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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순교자 형과 옥살이 모아보기. 4편
18. 당고개 형장 순교사
당고개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가 거의 끝나 가던 기해년 12월 27일과 28일 양일(음력)에 걸쳐 이곳에서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기해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거룩한 곳입니다.
당시 당고개는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던 곳은 아니었지만, 설을 앞두고 상인들이 닥쳐올 설날 대목장에 방해되지 않도록 처형 장소를 서소문 밖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요청하였기 때문에 서소문 밖 형장을 피해 조금 한강 가로 나간 곳이 당고개입니다.
그 후 6년 뒤 1846년 9월 16일 병오박해 때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성 김대건(金大建, 본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가 새남터를 향하여 마지막 가는 길에서 이곳에 수레를 멈추고 잠시 쉬어 갔던 곳입니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이성례는 남편과 격리된 채 젖먹이 아들(스테파노)과 함께 여인 감옥에 수감됐습니다. 잡혀온 다음날부터 문초와 형벌을 받아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졌지만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이미 순교를 각오한 터였기 때문입니다.
정작 이성례를 괴롭힌 것은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옥에 함께 있는 젖먹이였습니다. 젖은 나오지 않고 먹일 것이 없어서 막내아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편은 매를 맞아 순교하고, 젖먹이는 더러운 감옥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이성례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순교하면 젖먹이뿐만 아니라, 밖에서 구걸로 연명하고 있는 나머지 4형제 모두 고아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스테파노가 굶어 죽자 이성례는 더이상 버틸 수 없었습니다. "천주를 모른다"고 외치고 감옥에서 풀려나왔습니다. 남은 아이들마저 잃고 싶지 않은 지극한 모성애였습니다.
얼마 후 이성례는 큰아들 최양업이 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시 압송됐습니다. 그는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 격려에 힘을 얻어 전에 했던 말을 용감하게 취소했습니다. 잠시나마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영광스럽게 순교하기로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평화신문, 2012년 10월 28일, 남정률 기자]
가. 어머니를 치명터에 보내는 네 형제
6세부터 15세까지 네 형제가 부모를 가둔 옥에 찾아와 울부짖자 철이 든 차남 희정(羲鼎, 장남 최양업 신부의 바로 밑 동생)은 어머니가 다시 배교 할 것을 우려해 어린 동생들을 달래 발걸음을 돌립니다. 그 후 동냥한 음식을 틈틈이 부모에게 넣어 주면서 이성례가 참수되기 하루 전 어린 형제들은 동냥한 쌀과 돈 몇 푼을 들고 희광이(사형수)를 찾아갔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한칼에 하늘나라에 가도록 해 주십시오.” 이에 감동한 희광이들은 밤새 칼을 갈아 당고개에서 그 약속을 지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먼발치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본 어린 사 형제는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용감한 어머니의 순교를 기뻐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나. 모성(母性)과 신성(神性)의 합치
마리아는 관례대로 마지막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감옥으로 찾아온 자식들에게 “형장에는 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자신의 마음이 약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녀는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말아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최양업 신부)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자료: 《한국 초기 천주교회의 여정》(장영돈 편저)에서 발췌 요약]
19. 절두산 형장 순교사
가. 양화진(절두산).
병인양요 여파로 천주교 신자 박해가 다시 격화됐다.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략하는 데 천주교 신자들이 도움을 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병인양요가 진행된 10월 14일~11월 24일 천주교 신자 20여 명이 서울에서 양천으로 이어지는 한강 연안의 양화진에서 처형됐다.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신자 처형지를 양화진으로 옮기며 포고한 글에서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며 그로 인해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럽혀졌으니 양화진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밝혔다.
양화진에서 처형된 대표 순교자: 이의송(프란치스코, 1821~1866)
김한여(베드로, ?~1866) .김진구(안드레아, 1825~1866)
박성운(바오로, 1843~1866)
20. 갈매못 형장 순교사
때마침 고종이 병을 앓게 되고 국혼(國婚)도 가까운 시기여서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은 좋지 못한 징조라 하여 이들을 250여 리 떨어진 보령수영(保寧水營)으로 옮겨 처형하기로 했다.
