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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의 말씀(76) : 청함으로 안 된다. 택함을 받아야 한다
마태복음 22:1~14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 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지난 금요일은 6.25 한국전쟁 71주년이었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다시 생각해보고 전쟁에 참전한 우리 군인들 학도병들의 희생과 죽음을 기념하며 지난 한 주간을 보냈지요. 그래서 저는 우리 연동 교회가 6.25 한국전쟁 때 어떤 상황을 겪었는지 연동교회 120년 사를 조금 살펴 보았습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 연동교회 목사님은 전필순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전 목사님께서는 625 사변이 나서 부산으로 피난을 가시고 그곳에서 부산으로 피난온 우리 연동교회 성도님들을 다시 만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산으로 피난 온 연동교회 성도님들이 이곳에서 우리 연동교회 이름으로 다시 예배를 드리자고 제안을 했지만 전필순 목사님은 우리 부산에 그동안 함께 예배 드렸던 모든 연동교회 성도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다 모을 수도 없으니 부산에 부산 연동교회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거나 교회를 세우지 맙시다. 우리 각자 가까운 교회에서 일단 예배를 드리고 전쟁이 끝나면 다시 연동 교회 갑시다 라고 권면하셨다고 합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또 다시 전쟁이 나면 그래서는 절대로 안되지만 그런 어떤 일이 생긴다면 저도 전필순 목사님처럼 그런 지조를 지키는 목사가 되야겠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연동교회는 127년 동안 이 연못골을 지켜왔습니다. 이처럼 전쟁이 나던 어떤 큰 일을 겪던 반드시 이 자리를 지켜내야 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더욱더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625 아픔과 상처를 우리가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아픔과 상처 가운데 우리 연동교회가 항상 바위처럼 이곳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교회를 떠나셨거나 영적으로 방황하셔서 교회에서 멀리 계시거나 아니 71년전 처럼 전쟁이 나서 교회를 떠나게 될지라도 우리 연동 교회는 바로 이 자리 이 곳에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다시 돌아오게 되면 항상 오셨던 그 길로 오시면 됩니다. 270번 버스 타고 오시면 되고요 예 108번 버스 타고 오셔도 됩니다. 특별히 영적 방황 속에서 연동교회를 떠나셨던 분들이 코로나로 교회를 갈 수 없는데 집 안에서 우리 연동 교회 예배 드릴 수 있게 됐다고 하시면서 내가 그곳을 떠났지만 몸이 떠났지만 그때 내가 섬기던 교회를 늘 그리워 하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성도님들이 다시 돌아오길 원합니다. 다시 오십시오 저희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시는 방법대로 그대로 오시면 됩니다. 연동교회 항상 이 자리에 있겠습니다.
옆에 있는 분들과 함께 인사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뵙게 되어 행복합니다. 다시 뵙게 되어 행복합니다. 한 주 떠나 있었지만 다시 뵙게 되어서 너무나 행복합니다. 오늘 말씀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의 말씀 일흔 일곱 번째(76 번째) 청함으로 안 된다. 택함을 받아야 한다 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눠 보고자 합니다. 1986년 롤랑 조페 라고 하는 감독이 더 미션 The Mission 이라고 하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제목대로 기독교적 색채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션 선교 사명 이런 부분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지요. 그렇다고 이것이 기독교 영화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 영화는 기독교적 배경은 갖고 있지만 그 시대의 역사를 계속해서 반영하고 있고 더불어 그 가운데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담아내고 있어서 기독교 영화다 라고 단정지어서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남미 오지 마을에 들어간 한 선교사님이 순교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원주민들이 있는 선교지를 포기하지 않고 또 다른 선교사를 보냅니다. 그런데 그 선교사는 그곳에 가서 먼저 간 선교사를 죽여서 순교하게 만든 그 원주민들 앞에서 악기를 들고 음악을 보여줍니다. 음악으로 서로 영적 교감을 나누면서 그 가운데 그들의 마음을 사게 되었고 그 선교지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영화를 보면 또 다른 주인공인 한 명이 나옵니다. 악랄한 노예 상인입니다. 그런데 그가 우발적으로 자신의 동생을 칼로 찔러 죽이게 되지요. 이에 대한 죄책감 죄의식을 가지고 그 자신의 죄를 탕감받기 위해서 자신이 그렇게 노예로 삼았던 원주민들이 있는 그 마을에 선교사역을 도와주러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자신이 동물처럼 취급했던 그 원주민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며 그들과 함께 아름다운 마을을 꾸미고 교회를 짓고 예배를 드리는 그 먼저 온 선교사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 지를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헌신적으로 그 선교사님의 사역을 도와주고 원주민들과 함께 또 다른 천국을 만듭니다.
