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잡아야 잠을 잘 수 있었다. 방지턱을 넘는 버스. 내 키를 덮는 그림자. 엄마는 보이지 않고 내 손엔 엄마의 검지만 쥐여져 있었다.
눈 뜨면 구석일 때가 많았다.
1연과 2연은 마음을 아프게 하는군요. 어머니와 헤어지는 장면입니다. 꿈이기도 합니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꿈.
눈을 뜨면 현실이고 현실은 늘 시인을 구석으로 몰아넣는군요.
나는 주문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의 면도기와 골프공, 설렁탕을 담는다. 여섯 살 때 내가 잃어버린 휴게소를 클릭한다. 얼굴의 푸른색은 휴대폰에 옮겨둔다.
자, 이제부터는 택배 주문과 관련된 글들이 나옵니다. 파란색의 단어들은 모두 주문하는 물품들입니다. 그러다가
여섯 살 때 길을 잃어버린 일을 떠 올리고, 파랗게 질렸던 기억을 휴대폰에 저장합니다.
산소에 간다. 캔커피와 꽃을 산다. 살수록 비굴해진다. 더 비굴해지기로 한다. 그렇게 주문을 건다. 주문은 많은 걸 해결해 준다.
어머니의 꿈을 꾸었으니까, 산소는 어머니 산소가 되겠죠. 어머니는 캔커피를 좋아하셨나 봅니다. 그리고 산소에서
하소연을 합니다. 살수록 힘들다, 그래서 비굴해진다며 어머니에게 고백을 합니다. 스스로 주문을 외기도 하네요.
그런데 이때의 '주문'은 위에서 나온 '주문'과는 다릅니다. 주술적인 글귀입니다. 일종의 언어유희로 보입니다.
써보지 않은 양식의 글을 쓴다. 흰 봉투에 넣어 책상에 올려둔다. 이력서는 모두 폐기한다.
써보지 않은 양식의 글이란 무엇일까요? 아마도 '유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더구나 흰 봉투에 넣어두니까 더 확실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력서는 필요 없는 것이지요. 이 부분은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재의 청춘들의 이야기라 할 수도 있겠어요. 이력서를 내긴 하지만 연락이 없고 절망만 닥칩니다.
택배는 내가 받고 내역서는 그가 받는다. 방금 도착한 복숭아가 물러 있다. 상처가 잘 보이도록 사진을 찍는다. 스티로폼 박스에 반품이라 쓴다. 뽁뽁이로 싸맨다. 구겨, 몸을 넣는다.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 아이스팩을 끼운다. 뚜껑을 닫는다.
자, 다시 택배로 돌아왔습니다. 파란색의 단어들은 모두 택배와 관련된 단어들입니다. 수취인은 자신이며, 내역서는 아버지에게로 가는군요. 아마도 나는 다시 반품이 되길 원하나 봅니다. 이런 삶이 지긋지긋한가 봐요. 상처 입은 청년의 초상입니다. 뚜껑을 닫으며 자신을 숨기려고 합니다. 칼로 뜯지 마세요. 던지지 마세요.
우리는 택배 상자를 함부로 칼로 뜯고, 던지기도 합니다. 청춘이라고 아무렇게나, 던져져서는 안 되겠지요.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이 시대의 청춘들이 겪는 수고와 고난을 표현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아무도 열어주지 않아 나는 나를 열고 나온다. 뜯긴 머리카락을 털어낸다. 팔과 다리의 얼룩을 눌러본다. 운송장 번호가 없다. 받는 사람이 지워졌다. 상자를 열고 다시 몸을 넣다가,
아, 이 친구에겐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군요. 스스로 열고 나오기에는 세상이 너무 가혹합니다. 여기서 머리칼을 뜯기고 저기서는 온몸에 멍이 드는군요. 사실 택배를 받으면 박스 포장 테이프를 뜯고, 이리저리 눌러보고 하잖아요. 그런 것들을 청춘의 이미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운송장 번호가 없다'거나 '받는 사람이 지워졌다'라는 내용은 존재감 없는 청춘들을 대변합니다. 고독한 삶입니다.
그를 주문한다.
아버지를 다시 불러옵니다. 왜일까요? 따지고 싶을까요? 왜 이렇게 밖에 살지 못하는지 말이죠. 아니면 제발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일까요?
사실 감상을 쓴다고는 하지만, 목적은 딴 데 있습니다. 일일이 신문사를 돌아다니며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를 읽고 다시 필사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를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지금 적고 있는 저의 감상은 오로지 저의 감상일 뿐입니다. '시'는 시인의 손을 떠나면 '독자의 몫'이 됩니다. 하지만 권위 있는 신춘이고 보면 사실 겁이 나기도 합니다. 함부로 감상한 것이 아닌가 하고요. 다만 이렇게라도 하다 보면 조금씩 이해랄까요, 해석이랄까요, 여하튼 뭐든 남는 게 있지 않을까 합니다. 밤이 늦어도 여전히 덥습니다. 습기가 엄습합니다. 건강 유의하시고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