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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서신시대 – 5 빌립보서
서 론
1.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하는 동안 드로아에서 경험한 초자연적 환상의 결과로 세워졌다(참조, 행 16:8-10).
2.그것은 바울이 사랑하던 교회였음이 분명하다. 그가 잠시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그와 실라는 적어도 세 개인의 삶 가운데 놀랍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1)하나님께서 유대교로부터 구원해 주셨던 아시아 출신의 루디아란 자주 장수(행 16:13-15).
(2)하나님께서 귀신들린 것으로부터 구원해 주셨던 헬라인 점장이(행 16:16-18).
(3)하나님께서 로마 제국주의의 황제숭배로부터 구원해 주셨던 로마 간수(행 16:29,30).
3.그리하여 환상으로 표현되었던 이 교회는 감옥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을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실로 신기하고 놀랄만하다.
4.빌립보 시는 기원전 357년에 마케도니아의 필립(알렉산더 대왕의 부친)에 의해 세워진 후 그의 이름을 따라 불리어졌다. 로마에서 약 700마일떨어져있던이곳은 로마 시민의 특권을 완전히 누렸다. 펜티코스트(J.Dwight Pentecost)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동을 정복하는 중에 로마는 마케도니아와 교전하고 있었다. 역사를 살펴볼 때 우리는 로마군대에 소금이 부족했으며 따라서 로마 군인의 급료가 소금으로 지불되었다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로부터 '사람이 자기가 받는 급료(소금)만큼도 일을 못한다'라는 표현이 나왔다). 로마 군대는 전쟁을 그만두고 귀향할 위협에 처했다. 이것은 마케도니아가 여전히 정복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빌립보 사람들은 마케도니아인보다는 오히려 로마인들의 지배를 받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상당한 양의 소금을 모아 그것을 로마 군대에게 넘겨줌으로써 병사들은 급료를 지급받았다. 그들은 계속 마케도니아인들을 정복하고 쳐부숨으로써 마케도니아를 로마 제국에 통합시켰다. 빌립보 시민에 대한 보답으로 로마 황제는 그들에게 정복 식민지의 자격을 수여했다. 이것은 그들이 로마 시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같이 로마 시민으로서의 동일한 권리와 특권을 누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특별하고 안전한 배려 아래에 있었다. 즉 그들은 로마법이 제공하는 모든 특권을 누렸다. 로마의 거류민처럼 그들은 세금을 면제받는 특권을 누렸다. 그들이 비록 마케도니아에서 살았으나 로마인으로 되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수많은 로마 군인들은 군복무를 완전히 마친 후 이태리로 돌아가는 대신에 빌립보에 정착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빌립보는 또 하나의 작은 로마가 되었다. 즉 이 도시는 충성에 있어서나 법에 있어서나 철학 및 사고방식에 있어서 완전히 로마적이었다. 사도바울이 믿음을 통한 은혜로 받는 구원의 복음을 가지고 유럽 대륙을 횡단하기 시작한 곳이 바로 여기에서였다"([삶의 기쁨], The Joy of Living, pp.12,13).
5.그리하여 빌립보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최초로 기독교적 연주회에 귀기울였던 최초의 유럽 도시가 되었다. 그것은 한밤중에 연주되는 특별한 2중주와도 같았다.
6.기원후 57년, 자신의 3차 전도여행이 끝났을 때(그가 처음 방문한 지 약 5년후에)바울은두번잠시 빌립보를 방문했던 것 같다(참조, 고후 1:16; 행 19:21; 20:1-3).
7.기원후 62년에 사도 바울은 로마에 투옥된다. 사도행전 28:30,31은 6시간마다 서로 다른 로마 군사의 감시를 받으며 그가 세낸 방에 감금되어 있었음을 가리킨다. 비록 그가 일반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는 없었지만 쓰는 것은 허락받았다(엡 6:20; 빌 1:7,14,16; 골 4:18; 몬 1:1,10,13).
8.그러므로 바울이 자신의 사랑하는 교회에 빌립보서를 썼던 것은 그가 처음 빌립보를 방문한 지 약 10년후인바로그때였다.
9.바울이 로마에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 교회는 에바브로디도 편을 통해 그에게 애정어린 예물을 보냈다. 그들은 이미 수 년 전 그가 데살로니가에서 열심히 사역하고 있는 동안 그에게 두 가지 서로 다른 사랑의 선물을 보냈었다(빌 4:15,16).
