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2일 일요일
소멸하는 마을
김미순
지난 육 개월 동안 쾅쾅 텅텅 집을 짓느라고 고생했던 영수가 우리를 초대했다. 그동안 농막에서 살다가 드디어 새 집으로 들어가는 걸 축하하기 위해서다. 우리 절친인 병언이도 함께다. 거기다 목사님 부부, 마을 주민 서른 다섯 명도 다 불렀다.
이층 양옥집이었는데 1층은 영수 부부가 생활하고 윗 층은 자식들이 왔을 때 편히 지내라고 윗 층을 세웠다는거다. 영수는 자식들이 큰 돈을 들여 지어준 거라 자식 키운 보람이 있다고 입에 침이 나도록 자랑을 쳤다. 집 안의 집기들은 딸이 마련해 주었다고 설명해 줬다. 들어가자마자 대형티비가 떡 버티고 있었다. 눈이 침침하다고 했더니 무려 48인치 티비를 들여줬디고 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안마의자, 실내용 자전거, 삼 인용 소파와 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식탁, 분홍색 씽크대가 멋들어지게 자리 잡았다.
거실에 두 쪽으로 상이 놓였고 영수 딸과 병언이 베트남 며느리가 반찬을 놓고 있었다.
나는 목사님 부부와 내 마누라, 손주 창현이를 데리고 삐까번쩍한 영수집에서 거나한 점심을 먹었다. .
" 영수야, 자식 키운 보람이 있다. 어디 갔냐?"
" 이 층에 손주들과 노느라 정신이 없다. 내려오라고 불를께"
아들들 둘과 손주들 여섯, 사위 한 명이었다. 참 부러웠다. 영수는 농사만 지어 자식들 셋을 고등학교만 보냈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온 애들은 광주에 있는 차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 열심히 살고 있다. 딸은 오빠들 회사의 직원과 결혼하여 벌써 딸 둘과 아들 하나의 엄마다. 그 애들이 영수의 노후를 책임지느라 이런 이벤트를 마련한 것이다. 어려서부터 영수는 순박하고 성실하고 논 밖에 모르는 손수한 농부였다. 아내도 아랫마을에서 참한 어머니한테서 자라난 처자였다. 홀어머니와 농사짓는 오빠의 가르침으로 농사일은 끝내주었다. 성격도 온순하고 다정해서 온 마을에서 칭찬받는 마누라다. 부부를 닮아선지 자식들도 모난 것 없이 싹싹하고 둥글둥글했다.
아내 복이 없기는 병언이를 빼놓을 수가 없다. 고등학교 삼학년때 아들을 배고 시집을 온 병언이 처는 병언이 부모님, 병언이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도 시름시를 앓았다.딱히 병명을 알지 못한 채 아들이 세 살 때 세상을 떴다. 몇군데 재취를 알아보았으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지금까지 혼자 산다. 아들이 토마토 비닐하우스를 하면서 베트남 각시를 얻고 손주 셋을 낳아줘 그 재미에 산다.며느리가 워낙 예쁘고 영리해서 벌써 우리말의 달인이다. 사투리 대회에 나가 금상을 타기도 했다. 요즘엔 비닐하우스에 가끔만 가고 하루종일 막내 손주랑 알콩달콩 놀고 있다. 가끔 손주들 데리고 구판장에서 막걸리 한 잔씩 나눈다.
" 야, 말 잘 듣냐?"
" 뻰질뻰질해서 애를 먹는다. 누굴 닮았는지"
나는 며느리를 생각하며 병언이에게 꼬아바쳤다.
" 며느리가 직장을 다시 다니기로 했담서? 근디 이번 추석때 정근이만 내려왔단가,?"
