 앉으며는 죽산이라
그렇게 새까맣게 농민들이 모여서, 승승장구하여 전주에 입성한다. 전주 입성은 우리 민족 최초의 파리 코뮌이나 마찬가지다. 동학이 완전히 그 지역 정치를 장악하고 집강소를 세웠다.
천명이라는 연극에 자세히 해설되고 있는데, 안숙선 선생이 창을 하였다.
天命 도올 김용옥 각본, 손진책 연출, 안숙선, 왕기석 주연
1994년 4월 오페라하우스 초연, 1998년 10월 국립극장 앵콜
그런데 해월 선생은, 청국이 들어오지, 일본이 들어오지, 이러니깐 이건 도저히 우리의 실력으로는 백성만 다치니깐,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전봉준에게 계속 자제하라고 한다.
그러다 나중에 결국 기포 명령을 내리게 된다. 이건 백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도 나온다.
백범 김구(金九, 1876 ~ 1949)는 18세에 동학에 입도, 19세에 황해도 팔봉(八峰) 접주가 되어 해월선생을 만난다.
13. 해월의 기포명령
당시 동학군은 전남과 전주를 중심으로 집강소를 차리고, 세력이 있었지만 원래 동학이라고 하는 것은 전라도를 대상으로 포교를 하지 않았다. 경상도를 중심으로 충청도의 보은으로 해서 강원도 쪽으로 포교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1880년부터 전라도에 한 번 전파가 되면서 급격하게 교세가 늘어났다.
원래 영남이라는 곳은 산맥으로 갇혀있어서 바깥의 영향을 덜 받았다. 그런데 이 호남지역은 곡창지대였고, 서울로부터 지리적으로 터져 있었기 때문에 항상 피해를 직접 받았다. 수취를 많이 당했다. 지주들도 대개 서울에 사는 부재자 지주들이었다. 그러니깐 지주부터 해서 모두 착취만 했다. 그러니깐 여기 있는 백성들은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니깐 동학사상이 들아오자, 폭발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나중에 결국 일본이 들어온다고 하니깐, 해월 선생도 결심을 한다. 나중에 오지영이라는 사람이 남북접을 왔다 갔다 하며 절충을 하려고 하는데, 제일 마지막에 해월 선생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야말로 호랑이가 물려 달려드는데 어찌 앉아서만 당할 소냐?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싸워야지. 천명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그 때에 기포명령을 내린다. 이건 백범일지에 나온다.
해월이 마지막으로 기포명령을 내린 것은 1894년 9월 18일이었다. 그때 김구는 그때 자신이 목격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선생은 진노하는 안색으로 순 경상도 어조로 호랑이가 물러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서 싸우자.
-백범일지-
그래서 호서군과 호남군이 논산에서 합쳐서 공주로 가고, 우금치전투에서 당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비참하게 패하게 된다. 동학의 마지막은 최 해월 선생이 기포명령을 내려서 마지막 결전을 한 것이다.
해월 선생도 마지막에는 ‘안 되겠다! 도저히 갈 데가 없다.’하시면서 명령을 내리신 것이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판단을 유보했다.
14. 전봉준의 마지막 모습
내가 상당히 눈물겹게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해야겠다.
供草라고 해서 전봉준이 심문받은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다. 김옥균 밑에 있던 서광범이라는 사람은 김홍집 내각의 법무대신으로 있었는데, 그 사람이 취조하고, 일본 영사가 옆에 있던 기록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서광범(徐光範, 1859 ~ ?) : 김홍집 내각의 법무대신. 전봉준을 심문하고 사형판결을 내렸다. 당시 개화파들은 전봉준과 대원군을 한패로 몰고 친일적 개혁을 지지했다.
여길 보면 생생한 전봉준의 목소리를 그대로 들을 수 있다. 이렇게 귀한 자료를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게 소중하기도 하지만, 이걸 보면 얼마나 가슴이 저리는지 모른다. 전봉준 입으로 하는 석명 과정이 그대로 다 들린다. 처음에 이름을 묻고, 이어서 나이와 사는 곳을 묻는다. 이렇게 나가는데 참으로 눈물겹다.
