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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남상인(南裳人)이 벼슬을 얻어 조정에 들어왔다.
“19세 구모소 단군(기원전 1,412년) 남상인 이 벼슬을 얻어 조정에 들어왔다. 여기에서 남상인은 누구인가? 고 임승국교수는 그의 저서(한단고기 번역본 1986.95p)에서 남장인의 오식인듯 하였고 남장인은 지금의 운남성 변두리에 있었던 나라이며 섬라국을 말함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임교수가 잘못 비정한 경우이다. 먼저 한문의 뜻을 잘 살펴보자.
상(裳)은 ‘치마 상’으로 하의에 치마처럼 바지를 입는 사람을 상인(裳人)이라 칭한 것이다. 그런 사람이 인도계의 사람으로 신강의 타림분지에서 미이라로 옷을 입은 채 발견되었다. 조사 결과 기원전 약13세기경으로 추정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인도계(파키스탄등)의 사람이 치마 바지차림으로 단군에게 와서 벼슬을 얻어 정사를 돌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복식사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비정 할 수 없는 것이다.
10. 하나라(히타이트) 멸망과 은나라(상나라-아시리아)비사
“이때 걸이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보내어 길을 막고 맹약을 깨뜨리려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께서 마침내 은나라 사람과 함께 걸을 치는 한편, 은밀히 신지(臣智)우량(于亮)을 보내어 견군(畎軍-융족)을 이끌고 낙랑군사와 합세하여 관중의 변,기땅을 점령하여 주둔시키고 관제를 설치하였다. (13세 단군 흘달 <기원전 1782년> )
여기에서 “은나라 사람과 함께 걸을 치는 한편”으로 하나라 전투와 멸망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은나라 사람과 걸을 쳐서 항복을 받아내었다던지, 왕을 죽였다던지, 수도를 점령하였다던지에 대한 일체의 설명이 누락된 것이다. 소위 전쟁의 결과가 모호해 진 것이다.
이렇게 모호하게 해 놓은 것은 “견군(畎軍-융족)을 이끌고 낙랑군사와 합세하여 관중의 변,기땅을 점령하여 주둔시키고 관제를 설치하였다.”를 강조하여 하,상이 중국본토에 있었다는 것을 빈,기땅으로 강조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실로 히타이트(하나라)는 기원전 1,178년에 아시리아(상나라,은나라)와 9환(9문 동맹군)에 의해 멸망하였다. 13세 흘달 단군시대는 기원전 1,782년의 기록이므로 중국은 자기 땅에 없는 가공된 하나라의 존재를 590년 부풀려 놓은 것이 된다
.
이렇게 전쟁의 결과에 대한 모호성은 위작의 비판을 면할 수가 없는 것이며 필자는 이집트와의 9환족 동맹군과의 전투 기록(바다 사람들)에서 9환(9문)이 히타이트 수도를 불태웠던 기록을 ‘람세스3세의 빈소사원’ 기록에서 찿아내어 증명하였다.
견군은 서융(西戎)으로 바로 코카서스의 개로 유명한 ‘달마시안’의 고장인 코카서스(카스피 해 연안)인 것이며 카자흐스탄의 서쪽지역인 아랄해 주변 지역인 것으로 중국에서 입이 닳도록 인용하는 코쟉족인 ‘고죽국’ 지역이다.
즉 번한의 군대를 데려 온 것이다. ‘견이는 동이 9족 가운데 하나이다.<후한서> 서강 전에 걸왕이 세상을 어지럽히자 견이가 빈과 기 사이에 들어왔다.라고 하였다.’(증산도의 환단고기 661 p) 견은 밭전에다 개 견을 붙인 이름이다. 견군(畎軍)은 일종의 구가이며(狗加), 서융(西戎)족이다. 일찌기 ‘반고’가 무리를 이끌고 정착했던 지역으로 여기에서 궁서체로 쓰인 이 기록은 중국이 가필하여 위작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하나라와 은나라는 중국 역사가 아니며 그 허구와 왜곡을 상세히 뒷장에서 서술하고자 한다.
