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丁若鏞) 선생의
“홀로 웃다(獨笑)”
有粟無人食(유속무인식):
살림이 넉넉하여 양식 많은 집엔 자식이 귀하고,
多男必患飢(다남필환기):
자식이 많은 집엔 가난하여 굶주림이 있다.
達官必憃愚(달관필창우):
높은 벼슬아치는 꼭 멍청하고
才者無所施(재자무소시):
재주 있는 인재는 재주 펼 길 없다.
家室少完福(가실소완복):
집안에 완전한 복(福)을 갖춘 집 드물고,
至道常陵遲(지도상능지):
지극한 도(道)는 항상 쇠퇴하기 마련이다
翁嗇子每蕩(옹색자매탕):
부모가 절약하여 재산을 모으면 자식들은 방탕하고,
婦慧郎必癡(부혜낭필치):
아내가 지혜로우면 남편은 바보짓을 한다.
月滿頻値雲(월만빈치운):
보름달 뜨는 날은 구름이 자주 끼고,
花開風誤之(화개풍오지):
꽃이 활짝 피면 바람이 불어댄다.
物物盡如此(물물진여차):
세상일이란 모두 이런 거야,
獨笑無人知(독소무인지):
나 홀로 웃는 까닭을 누가 알아줄까?
위의 12줄 한시(漢詩)는 보편적인 우리의 삶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어 설명이 따로 필요없을 정도다.
다산(정약용)초당
다산(茶山)은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호학 임금인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죽은 후 11세의 나이로 순조가 즉위하자 정조의 계모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 하면서 주로 남인 세력인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1801년 2월 천주교도들이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끌어들이고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을 내세워 신유사옥을 일으켰다. 그해 2월에 함께 체포된 다산 3형제 중 정약종ㆍ최창현·최필공·홍교만·홍낙민·이승훈은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했다. 권철신·이가환은 옥사했으며, 이존창은 공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그러나 다산은 처형당한 형 약종이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중(仲:약전), 계(季:약용)가 함께 천주교를 믿지 않음이 한스럽다 (仲季之恨不同學)”라는 증거가 나와 약전‧약용은 죽이지 못하고 포항 인근 장기로 유배형을 내렸다.
그해 가을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지자 정약용을 다시 압송 국문했지만 증거가 없어서 귀양지만 강진으로 바꿨다. 황사영은 다산의 이복 맏형인 정약현의 사위다. 부인은 정명련으로 관노로 제주도 대정으로 귀양 살다가 소천했다. 정난주란 이름으로 현재
대정성지에 묻혔다. 그의 두살 아들 황경한은 귀양 중 추자도 예초리 갯바위에 버렸으나 오씨란 성의 어부가 발견 키웠다.
현재 추자도 제주 올레18-1코스에 천주교 성지인 황경한의 무덤이 있다.
다산에게 서학(西學)인 천주교는 평생 헤어날 수 없었던 굴레였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천주교 신앙 문제가 다산의 발목을 잡았다. 정조의 아낌이 없었다면 다산은 진작에 죽었을 목숨이었다. 배교문제도 있었지만. 조선 천주교회 창립 주역인 이벽(李檗)은
큰 형수의 동생이었고, 최초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창설의 리더 역할을 맡았던 이승훈은 누나의 남편이었다. 형님인 정약전의 스승 권철신 권일신 형제도 초기 교회 창립의 핵심 주역이었다.
1801년11월22일 다산이 강진에 도착한 날은 추웠다. 절망해야할까..위기는 기회다.
이제 공부할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 (今得暇矣). 주막집, 보은산방, 제자 이청의 집에서 8년을 보낸뒤 다산초당이 있는 귤동에 자리를 잡았다.
1817년 새로운 국가건설 방안을 담은 <경세유표>가 완성되었다. 1818년에는 정치적인 이상과 포부를 담은 정치철학서 < 목민심서>를 마무리 하였다.
그해 10월9일 드디어 귀양이 풀렸다. 장장 18년의 모진 세월이었다. 18세기는 격동의 시대였다. 조선은 밖으로는 빗장을 걸고 안에서는 당쟁에 몰두할때 젊은 실학파들은 연행사로 북경을 오가며 신문물을 접하면서 이루지 못할 개혁을 꿈을 꾸었다.
천재였기도 한 다산의 형제들이 신분 차별없는 천주교 세상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 시대 지성인의 당연한 정서였다.
이웃 일본은 막부시대를 끝내고 1868년 명치유신을 시작하여 근대화의 길에 접어들었다. 정조(正祖)(1752~1800)와 다산(1762~1836)의 일생(生)이 겹치는 시기였다.
다산은 강진에서 귀양이 풀리고 고향인 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마재 생가 당호(堂號)를 '여유당(與猶堂)'이라 짓고 조용히 살면서 학문에 매진했다. 육경사서와 경학 공부와 정치경제를 아우르는 경세학 연구를 '다산학'으로 결실을 맺었다.
조선의 학술을 집대성한 다산의 학문과 사상을 500여권의 저서를 정리해서 "여유당전서" 편찬했다. '여유당(與猶堂)'은 노자(老子) 도덕경의 한 구절로 마치 코끼리가 살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 산다는 뜻이다.
다산은 루소 헤르만 헤세와 함께 세계의 위대한 사상 문화 인물로 유네스코에 등재 되는 목민심서, 경세유포 등 182책 503권의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민족사학자 정인보 선생은 "여유당전서와 다산이 있었기에 정조가 있었고 정조가 있었기에 다산이 있었다. 다산 정신을 받들면 발전하는 조선이 되고 버리면 쇠퇴한다"고 하였다.
평등과 실학이 다산이 꿈꾸던 세상이었다.
세월가서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되었지만 지식인은 소리小利에 침묵하고 정치인은 편갈라 쌈질이니, 다산의 꿈은 아직도 먼길이든가.
이렇게 한 시대의 위인(偉人)이 갔다.
아직도 당파의 싸움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니 허허허😁
언제나 정신 차리려나 견변식위(犬糞食衛)나 먹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제발 더 이상 국민 팔지 마시라. 썩은 정치인, 저급 언론사. 언론인, 해바라기 검찰. 법조인. 이 땅에서 하루 속히 사라져야 할 것이다.
오늘도 허! 허! 허! 웃는 하루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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