사형장은 보령 갈매못이라 하는 곳인데, 수사(水使)가 있는 수영(水營)에서 한 10리쯤 떨어진 강가이었다.
공주에서 희광이가 와 사형을 집행하는데, 맨 먼저 안 주교의 목을 반쯤 베고 웃돈을 더 달라 하며 베지 아니하였다.
안 주교의 몸이 뒤틀리며 목에서 보배로운 순교의 선혈이 낭자하게 흘러내렸다. 그러자 보령 원님이 400량을 더 주기로 정한 후 오매트르 신부는 두 번의 칼질에 목이 잘리고, 다른 증거자들은 모두 단칼에 참수되었다.
21. 황새 바위 형장 순교사
공주 황새바위는 한국 천주교 역사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증언지 중 하나로 그 의미가 크다. 공주에는 일찍부터 충청남북도를 관할하는 관찰사와 지금의 시에 해당하는 감영이 있었다.
감사의 명에 의해 황새바위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충남의 홍주, 예산, 해미, 덕산, 신창, 홍산, 연산, 청양, 공주, 이인, 탄천과 충북의 청주, 진천, 연풍, 옥천, 전라도 전주, 광주, 경기도 죽산, 포천, 그리고 한양의 교우들이 공주에 와서 순교하였다.
황새바위 앞을 흐르는 제민천은 지금처럼 둑이 쌓여 있기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는데, 홍수로 범람할 때에는 순교자들의 피로 빨갛게 물들어 금강으로 흘렀다고 한다.
순교자들은 참수, 교수, 돌로 맞아 죽음, 옥사, 아사, 매질 등으로 죽어갔는데, 교회사가 달레(Dallet,Claude Charles)는 공주 감영에서 있었던 교수형에 대해 "옥의 벽에는 위에서부터 한 자 높이 되는 곳에 구멍이 뚫려 있다.
매듭으로 된 밧줄 고리를 죄수 목에 씌우고 밧줄 끝을 벽의 구멍으로 내려보낸다. 그리고 옥 안에서 신호를 하면 밖에서 사형 집행인이 밧줄을 힘껏 잡아당긴다. 희생자가 죽으면 시체를 밖으로 끌어내어 장례도 지내지 않고 밭에 내버려 둔다." 고 묘사하고 있다. 때로는 구멍이 있는 형구돌이 사용되었는데 구멍에 줄을 넣고 죄수의 목에 얽어맨 다음 형구돌의 반대편에서 줄을 잡아 당겨 죽였다.
공주에서의 순교자들은 당시 '사학의 괴수'로 알려져 있던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꼬)과 10여명의 회장들을 비롯해 연령, 성별, 신분에 관계없이 무수히 많다. 가장 나이 어린 순교자는 김춘겸의 딸로 당시 불과 10살 밖에 안 되었고, 최연장자는 남상교(아우구스티노)로 당시 84세였다. 20세 미만의 순교자도 20명이나 되었으며, 양반, 중인, 농민, 노비 등 그 신분계층도 다양했다.
22. 제주, 김기량 펠릭스 순교행적
제주를 복음화하려는 그의 노력은 안타깝게도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박해가 일어난 직후 그는 거제도로 나갔고,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박하유(薄荷油)를 팔러 조선수군의 본부가 있던 통영으로 나갔다가 게섬(현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박하유는 천주학쟁이의 물건이다.”라고 말하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통영관아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굳게 신앙을 지켰다.
옥에 갇힌 뒤 혹독한 매를 맞고도 네 명의 신자들에게 “나는 순교를 각오하였으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오시오.”라고 권면하였다. 그럼에도 목숨이 붙어있자 관장은 다섯 명 모두 옥으로 옮겨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특히 관장은 그의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때가 1867년 1월(음력 1966년 12월)로 당시 김기량의 나이는 51세였다.