11. 고죽국(孤竹國)과 고죽군(孤竹郡)에 대한 역사왜곡의 비판
“21세 단군 소태(기원전1,286년) 이 해에 백이(伯夷)와 숙제(叔弟)도 역시 고죽군의 자손들로서 나라를 버리고 동해의 해변에 와서 살며 밭갈기에 힘쓰며 혼자 살아갔다.“
“22세 단군 색불루(기원전 1,266년) 남국이 자못 강성하여 고죽국 왕과 더불어 모든 도적을 쫓아버렸다. 남쪽으로 옮겨 엄독홀(이란)에 이르러 머무르니 그곳은 은나라(아시리아) 국경과 가까운 곳이었다.”아프가니스탄의 남쪽은 분명 ‘이란’인 것이다.당연히 ‘이란’옆은 ‘아시리아’인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36세 단군 매륵(기원전 653년)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다. 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孤竹)에 쳐들어 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서 싸워 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하고는 물러갔다.
한단고기에 고죽국과 고죽이란 용어가 더러 나오며 ‘백이와 숙제’ 이야기도 나온다. 중국 사가들은 고죽 군을 은나라 제후국이며 중국의 ‘북평지방’을 옛 이름으로 ‘고죽군’이라 불렀으니 고죽국도 역시 그쪽이라고 상고사를 연구하는 대다수의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물론 강단사학자들은 한반도의 ‘해주’라고 비정하였고……또한 .왜곡시킨 중국사가들은 헷갈리게 낙랑국과 낙랑군으로 그 표기를 달리 하였다.
고죽국은 허베이 성이 아니다. 은(상)나라는 중국 역사가 아니다. 물론 ‘하나라’도 마찬가지이며 ‘주나라’까지 중국역사가 아닌 것이다. 이 문구를 상세히 관찰 해주기 바란다. 일단 은(상)의 엉터리에 대하여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22세 단군 색불루(기원전 1,266년) 남국이 자못 강성하여 고죽 국왕과 더불어 모든 도적을 쫓아버렸다. 남쪽으로 옮겨 엄독홀에 이르러 머무르니 그곳은 은나라 국경과 가까운 곳이었다.”
증산도의 한단고기 번역본(673 p)의 고죽과 남국에 관한 지도를 보면 아주 기가 차는 내용이 실려 있다. 즉 , 남국은 태원의 오른쪽으로 되어 있고, 고죽국은 북경의 우측에 발해만을 끼고 있다. 그런가 하면 낙랑을 북경 좌측의 조양 옆에 그려 놓고, 한단고기에 나오는 엄독홀과 서,회땅과 은나라는 좌측에 안양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로 그려져 있다. 물론 모르는 독자들은 증산도의 환단고기에서 인용한 지도를 보면 틀림없는 은나라와 고죽, 남국의 지도가 맞다고 할 수 있다.
하나, 이것은 아주 심하게 조작 된 것으로 중국 사가들이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부터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난도질 하였다는 것이 여기 지도 1장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이 이야기 하는 남국이 남씨 성을 가진 사람이 건국한 나라가 아니며 오히려 대월지국을 건설하여 쿠산왕조를 열어 나갔던 모체는 아프카니스탄의 카불(Kabul-고리의 광명)에 위치하였던 남씨성(藍氏城)이다.
후한서엔 남씨 성으로 나와 있고 한서엔 감씨 성으로 오역되어 있다. 중국측도 남이(藍夷)로도 부른다. 이 남이, 남국은 ‘쪽빛 남’ ,남색 남의 남국이며 조금 전에 필자가 기술한 대로 ‘청금석과 청람석의 자원으로 남국이라고 불리워 졌다고 소개하였다. 그렇다면 아프카니스탄이 왜 그 지도에 버젓히 산동방향에 있어야 하며 고죽국이 발해만에 있어야 하는가?