" 금메, 아마도 친정이 일본에 있다보니 친정 부모 만나러 간 모양이야"
" 못 됐네, 아이도 있고 가까운 시댁이 먼저 아닌가. 쯪쯪"
나는 정말 속이 상하다.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면사무소에 주사로 시작하여 면장까지 근무한 이유가 뭔데~
아들 하나 잘 키우자고 고등학생 때부터 서울로 유학 보내고, 대기업에 취직을 할 때까지 별의별 일을 다 하였다. 원룸 보증금도 비싼 곳,, 월세도 비싸 곳, 돈 값을 하겠다 싶어 비싼 곳을 골라해 주었다. 기숙사가 싫다고 하여 비싼 원룸을 얻다보니 내 월급이 바닥이 날 것 같앗다. 다행히 미누라가 예금한 게 있어 보탬이 되었다.
친구들은 역시 좋은 직장에 다니는 아버지 자식들이 공부도 잘 한다며 나를 부러워 했다. 대기업에 취직할 때도 한 턱 내라고 성화를 하여 읍내에 나가 삼겹살을 샀다.
첫 월급을 타서 백 만원을 주었다. 그 이후 한 달에 삼십 만원 씩 용돈 조로 주었다. 나는 그것도 감지덕지라 여기며 지 인생에 제일 큰 일, 집 살 돈을 모으라고 했다. 요즘 아가씨들이 집을 가진 사람을 최고의 신랑감으로 친다고 하니 아들의 그런 행동은 당연한 것이다. 나는 퇴직금도 있고 연금도 있으니 걱정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번 추석 때 아들이 손주를 데리고 왔다. 며느리가 일을 하게 되었단다. 아들을 맡길 때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나를 찾은 것이다.
나는 요즘 저출산위기극복 사업에 고문으로 참가하고 있다. 점점 인구가 줄어가는 마을을 살리기 위해 귀촌 인구를 확대하고 빈 집을 리모델링해서 싼값에 임대해 주는 일이다. 특히 면장을 역임한 나는 솔선수범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우리 아들이 귀촌을 한다는 것엔 반대한다. 벌어먹을 일자리도 없고 우리 아들이 농사는 잼 뱅이라 권하기도 힘들다. 아들 스스로가 귀촌을 원한다면 어쩔 수 없이라도 허락하겠지만 그럴 일은 없다
그런데 추석이 지나고 주식이 폭락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나는 관심도 없고 해 본적도 없는지라 귓등으로 흐렸다.
" 영수야, 니 큰 일 날뻔 했다매 ?
" 야 말도마라 전화로 좋은 주식 물건이 있다고 하더라 이자도 엄청 높다고 해서 예스라고 할 뻔 했는데 마누라가 그런 전화는 보이스 피싱이라고 해서
바로 끊었자. "
병언이도 농사 짓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배우게 해 주는데도 돈을 준다는 말에 혹 갈 뻔했다고 한다. 며느리가 영리해서 거지 될 뻔했는데 구해줬다고 자랑쳤다.
나는 전혀 그런 일도 없는데 주식은 무슨~~
그날 밤 며느리가 왔다. 아내도 창현이도 쌕쌕 잠에 빠져 있는데, 살이 쏙 빠진 몸으로 거실 끝에 앉았다.
" 아버님, 잘 계셨어요?."
" 그래, 별일 없지야"
" 아니요. 그이가 오면 자수하라고 해야 해요."
아니, 무슨 말인가? 아들이 주식을 했다. 매일 주식만 들여다보니 높은 사람한떼 소리를 들었나 보았다. 회삿돈을 횡령하고 상사를 폭햄하였다고 한다.아니, 우리 아들이 이런 나쁜 일에 주범이라니? 병언이나 영수의 삶에 엄청 못 따라가는 내 삶.
나는 다음 날 집을 부동산에 내 놓았다. 시골집이라 사는 사람이 없어 반값도 겨우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귀촌을 꿈꾸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기다려 보자고 한다.
나는 밤봇집을 싸는 사람처럼 친구들한테 아무말도 안 했다. 목사님께만 자세히 말하고 강원도에 기도원으로 갔다. 두 번이나 갈아탔다. 창현이는 기차를 타는 것이 처음이라 눌루랄랄 노래까지 부르며 엄마 품, 할머니 품을 오가며 신나게 놀았다. 그 둘은 침울한 표정으로 밖만 쳐다 보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