23. 순교 형태로 보는 복자 124위
[순교자성월 특집]
거룩한 순교자들의 피, 오늘날 신앙을 꽃 피우다
- 도끼에 목 잘리고 있는 순교자(참수). 매를 맞으며 죽어가고 있는 순교자(장사). 줄로 목을 졸라 사형하는 모습(교수). 이 그림들은 고 탁희성(비오, 조선 왕실의 마지막 궁중화가) 화백이 동양채색화로 그린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모습이다.
- 124위 순교자 순교형태별 분류.
신앙선조의 순교 정신과 행적을 기리는 한국교회만의 특별한 절기, 9월.
순교자성월을 맞이해 가톨릭신문은 현재 시복시성 추진 중인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에 주목하고, 다양한 시각을 제시한다.
기획은 독자들의 보다 쉬운 접근과 이해를 위해 ▲ 순교 형태로 보는 ▲ 지역으로 보는 ▲ 신분으로 보는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등으로 3회에 걸쳐 진행된다.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순교자성월, 여러 가지 형태의 순교자 분석을 통해 우리 124위 신앙선조들의 아름다운 향기를 느껴보자.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순교 형태는 다양했다. 전체적으로 참수가 76명으로 가장 많았고, 장사가 15명, 교수 11명, 능지처참 2명, 군문효수 1명, 옥사 12명, 순교형태를 알 수 없는 순교자는 7명이었다.
초대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테르툴리아누스는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라고 했다. 처참한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증거하며 생을 마감했던 124위 순교자들을 생각하며 9월 한달을 묵상한다.
참수(76명)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를 순교형태로 분석해보면 ‘참수’가 76명(61.3%)으로 대다수를 차지한다. 윤지충 바오로와 함께 권상연 야고보,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강완숙 골룸바 등 많은 순교자들이 참수로 절명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 특별위원회가 펴낸 약전에는 참수의 경우, ‘칼날을 받았다’고 표현돼 있다.
참수는 목을 베는 처형방법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방법 중 하나이며, 전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역시 참수형이 있었는데 도적이나 역적과 같은 ‘대역 죄인’을 위한 사형제도였다.
양반이라면 유교사상에 따라 부모가 물려주신 신체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사약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인들의 대다수가 참수형을 선고받은 것을 보면, 당시 천주교인들에 대한 혹독한 평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후에는 ‘먼저 죄인의 목을 베고 나중에 보고하라’는 이른바 ‘선참후계령’이 적용돼 지방관이 마음대로 천주교인들을 살해하고도 적당히 보고를 생략, 수많은 무명 순교자가 생겨나기도 했다.
장사(15명)
장사로 죽음을 당한 순교자들은 원시장 베드로, 윤유일 바오로, 최인길 마티아 등 밝혀진 숫자만 124위 중 총 15명(12.1%)에 달한다.
말 그대로 매를 맞아 죽음을 당한 것이다. 장사로 숨을 거둔 순교자들을 보면, 대부분 죽을 때까지 매질을 받게 되는데 뼈가 부러지는 것은 물론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큰 돌을 들어 가슴을 여러 번 내리치거나, 불두덩에 달궈진 몽둥이로 짓찧는 등 형태가 참혹하고, 다양하며 여성 또한 매를 맞아 순교하기도 했다.
교수(11명)
참수형과 장사를 제외하고도 교수형으로 생을 마친 순교자들도 있었다. 박취득 라우렌시오, 유중철 요한, 유문석 요한,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등 11명(9%)이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교수형은 새끼줄로 목을 졸라 죽이는 형태로 행해졌는데 공개 장소에서 정해진 격식에 따라 죽이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조선 후기 천주교인들의 경우 사령들이 옥중에서 임의적으로 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참수형보다는 약한 형벌로서 시체를 매장할 수 있었으며, 특히 박해가 가열되면서부터는 참수형보다 손쉬운 교수형이 많이 이뤄졌다. 교수치명이라고 한다.
능지처참(2명)
조선시대 모반이나 대역죄를 지은 중죄인에게 행하던 가장 잔인한 형벌로서 124위 중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윤지헌 프란치스코 등 2명이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했다.
