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젊은 여성도 매혹적으로 보일 수 있다. 가만히 서서 바보처럼 보이기만 하면 된다.
헤디 라마(Hedy Lamarr)
헤디 라마(Hedy Lamarr, 1914-2000)
ⓒ Light show/Wikipedia | public domain
오스트리아 출신의 배우이자 발명가
본명은 헤드비히 에바 마리아 키슬러(Hedwig Eva Maria Kiesler)다. 17세에 배우 활동을 시작해, 1930년대 미국 할리우드로 건너가 헤디 라마(Hedy Lamarr)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유명 영화배우이면서 블루투스, 와이파이 등에 활용되는 무선통신기술 개념을 착안한 발명가로 뒤늦게 명성을 얻었다. 영화배우로는 주로 관능적이고 이국적인 분위기의 미녀 역할로 출연했으며, 〈삼손과 데릴라〉를 포함해 약 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배우로서 전형적인 역할에서 탈피하고자 직접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1997년 무선통신기술의 발명을 인정받아 ‘EFF 개척자 상’ 등을 수상했으며, 사후 2014년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초기 생애
1914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거스루드 키슬러(Gertrude Trude Kiesler, 1894-1977)는 상류 유대인 집안 출신의 피아니스트였으며 아버지 에밀 키슬러(Emil Kiesler, 1880-1935)는 성공한 은행가였다. 헤디 라마는 이른 나이부터 영화와 연기에 관심을 보였다. 16세 때는 연기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독일 베를린에 있는 막스 라인하르트 연극학교에 입학했다.
연기 경력의 시작
연극학교에 입학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헤디 라마는 1930년 영화 〈길 위의 재산〉에 출연하게 되었다.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연기 경험을 쌓던 그는 구스타브 마차티(Gustav Machaty)의 영화 〈엑스터시〉(1932)에서 무관심한 남편의 애정을 갈구하는 젊은 아내로 출연해 유명세와 악평을 동시에 얻었다. 촬영 당시 18세였던 헤디 라마는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노출 장면을 찍어야 했으며, 감독은 교묘한 편집을 통해 헤디 라마가 오르가슴을 연기하는 것처럼 연출했다. 이 영화 이후 헤디 라마에게는 오랫동안 ‘최초로 알몸 오르가슴을 연기한 배우’라는 자극적인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1933년 헤디 라마는 오스트리아의 군수품 제조업자 프리츠 만들(Friedrich Mandl)과 결혼했다. 결혼 당시 헤디 라마는 18세, 프리츠 만들은 33세였다. 부유한 무기상인 만들은 이탈리아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과학자나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자주 집으로 초대했다. 헤디 라마도 모임에 자주 참여했으며 과학 기술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15살 연상의 남편은 헤디 라마의 연기 활동을 반대했다. 영화 〈엑스터시〉의 필름과 포스터를 사들여서 없애려고 했으며 일상생활까지 통제하려 들었다. 헤디 라마는 이후 결혼 생활에 대해 “만들은 절대적인 군주였으며, 나는 인형과 같았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프리츠 만들이 나치 동조자가 되면서 갈등은 더 깊어졌다.
할리우드로 가다
결국 만들의 통제를 견디지 못하고 몰래 탈출한 헤디 라마는 1937년 영국 런던에서 영화제작사 MGM의 공동설립자 루이스 B. 메이어(Louis B. Mayer)를 만난다. 루이스 메이어는 그의 스타성을 감지하고 본명인 헤드비히 에바 마리아 키슬러 대신 헤디 라마(Hedy Lamarr)라는 새로운 이름을 제안했다. 헤디(Hedy)는 본래 이름인 헤드비히(Hedwig)에서, 라마(Lamarr)는 1926년 사망한 배우 바바라 라 마르(Barbara La Marr, 1896-1926)의 이름을 딴 것이다.
짙은 밤색 곱슬머리와 높이 올라간 고혹적인 눈썹 등 헤디 라마 특유의 스타일은 이후 비비안 리(Vivien Leigh) 등의 여러 배우에게 영향을 주었다.
1938년 헤디 라마는 루이스 B. 메이어와 함께 미국 할리우드로 건너간다. 루이스 B. 메이어는 헤디 라마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홍보하기 시작했다. 헤디 라마는 고전적 사랑 이야기인 〈알제〉(1938)를 시작으로, 〈레이디 오브 더 트로픽스〉(1939), 〈아이 테이크 디스 우먼〉(1940), 〈펄햄 씨〉(1941), 〈토르티야 대지〉(1942), 〈화이트 카고〉(1942), 〈공주마마와 벨보이〉(1942)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다.
