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의 마디/ 김대호
어떤 식으로든 말하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은 말이 있었다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 순간이 지나가자
내 앞에 서 있던 말이 떠났고 이 일 저 일 시간을 궁리했다
나이들면 표정에 마디가 생기나 보다
나무의 옹이 같은 것이었는데, 단단한 그 안에는
뱉고 싶었던 말이 굳어 있을 것이다
할 말 못하고 있는 생각이 흐르다가 또 다른 마디가 되고
기억이 차곡차곡 쌓이던 분기점을 돌아
아침에 같은 약을 두 번 먹는 지점에 서 있고
어느 날, 마디에서 헛기침이 새나왔다
말하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던 말 말 말들
입만 벌리면 허공에라도 내뱉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너무 낯설어서,
아니, 민망해서
입을 꽉 다문 채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 2012년 <시산맥> 신인상 당선작
■ 김대호 시인
- 1967년 경북 김천 출생
- 2010년 수주문학상 수상
- 시집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필요하지>
《 심사평 》
시산맥을 통해 등단하는 시인들에게 시산맥은 고향일 것이며, 그런 시인들이 고향인 시산맥을 지키는 기둥들이 될 것이라는 공통된 합의를 바탕으로 심사위원들이 심사에 임했다는 사실을 우선 말씀드린다. 최종심에 올라온 분들은 이진욱, 김대호, 오유경, 이선자와 홍영수 등 다섯 분이었고 이 중에서 김대호와 이진욱 두 분을 등단의 대상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탈근대의 시대에 이르러 시인들이 깨닫게 된 것은 언어가 기본적으로 은유라는 사실이었다. 김대호는 이런 사실을 본능적으로 채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대호는 “어떤 식으로든 말하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은 말이 있었다/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 순간이 지나가자/ 내 앞에 서 있던 말이 떠났고 이 일 저 일 시간을 궁리했다”라는 「허공의 마디」의 1연에서 축자적(literal) 표현이 더 이상 자존(自存)할 수 없는 상황을 지적하고 있다. 김대호는 「은밀함에 대하여」에서 “태초에 우리는 은밀하였다”라고 전제하면서 “지금 은밀함은 해석이 잘못되어 천대 받고 있지만/ 우리는 모두 은밀함의 자손이다”라고 현시대의 상황을 비극적으로 진단하고 있다. 이런 탈근대적 인식의 구체적 작품화가 「그늘을 베다」, 「개를 몰고 산책하다」와 「까마귀」 등에서 시도되고 있는데 은유가 편리하게 상징으로 안착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김대호의 시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진욱은 「희곡(喜曲)을 기다리다」의 괄목할만한 성취로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받았다. “상연하려고 쓴 연극의 각본”인 희곡(戱曲)이 아닌 이 시의 제목에서 제시되고 있는 ‘즐거운 노래’라는 뜻의 ‘희곡(喜曲)’이란 용어는 코믹 오페라인 희가극(喜歌劇)을 연상시키는데,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시 쓰기’하면서 극적 상상력이 의미심장하게 발휘되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어둠이 납작하게 내린 날/ 모서리에서 동선이 스멀스멀 움직이기 시작했어 늙은 배우는 처음부터 피곤에 절어 있었어”라고 현실의 정경이 연극의 무대와 빈틈없이 오버랩되는 첫 부분부터 이진욱은 자신의 공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진욱은 극적 상상력이 충분히 발휘되었을 때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데, 「모항」에서 “섬의 길목에서 유혹했던 남동풍 따라/ 매일 대폿잔을 들고 오신 아버지/ 그 발자국을 뒤밟아/ 어머니는 하루같이 물질하셨고/ 한소쿠리씩 검버섯을 캐 오셨다/ 처녀 같던 바다에 주름은 겹겹이 쌓여 갔다”라는 묘사는 한국시에서 통상적으로 보이던 부모 묘사의 센티함을 극적 상상력으로 멋지게 극복하고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없소」, 「독을 만지다」와 「보리숭어」는 앞의 두 작품보다는 다소 힘이 떨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진욱의 시세계에서 극적 상상력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 기대하게 하였다. 등단한 두 분께 축하의 말을 전한다.
- 이만식(시산맥 편집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