죄인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사지를 잘라내고 마지막에 목을 베어 여섯 토막을 내어 죽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몸을 토막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체 토막을 보여주어 대중에게 경계심을 주는 부가형이 가해졌다.
능지처참은 조선 고유의 것이 아닌 대명률에 따른 형벌이었고, 참수형보다도 잔인했다. 천주교인들을 처형할 때에도 능지처참형은 흔히 사용되지 않았지만 유항검, 윤지헌 등이 ‘서양 선박을 불러들여 나라를 해롭게 하는데 앞장섰다’해 반역죄를 선고받고 이 형벌을 받았다. 가족들 또한 유배형을 받고 가산은 몰수된다.
군문효수(1명)
사형수의 머리를 베어 장대에 매다는 형벌이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고려·조선의 5형 중에서 사형에, 사형 중에서도 참수형에 속하는 것으로 대역죄인 등 중범자들에게 행했다.
능지처참의 경우에는 머리를 거두어 갈 수 없었으나 참수한 경우에는 3일이 지나면 이를 거두어갈 수 있다. 군문효수의 경우에는 머리를 군문 앞에 매단 경우는 흔치않았고 실제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시장이나 성문 누각에 매달았다.
그 외(옥사 12명, 알 수 없음 7명)
이밖에도 여러 고문들을 이기지 못해 옥에서 숨을 거둔 옥사가 12명(9.6%)이었으며, 방 프란치스코, 정산필 베드로, 송 베네딕토, 송 베드로, 이 안나, 박 프란치스코, 오 마르가리타(7명)는 정확한 순교 형태를 알 수 없었다.
[가톨릭신문, 2008년 9월 7일, 오혜민 기자, 권선형 기자]
24. 교회사 용어
사대(事大)
전근대 아시아의 국제관계에서 약소국이 강대국에 취한 외교노선의 하나이다.
소국은 대국과의 외교 관계에서 큰 나라를 섬긴다는 사대(事大)를 방편으로 국운(國運)을 지키고자 했다. 이에 소국은 대국을 섬기고 대국은 소국을 사랑으로 어루만진다는 ‘사대자소(事大字小)’의 개념이 생겨났다.
이후 사대는 중국과 그 주변국 사이에서 조공 · 책봉 체제로 나타났다.
세도정치(勢道政治)
19세기 전반 조선에서 외척들이 중심이 되어 왕권을 사실상 무력화시키면서 권력을 집중한 정치 형태를 일컫는다. 정조 초반 홍국영의 전횡이나 고종 연간 대원군 집권, 여흥 민씨 세력의 권력 독점 등도 세도정치의 범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흔히 순조 · 헌종 · 철종 연간의 정치 형태를 가리키며, 특히 철종 연간 안동 김씨의 집권을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 이해한다.
연행사
조선 시대에 청나라로 보낸 사신 행차를 말한다. ‘연행(燕行)’이라고 한 이유는 청나라의 수도인 북경(北京)을 ‘연경(燕京)’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조선 중 · 후기에 연행은 1637년(인조 15)부터 1893년(고종 30)까지 257년간 지속되었다.
물고([物 故]
사전적의미: 유명한 사람이 죽음. 예전에, 죄인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나 죄인을 죽이는 일을 이르던 말.
“잘못하다가는 이 나라에서 쫓겨나거나 물고를 당할 형편이다.”
실제로 물고(物故)란는 용어는 일부러 매를 쳐서 죄수를 죽이려고 할 때 썼던 용어
다.
조선의 신분질서
조선의 신분질서는 법적으로 양인, 천민의 2단계(양천제)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4단계(반상제)로 분화되었다. 초기에는 양천제였지만, 중기로 접어들면서 후자의 반상제 체제가 정착되어 간다.
노비(奴婢)
한국 역사에 나타난 신분의 하나로, 사회구성상 조선시대에 가장 큰 의미를 지녔다. 조선 양반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기반이었던 노비제는 16세기에 최대 전성기를 구가하고, 17세기 후반부터 쇠퇴기에 접어드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노비제가 해체기로 접어드는 시기로 평가되는 17세기 후반에 노비의 비중은 여전히 높았다. 17세기 후반 이후 노비들의 도망이 속출하면서 노비제는 해체의 길로 접어들었다.