고죽국은 번한의 왕인 키르기즈스탄의 동맹국인 카자흐스탄의 가신인 ’고죽국‘이었으며 그 나라는 카자흐스탄과 접경지역인 코카서스 지방의 국가로 ’아랄해‘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한문으로 고죽을 표기하였지만 원명은 ‘쟉국’이었다. 쟉국에서 ‘고리’의 ‘코’를 붙여 ‘코작’이 된 것으로 인도유럽어로 ‘코쟉’(코샥)이었는데 풀어보면 ‘고쟉’이 되며 이 고쟉은 다시 구쟉,구작,구족,구죽,고죽등으로 발음이 변형되므로 한문으로는 ‘코쟉’을 도저히 나타내지 못하므로 반드시 고작을 사용해야 하는데 ‘백이와 숙제’가 충신으로서 굶어 죽은 것을 기리고자 ‘외로울 고(孤)에 충절의 표시인 대나무 죽(竹)을 넣어 모든 사람들에게 충절의 표시로 선전해 온 것이었다.
인도유럽어의 표현인 ’코쟉‘은 우리 말로 하면 고쟉내지는 고작이 되어야 마땅하다. 한문으로는 중모음을 나타낼수 없으므로 高作, 古作, 固作, 故爵, 膏皭, 鼓作, 庫作, 古爵, 稿作등 엄청나게 고작으로 붙일 수 있는 이름이 많다. 고작은 영어로 KOZAK이며. 원명은 ‘ZAK’족이다 .앞의 KO는 단어의 앞이나 뒤에 붙은 ‘꼬리표’로 ‘고리’란 것을 수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카, 쿠, 케, 키, 코로 수식하였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중국의 사가들이 외로울 고에, 대나무 죽을 붙인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상당히 의도적인 것이었다. 중국사람이 자기들하고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던 ’고죽국‘의 사람인 ‘백이와 숙제’를 만고 충신의 표상으로 삼아 지금까지 확대 선전한 이유는 엄청난 역사 왜곡을 위한 고단수적인 술책이었던 것이다. 즉, 하,상,주역사의 정통성을 확립시키기 위한 부품으로 고죽국이 필요했고 백이와 숙제가 필요하였으며 남국이 필요하였고, 관중의 빈과 기땅이 필요하였다.]
그들은 또한 복희의 출생지는 파키스탄의 ‘펀잡’인데 감숙의 천수(天水) 로 설명하고 복희의 땅인 제수(濟水-춘추좌전에 야만인의 땅이라고 규정하였다)를 산동에 지명 이동시켰고, 치우 무덤 역시 산동에 놓았으며 역사왜곡을 위한 퍼즐에 마음대로 지명을 이동시키고, 태백산,갈석산등 여러개의 지명을 전국에 흐트려 놓아 못 찿게 만들고 수시로 자기네의 25사를 뜯어 고쳐 동이족의 흔적을 왜소하게 만들어 온것이 드러나고 있다.(수양산은 6군데이다.)
중국 사람이 카자흐스탄인의 ‘코쟉‘ 에다 방언을 붙여 모음을 이리저리 고쳐 나가며 발음하는 그런 언어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마찰음만 빼고 그대로 발음하면 ’고작‘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중국 사가들은 ’고죽(孤竹)‘으로 불렀다. 그래서 이름하여 ‘외롭게 대나무처럼 충절하다 죽은 사람의 나라’인 ‘고죽’으로 지은 것이다.
‘고작’으로 지을 수 있는 이름이 다양하게 많다. 그런데도 굳이 ‘고죽’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은 중국 사가들이 오래 전부터 우리의 한단고기를 위작했다는 귀결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동해로 나아가’란 용어이다. 카자흐스탄의 카작(우랄 해 근방)에서 중국의 산동까지는 엄청나게 먼 거리이다.