10.로마에 있는 동안 에바브로디도는 매우 심한 병으로 거의 죽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목숨을 살리셨다. 그리하여 바울은 빌립보 사람에게 그들이 보내준 선물에 대한 감사와 또한 에바브로디도의 병이 나았다는 기쁜 소식을 전한다.
11.이 서신에는 세 가지 독특한 말투가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약 70번쯤다양한형태로나타남)이고, 다른 하나는 '기쁨'(18번)이란 말이며, 마지막 하나는 '정신'(12번 언급됨)이다.
I.인생의 목적이신 그리스도(빌 1장)
"이는내게사는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
1.바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호 안에서 편안히 쉬게 함(빌 1:1-12).
1.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에 대한 그의 문안
(1)그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쓴다.
(2)그는 또한 감독과 집사들에게 편지를 쓴다. 월보드(John Walvoord)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감독과 집사에 대한 언급은 빌립보 교회의 조직이 매우 발전되어 이제는 인정받는 사역자를 배출했던 성숙하고 재능있는 신자들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가리킨다. 포세트(A.R.Fausset)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감독과 집사가 언급된 가장 초기의 서신이며 그들이 구분되어 언급된 유일한 서신이다'. 물론 앞서 사도행전 6장에서와 같이 사람들은 집사와 유사한 방법으로 임명되어 교회에서 봉사하였다. 비록 집사로 불리우지는 않았지만 사도행전에서 특별한 봉사를 하도록 이렇게 사도행전에서 특별한 봉사를 하도록 이렇게 사람을 임명하는 제도의 우월성은 그 의미가 인정되고 있는 듯하다. 장로는 사도행전 14:23에서처럼 처음부터 모든 교회에서 임명되었으며 또한 사도행전 11:30; 20:27,28; 데살로니가전서 5:12,13에서도 언급되고 있다"([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인 빌립보서], Phillippians, Trumph in Christ, p.24).
헬라 학자인 웨스트(Kenneth Wuest)는 이와 유사한 태도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감독(bishop)이란 말은 어떤 자격을 지닌 감독자의 세속적 직업에 사용되는 헬라어를 옮긴 것이다. 가령 성전 수리의 책임을 맡은 관리나 군대의 장교가 이에 속한다. 이 단어 자체는 '~을 쳐다보다'를 의미한다. 바울은 그것을 장로에 대한 또다른 이름으로 사용한다. 장로는 교회 법령에 관련된 직책의 명칭이고, 감독은 지역 교회의 영적 복지를 관장하는 직책의 명칭이며 그 직무의 책임성과 능력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그는 사도행전 20:17,28에서 한 개인에 대한 칭호로 두 명칭을 함께 쓰고 있다. 'deacon'(집사)이란 말은 종을 나타내기 위해 일반적으로 쓰였던 헬라어의 영어철자이다. 그것은 노예와 고용한 종 모두에 적용되었다. 그것은 주인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종이 아닌 그의 활동에 있어서의 종을 의미했다. 이와 같은 말은 고린도전서 3:5; 고린도후서 3:6; 에베소서 3:7에서 '사역자'로 번역된다. 여기에서 그것은 사도 교회에서 직무를 맡은 자의 뚜렷한 계급을 가리킨다. 이러한 직책의 기원은 사도행전 6장에 제시되어 왔다"([빌립보서 단어 연구], Word Study of Philippians, p.28).
이에 대한 마지막 참고자료로서 펜티코스트(Dwight Pentecost)의 주석을 살펴 보자.
"집사(deacon)란 말은 '먼지를 일으키다'를 의미하는 복합 헬라어에서 왔다. 그것은 그가 걸어갈 때 그의 발로 먼지를 차며, 자기가 맡은 일을 수행하기 위해 파레스틴 마을의 먼지나는 길을 매우 빠르게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나타낸다. 집사가 할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는 빈둥거리거나 지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먼지를 일으키는 것과 같이 근면하게 자기가 맡은 일을 수행하며 돌아다녔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세움 받은 사람들은 '먼지를 일으키는 자' 혹은 '집사'로 불리었다"([인생의 기쁨], Joy of Living, p.114).
2.빌립보 성도들에 대한 그의 감사(빌 1:3-5).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빌 1:3).
