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년 을사 > 9월 10일 > 최종정보 영조 1년 을사(1725) 9월 10일(갑진) 맑음 01-09-10[27]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좌찬성 최경회(崔慶會) 등에게 시호와 포상의 은전을 내려 주기를 청하는 전라도 생원 이만영(李萬榮) 등의 상소 |
최경장은 명을 받들고 감격하여 더욱 한결같은 충정을 독려하여 옥과현(玉果縣)에 주둔하고 방책을 세워 훈련원 부정 선의문(宣義問)을 부장으로 삼고, 서천 군수(舒川郡守) 김윤명(金允明)을 종사관으로 삼아 의병들을 격려하여 이끌고 전진하여 고성(固城)의 견내량(見乃梁)을 막아 지켰습니다. 얼마 후에 원수(元帥)의 관문(關文)으로 인하여 군사를 석주(石柱)로 이동시키고 시설과 구획을 모두 알맞게 하니 기계와 병량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미처 적을 만나지는 않았으나 휩쓸렸던 것을 회복하고 적을 베어 버린 공이 있었으며, 저 약탈을 일삼던 추한 오랑캐도 그가 최경회의 형인 것을 알고는 풍문을 듣고 겁을 먹어 무기를 거두고 물러가 피했습니다. 그해 12월에 왕세자가 분조(分朝)를 세우고 전주(全州)에서 무군(撫軍)하니 최경장이 즉시 달려 나아가 사은하였습니다. 그때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이 담양(潭陽)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아직 군졸이 없었습니다. 이에 무군사(撫軍司)에서 조정에 계문(啓聞)하여 계의병의 무기와 병량을 모두 김덕령에게 옮겨 주라고 하였으니, 대개 최경장의 나이가 이미 망칠(望七)이라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싸우기 어려울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에 최경장은 그 병량을 모두 수송해 주고 그 진호(陣號)를 파하고 돌아갔으니 이것이 최경장이 능히 한번 전공을 세울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의병을 일으킨 날에 죽지 못하여 당시에 의병을 일으킨 선비와 같이 포상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충성과 효도가 다른 사람보다 못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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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서(輿地圖書) 全羅道 長興府
金允明。 武科。 壬辰亂, 扈從龍灣, 至誠衛護, 又參崔慶長義兵從事。 錄勳行郡守, 贈兵曹參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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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명(金允明)
[무과] 선조(宣祖) 17년(1584) 갑신(甲申) 별시(別試) 병과(丙科) 31위(48/202)
자(字) 중성(重誠)
생년 기유(己酉) 1549년 (명종 4)
합격연령 36세
본인본관 광주(廣州)
거주지 장흥(長興)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202명 [甲1‧乙16‧丙185]
전력 교생(校生)
부모구존 엄시하(嚴侍下)
[부(父)]
성명 : 김희고(金希古)
관직 : 유학(幼學)
[출전]
『만력12년갑신추별시문무방목(萬曆十二年甲申秋別試文武榜目)』(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고)349.16 문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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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일록 제2권 / 갑오(甲午, 1594) / 봄 2월
○ 2월 26일 을해(乙亥)
비가 오더니, 오후에 비로소 개었다. 나는 사고(士古)ㆍ극수(克修)와 함께 김 장군(金將軍)을 뵈었다. 이어서 사평(司評) 최언욱(崔彦勗)과 서로 이야기하고, 또 개령(開寧)의 최기준(崔琦準)ㆍ서천(舒川)의 김윤명(金允明)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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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잡록 2(亂中雜錄二)
임진년 하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 경상도 안동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키다. 이때에 생원 김윤명(金允明), 진사 배용길(裵龍吉) 등이 초유사의 격문을 보고 부로들에게 고하여 이달 9일에 금법사(金法寺)에 모이기로 약속하고 앞의 사람들이 먼저 가서 기다렸더니 전 현감 권춘란(權春蘭), 전 봉사 안제(安霽), 전 검열 김용(金涌), 진사 신경립(辛敬立) 등이 모두 와서 모이다. 의(義) 자는 스스로 뻐기는 혐의가 있다 하여 향병이라고 칭하다. 기약을 정하여 13일에 또 임하현(臨河縣)에 모였는데 전 예천 현감(醴泉縣監) 이유(李愈) 또한 참여하여 임하의 모임에는 사람 수를 백으로 헤아렸다. 김윤명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배용길로 부장(副將)을 삼아서 17일에는 향교에 모여서 일을 시작하는데, 윤명은 몸이 쇠하고 처사가 둔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생원 이정백(李廷栢)이 대신하다. 전 검열 김해(金垓)가 예안(醴安)으로부터 와서 합세하기로 모의하고, 이튿날에 일직현(一直縣)에서 동맹하여 예안ㆍ안동ㆍ의성(義城)ㆍ의흥(義興)ㆍ군위(軍威)ㆍ비안(比安)을 합하여 하나의 진을 만들어 다시 김해로서 대장을 삼고 정백ㆍ용길은 부장이 되며 안동 향교를 진소(陣所)로 삼다. 신경립은 문서를 맡다. 소속된 각 고을의 남정(男丁)은 모두 관군에 들어갔으므로 군사가 1만 명이 차지 못하자, 이에 선비와 품관(品官)을 모두 징발하여 건장한 자는 군대에 속하고 늙고 약한 이는 종[奴]을 대신하여 쌀을 바치게 하니 일부(一府)에서 얻은 것이 마침내 5백여 원(員)과 쌀ㆍ콩 1천여 석이 되다. 약속하기를, “적의 머리를 베는 것으로 상공(上功)을 삼는다면 먼저 베려고 다투다가 적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우리들의 이 일은 다만 적을 죽이려는 것이니, 잘 쏘아 꼭 죽이는 것으로써 상공을 삼고 머리 베고 왼쪽 귀를 베는 것은 차공(次功)으로 하자.” 하다. 그 뒤에 김면이 합도 대장(闔道大將 전라도 의병대장)이 되고 경립이 의병 명부를 가지고 강을 건너서 충청도 황간(黃澗)으로 둘러서 거창에 도달하다. 김면이 명부를 열람해 보매 모두 유생으로 편성되어 있으니, “이야말로 참의병이로다.” 하다. 이듬해 계사년에 김해는 천병을 따라 경주에 있다가 계림(鷄林)에서 병으로 죽다. 일이 위에 알려지매 홍문관 수찬으로 증직되었고, 생원 금응훈(琴應壎)이 대신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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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곡집(丹谷集) 곽진(郭𡺽)생년1568년(선조 1)몰년1633년(인조 11)자정보(靜甫)호단곡거사(丹谷居士)본관현풍(玄風)특기사항권두문(權斗文)의 문인. 이준(李埈) 등과 교유
丹谷先生文集卷之五 / 雜著 / 師友錄 先生易簀日絶筆
[金允明]
安東豐山金開寧。諱允明字守愚。年齡二倍於吾。而相愛之深。竟作忘年交。不事表襮焉。右丈出入西厓門。言論淸深。氣度軒昂。吾於熏襲之功不少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