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 - 왕은 따로
논다. 왕처럼 따로 노는 남자가 있다.
뭔가 다르긴 다르다.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 된다. 기품이 있다.
역시 왕의 피가 흐른다.
백조도 따로 논다. 백조처럼 따로 노는 오리가 있다.
뭔가 다르긴 다르다. 다른 오리들과 차별화 된다. 그래서 미운
오리새끼이다. 백조이다.
땅은 혼돈하였고 공허하였으며 흑암으로 덮여 있었다. 거기에 인간의
고통과 신음이 있었다.
살고자 하는 인간의 부르짖는 절규가 하늘에까지 들리어 하늘에 계신
왕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땅의 인간과 거리를 두고 따로 놀던 하늘의 왕이 빛을 뿌리며 인간
세계로 내려와 그들과 함께 하였다.
그러나 이
왕도 따로 놀게 되었다. 이번에는 인간들이 그를 따로 놀게 했다. 그들과 너무 다르므로.
멀리 다른 별에서 지구로 온 어린 왕자는 왕따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왕자이기 때문에.
그의 순결함이 사람들로 하여금 배척하게 했다. 그의 순수한 용기가
사람들의 비겁함을 드러나게 했다.
그의 단순함이 복잡한 시대에 복잡하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흔들어 놓아 당황케 했다.
안일한 삶의 타성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말, 행동, 몸짓
모든 게 도전적이 되어 불편케 했다.
땅은 이미 폐허로 변하고 있었다. 인간의 욕심이 전쟁을 일으켰고,
서로 미워하고 죽이게 했다.
죄악으로 물든 세상에 내려와 남루한 죄인의 옷을 입고 세상을
바라보는 왕의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팠다.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세상을 멸망시켜버리는 것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길을 택했다. 세상을 멸망케 하는 대신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대신 그는 죽어야 했다.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 대속의 제물이 되어야 했다.
왕은 세상에서 다시 왕따가 되었다. 본래대로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갔다. 왕이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예수의 제자가 되어 '작은 예수'(christian)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미운오리새끼가 될 수밖에 없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속한 오리새끼들은 물가장자리 수풀 사이에서 떼지어 꽥꽥거리며
흙탕물을 일구고 아주 재미있게 논다.
그러나 미운오리새끼는 그들 틈에서 떨어져 호수 한가운데서
먼 하늘을 바라보며 고고히 떠있다.
백조이기 때문이다. 백조는 따로 논다. 왕처럼 따로 논다. 세상의
그들과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백조의 울음소리를 들어
본 기억이 없다. 일생에 마지막 순간 딱 한 번 울고 죽는다는 말이 사실일까?...
사람들이 묻는다.
"백조의 이야기라면 아름답고 잔잔한 호수에 고요히 떠있는 백조
사진을 이미지로 사용하지 않고,
왜 황폐한 도시를 바라보는 왕, 그것도 아주 빈약하게 보이는 어린
왕자를 올려 놓았느냐" 고...
나는 대답한다.
"바다에서는 바다 얘기를 안 합니다. 바다 이야기는 정작 바다를
떠나 왔을 때 바다를 그리며 하게 됩니다."
세상이 뿌연 잿빛 안개 속처럼 불투명하게 보이는가? 음산한 SF의
장면들이 두렵게 떠올려지는가?
난세(亂世)가 영웅을 만들듯이 왕은 민중들의 고통 속에서 비로소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칭송의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 모든 역설적 궤변을 뒤로 한다 하더라도 지금의 드높고
푸른 가을하늘을 바라보며 왕의 귀환을 기대한다면
그는 진정 복된 자요, 삶으로 예수의 제자임을 증거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다. 이제 섞인 듯하면서도 따로 놀 때이다.
- Abraham J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