問 : 爾姓名爲誰?
供 : 全琫準
問 : 年歲何?
供 : 四十一歲
問 : 居在何邑?
供 : 泰仁山外面東谷
마지막 심문을 하니깐, 전봉준이 마지막으로 대놓고 한 이야기가 있다.
“내 한몸의 害(해)를 위해 起包하였다면 어찌 男子의 일이라 하겠는가? 衆民이 寃歎(원탄)하는 故로 백성을 위해 除害(제해)코자 한 것이었다. 내 이제 어찌 구구히 生命을 위해 活路(활로)를 구하리오?”
그러면서 서광범이랑, 재판관을 향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희들은 나의 敵이요, 나는 너희 敵이라. 내가 너희들을 쳐없애고 나라를 바로잡으려다가 도리어 너희 손에 잡혔으니 너희는 나를 죽일 뿐이요 다른 말은 묻지마라. 내 敵의 손에 죽을지언정 敵(적)의 法의 적용을 받지 않으리라.”
그야말로 피눈물 나는 역사이다. 전봉준은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리고 형장에 끌려 나가면서 외친 한 마디가 일본 신문에 나온다. 이런 이야기였다.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가는 사람에게 내 피를 뿌려주는 것이 가할진대 어찌 컴컴한 적굴속에서 暗然(암연)히 죽이는가!”
왜 자신을 어두운데서 죽이느냐는 말이다.
15. 전봉준의 마지막 시
이렇게 돌아가시면서 마지막으로 시를 하나 남긴다. 내가 이 시를 무척 좋아한다.
時來天地皆同力(시래천지개동력)
때가 오니 하늘땅이 하나되어 일어나더니
때가 오니 천지가 다 하나로 힘을 합치더라는 말이다.
運去英雄不自謀(운거영웅불자모)
운이가니 영웅이란들 어찌해볼 도리없다
흩어질 때가 되면 다 흩어지고 마는 것이다. 자기가 동학의 기치를 들었을 때는 모든 천지가 모여들다가 이제는 운이 가니 영웅이라 한들 어찌 해볼 도리 없다.
爲國丹沈誰有識
나라위한 붉은 마음 그누가 헤아릴까
그러면서 제일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기가 막힌다.
絞台虛作一孤魂(교태허작일고혼)
교수대에서 헛되이 외로운 넋 될뿐이런가
고독한 혼이 되어 교수대에서 사라지고 마는 내 인생이란 말인가.
아주 애절한 시이다.
16. 청포장수 울고간다.
우금치에서 패하여 도망을 가다가 순창의 피로리라는 데로 옛날 자기 부하인 김경천의 집에 갔었다.
순창(淳昌) 흥복산(興福山) 중턱 피로리(避老里)에서 옛 부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잡힘. 1894년 12월 2일 밤이었다.
그때 녹두장군의 목에 현상금 일천 냥이 걸려 있었고, 밀고를 하면 군수로 제수를 하겠다고 했다. 김경천이라는 놈이 옛 부하인데도 불구하고 눈이 멀어서 밀고를 한다. 그래서 이 양반이 순창 피로리에서 잡힌다. 호송되는 유명한 사진이 지금도 있다.
그걸 보고 우리 백성들이 부른 노래가 이것이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요새 젊은이들은 이걸 모른다.
녹두는 전봉준이다. 왜 녹두냐 하면, 전봉준이 키가 작아 콩알만 하게 생겼다. 그리고 녹두가 단단하다. 작고 단단하다고 해서 어렸을 때부터 붙은 별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이렇게 아름다운 민중의 시를 썼다.
우리 세대는 다 아는 노래다. 요즘 젊은이들도 알아야 한다. 우리 민중들은 이러한 비극적인 결말을 이런 시로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제가 지금 동학에 대한 이론 등 너무나 해드릴 말씀이 많은데 안타깝다. 해월과 이 사람들의 세계는 정말 피눈물 나는 역사였고, 우리가 살아온 가장 진실한 역사이다.
이 시간을 여러분들과 ‘새야새야’를 부르면서 끝내겠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