3.빌립보 성도들에 대한 그의 확신.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물론 사실상 바울이 실제로 확신한 것은 이 빌립보 성도들 안에 내재하시는 '구세주'에 대해서였다.
4.빌립보 성도들에 대한 그의 간구.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빌 1:9,10).
여기에서 분별한다는 말은 시험 기간이 끝난 후 어떤 것에 대해 승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헬라인들은 시험에 합격한 의사들을 묘사하는데 그것을 사용했다. 그 때 그들은 의사로서 공인을 받았다.
2.바울로 하여금 커다란 고난 가운데에서도 기뻐하게 한 것(빌 1:12-20). 사도 바울은 자신의 투옥 경험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그것은 복음을 전파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그것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3가지를 통해 성취되었다.
1.묶인 채 감금됨(빌 1:13; 4:22). 월보드(John Walvoord)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 군대의 핵심인 근위대의 감시를 받았다. 이 편지를 쓴 때는 그가 로마 제국의 중심지인 로마에 체류하는 동안이었다. 그러나 로마에 있었던 다른 곳에 있었던 간에 사도 바울은 관습에 따라 하루 24시간 동안 매 6시간마다 보초가 교대되는 로마 군사에게 감시받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의심할 나위없이 이것은 그가 친구에게 말을 걸거나 기도하거나 편지를 쓰려고 할 때 조차 그를 감시하는 자의 모든 그악한 특징과 변덕에 바울이 순종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가장 모진 체험이었을 것이다. 이 로마감시병은 항상 있었다. 그러나 또한 그러한 환경은 그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무수한 기회를 제공해 주었으며 감시하는 자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선포하고 그것이 그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고 증거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행한 증거가 진짜인지 아닌지 알고자 하는 여러 감시자의 조사를 받았다. 가장 사소한 탈선이나 초조감, 불안감도 그가 감시자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를 빼앗을 것이며, 생활의 어떠한 일관성이 단절되어도 곧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감시자가 본 바울 사도의 성실성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의 열성적인 강론은 감시자들마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될 때 그 효력이 확실하게 나타났다.
오직 하나님만이 바울이 살도록 허락된 셋 방에서 계속 진행되었던 일을 아셨다. 거기에서 감시자들은 바울이 자신의 친한 친구들과 대화하는 소리를 들었으며 그 투옥된 자들로부터 들은 이상한 말에 대해 물어볼 수 있었다. 달빛만이 비치는 어두운 밤, 고적한 시간에 수많은 감시병들이 바리새인으로서의 그의 초기 삶,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적대감과 박해, 그의 놀라운 개종 그리고 그가 투옥되게 된 이유 등에 대한 바울의 증거를 들었을 것이다. 분명히 이 모든 것은 친위대 보초들 중에 오고간 대화의 주제였으며, 그들이 그의 부당한 투옥을 이해했을 때 군인들 사이에 동정을 불러일으켰다. 바울을 묶은 사슬은, 개종만 된다면 그들이 이리저리 옮겨다닐 때 세상 끝까지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로마제국의 우수한 군인들과 의사를 소통하는 효율적인 수단이 되었다. 그것은 삶의 모든 환경이란 변화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은혜가 택한 백성의 삶 가운데 나타날 수 있는 강단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 Triumph in Christ,pp.37,38).
2.그의 친구들의 용기(빌 1:4). 바울의 투옥은 그의 소심한 동료 신자들을 자극하여 보다 떳떳하게 복음을 전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것을 보여주는 한 가지 가능성은 여러 명의 로마 군사 고관들의 개종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증거는 의심할 여지없이 로마에 있는 그러한 정규 교회의 성도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3.그의 대적들의 세속성(빌 1:14-16).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시편 기자는 언젠가 다음과 같이 썼다.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시 76:10).
즉,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의 불순하고 불성실한 동기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뻐했다.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세상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복음의 불완전한 선포가 아니라 그것이 전혀 전파되지 않는 데 있다.
4.그의 장래에 대한 확신(빌 1:19,20).
바울은 두 가지를 확신하고 있다.
(1)하나님의 성령께서 그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다. 윌스비(Warren Wiersbe)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급하다'(Supply)란 말에서 영어의 'chorus'(합창)이란 말이 나온다. 헬라 도시가 특별한 축제를 개최하려 할 때는 언제든지 돈을 주고 누군가 가수나 무희를 데려와야 했다. 소위 이러한 기부는 아낌없는 것이어야 했다. 그래서 이 말은 '아낌없이 푸짐하게 제공한다'를 의미하게 되었다.