그런데 식민 국가였던 한 유럽의 나라가 그 선교지를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그곳에 총과 칼로 무장된 군인들을 보내게 됩니다. 평화로운 삶을 살았던 원주민의 그 마을에 군인들이 쳐들어오자 그 마을은 혼란을 겪게 되지요. 그런데 그때 그 마을을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로 새롭게 만들었던 먼저 온 그 선교사는 군대 개입의 그들의 총과 칼에 개의치 아니하고 평화로운 예배만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뒤늦게 회개하고 먼저 온 선교사님과 함께 예배를 지키려고 했던 나중에 온 그 선교사는 예전에 자신이 들었던 총과 칼을 다시 들고 그 원주민들과 함께 쳐들어 오는 그 군대를 대항해서 그 마을을 그 원주민들을 지켜주려고 합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한 쪽은 세상에 폭력적인 공격에 비폭력 무저항으로 지키려고 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한쪽은 세상의 공격과 침략에 그들도 똑같이 총과 칼로 저항해서 자신의 신앙과 교회를 지키려고 하는 거룩한 전쟁을 하려고 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영화의 결론은 총과 칼을 쥐고 달려오는 군대에 비폭력 무저항으로 예배와 자신의 신앙을 지키려고 했던 그 선교사는 죽습니다. 또 원주민들과 더불어 총과 칼로 같이 무력으로 칼에는 칼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맞서 싸워서 신앙을 지키려고 했던 그 선교사와 다른 원주민들 모두가 죽게 되고요 실패하게 됩니다.
하지만 진짜 마지막 장면은 그 전쟁 가운데 서로 양쪽의 선교사가 모두 죽고 원주민들도 몰살당하게 되었지만 그 가운데 살아남은 아주 극소수의 원주민들이 원래 도망쳐서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들의 목에는 작은 십자가가 걸려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여전히 하나님의 역사는 어떤 방법으로든 이어져 가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1980년대 90년대 많은 교회에서 바로 미션이라고 하는 영화를 가지고 신앙 토론을 많이 했지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국가들 패망하면서 우리나라도 군부독재 그리고 민주 국가의 그 과도기를 교회가 이 시기에 교회가 그냥 기도만 하면 되는가? 예배만 드리면 되는 건가? 그러면 하나님이 다 우리의 역사를 잘 이끌어 주실까 라는 것에 고민하는 그룹이 있었고요, 다른 그룹에서는 직접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에 나가서 세상에 나가 자유와 민주주의의 외치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것을 우리 교회가 우리 그리스도 인들이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맞는가 라는 것을 고민하는 양쪽의 그룹이 있었습니다. 양쪽의 그룹이 서로 신앙적인 토론을 많이 해왔었는데 바로 그때 이 미션이라고 하는 영화가 아주 중요한 신앙적인 소스를 주었습니다. 서로 상반된 모습이지만 다 내 신앙 내 교회를 지키려고 하는 모습이 있지요. 어떤 것이 옳을까 어떤 것이 그를까, 서로 얘기하긴 참 쉽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토론의 소스가 됐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연동교회를 다니셨던 여러분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교회에서는 이렇게 많이 얘기했습니다. 연동교회처럼 우리도 이 나라의 자유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세상에 나가 행동하는 크리스찬과 교회가 되자! 아니다 지금처럼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것으로 그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자가 되자. 그런 식으로 양쪽에서 신앙 토론을 할 때 항상 연동교회는 그때 당시에 교회로서 본이 되는 교회였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자랑스러워 하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이런 신앙 토론은 그때도 지금도 답을 내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혼란스러운 세상에 비폭력 무저항으로 오직 예배 오직 기도로 신앙을 지키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칼에는 칼 총에는 총, 그 불의에 맞서 같이 피흘리고 맞서 싸우고 행동하는 크리스찬의 모습이 진짜 우리의 신앙의 모습인지, 사실은 어느 쪽이 옳다 라고 말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둘 다 모두 필요한 신앙이고요, 우리 눈에 들어오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서로 완전히 다른 신앙이 우리 교회 안에 공존하고 있고 이 양쪽의 신앙이 함께 있을 때 건강할 수 있습니다. 한 쪽을 무시해선 안됩니다. 한 쪽으로 기울어져도 안됩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도 그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통합적인 신앙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청함 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청함에 대한 택함의 삶을 살아야 한다. 곧 부르심 만으로는 안 된다. 