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돈 만원의 행복
정동식
성서산업단지 네거리 부근에 L국숫집이 있다.
나는 성서 쪽에 볼 일이 있으면 꼭 이 집을 들러 점심을 먹는다.
공교롭게도 수년 전, 이 부근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이후부터 단골이 되었다. 이 식당은 맛이 좋고 저렴할 뿐 아니라 보통과 곱빼기의 가격이 같다는 이색적 매력도 있다.
그 당시에 이 가게의 단골이 되지 않은 것은 누군가 밀가루 음식의 취향을 물었을 때, “국수 빼고는 다 좋아합니다.”라고 답변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람을 처음 만나거나, 이러쿵저러쿵 설명하기 곤란한 경우에는 아예 좋아 하지 않는다고 답변을 하는 경향이 있다. 바람직란 태도는 분명 아니다. 내 식성이 까다로워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라고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사실 나는 모든 국수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호불호가 있다. .
나는 국수의 외양에 관심을 가진다. 퍼진 국수에는 눈길을 주지 않으며 약간 쫄깃쫄깃한 국수를 좋아한다.
색상도 아주 하얀 것보다는 노르스름한 편을 선호한다. 맛에는 더욱 예민하다. 고추장이 들어간 듯 텁텁한 맛은 좋아하지 않고, 멸치로 우려낸 국물맛을 선호한다. 쇠고기로 우려낸 육수도 나쁘지는 않지만 최애는 단연 멸치내음이나는 담백한 국수이다.
가끔 가마솥국밥집에서 먹는 장터국수도 괜찮지만 이 식당의 국수만은 못하다. 고명으로 부추와 김, 깨소금을 얹어준다. 밑반찬은 간결하다. 풋고추, 청양고추, 깍두기, 양파 4가지인데, 단출한 듯 보이지만 모자람이 없다. 더 먹고 싶으면 ‘추가반찬 셀프바’에서 가져다 먹으면 된다.
와이파이 서비스가 제공되며 휴대폰 충전하는 곳도 고객들 눈에 잘 띄는 장소에 마련되어 있다. 무제한 요금제를 쓰지 않는 사람, 더군다나 혼자 온 사람에게 이 정도의 서비스라면, 기다리는 동안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고급식당이 아님에도 고객이 필요한 서비스를 비교적 잘 갖추고 있다. 어제 아내의 건강검진 결과를 보러 갔다가 병원 인근의 초밥정식집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주인이 권하는 테이블에 앉았지만 간장이 없었고, 냅킨도 두어 장 사용하고 나니 다른 테이블의 냅킨을 가져와야 했다. 손님을 맞기 위해서는 작은 것부터 준비가 필요한 게 아닐까? 음식점이라면 맛이 첫째이고, 둘째는 친절, 셋째는 영업 전 섬세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L국수는 30년 전통답다.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이 국숫집, 최고의 서비스는 보통과 곱빼기의 가격이 같은 점이다. 이 서비스에 묘한 매력이 있다. 인심이 솟아오르고 양이 많은 사람에 대한 배려도 느껴진다.
푸짐한 점심 한끼가 나른한 오후를 생동감으로 넘치게 한다.
이 식당을 아내와 처음 찾았을 때의 일이다.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아내를 식당 근처에 내려주고 나는 200미터쯤 떨어진 공단 쪽에 주차를 하고 갔다.
아내가 보통 하나와 곱빼기 하나를 시켰단다. 타이밍이 잘 맞았는지 자리에 앉으니 바로 국수가 나왔다. 나는 대식가는 아니라도 보통사람보다는 조금 더 먹는 편이다. 그런데 곱빼기를 어느 정도 먹고 나니 배가 불렀다. 아내는 원래 양이 많지 않은데 아까워서 꾸역꾸역 다 먹었단다. 우리 바로 옆 테이블에 부부로 보이는 커플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먼저 부추전을 맛있게 먹더니, 바로 국수 한 그릇이 나왔다. 작은 그릇에, 남자가 정성을 다해 일정량의 국수를 덜어 여자에게 주었다. 그렇게 식사를 끝내고는 “아~잘 먹었다”하는 것이다. 아내가 그 광경을 보고 “여보! 다음엔 우리도 저렇게 한번 시켜봅시다.”했다. 우리는 그 이후, 이 식당을 찾을 때면, 으레 부추전 한판에 국수 한 그릇을 주문하게 되었다.
우리 주변에 많은 식당이 있지만 맛집으로 소문난 집은 그렇게 많지 않다. 추천받은 식당이라도 그곳에 가보면 서비스도 천차만별, 가격도 천양지차다. 친절함도 다르고, 같은 음식이지만 맛 또한 가지각색이다.
나는 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 맛있거나 마음에 들면 꼭 명함을 가지고 나오는 습관이 있다. 다음에 가족이나 지인들과 한 번 더 와서 맛을 음미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자주 찾거나 최소한 한 번 정도 가본 식당은 통상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 맛도 없고 비싼 식당이다. 이런 경우는 최악이다. 비싼 돈을 지불하고, 맛이 없다면 누구든지 두 번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는 맛은 있지만 비싼 식당이다. 이런 식당은 맛이 좋아서 누구나 가고 싶지만 아무나 갈 수는 없다. 서민이 함부로 가기는 벅찬 곳이다. 세 번째는 음식값은 저렴하나 맛이 없는 식당이다. 배는 고픈데 마땅한 대안이 없는 경우, 싼 맛에 이용할 수는 있겠지만, 맛이 없는 식당을 굳이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네 번째는 맛도 있고 가격도 비싸지 않은 식당이다. 가성비가 좋으니 최고의 선택이라 할 수 있다.
L 국숫집은 네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식당이다. 식사하는 손님들의 표정에서 포만감과 즐거움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식당안도 시끌벅쩍하여 생기가 있다. 국수 한 그릇에 4,500원, 부추전은 5,000원!
단돈 만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입을 즐겁게 했으니 오늘 우리 부부는 홍재를 만난 셈이다.
(23.1.19)
첫댓글 만원의 행복 잘 감상했습니다. 영상으로 보는 듯한 리얼한 글 솜씨, 대단합니다. 더욱이 사모님과 함께하는 나드리에서도 다정다감함을 느낄 수 있고요. 식당구분 4가지 또한 우리들의 마음을 진솔하게 담은 것 같습니다. 언제 한 번 만원의 행복을 체험했으면 합니다.
김선배님~ 감사합니다.
설날 행복하게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국수미팅 한번 해야겠네요 ㅎ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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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를 아주 좋아하시나 보네요. 자주 가보셨다니 깜짝 놀랬습니다.
이 높은 물가에도 아직 안 오르고 있으니 대단하지요.
설 명절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서민의 음식 국수입니다. 옛날 시골에서 홍두께로 밀어서 먹던 그 국수, 국수 꼬랑지를 쇠죽 솥 부엌에 구우면 붕긋 크지며 익어갑니다. 그 맛이 최고 입니다. 글을 조금 퇴고 해보세요.
교수님 ~~김시힙니다.
글을 올릴 때는 모르다가 올려 놓고 보면 미흡함이 보이고
어떨 땐 퇴고를 위해 펼쳐 놓아도 아무것도 안보이고, 생각이 못 미치기도 하고 .... ㅠ
조금 퇴고를 하긴 했는데,....
아직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설 명절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