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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장씨 시조묘 및 장영실 묘 공세리 천주교 성당을 방문할 때 인근에 있는 묘소를 확인하던 중 아산장씨 시조 장서 묘와 세종 때의 천재 과학자 장영실 가묘가 있다는 것을 알고 방문하였다. 추석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였는데도 묘역의 벌초를 하지 않아 답사객의 마음이 무거웠다. 후손들이 인근에 계시는데 조금만 더 신경을 썼으면 좋았겠다. 이곳은 평지룡에 묘역이 위치하다보니 주변 사격이나 국세 등은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 곳이다. 위성 사진 등으로 분석하고 현장에서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산이 보이고 물이 보이게 된다. 시조 묘와 장영실 묘가 지천에 가깝게 있는데 두 묘소의 향은 많이 차이가 난다. 이번에는 묘역 찾는 것에 우선을 두었기 때문에 차근차근 살펴볼 시간이 부족했는데 다른 기회가 되면 좀 더 세밀히 연구해볼 곳으로 보인다. |
아산 장씨(牙山 蔣氏) 장(蔣)씨의 득성(得姓) 근원은 중국 춘추 시대 주나라 주공(周公)의 셋째 아들 백령(伯齡)이 하남성(河南省) 기사현(期思縣)을 장국(蔣國)으로 하사 받아 국명을 성(姓)으로 삼았다고 한다. 아산 장씨(牙山蔣氏)의 시조 장서(蔣壻)는 송나라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신경위대장군(神慶衛大將軍)을 지냈다. 고려 예종 때 금나라가 송을 침입하자 그는 상서(尙書) 이강(李綱)과 함께 항전할 것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배를 타고 망명하여 고려의 아산(牙山)에 표착하였다. 《기미보(己未譜)》에 의하면, 장서가 아산에 표착한 사실을 좌복야(左僕射) 박인량(朴寅亮)과 재보(宰輔) 위계정(魏繼廷)으로부터 전해 들은 고려 예종이 그에게 아산을 식읍으로 하사하고, 그를 아산군(牙山君)에 봉하였다고 한다. 시조의 묘소는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에 있다. 아산(牙山)은 충청남도 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는 백제시대에 아술현(牙述縣)이었는데 신라시대에 음봉(陰峰 일명 음잠) 또는 온정군령이라 하였고, 고려 초기에 인주(仁州)로 고쳤다가 그 후 아주(牙州)로 고쳤고, 1413(조선 태종 13) 아산으로 개칭하였다. 1895년(조선 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홍주부 아산군으로 개편되었고, 1896년에 충청남도 아산군이 되었다. <위키백과에서 인용> 장영실(蔣英實) 비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재능과 기술로 조선 전기 과학기술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본관은 아산(牙山). 아버지는 귀화한 중국인이며, 어머니는 기녀였다고 한다. 동래현(東萊縣)의 관노로 있다가 뛰어난 기술재능으로 발탁되어, 1423년(세종 5) 노비 신분을 벗고 상의원별좌(尙衣院別座)로 임명되었다. 1424년 중국의 체재를 참고하여 물시계를 만들어 그 공으로 행사직(行司直)이 되었다. 1432년 김돈(金墩)·이천(李) 등을 도와 간의대의 제작에 착수하고, 각종 천문기기의 제작을 감독했다. 1433년 호군(護軍)에 올랐으며, 같은 해 6월 혼천의(渾天儀)를 완성했다. 이듬해 김빈과 함께 자동시보(自動時報)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다. 11세기 송(宋)의 소송(蘇頌)이 제작한 천문시계장치와 아라비아 시계의 자동시보장치에 영향을 받은 이 시계는 시(時)·경(更)·점(點)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종·북·징을 쳐서 시보를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1434년 7월 1일부터 사용된 표준시간은 자격루에 맞추어 운용되었다. 또한 같은 해 금속활자인 경자자의 결함을 보완한 갑인자 제작을 감독했다. 1437년 천체관측용 기구인 대·소간의(大小簡儀), 공중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 태양시(太陽時)와 항성시(恒星時)를 측정하여 주야 겸용 시계로 쓴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 등을 완성했다. 다음해 자격루의 일종인 옥루(玉漏)를 제작, 완료하고 경상도 채방별감(埰訪別監)이 되어 동(銅)·철(鐵)의 채광·제련을 지휘, 감독했다. 1441년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測雨器)와 하천 수위 측정기인 수표(水標) 제작을 감독, 완성했다. 상호군(上護軍)으로까지 특진했으나 1442년 그의 감독으로 제작된 왕의 가마가 부서지는 바람에 투옥, 파면 당했다. <다음백과에서 인용> |
문화재지정 | 미지정 |
문화재명칭 | 아산장씨 시조묘 및 장영실 묘 |
소재지 | 충남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 79-6 |
관리자(연락처) | 아산장씨 문중 |
▼ 아산장씨 시조묘 및 장영실 묘
▼ 과학자 장영실선생 추모비
▼ 장영실 추모비와 장영실 묘
▼ 장영실 묘 측경
▼ 장영실 묘 전경
▼ 장영실 묘 석물
▼ 장영실 묘
▼ 장영실 묘 후경
▼ 아산장씨 시조 묘 측경
▼ 아산장씨 시조 묘도비... 신도비는 많이 봤어도 묘도비(墓道碑)는 처음 본다.
▼ 아산장씨 시조 묘도비(墓道碑)
▼ 아산장씨 시조 묘 청룡방 전경
▼ 아산장씨 시조 묘 백호방 석물
▼ 아산장씨 시조 묘 전경
▼ 아산장씨 시조 묘 근경
▼ 아산장씨 시조 묘... 추석 일주일전인데 벌초를 아직 안했다. 유명인 묘는 답사객이 많이 찾기 때문에 문중에서도 신경을 써서 벌초를 두 번 정도 하는데 아산장씨 문중에서도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
▼ 아산장씨 시조 묘 석물
▼ 아산장씨 시조 묘 측경
▼ 아산장씨 시조 묘 후경... 평양지에 조성된 묘라 후경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 아산장씨 시조 묘 좌,우에서 바라본 측후경
없는 시간을 내서 찾은 장영실 묘역은 실망만을 안고 왔다.
아산장씨 묘는 좋은 기운이 있는 묘로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벌초를 하지 않아 혼자서 돌아다니기에는 무리가 되어 사진만 몇 장 찍고 돌아왔다.
천재 과학자의 말로가 석연찮은 것도 찜찜하다.
이런 것도 세종의 면목으로 봐야 할건지? 아니면 정치라고 봐야 할건지?
그래도 장영실은 그가 발명한 발명품과 함께 이름은 영원히 남았으니 성공한 사람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