그 부르심에 대한 응답하는 크리스천의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부르심을 받은 자도 하나님의 택함을 받기 위해서 살아갈 때 진정한 부르심의 완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 그 자체, 그 소명의 순간 그 때 느꼈던 희열과 그때 내 눈 앞에 섬광처럼 나타났던 어떤 신비적인 현상 그리고 여러분이 믿는 어느 한 싯점, 이단에서는 당신 언제 예수 믿었습니까? 그 믿음의 싯점을 얘기하죠.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 몇 초 그거를 알아야만 진정한 믿음이 들어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믿음을 알고 있는 것 어떤 믿음에 대한 의지 내가 믿고있어 라고 하는 감정 그것이 있으면 완전하고 제대로 된 크리스천이 되었다 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은 그렇지 않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부르심 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점을 알고 있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러 소명을 주시고 소위 콜링 Calling을 주시고 부르실 때 섬광처럼 나타난 것 그것 만으로 여러분이 크리스천이 다 되었다 라고 생각하시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믿음을 갖게 됐던 몇 년 몇 월 며칠을 알고 있는 것으로 믿음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그때 부르심 받은 이후로 그때 그 뜨거움을 가지고 매일 매 순간 성령 하나님을 통해 성화된 삶을 살아가는 자가 될 때 진정한 크리스찬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바로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천국 비유라고 얘기하지요. 임금이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연 것이 천국과 같다 라고 얘기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임금이 많은 사람을 초대했지만 어떤 이들은 자기 일이 바쁘다고 안 가고 어떤 사람들은 그 임금이 싫어서 임금이 보낸 그 종들을 다 죽이기도 합니다. 나는 절대 그 초대에 가지않을 거야 하며 거절하지요. 그렇게 잔치에 참여한 합당한 사람이 없자 임금은 거리로 나가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불러 모읍니다. 콜링 Calling을 하지요. 그런데 그 가운데는 악한 자도 있고 선한 자도 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청함을 받았다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지만 그 임금은 그 모든 사람을 잔치에 초청을 했지만 그 모든 사람을 택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11절 12절을 함께 읽습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 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아니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그리고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무엇이라고 증거합니까? 함께 읽겠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가 적으니라'
초대는 다 받았죠 콜링은 다 받았습니다. 예수의 부르심 지금 우리가 다 있죠. 하지만 오늘 말씀이 얘기하는 것은 그 가운데 택함 받은 자는 적을 것이다. 오늘 내용은요 뭐 이런 임금이 다 있어? 이런 잔치가 있어? 그런 사실을 근거로 팩트 체크하려고 이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야, 정말 이런 임금이 있느냐? 무슨 잔치 하는데 사람을 죽이고. 옷 안 입었다고 저쪽에 사람들 배제시키고 뭐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 잔치가 있는냐? 이런 임금이 있을 수 있겠느냐 라고 하는 식으로 이 말씀을 읽을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요 풍유 또는 알레고리 라고 해서 비유와 은유와 어떤 의인법을 쓰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겪는 어떤 경험과 사건 어떤 상황들을 상징과 비유를 통해서 그것을 깨닫게 하는 어떤 메세지를 주고자 하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이야기는 천국에 대한 비유 이야기다 라고 먼저 말씀하시지요. 따라서 우리는 혼인잔치 천국 비유에서 임금에 대한 윤리적 판단 천국 잔치에 대한 뭐 사회 법적인 문제를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전체 얘기에서 주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이냐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의 주제는요 천국과 구원의 삶은 앞에서 말씀드렸던대로 청함 만으로 안 된다는 것이죠. 택함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르심 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소명에 걸맞는 참된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청함 부르심 콜링 소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청함과 부르심 그 콜링과 소명의 삶에 대한 부름 받은 자의 응답이 있는 삶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명 부르심 그때 거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 사명의 삶과 통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바로 그 부름받은 자의 응답이 있는 삶을 오늘 본문 11 절에서는 예복을 입는 자라고 표현하죠. 