바울은 그 자신의 줄어드는 재원이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푸짐한 재원에 의존했다."(<기뻐하라>, Be Joyful,p.36).
(2)바울의 몸을 통해 구세주께서 존귀하게 될 것이다(빌 1:20). 이것은 어떻게 행해질 수 있는가? 망원경을 통해 멀리 있는 대상을 가까이 가져와 볼 수 있거나 현미경을 통해 작은 물체를 크게 볼 수 있는 사실에서 이것이 관찰되어진다. 그리하여 이러한 기구들을 영적 방법으로 바르게 적용함으로써 신자들은 성도와 죄인들이 감시하는 데 있어서 그의 몸을 통해 그리스도를 크고 가까이 있게 할 수 있다.
3.바울로 하여금 여전히 기쁘게 봉사하게 함(빌 1:21-30).
1.그의 소망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 1:21,23;참조, 고후 5:8).
*주:바울은 죽음을 '떠나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참조, 딤후 4:6). 이 '떠난다'는 말은 다음과 같은 곳에 쓰였다.
(1)군인들이 그들의 막사를 거두고 이동했을 때.
(2)정치가가 투옥된 자를 풀어주었을 때.
(3)농부가 자기 황소의 멍에를 풀어주었을 때.
2.그의 결심은 살아남아 성도들에 대해 사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4).
(1)이러한 사역은 분투 노력하는 것을 포함한다.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빌 1:27;참조, 삿 1:3).
(2)이러한 사역은 불변성을 포함한다.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빌 1:28). 여기에서 "두려워하는"(terrified)이란 말은 전쟁에서 뒷걸음질치는 말을 가릴킬 때 헬라인들이 사용했던 단어이다(참조, 사 41:10; 마 10:28; 히 13:5,6).
(3)이러한 사역은 고난을 포함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II.인생의 모범이신 그리스도(빌 2장)
이장에서바울의주제는 그리스도인의 미덕인 "일체감"이다.
1.하나가 되는 것에 대한 권면(빌 2:1-4).
1.이러한 일체감은 유용하다(빌 2:1). 2:1에 나오는 "만약"(if)이란 말은 "...이기 때문에"(since)로 번역되어야 한다.
(1)하나님의 아들 안에 위로와 권면이 있다.
(2)하나님의 성령 안에 격려와 교제가 있다.
2.이러한 일체감은 달성할 수 있다(빌 2:2-4). 그것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김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빌 2:3).
플라톤은 "겸손"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우주의 신성한 질서에 복종하고 불순하게 자만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 이 말은 최근에 나일 강에서 발견된 일반 문서에 사용되고 있다. 만약 이러한 원리가 준수되었더라면 피할 수도 있었을 비극적인 교회의 분열이 얼마나 많았었는가!
2.일체감의 실례(빌 2:5-30).
1.그리스도의 모범(빌 2:5-8). 확실히 이 구절들은 모든 성서 가운데 가장 위대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는 이 절들로부터 죄많은 피조물을 그의 거룩한 창조주와 결합시키고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하는 일을 알게 된다.
(1)그분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셨다(요 17:5; 고후 8:9).
(2)그분은 자신의 이름을 떨치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셨다. 2장 7절의 헬라어는 "케누"(kenoo)이며 이것은 "비우다"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무엇을 비웠는가?
1)소극적인 면 - 그분은 어떤 의미에서도 자신의 신성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과거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영원히 하나님의 완전한 아들일 것이다(참조, 요 1:7; 17:5; 고후 4:4; 골 1:15; 골2:9; 히 1:3).
2)적극적인 면 - 그분은 잠시 동안 세속적인 틀 가운데 자신의 거룩한 명성을 숨기셨다. 비록 그분은 지상 생애 동안 모든 신성들을 그대로 갖고 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그러한 신성들에 대한 독립적 사역을 성령에 넘겨주었다(참조, 시 22:6; 사 53:3; 막 9:12; 롬 15:3). 다음의 두 구절들은 이 점에서 우리가 조사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형체."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기 이전에 육신의 형태를 지니고 계셨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람이나 사물의 내적이고 본질적이며 변치않는 성격을 가리키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 테니스 선수는 오늘 매우 진기한 자세(form)를 취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함." 그는 이와 같은 그의 거룩한 신성을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유지되어야 하는 보화로써 주장하거나 간주하지 않았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것을 유지하는데 마음을 두지 않으셨다.
