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사직, 조용한 해고
강 돈 묵
그동안 인간들은 서로 부대끼며 사는 데에서 보람과 가치를 찾고, 무리에서 열외 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은 ‘왕따’라는 말이었다. ‘우리’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면서 ‘나’는 덤으로 얻어지는 기쁨으로 만족하는 삶이었다. 그만큼 개인의 성취는 공동체의 발전을 떠나서는 이룰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구성원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만의 능력을 키우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발전은 구성원의 인정으로 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다. 주위의 평가에 의한 삶이 가치 있는 삶으로 여겼다. 타인의 힘을 빌려 일을 해결하기보다는 제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스스로 해결하려 하였고, 성과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몸부림쳤다. 무슨 일을 하든 결과물에서 만족을 찾았고, 그 안에서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들은 진정한 즐거움과 기쁨이 일과 삶이 균형을 이룰 때에 가능하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갑자기 감염병으로 인하여 사회적 거리 두기가 요구되고, 차단을 위한 마스크가 필수품이 되면서 기존의 인간관계는 찾을 수가 없다. 사람 간의 관계보다는 조화롭게 진행되는 개인의 삶과 일에 관심을 둔다. 대부분의 의사소통은 전자기기에 의존한다. 즉 접촉의 시대는 가고 접속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더 가까워지는 게 아니고, 아주 멀리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비대면으로 삶의 형태가 일대 전환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가치관의 변혁도 이루어졌다.
비대면의 사회는 절대적인 ‘신뢰’가 요구된다. 이 신뢰는 공개적인 확실성을 기반으로 한다. 반드시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를 소망하니, 자연스럽게 투명사회로 전환한다. 궁극적으로 신뢰를 위한 투명사회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상대를 믿을 수 없다. 오히려 불신의 골이 깊어 많은 부작용이 야기된다.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 미국의 20대 엔지니어 자이들플린의 틱톡이라는 플랫폼에서 처음 소개된 신조어다. 지난 7월에 처음 나타난 이 말은 석 달 만에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유행을 탔다. 미국인의 절반이 동의했고, 2, 30대에서는 무려 80%에 가까운 사람들이 절대적인 동의를 보냄으로써 미국 사회의 현실을 가늠하는 신조어가 되었다.
이 말은 진정 직장에 사표를 제출하고 떠난다는 말이 아니다. 그대로 근무는 하되 ‘할 수 있는 업무 중에서도 최소한으로만 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최소한의 범위는 직원이 받은 월급에 비례한다. 그들은 기존의 삶 태도에서 빠져나와 용감하게 자신들의 생각을 주장한다. ‘주어진 일 이상을 한다는 생각을 그만 두라.’, ‘당신의 가치는 당신의 일의 결과물로 정의되지 않는다.’, ‘일은 당신의 삶이 아니다.’, ‘너무 일만 열심히 하지 말고, 나 자신의 가치를 찾고, 진정한 나를 찾아야 한다.’, ‘딱 월급 받은 만큼만 일하면 된다.’
이 또한 코로나 감염병의 후유증이다. 팬데믹 이후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 언제 퇴사 당할지 모르는 직장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잘 나가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꼴을 지켜보면서 내동댕이쳐지는 자신의 불확실성 앞에 이 같은 생각은 어쩜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기업이 책임져주지 않는 현실이 너무도 절망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다. 공동체의 미래보다는 자신의 현재가 더 절실하다. 자신의 노력은 기업의 존폐 앞에서는 무의미함을 깨닫는다. 자신의 일은 자신이 챙겨야 한다. 이런 불안감 속에서 비롯된 것이 ‘조용한 사직’이다.
‘기업의 발전을 위한 희생’, ‘조직에의 충성’. 이런 말들은 옛말이 되었다. 정해진 근무시간에 정해진 업무만 하고, 추가 업무는 별도로 보상하면 생각해 보겠다고 응답한다. 다른 업무를 주문하면 지체 없이 ‘다른 업무를 하러 입사하지 않았습니다.’, ‘자꾸 다른 업무를 시키면 이직하겠습니다.’라고 칼로 자르듯 선을 긋는다.
업무 처리가 급박하다 하여 주말이나 주일을 할애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다. 당연히 회사의 주말 행사로 자신의 시간이 소비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또 야간에 카톡을 보내는 상사를 제일 증오한다.
이에 간부들은 반발한다. 결국 MZ세대와 꼰대 그룹의 갈등이다. 업무 시작 전 10분은 일찍 와서 준비하기를 종용하는 것은 꼰대다. 그 10분은 근로계약법상 근로시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MZ세대다. 그들은 10분 일찍 나오는 것 자체가 내 중요한 시간의 낭비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자질구레한 부가 업무 처리도 난감하다. 사람과의 관계나 정에 기대는 일은 없어진 지 오래다.
기업은 이들에 불만이 많다. ‘조용한 사직’에 맞서 ‘조용한 해고(Quiet firing)’를 준비한다. 연봉을 동결하고, 승진에 누락시키고, 성장 기회를 박탈하고, 업무의 피드백에서 제외하면서 구체적 방법을 마련한다. 이 또한 기업의 문화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참혹한 모습이다. 결코 해고는 하지 않고, 스스로 질려서 나가도록 만드는 술책은 기업이든 개인이든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며 이해하고 배려하는 슬기로운 지혜가 필요하다.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으면서 시간만 때우는 근로자나 제 발로 관두길 기다리는 관리자나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이는 조직 전체의 성과나 문화를 파괴시키는 옹졸한 행동이다. 또한 개인의 발전에도 있어서는 안 될 우매한 짓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의 가정을 훔쳐본다. 남녀가 가정을 꾸리고 제법 세월이 흘러 50대가 되면 배우자에 대한 배려가 적당히 무뎌진다. 남편은 밖의 생활에 정신이 없고, 아내는 가족들에 대한 뒷바라지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이제 여유를 찾아 거울 앞에 서니 모르는 중년 여인이 버티고 서 있다. 머리칼은 희끗희끗하고 주름살투성이 얼굴이 생소하다. 할 만큼 했다는 생각에 자신을 찾아 나선다.
각자 자신의 일을 챙긴다. 홀로 식사도 해결하고, 한방에 머무르기보다 각방을 쓰며 스스로 편안한 저녁을 모색한다. 같이 하는 저녁 삶은 없어졌다. 귀찮게 여기며 약간의 배려만으로 가정을 꾸려 간다. 이게 편하다며 주변에 수다를 늘어놓기에 주저함이 없다.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최소한으로 배려하며 사는 모습이 어색하다. 어찌 보면 상대가 지쳐서 나가달라는 제스처 같기도 하다.
이는 ‘조용한 사직’일까, ‘조용한 해고’일까.
교수님 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