그렇게 비유합니다. 부름과 청함을 받았더라도 잔치 자리에 들어갈 때 걸 맞는 옷을 입어야 됩니다. 걸맞지 않는 의복과 격식을 가지고 간다면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 라고 얘기하죠. 여기서 예복 격식은요 소명에 대한 내 반응적인 삶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코로나 이전에도 수 많은 문제들이 있어서 그 신뢰도가 계속 떨어져 갔지만, 코로나를 겪으면서 엄청난 수치와 통계로 믿음과 신뢰를 아니고요 아이 그런 것은 생각지도 않고요, 더 불신과 어려움을 주는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청함 만으로 안 되고 반드시 택함받는 삶 택함에 걸맞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지금 통계를 보니 왜 한국 교회가 불신을 받는 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소명에만 머물러 있는 저희들이 그 사명의 삶을 살아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니 지금 이렇게 불신받는 종교 집단이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통계를 보니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이런 질문을 합니다. 왜 한국교회가 불신을 받는지 알게 될 것이다 라는 것에 대한 질문으로 한국교회의 공교회적인 역할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요 여러분 일반 평신도 일반 교인들은 절반 이상이요 한국 교회가 공교회적인 역할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는 질문에, 세상과 소통하고 대화하고 세상 속의 교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된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반면에 저와 같은 목회자들은 뭐라고 대답하느냐면 그렇게 세상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그런 교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에 50% 가 안됩니다. 성도님들과 목회자들과 벌써 생각이 갭 Gap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목사들이 평신도들 보다 더 소명과 더 부르심 하나님의 부름받은 사람이라는 의식이 강한 사람들인데 도리어 목회자들이 평신도들 보다 더 교회를 선교적인 교회로 생각하지 않고있다는 거죠. 교회 밖에서의 교회가 어떤 역할을 할지 더 바르고 온전한 생각을 하지 않더라는 겁니다. 오히려 성도들 보다 더 부족한 생각을 성직자들이 하고 있더라. 목사들이 청함과 부르심 소명과 부르심 받은 것에 취해 있더라는 겁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소명의 그때 그때 번쩍 섬광이 나왔던 그 때를 가지고 목회하고 있습니다. 그 성직에 그것만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죠. 오히려 성도님들이 그렇지 않다 그것에 묶여 있으면 안 된다 더 세상을 향해 대화하고 소통하고 그곳에서 바른 교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해야 된다 라고 성도님들이 생각하고 있는데, 목회자들은 여전히 소명에 묶여 있다는 것이죠. 저도 목회자니 저부터 회개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되었던 오늘 이와 같이 바로 이런 청함과 소명에만 빠져있는 교회 안의 그룹이 있는데 그 그룹이 청함에 걸맞는 택함받은 온전한 사명의 삶을 살아가는 그런 교회 모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룹이 교회 안에서 서로 계속해서 양쪽으로 나눠지고 있으니 교회가 더 침체하고 더 불신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더 통계자료를 보시겠습니다.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한국 교회의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해 사회적인 교회가 교회 역할을 교회 사명을 회복하기 위해 한국교회 특별히 대형교회가 해야할 일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주황색이 일반 성도이고요 파란색이 목회자들인데 이미 딱 보시다시피 서로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일반 성도들은 1등으로 가장 많이 대답한 것이 사회와의 적극적인 소통과 사회 발전을 위한 활동을 우선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대답이 많은 것이 미자립 교회를 지원하고 교회 양극화를 해소해야 된다. 그런데 목회자들은요 가장 많이 응답한 것이 일반 성도들이 대답한 두 번째 대답을 가장 많이 대답했습니다.
미자립교회를 지원하고 교회 양극화를 해소해야 된다가 가장 많고요 사회 적극적인 소통과 사회 활동하는 두 번째로 대답했습니다. 저는 목회자들과 평신도가 서로 다른 답을 한 것에 중요하게 생각할 포인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함께 통계를 냈던 단체에서 일반 국민에게 교회 다니지 않는 크리스찬이 아닌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개신교가 신뢰받기 위해서 개선해야 될 부분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던졌는데, 그들의 답의 첫 번째가 일반 성도들이 대답했던 그 대답을 했습니다.
