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秋(춘추)-106 文公篇(문공편)9
九年春(구년춘) 毛伯來求金(모백래구금)
9년 봄, 모백(毛伯)이 와서 금(金)을 구했다.
夫人姜氏如齊(부인강씨여제)
부인 강씨(姜氏)가 제(齊)나라로 갔다.
二月(이월) 叔孫得臣如京師(숙손득신여경사)
2월, 숙손득신(叔孫得臣)이 경사(京師)에 갔다.
辛丑(신축) 葬襄王(장양왕)
신축(辛丑), 양왕(襄王)을 장사 지내었다.
晉人殺其大夫先都(진인살기대부선도)
진(晉)나라 사람이 그 대부 선도(先都)를 죽였다.
三月(삼월) 夫人姜氏至自齊(부인강씨지자제)
3월, 부인 강씨가 제나라에서 돌아 왔다.
晉人殺其大夫士縠及箕鄭父(진인살기대부사곡급기정보)
진(晉)나라 사람이 그 대부 사곡(士縠) 및 기정보(箕鄭父)를 죽였다.
楚人伐鄭(초인벌정)
초나라 사람이 정나라를 쳤다.
公子遂會晉人宋人衛人(공자수회진인송인위인)
공자 수(遂)가 진(晉)·송(宋)·위(衛)나라 사람과,
許人救鄭(허인구정)
허(許)나라 사람과 모여 정나라를 구했다.
夏(하) 狄侵齊(적침제)
여름, 적(狄)이 제(齊)나라를 침범했다.
秋八月(추팔월) 曹伯襄卒(조백양졸)
가을 8월, 조백(曹伯) 양(襄)이 졸(卒)했다.
九月癸酉(구월계유) 地震(지진)
9월 계유(癸酉), 지진(地震)이 있었다.
冬(동) 楚子使椒來聘(초자사초래빙)
겨울, 초자(楚子)가 초(椒)를 보내어 빙문했다.
秦人來歸僖公成風之襚(진인래귀희공성풍지수)
진(秦)의 사람이 와서 희공(僖公)과 성풍(成風)의 수의(襚衣)를 드렸다.
葬曹共公(장조공공)
조(曹) 공공(共公)을 장사 지냈다.
해설;이(夷)의 군대 편성 때(문공 6년) 진후(晉侯)는 기정보(箕鄭父)와 선도(先都)의 직책을 그만 두게하고 사곡(士縠)과 양익이(梁益耳)를 중군의 장(將)과 부(副)로 임명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선극(先克)이 말하기를, "호언(狐偃)이나 조쇠(趙衰)가 문공(文公)을 따르면서 세운 공을 잊으시면 안됩니다"라고 간하여, 공이 이 말을 좇았다. 그뒤 선극은 영호의 싸움에서 근음(菫陰)에 진을 치고 괴득(蒯得)의 전지(田地)를 망쳐 놓았으므로, 선극에게 앙심을 품은, 기정보(箕鄭父)·선도(先都)·사곡(士縠)·양익이(梁益耳)·괴득(蒯得)이 난을 일으켰다.
9년 봄에 모백(毛伯)이 와서 금(金)을 구한것은 예에 어긋난다. 금을 구한 것은 양왕의 장례에 쓰려고 했기 때문이다. 경문(經文)에 왕(王)이 보냈다는 말을 쓰지 않은 것은 양왕의 장례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인 강씨가 제나라로 간 것은 근친(覲親)을 한 것이다. 2월에 장숙(莊叔: 손숙득신)이 주나라 서울로 가서 양왕의 장례에 참석했다. 이것은 예에 맞는 것이다.
을축(乙丑)에 진(晉)나라 사람이 선도(先都)와 양익이(梁益耳)를 죽였다. 을축(乙丑)은 정월19일인데, 경문(經文)에 2월로 기록된 것은 부고(訃告)가 도착한 날짜에 따른 것이다.
3월 갑술(甲戌)에 진(晉)나라 사람이 그대부 기정보(箕鄭父)·사곡(士縠)·괴득(蒯得)을 죽였다. 경문(經文)에 양익이(梁益耳)와 괴득(蒯得)을 쓰지 않은 것은 모두 경(卿)이 아니기 때문이다. 범산 (范山)이 초자(楚子)에게 말하기를, "진(晉)나라 임금이 나이어려서 제후(諸侯)의 뜻을 두고 있지않습니다. 이 기회에 북방(北方)으로 진출 합시다"라고 했다. 이리하여 초자가 낭연(狼淵)에서 열병(閱兵)하고 정(鄭)나라를 쳤다. 공자 견(堅)·공자 방(尨)및 악이(樂耳)의 세 장수가 사로잡혀 정(鄭)나라는 초(楚)나라에 화평을 청했다.공자 수(遂)가 진(晉)나라의 조순(趙盾),송(宋)나라의 화우(華耦),위(衛)나라의 공달(孔達),허(許)나라의 대부의 군대와 합세하여 정(鄭)나라를구원했다.그러나 때가 늦어서 초나라 군대와 싸우지 못했다. 경문(經文)에 제후(諸侯)의 경(卿)의 이름을 쓰지 않은 것은 때에 미치지 못했음을 폄(貶)한 것이다.
겨울에 초나라에서 자월초(子越椒)가 내빙 했다. 폐백(幣帛)을 드리는 태도가 오만 했다. 숙중혜백(叔仲惠伯)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반드시 약오씨(若傲氏)를 쳐없앨 것이다. 두나라 사이의 세의(世誼)를 돈독히 하러 와서 태도가 이처럼 불손한 것은, 곧 자기 나라 선군(先君)에게도 오만한 것이다. 신(神)은 이와 같은 사람에게 복을 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진(秦)나라 사람이 와서 희공(僖公)과 성풍(成風)의 수의(襚衣)를 바친 것은 예에맞는 것이다. 제후(諸侯)가 서로 조문하고 축하함에있어 비록 시기에 적당치 않더라도 예법에 맞는 것이라면, 경문(經文)에 이를 기록하였다. 지난 날 부터 내려오는 호의를 잊지 않으려는 것이다. 조(曹)나라의 공공(共公)을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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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춘추)-106 文公篇(문공편)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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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25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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