(3)그분은 인간의 모양으로 지음을 받으셨다(요 1:14; 롬 1:3; 8:3; 갈 4:4; 히 2:14,17). 이 단순하지만 지극히 엄청난 사실은 인간의 정신으로는 희미하게나마도 이해할 수 없다. 무한하고 거룩한 창조주가 갑자기 자신의 제한되고 죄 많은 피조물의 모습을 띠게 된다(그러나 그에게는 죄가 없음).
그러한 믿을 수 없는 겸비(condescension)를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전능하고 존엄한 세속의 왕이 잠시 자신의 놀랄만한 재물이 저장된 창고를 버리고 사랑하는 조정을 뒤에 남긴 채 보잘 것 없는 개미의 몸을 취하기로 결정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인자"는 그분의 지상 생애 동안 주님이 가장 좋아하던 자신의 칭호였다.
(4)그분은 몸소 종의 형제를 띠었다. 그분은 막강한 인간적 황제나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철학자로 오시지 않았다. 더구나 이러한 사실은 어마어마한 속성에 대한 자신의 비하이기조차 했다. 그는 오히려 비천한 종으로 오셨던 것이다.
(5)그분은 자신을 낮추셨다. 즉 그분은 권위에 복종했다(참조, 벧전 2:21-24). 그분은 우리의 말을 사용하고, 우리의 의복을 입었으며, 우리의 음식을 먹고, 우리의 공기로 호흡하며, 우리의 야비하고 사악한 대우를 견디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그분의 말씀을 사탄의 말과 대조해 보라(마 26:39,42; 사 14:13,14).
(6)그분은 죽음에 복종하셨다(마 26:39; 요 10:18; 히 5:8; 12:2).
(7)그분은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육체적으로나 사법적으로 가장 지독한 형태의 죽음을 당하셨다(갈 3:13; 사 53;시22편).
2.하나님의모범(빌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우리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살펴 보았다. 이제 그분의 높아지심에 주목해 보라.
(1)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높이 들림을 받으셨다(사 52:13; 요 17:1; 행 2:33; 히 2:9).
(2)그분은 다른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권위있는 지위와 자격)을 부여받았다(엡 1:20; 히 1:4).
(3)그분은 만유의 주로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1)이러한 인정의 방법 - 무릎을 굻고 혀로 고백함으로.
2)이러한 인정을 하게 하는 피조물.
"하늘에 있는 자들" : 천사들의 세계
"땅에 있는 자들" : 성도와 죄인들의 세계
"땅 아래 있는 자들" : 악마의 세계
(참조, 계 5:13; 7:9-12; 14:6,7; 사 45:23; 롬 10:9,10).
-주(註):이 세상에서 그분을 주로 고백하는 것은 구원을 의미한다. 그러나 내세까지 기다리는 것은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 그리하여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류가 이것을 '언제'행하느냐가 아니라 '어디서' 행하느냐 하는 것이다.
3.바울의 모범(빌 2:12-18)
(1)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 그것을 이루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우리가 그가 "너 자신의 구원을 위해 힘쓰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주목하자. 여기에서 의미하는 것은 어떤 것을 성취하라는 것이다. 헬라인은 수학문제를 그 논리적 결론으로 이끌 때 또는 금광에서 금을 캐낼 때 이 말을 사용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따라서 그것은 모방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육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갈 2:20).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일련의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과정이 되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내적이거나 외적인 과정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고 우리는 이루어야 한다.
(2)빛을 비추는 문제에 있어서 - 불을 밝히라.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빌 2:15,16). 펜티코스트(J.Dwight Pentecost)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밝히는'이란 말을 할 때 매우 흥미있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한 사람은 등불을 가지고 다른 한 사람은 등불을 가지지 않은 채 밤길을 걸어가고 있는 두 여행자를 가리킨다. 한 사람은 뒤따르는 다른 사람의 발치까지 빛이 비추도록 높이 자기 등불을 밝힌다... 바울이 "빛"으로 번역한 말을 빛을 내는 물체(luminary)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그것은 별과 같이 빛을 비추는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세상은 '의의 아들'이 태양이 떠오르듯 출현하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 빛을 이 세상에 다시 가져오기 위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 인간이 넘어지지 않도록 빛을 비추는 별들이 있다. 당신은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별이다. 그러므로 투덜거리거나 불평하지 말고 모든 일을 하라."([삶의 기쁨], The Joy of Living, pp.101,102).