사회와의 소통과 사회적인 공익을 추구하는 교회가 될 때 교회가 신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죠. 일반 성도 여러분들이 대답한 그대로 여러분이 가장 많이 대답한 그것을 세상 사람들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더라는 거죠. 단 이 단에 서있는 목회자들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 목사들은 어떻게 하면 내 주변에 있는 목회자들을 도울 수 있을까? 내 동문들 나랑 친한 사람들 내 라인에 있는 사람들을 좀 더 혜택을 주고 그들을 좀 도와줄 수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은혜를 베풀기 원하고 그 가운데 나누고 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를 원하는데 목회자들은 도리어 자기 테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뭔가 더 혜택을 주면 좋지 않겠나, 그 생각에 빠져 있다는 거죠.
목회자들은 소명 의식이 강하지요. 어떻게 목사님 되셨습니까? 물으시면 아마 며칠간 부흥회 해도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많은 시간을 이야기해서 제가 부름받은 하나님께 콜링 받아서 성직자가 된 것을 아마 간증하는 이야기가 차고 넘치실 겁니다. 그렇게 목회자들이 말이 많습니다. 제 아내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목사가 설교 안 할때, 목사 다운 사람이 진짜 목사라고요.
좀 편하게 설명드리면 제가 옷 벗고 그 양복 안 입고 편하게 가고 가만히 있을 때 저 사람은 목사구나 라고 생각해야 제가 진짜 목사다운 거죠. 하루는 저녁에 뭐 사무실에 두고 와서 찾으러 왔습니다. 제가 모자도 쓰고 뭐 옷도 편하게 입고 왔는데 그 야간에 근무하시는 집사님이 저를 못 알아 보시는 겁니다. 누구냐고 왜 들어오냐고 여기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모자 벗고 저 마스크 벗고 저 김주용영 목삽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좌중 웃음).
제가 그리고 다시 들어오면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 내가 아우라가 부족하구나 은퇴하신 목사님하고 같이 식사하는데 은퇴 목사님이 어제 전화를 하셨습니다. 여보세요 했는데 통화가 다 들립니다. 상대방이 아 목사님 그러는 겁니다. 그랬더니 그 은퇴하신 목사님이 아 난 여보세요 라고만 했는데 내가 목사인줄 어떻게 알았어? 아이 목사님 왜 목소리를 모르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아 저는 그 목사님이 참 존경스러웠습니다. 저는요 여보세요 연동교회 김주용 목사님입니다. 그러면 누구라고요 반문합니다. 아무리 제가 통성명을 해도 제가 목사인줄 모르는 분도 많으십니다. 정말 저희들이 내가 부름받고 소명 받았을 때 그때만 붙잡고 살아가니 그 이후에는 목회자로서의 그 택함 받은 자의 삶을 보여줘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부분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 성직자들이 정말 그렇게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 부름과 청함을 받았는데 그 부름받고 청함 받은 만큼 그에 걸맞는 목회자와 성직에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 청함 받은 신앙 만큼이나 하나님께 택함 받을 수 있는 천국의 예복을 입고 있느냐? 이렇게 목사 가운 입고 목사 옷을 입어야 제가 목사인 줄을 그제서야 사람들이 알게 된다는 이 사실이 부끄러운 일이지요. 앞에서 본 통계수치는 특별히 우리 성직자들이 그렇지 않은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바로 교회 침체 교회 불신 전도와 선교를 더 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지요.
제가 유학 중에 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한국에서 목사까지 되신 분인데 다시 미국에 오셔서 신학대학원 목회자 수료과정을 다시 수련과정을 다시 들어갔습니다. mdb 과정에 들어오신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목사 수련과정을 왜 또 하십니까? 한국에서 이미 신학대학원 다 나오시고 또 목사안수까지 받으셨는데 왜 미국에 와서 미국 신학교에서 MDB 과정을 또 하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본인이 아주 잘 나가는 회사에 몇 억 연봉을 받았던 사람인데 하나님께 받았는데 소명을 컬링을 받았다는 겁니다. 너 목사가 되라. 그때 그 콜링의 과정 그것을 간증으로 얘기하면 너무나 은혜로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얘기를 몇 교회에서 했더니 너무 은혜롭고 그 간증 소명 받을 때 콜링 받았을 때 그 신비로운 체험을 우리에게 더 전해 달라고 이 분이 곳곳의 교회에 갔습니다. 이분이 전도사인데 신학대학원 다니는 전도산데 곳곳 교회에서 계속해서 부름을 받는겁니다. 집회 해달라고 부흥회 해달라고 간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3년 동안 이 분이 제대로 공부를 못했습니다.