헤디 라마는 배우로서 할리우드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그러나 사적으로는 유대계 오스트리아 이민자로서 미국 사회에서 외로움과 향수병에 시달리곤 했다. 배우로서도 좀 더 다양한 역할을 맡기 원했던 그는 1945년 MGM을 떠나 직접 제작사를 설립했다. 〈낯선 여인〉(1946), 〈불명예의 여인〉(1947) 등의 스릴러 영화를 제작했으나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1949년 헤디 라마는 세실 B. 데밀 감독의 영화 〈삼손과 데릴라〉(1949)에서 이국적이면서도 상투적인 역할로 다시 돌아왔다. 〈삼손과 데릴라〉는 헤디 라마의 출연작 중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영화다. 그는 MGM으로 돌아온 후 〈여권이 없는 여자〉(1950), 〈마음에 드는 스파이〉(1951), 〈더 피메일 애니멀〉(1958) 등에 출연했다.
발명가로서의 삶
헤디 라마는 배우로 일하면서도 꾸준히 발명품을 만들었다. 그의 아이디어 중에는 개선된 교통 신호등이나 물에 녹이면 탄산음료를 만들 수 있는 정제(Tablet) 등이 포함돼 있었다. 헤디 라마는 미국 정부가 운영하던 국립발명가협회(NIC, National Inventors Council)에 가입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NIC 회원인 찰스 케터링(Charles F. Kettering) 등은 헤디 라마가 연예인으로서 전쟁 채권 판매를 홍보하는 것이 연합군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결국, 헤디 라마는 국립발명가협회(NIC)에 가입하는 대신, 전쟁 채권 판매 캠페인에 참여했다.
주파수 도약 기술 개발
제2차 세계대전 중 헤디 라마는 원격 조종 어뢰에 사용하는 무선 주파수 통신 관련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당시에는 어뢰를 원격 조종할 때 고정 주파수를 사용했는데, 이는 쉽게 탐지되어 제어를 방해당하는 문제가 있었다. 헤디 라마는 무선 신호의 주파수를 계속 바꿀 수 있다면, 외부에서 신호를 도청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헤디 라마는 친구이자 작곡가인 피아니스트 조지 앤틸(George Antheil)과 함께 아이디어를 구체화했다. 조지 앤틸은 두루마리를 이용해 작동하는 자동 피아노를 만든 적이 있는데, 두 사람은 같은 방식을 적용해 무선 주파수 간에 빠른 도약을 만들어냈다. 이른바 ‘주파수 도약(Frequency Hopping)’이라 불리는 통신 방식이다. 주파수 도약이란 동기화된 주파수 대역 사이에서 주파수를 일정한 함수에 따라 빠르게 바꾸면서 통신을 유지하는 방법을 말한다. 두 사람이 1940년 국립발명가협회(NIC)에 보낸 이 아이디어는 1941년 미연방 특허청에 출원됐으며, 1942년 ‘비밀통신시스템(Secret Communication System)’이란 이름으로 정식 특허로 등록됐다.
비밀통신시스템(Secret Communication System) 특허 출원서 사본
헤디 라마와 조지 앤틸은 주파수 도약 통신 방식을 개발해 정식으로 특허를 받았다.
ⓒ U.S. Patent Office | Public Domain
헤디 라마의 발명과 특허는 당시에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재혼하면서 이름이 바뀌어, 헤디 키슬러 마키(Hedy Kiesler Markey)라는 이름으로 특허가 올라갔기 때문이다. 또한, 헤디 라마와 조지 앤틸의 아이디어는 당시 기술로는 구현이 어려워 전쟁이 끝날 때까지 활용되지 못했다. 두 사람이 고안한 통신 방식은 1950년대부터 재조명되어 무선통신 기기에 사용되는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기술로 발전했으며, 현대에 널리 쓰이는 블루투스, 셀 네트워크, 와이파이 등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헤디 라마는 자신의 발명을 통해 어떤 이득도 얻지 못했다. 기술이 상용화된 시점에 이미 특허권이 만료되었기 때문이다. 1997년 헤디 라마와 조지 앤틸은 CDMA 기술의 기본 원리를 발명한 공으로 전자개척자재단(EFF)으로부터 ‘EFF 개척자 상(EFF Pioneer Award)’을 수상했다. 2014년 헤디 라마와 조지 앤틸은 사후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National Inventors Hall of Fame)’에 이름을 올렸다.
생애 후반
헤디 라마는 1953년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그는 프린츠 만들과의 첫 번째 결혼을 포함해 총 6번 결혼했으며, 1965년 마지막 이혼 이후로는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았다. 헤디 라마의 사생활은 쉽게 가십으로 소비되었다. 1966년 헤디 라마의 동의 없이 자서전 〈엑스터시와 나〉가 출간되었다. 그는 책의 여러 부분이 거짓이라며 발행인을 고소했다.
젊은 시절, 아름다운 외모로만 평가받았던 헤디 라마는 나이가 들면서 성형에 집착하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도 발명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으며, 성형외과 의사에게 수술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했다. 1980년대 헤디 라마는 플로리다에 정착해 혼자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다른 사람과의 교류는 대부분 전화로만 이뤄졌다. 2000년 1월 19일 심장 질환으로 인해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014년 오스트리아 빈 중앙 묘지에 명예 무덤이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