수양산은 밝은 광명의 산으로 태백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고조선 권역에 많은 태백산이 있었다.(앞장의 태백-테페,테베 연구 참조)
고조선의 마한 영역인 히타이트에 많은 태백산인 수양산(태페-성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천리 먼 길을 돌아 중국의 산동성에다 발해만까지 갈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고죽국을 북경근처의 발해만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중국학자들은 북해를 발해라고 부른다. 발해만의 발해를 왜 북해라 부를까? 지도로 보면 발해만은 동쪽이며 동해로 불러야 마땅하다. 중국의 발해만을 북해로 생트집을 잡아야 발트 해와 발칸의 환웅시대가 없어지며 초기고조선 역시 중국의 발해만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여기에 아프가니스탄인 남국과 고죽을 끼워 놓고, 빈과 기란 지명을 넣으며 엄, 포고, 회, 서로 하여 역사왜곡의 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맹자가 말한 것은 백이가 주(상의 주왕-아시리아)를 피하여( 북쪽 바닷가에 기거하였다.” 여기에서 중국학자들은 북해(흑해,Black sea)가 중국의 발해(발해만)라고 고집한다. 중국 사람은 북해가 발해가 되고 발해는 다시 동해도 되는 것인가? 엉터리인 것이다. 필요에 따라 동해도 되고 북해도 되는 엉터리 학설이 중국학자들의 주장이다. 하나라인 히타이트는 아나톨리아반도에 있었기에 하투샤(하나라) 북쪽이면 바로 흑해이다. 흑해는 북해이다.
북쪽에 바닷가라면 흑해와 카스피해 말고 없다. 백이가 북쪽 바닷가에 은거하였고 상은 아시리아이므로 중국의 산동에 은거하였다는 주장은 거짓말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맹자가 말한 중국의 북쪽 바닷가는 어디인가?
“수서(隨書) 배구전(裴矩傳)에 ‘고죽국은 고구려 땅이다. 高麗之地, 本孤竹國也”라고 하여 고죽국의 영토가 고구려의 통치영역이 되었음을 나타내었다. (증산도 한단고기 736P)
즉, 고죽국은 카자흐스탄의 번국으로 아랄해 근방에 위치하였다.북부여로부터 이어 받은 고구려의 발상지는 우크라이나 남부인 ’북캅카스’ 지역(카자흐지역)이나 우크라이나의 ‘키에프(고리의 아버지)지방으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한다. 왜냐하면 첫 수도가 ‘졸본’이며 고조선의 고토회복을 주장하였음에 한반도의 평양이 될 수 없는 것이며, 중국 땅도 아니기 때문이다. 졸본(Zolbon)은 흘본, 글본, 클본 으로도 사용됨에 그리, 크리가 됨에 ‘고리’가 있는 아버지의 땅!‘ 본래의 땅이 고구려의 첫 수도인 것이다. 졸본(Zolbon)은 “태양의 아버지 사람들”의 해석이 된다.
북부여의 해모수는 웅심산에서 건국하였다. 웅심산은 웅심(雄心)국으로 북캅카스지역으로 비정한다.. 지금도 쿠미크어, 코미어, 쿠만어등 소위 ’곰 언어‘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합체로 지금은 러시아 연방 자치구이다. 웅심산은 지금의 마리엘 공화국으로 곰이 방패와 칼을 들고 서 있는 국장의 나라로 본다.. 대저 웅심(雄心)이란 뜻은 무엇인가? 심(心)은 심장을 뜻한다. 심장은 한가운데에 위치한다.
심장(心腸)의 심(心)은 오행상 ‘화‘이며 신체 구성에서 한가운데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웅심은 곰의 마음이며, 곰의 중심부를 말한다. 곰의 중심부는 바로 북캅카스지역이다. 체첸공화국, 인구시공화국, 다게스탄공화국, 카바르디노발카르공화국, 카라자예보케스카야공화국, 세베로오세티아공화국, 마리엘공화국등이 ’곰 언어’ 를 사용하고 있다. 강단사학자들은 웅심 산을 송화강 하류인 ‘서란‘으로 보고 있다.
아무런 곰 언어 영역도 없는 쑹화 강 지류에서 ’웅심‘이 나올 리 없지 않은가? 언어학, 종족학, 인류 문화사적으로 보아도 웅족들과 웅족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집합체가 사는 곳이 웅심국이 되는 것이고 웅심산‘이 되는 것이다.