4.디모데의 모범(빌 2:19-24). 디모데는 이 교회와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참조, 행 16:3; 17:14; 15; 19:22; 20:3,4; 빌 2:19-23).
(1)빌립보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디모데는 목자였다,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빌 2:20).
(2)사도 바울과의 간계에 있어서 디모데는 아들이었다.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빌 2:22).
(3)복음과의 관계에 있어서 디모데는 종(servant)이었다.
"(그는)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 2:22).
디모데은 바울 서신에서 24번 언급된다.
5.에바브로디도의 모범(빌 2:25-30). 이 사람은 빌립보 출신의 이방 신자였다. 그의 이름은 "매력적인"을 의미한다. 그는 바울에게 봉사하고 그에게 기금을 전해주도록 빌립보 교회에 의해 파견되었다.
(1)그의 봉사
1)"나의 형제" - 그들이 공통의 사랑을 통해 맺어져 있음을 가리킴.
2)"함께 수고하는 자" - 그들이 공통의 사역으로 묶여져 있음을 가리킴.
3)"함께 군사된 자" - 그들이 공통의 위험을 통해 묶여져 있음을 가리킴.
(2)그의 질병 : "죄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빌 2:27).
(3)그의 슬픔 :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빌 2:26).
펜티코스트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근심한지라라는 구절은 가장 생생한 표현이다. 그것은 어떤 커다란 육체적인 긴장이나 정신적 혹은 감정적 긴장에서 비롯된 혼란되고 초조하며 괴로운 상태에 대한 언급이다. 그의 향수병이 그를 너무 무겁게 압박했으므로 에바브로디도는 자기에게 맡겨진 정규적인 어떤 직무에도 관심을 기울일 수가 없었다. 그러한 상태는 종종 질병을 수반하여, 육체적인 질병으로부터 어떤 사람이 회복하도록 돌보는 자는 육체적인 허약성 때문에 생기는 이러한 고통을 처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에바브로디도의 허약성과 육체적 상태가 이와 같았으므로 그는 그이 병에서 비롯된 사람들의 걱정과 관심 때문에 괴롭기까지 했다"([삶의 기쁨],pp.119,120).
(4)그의 생애:월스비(Warren Wiersbe)박사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시사함으로써 에바브로디도의 생애를 적절히 요약하고 있다.
1)균형잡힌 그리스도인(빌 2:25).
"에바브로디도는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이었다. 균형이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교제'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복음 전파'에 대해서는 잊어버린다. 또 어떤 사람들은 복음에 대한 '믿음'을 너무 고집함으로써 다른 신자와의 '교제'는 등한시한다. 에바브로디도는 이러한 함정 가운데 어떤 곳에도 빠지지 않았다. 그는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흙손을 들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던 느헤미야와 같았다(느 4:17). 당신은 검으로 집을 세우거나 흙손으로 전쟁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님의 사역을 성취하는 데에는 이 둘이 다 필요하다. 아이런사이드(H.A.Ironside)박사는 오직 '교제'만을 염두에 두는 신자들에 대해 말하곤 했다. 그들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일이나 그의 대적들과 맞서 신앙을 수호하는 일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회합 장소 앞에 그들은 '오직 예수'(JESUS ONLY)라는 푯말을 걸었다. 그러나 바람으로 인해 몇 개의 글자가 달아나 그것을 '오직 우리'(US ONLY)가 되었다. 그것은 한 가지 면에 치우쳐 있는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완전한 묘사였다"([기뻐하라], Be Joyful,p.76).
2)짐을 진 그리스도인(빌 2:26,27).
3)축복받은 그리스도인(빌 2:28-30).
III.인생의 상급이신 그리스도(빌 3장)
1.이러한상급을더럽히는 자들(빌 3:1-3,18,19).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유대주의에 대한 언급이라고 생각된다. 바울은 준엄한 말로 그들과 그들의 행위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1.그들은 개와 같았다. 그들은 항상 바울의 발꿈치로 물거나 그들의 잘못된 교리를 떠들어댔다.
2.그들은 사악한 일꾼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한 사업"을 육신으로 수행했다(참조, 사 64:6; 마 23:15).