부록: 조선 말, 왕조와 교회사 연대표
20대 경종 | 1720년 | 6월 19대 숙종과 희빈 장씨의 아들. 노론과 소론 당쟁의 절정기. |
1722년 | 중국 옹정제 즉위 후 천주교 말살정책 시행 | |
21대 영조 | 1762년 | 사도세자 사사 1701년 무고의 옥 |
22대 정조 1776.3월 21대 사도세자의 아들. 조선 후기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다고 평가됨. | 1776년 | 1776.3월 21대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 탕평책을 계승하고 인재를 고루 등용함. 조선 후기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다고 평가됨. |
1779년 | 권철신 주도하에 천진암 강학회 개최 | |
1780년 | 홍국영 축출 | |
1784 | 1월 이승훈 영세(북당/그라몽 신부) | |
1784 | 3월 김범우세례. 자기집을 신앙집회장소로 제공.한국천주교회창립 | |
1785 | 3월 을사추조적발 사건으로 김범우 유배(경남 밀양 단장/삼랑진) | |
1791 | 5월 . 신해박해(진산사건 / 윤지충, 권상연 순교)(신해박해) | |
1794.12 |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 조선에 밀입국 | |
1795.6 | 윤유일, 지황, 최인길 순교(을묘박해) | |
23대 순조 1800.7월22대 정조둘째아들.11세즉위. 안동 김씨가세도정치 | 1801년 | 신유박해 |
1801.1 | 정순왕후 김씨, 천주교 박해령, 오가작통법 시행 | |
1801.3 | 주문모 신부 자수로 그와 연관된 신자들이 잡혀 순교 | |
1801.9 | 황사영이 체포되고 백서 발각으로 다시 박해가 가열 | |
1815 | 을해 박해 | |
1831.9 | 조선대목구설정. 브뤼기애르 소주교 | |
24대 헌종 1834.11월 23대 순조의 손자. 8세 즉위.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권력 투쟁에 휘말림. | 1834.1 | 유방제 신부가 정하상 등의 안내로 의주 변문을 통해 입국. |
1833.4 | 파리외방전교회 조선 포교지 수락 | |
1836.1 | 모방 신부 입국 | |
1836. | 앵베르 신부(범세형 라우렌시오)가 조선대목구의 부주교로 임명 | |
1836 | 최방제, 최양업, 김대건 3명을 마카오에 파견 | |
1839 | 기해 박해 | |
1844.12 | 김대건, 최양업,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서품 | |
1845.8 | 상해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김대건 사제 서품(페레올 주교 집전) | |
1845.10 | 페레올 주교 일행 조선 입국(강경 황산포 나바위(羅岩)에 도착) | |
1846.9 | 김대건 신부 순교(새남터). 병오박해 | |
1849.12 | 최양업 신부 단신으로 입국 / 페레올 주교와 만남(충청도) | |
25대철종18496월.19세 | 1857.3 | 다블뤼 보좌주교주교성성식을 최초로 조선에서 거행 |
1861.6 | 최양업 신부, 경북 문경에서 선종. | |
26대 고종 1863. 12월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12세 즉위. | 1866년 | 병인박해 |
1866.3 | 베르뇌 주교, 브르뜨니애르, 볼리웨, 도리 신부 참수치명(새남터) | |
1866.3 | 다블뤼 주교, 오매르트, 위앵 신부 황석두, 장주기 참수치명(갈매못) | |
1866.10 | 병인양요(로즈제독 군함 7척으로 강화도 침입, 박해가 심해짐) | |
1871년 | 제너럴 셔먼호 사건. 신미양요 발발 | |
1873.11 | 흥선 대원군 실각 | |
1876년 | 강화도 조약 (조.일수호조규) 체결 | |
1886.6 | 한불수호통상조약 조인 / 종교자유획득 | |
1904년 | 한.일 협약 체결 |
[자료편집: 성지순례 후원회]
성지순례후원회 ❙ http://cafe.daum.net/holyplace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