내가 사는 동네 위쪽에는 오래전에 다른 곳에서 철거되어 온 사람들이 모여서 부락을 일군 곳이 있다. 이름하여 ‘제주도 동네’라고 한다. 왜 그런지 이웃에게 물어보니 지금은 몰라도 예전에는 ‘제주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조그만 소부락도 이럴 진데 하물며 ‘웅심’이란 웅족의 집합체이다. 웅족이 모여 살았고, 곰 언어가 활발히 사용되었던 곳이 바로 ‘웅심산’ 일대인 것이다.
강단사학자들은 백아강이 평양이며, 초기고조선의 백악산이 장춘,농안이며 장당경은 개원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리고 아사달은 하얼빈으로 비정하였다. 장단국은 고대 티벳의 왕국 이름으로 나중에 티베트로 수도를 옮긴 듯 하다. 초기 고조선은 일제의 반도사관에 입각하여 비정한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인 만주 일대도 아니며, 재야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중국 본토도 아니다. 중앙아시아이다.
왜 중앙아시아가 초기 고조선의 강역인지 필자가 처음부터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뿌리 없는 나무가 없고 부모없는 자식이 없다. ” 고조선은 환인과 환웅의 뿌리에서 시작된 것으로 이미 설명한 유럽의 최대 오래된 문화인 ‘빈카문화’에서 한인, 환웅의 곰 숭배를 하는 신정통치가 입증되었고, 백색 그리스문화와 소아시아문화를 선도한 것으로, 파키스탄의 “메르가르”문명과 그 하위 문화인 ‘하라파 문화, 모헨조다로 문화’ 에 연결된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문명으로 고조선은 중앙아시아의 타지기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지대인 ’고르노바다흐샨주‘에서 옥서스강을 끼고 시작된 것이다.
물론 중국의 ‘발해’란 지명도 ‘발트 해’ 에서 지명 이동이 된 것이다. 발칸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환웅시대의 문화를 중국이 억지로 지명 이동시켜서 중국의 발해만을 만들어 그곳에다 하나라와 상(은)나라, 주나라 역사까지 만들어 발해문화로 옮겨 온 것으로 고조선은 고작 해봐야 기자와 위만조선으로 중국의 손아귀에 놀아 난 지방정권쯤으로 확대 포장하고 색칠을 하여 우리의 환인시대와 환웅의 역사를 아예 없었던 것 처럼 송두리 채 도적질 하고 단군의 역사마저 1천년 이상 삭둑 잘라먹는 행위는 일본의 역사왜곡을 뛰어 넘는 파렴치한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하였던 것이다.
남국의 남은 ‘남색 남‘이며 ’쪽빛 람’이다. 절대 속이지 못한다. 남이,남국은 아프가니스탄이다. 이 아프카니스탄이 남국이고 고죽국이 카자흐스탄 가신국이므로 필자의 주장대로 이해를 하고 문장을 살펴본다면 중국의 주장이 앞,뒤가 맞지 않는 황당한 것에 도달하게 된다.
중국(지나)은 지금까지 잘도 속여 왔지만 필자의 해독으로 중국이 그토록 자랑하고자 하여 약 2,500년 동안 퍼즐을 맞추고 숨기며 하,상,주의 역사 왜곡을 해 온 것이 하루아침에 산산조각 나 버렸던 것이다.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며 “사필귀정”인 것이다. 앞의 문장을 필자의 주장대로 한다면 상(은)나라는 아시리아이다. 물론 하나라는 히타이트이다.(별도의 해석이 있을 것이다.
http://cafe.daum.net/coreahistech/R8e9/89?q=%EC%9D%80%EB%82%98%EB%9D%BC%20%EB%A9%B8%EB%A7%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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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거운 수요일 행복한아침 시작하시고
오늘도 즐거운 미소속에
항상건강하시고 좋은일만 가득한
행복한하루 열어가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