3.그들은 분리주의자들었다. 이 말은 글자 그대로 '절단하는 행위'(mutilation)을 의미하며 할례라는 말 과는 이음동의어(異音同意語)이다. 그들은 할례가 구원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가르쳤다(참조, 행 15:1; 갈 6:12-18). 참 할례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은 골로새서 2:11에서 발견된다.
4.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대적들이었다.
5.그들의 탐욕은 곧 그들의 신이었다(골 2:20-23).
6.그들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다.
7.그들은 철두철미한 물질주의자들이었다.
2.이러한 상급의 가치(빌 3:4-6). 바울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자신의 수많은 세속적 장점들을 기꺼이 해로 여겼다.
1.그는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다. 바울의 부모는 경건한 자들이었다.
2.그는 이스라엘의 혈통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교도이거나 이스마엘 혹은 에서의 혈통에서 태어난 자가 아니라. 이삭과 야곱의 계보에서 태어난 자였다.
3.그는 베냐민 지파에 속했다. 이 지파는 12지파 중에서 가장 뛰어난 지파 가운데 하나였다. 이스라엘의 최초의 왕(사울)은 이 지파의 출신이었다.
4.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다. 그는 히브리어로 말했다. 그는(헬라 문화를 채택한 유대인인) 헬라화한 자가 아니었다(참조, 고후 11:22; 행 21:40; 22:2). 그는 또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했다(행 22:3).
5.그는 바리새인이었다. 바울은 이에 합당한 교육을 받았다.
6.그는 유대교를 지키는 데 있어서 매우 열심이었으며 그의 수많은 훌륭한 저서들로 알려져 있었다(고전 15:9; 갈 1:13,14).
7.그는(인간이 할 수 있는 한) 구약의 율법을 지켰다.
3.이러한 상급의 영광(빌 3:7-17,20,21). 그러나 그가 개종하자마자 바울은 의식, 종족, 종교, 명성, 인간적 의(義)에 대한 모든 확신을 포기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대속자'를 소유했다. 이제 그가 개종을 통해 얻은 것을 살펴보자.
1.그는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빌 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으려 함이니"(빌 3:7,8).
순교한 선교사인 짐 엘리어트(Jim Eliot)는 언젠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자기가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지킬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참조, 렘 9:23; 고전 2:2).
2.그는 새로운 의를 얻었다(빌 3:9).
3.그는 새로운 권능을 얻었다(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0).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유명한 절의 상반절의 의미에는 흥미를 가지면서도 나머지 하반절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부활의 권능은 반드시 고난과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이것들은 서로 손을 잡고 있다.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 모든 경건한 신자들이 지향했던 목표였다. 다음과 같은 증거들을 살펴보자.
(1)모세 - 출애굽기 33:13.
(2)다윗 - 시편 42:1; 63:1,2.
(3)빌립 - 요한복음 1:45(참조, 롬 6:3-5; 8:!7).
4.그는 새로운 목표를 얻었다(빌 3:11-17).
월보드(John Walvoord)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는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라'(12절)고 말을 꺼낸다. 장차 부활 때에 소유하게 될 완전함을 그는 아직 얻지 못했다. 그것은 그가 여전히 죄의 속성과 죄짓기 쉬운 육신을 갖고 있었으며 영적 진보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할 때 사도 바울은 '텔레이우'(teleioo)라는 헬라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목표에 이르거나 목적을 달성하다'를 의미한다. 이것은 우주의 섭리나 목적을 가리키는 'teleology'(목적론)이라는 영어의 어원이다. 이와 같은 말이 누가복음 13:32; 요한복음 17:23; 고린도전서 2:6; 고린도후서 12:9; 에베소서 4:2 그리고 그 외의 많은 구절에서 발견된다"([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인 빌립보서].pp.90,91).
빌립보서 3:13에 나오는 바울의 "내가 오직 한 일"이란 말에 특히 유의하자. 이에 대한 다른 성서의 실례는 다음과 같다.
(1)예수님과 부자 청년 지도자(막 10:21).
(2)마르다와 예수님(눅 10:42).
(3)소경이었던 자(요 9:25).
(4)시편 기자(시 27:4; 참조, 약 1:8).
윌스비(W.Wiersbe)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헌신은 권능의 비밀이다. 만약 강물이 둑을 넘쳐 흐르도록 그대로 방치된다면 그 주변 지역은 물에 잠기게 된다. 그러나 만약 그 강을 댐으로 막아 통제한다면 그것은 수력의 그원이 된다"([기뻐하라],p.97).