그냥 그저 전도사 타이틀로 그 소명 받았을 때 그 사건 그 신비적 체험만 간증하러 다닌 거죠. 그리고 어떻게 하다가 목사 안수까지 받았는데 목회 현장에 나가서 진짜 설교를 하려고 하니 소명 받았을 때 얘기 밖에 없더랍니다. 3년 동안 신학공부 영성 훈련을 했어야 되는데 그거 하지 않으니 진짜 현장에 목회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본인이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한국에서도 공부하려고 하는데 이미 목사안수까지 다 받고서 할 수가 없어서 다시 미국으로 도미해서 그곳에서 아무도 모르는 그 신학교에서 다시 mdb 목사 수련과정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이 그분을 목사로 부르셨던 신비로운 청함 소명의 때 만을 붙잡고 살았던 것이지요.
그때 그 신비 거룩한 기억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으로 청함을 받았던 그때 그것만 붙잡고 사니 청함과 그 소명 그 콜링에 걸맞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서 신학과 영성훈련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소명의 순간 번쩍거리는 섬광 그거만 붙들고 살았으니 진짜 보여줘야 할 소명에 걸맞는 신앙의 삶 천국의 예복을 보여줄 삶을 보여주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목회자들이 한국에 너무 많습니다. 그런 현상 가운데 목회자와 성도들은 생각이 점점점 갭 GAP이 벌어지고 점점점 다른 생각을 하니 교회가 침체를 겪고 세상의 불신을 받는 곳이 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종종 한국 교회를 강하게 오늘처럼 이렇게 질타하는 설교를 합니다.
몇 분은 그만해라 누워서 침 뱉기인데 당신부터 잘해라 라고 얘기합니다. 저라고 제가 완벽해서 깨끗해서 이렇게 설교하겠습니까? 또한 저부터 누워서 침 뱉기 같은 이런 설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게 침 뱉는 거랑 같은 건데 하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바꿀 수 있다면 이렇게 설교해서라도 바꿀 수 있다면 저라도 설교해서 회개해서 저하나 만이라도 설교하는 설교문을 작성하면서 얼마나 회개하고 반성했는지 모릅니다. 나 하나만이라도 반성하고 회개할 수 있다면 저는 계속해서 강단에서 이렇게 설교 할 겁니다. 최근 한 기독교 비판 신문기사의 댓글에 이런 글을 보고 제가 깊은 반성을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예수 빼고 다 있다.
여러분, 거꾸로 돼야 되지 않습니까? 교회에는 예수 십자가 하나님만 있다 라구요. 우리가 그렇게 외치는 세상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하냐 하면 교회에는 예수 하나님 빼고 다 있다 라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목사만 없어지면 잘 될 거다.
웃지 않으시는 거 보니까 맞는 건가 보네요. 1, 2부 때 다 안 웃으셨습니다. 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리고 그동안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 받는 것에 만족하고 살았던 것이죠. 그 부르심에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떤 신앙의 삶을 살 것인지 어떻게 성화된 그리스도 인으로 살아갈지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번쩍거렸던 섬광의 콜링의 순간 소명의 순간만 붙잡고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 때 그 콜링 그 부르심에 이젠 내가 택함 받는 천국을 천국에 예복을 입는 삶을 살아야 한다 라고 우리에게 깨우쳐 주십니다. 아나 하나님께서 과잉으로 성장한 한국교회 그리고 유튜브 인터넷 신앙 서적을 지나치게 읽고 거기를 탐독하면서 머리만 커진 저와 여러분 같은 현대 크리스천들에게 오늘 24절의 말씀을 경고로 주십니다. '청함 받은 자는 많되 택함 입은 자는 적게 될 것이다' 연동교회 성도 여러분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것입니다. 한국교회, 세상 사람들은 늦었다고 얘기하고요 이제 끝났다 라고도 얘기합니다. 하지만 저는 가장 늦었다 라고 생각하는 그 시점에서 우리 교회와 우리의 신앙이 새롭게 되고 거듭날 수 있는 가장 빠른 시점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 부름받은 것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소명 받았을 때 콜링 받았을 때 그 눈 앞에 있던 섬광 하나님의 음성 그것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직분 하나 가진 것에 목회자로 성직 얻은 것에 이 자리에 성직자로 계신 분들도 성직에 만족하지 마시고 그에 걸맞는 택함 받는 자의 삶을 살길 바랍니다. 그때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밟는 모든 땅을 천국으로 바꿔주시고 새롭게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런 부름받은 자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는 한 주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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