(바울의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란 구절에 관해서는 고후 9:24,26; 딤후 4:7,8; 히 6:1; 12:1을 참조하라).
5.그는 새로운 소망을 얻었다(빌 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맥기(J.Vernon McGee)박사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시민권이 영어 흠정역에서는 'conversation'(교제)으로 나와 있다. 몽고메리 여사는 이것을 보다 더 적절하게 번역했다. '우리의 본향은(city home)하늘에 있도다." 나는 이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싶다. '우리는 하늘에 거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으나, 그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는 하늘에 거하는 자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가 하늘의 시민이기 때문에 신자가 하늘에서 오는 법에 복종해야만 한다. 누군가 '하늘로 통하는 모든 길은 곧 하늘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이 땅에서의 신자의 삶은 하늘로 가는 모든 길을 비추어야만 한다. 바울이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미래의 일이다"([빌립보서 탐구], Probing Through Phillippians, pp.67).
따라서 빌립보가 다른 나라의 국토로서 로마의 식민지였던 것처럼, 교회는 지상 위에 있는 하늘의 식민지이다.
IV.인생의 권능인 그리스도(빌 4장)
1.이권능은하나되게 할 수 있다(빌 4:1-3).
2.이 권능은 강하게 할 수 있다(빌 4:4-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1.두 가지 법칙
(1)"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여기에서 "염려하는" 이란 말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끌려가는"을 의미한다. 바울은 여기에서 관심(concern)에 대해서가 아니라 공포(penic)에 대해 말하고 있다(시 55:22; 벧전 5:7).
(2)모든 일에 기도하라. 더구나 우리의 기도는 명확하고 헌신적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걱정해서는 안되는 오직 두 가지 영역이 있음을 사람들은 주목해 왔다.
1)자기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러한 일들. 이에 대한 해답은 '노력'이다.
2)자기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는 그러한 일들. 이에 대한 해답은 '기도'이다.
2.두 가지 결과(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기에서 '기킨다'는 말은 황제의 왕궁에 소속된 정예 로마 군사가 감시하는 데 사용되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서 5:1에 언급된 내용처럼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 그러나 염려 대신 기도를 잘 하는 사람만이 실로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평강이 지켜주는 것을 보게 된다.
(1)잘못된 느낌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우리의 마음.
(2)잘못된 생각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우리의 정신.
"기도는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라는 친숙한 표어가 항상 진실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기도는 우리를 절망으로 몰고가는 그러한 문제들은 막아줌으로 우리를 변화시킨다(참조, 사 26:3; 시 119:165; 고후 10:5). 따라서 기도는 화평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방법이다.
3.이 권능은 정결케 할 수 있다(빌 4:8,9).
이 절은 성경 전체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지극히 간결한 묘사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들을 생각하라"는 구절은 글자 그대로 "숙고하라"로 번역될 수 있다.
4.이 권능은 흡족하게 할 수 있다(빌 4:10-12).
바울은 자신의 모든 환경에서 "자족하기를" 배웠다. 그러나 자족(contentment)이란 만족(complacency)과 다르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은 안으로 억누르는 것(containment)이다. 바울의 몸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는 이러한 만족을 그에게 보증하셨다. 다음과 같은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에 대해 살펴보자.
1.온도계와 같은 신자. 그의 만족은 완전히 외적인 환경에 의존하고 있다. 그는 단순히 영적 온도의 증감만을 기록한다.
2.온도 조절장치와 같은 신자. 그의 만족은 외적 환경과 완전히 독립적이다. 그는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그를 둘러싼 환경을 조절한다.
5.이 권능은 도움을 베풀 수 있다(빌 4:13-23).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바울이 사용한 몇 가지 전치사들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1.그리스도 안에(in) 있다는 것은 구원을 의미한다.
2.그리스도를 통해(through) 사역하는 것은 성별을 의미한다.
3.그리스도를 위해(for) 사는 것은 헌신을 의미한다.
4.그리스도에게(to christ) 굴복하는 것은 희생을 의미한다.
5.그리스도와 더불어(with)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찬미를 의미한다.
바울은 이 사랑스러운 기쁨의 서신을 다음과 같이 영광스럽게 환기시키면서 끝을 맺고 있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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