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복자 성당
도로주소: 대구광역시 동구 송라로 22
도심 속 순교자 모신 성역 대구시 동구 신천 3동에 위치한 대구 복자성당은 순교자 시복시성운동의 일환으로 천주교대구대교구가 1970년에 봉헌한 성당이다. 현대적인 건물로 마치 배가 돛을 펴고 나가는 듯한 진취적인 기상을 지닌 대구 복자성당에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가, 이양등 베드로 세분 순교자의 넋이 잠들어있다. 경주 단석산 범굴에서 나란히 숨어살다가 죽음의 길을 같이 걸어 천국에서도 한 형제같이 잠들어있는 대구 복자성당은 도심에 위치한 순교성지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지이다.
주교회의에서 순교자기념성당 짓기로 결정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는 1964년 순교자 시복 운동의 일환으로 각 교구별로 순교자 기념성당을 건립하기로 결의했다. 주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대구대교구는 1964년 11월 9일 순교기념성당건립기성회를 발족하고, 또한 지부조직을 설치하여 각 본당별로 순교자기념성당 건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이듬해인 1965년에는 모금운동과 더불어 성전건축 기공식을 가졌으며, 또한 순교 100주년이 되는 1966년 9월 12일부터 28일까지 본당 순회 순교자의 밤을 개최하여 순교자들의 신앙정신을 더욱 현양하였다. 복자성당은 착공 5년 만인 1970년 1월 1일 준공됐다.
1973년 병인박해 순교자 3분 모셔 그해 7월 5일 성 김대건 신부 성상을 축성하고, 1973년 10월 19일 대구복자성당이장위원회는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가, 이양등 베드로 세 분 순교자의 유해를 이장 허가를 받아 대구 월배 감천리 교회 묘지에서 복자 본당으로 이장하였다. 순교자현양성당으로서 면모가 갖춰지면서 매년 9월 순교성월이면 대구대교구 내 5개 대리구별로 연차 순회하며 복자성당을 순례하고 있다. 2000년 12월 순교자 묘역을 재단장하고 , 품격을 높였다.
순교자 현양기념성당으로 면모 갖춰 복자성당 주 출입구 전면 중앙에 위치해있는 성역에는 1868년 9월14일(음 7월 28일) 울산 동천 강변 장대벌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가, 이양등 베드로의 유해가 안장돼있다. 성역 앞으로는 잔디밭이 넓게 자리잡고 있어 순교성월, 복자의 밤 행사를 갖기에 좋다. 복자성당에 모셔진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가, 그리고 이양등 베드로 3인 순교자는 각각 김해, 공주, 서울 태생이다. 이들은 병인박해로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집과 전답 고향 등 모든 것을 버리고 비교적 박해의 손길이 먼 경상도 교우촌으로 피난해왔다가 울산 장대벌에서 한날 한시에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울산 장대벌에서 한날 한시에 순교의 월계관 세분 순교자의 시신은 처형 직후 형장 근처의 동천 강둑 아래 구덩이 속에 묻혀 있다가 경주 산내면 진목정에 합장됐다. 그 후 1932년 5월 29일 감천리 묘지로 옮겨졌다가 1962년 10월 25일 감천리 묘지의 성모상 앞으로 이장 됐다. 다시 1973년 10월 19일 비로소 대구 복자성당 구내로 모셔져 오늘에 이른다. 현재 경주 진목정에는 세분 순교자의 허묘가 있다.
허인백, 김종륜, 이양등 유해 이장 경로
① 3인 순교자 동천 강둑에 임시로 묻히다
3인 순교자들이 1868년 9월 14일 울산 장대벌에서 참수당하자 순교 현장을 지켜보던 허인백 야고보의 부인 박조예 여사가 어둠을 틈타 형장에 버려진 유해를 미리 보아둔 강둑 구덩이에다 묻었다.
② 경주 산내면 진목정 뒤 도매산으로 옮기다
갑오경장 때 칙령에 따라 순교자들의 신원이 회복되었다. 그때 울산 동천 강둑에 가매장되었던 3인의 시신을 박조예 여사가 주선, 김종륜 루가의 후손들이 사는 경주 진목정 뒷산으로 이장했다.
③ 대구 감천리교회 묘지로 옮겨지다
대구에 살던 허인백 야고보의 손자(허명선)는 김종륜 루가의 손자(김병옥)의 협조 아래, 초대 대구교구 안세화 드망즈 주교와 남산본당 남대영 델랑드 신부의 재가를 얻어서 1932년 5월 26일~28일 사이 경주 진목정에서 대구 감천리 교회묘지로 이장했다.
④ 감천리교회 묘지 내 성모상 앞으로 이장하다
1962년 10월 25일 대구교구 신현옥 치릴로 신부 지휘로 이장위원장 이효상 아길로, 순교자 김종륜 루가의 후손과 43명 신자들이 순교자들 시신을 같은 감천리 교회 묘지 내 성모상 앞으로 이장했다.
⑤ 대구 복자성당 성역에 안장되다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구교구민이 설립한 순교자현양성당 대구복자성당이 1970년 1월 1일 봉헌됐다. 1973년 10월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가, 이양등 베드로 3인 순교자의 유해를 대구 복자성당 성역으로 이장했다.
병인박해 3분 순교자 약력
복자 허인백 야고보(1822-1868년)
허인백(許仁伯) 야고보는 1822년 경상도 김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언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다가 24세 때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으며, 아주 열심히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여 교우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았다.
허 야고보는 아내 박조예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그뿐만 아니라 정결을 지키고자 아내와 남매처럼 살았으며, 고신 극기는 물론, 겸손과 인내의 덕을 쌓는 데에도 노력하였다. 또 애긍에 힘써 가난한 이와 병든 이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1860년에 경신박해가 일어난 뒤, 허 야고보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무수히 매를 맞고, 언양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천주교 신자임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그리고 옥에 갇혀 50여 일을 지낸 뒤에 경주로 이송되었으며, 이곳에서도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기에 8개월을 옥에 갇혀 지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박해를 중단하라는 임금의 명에 따라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허 야고보는 울산의 죽령(현, 경남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산속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양등 베드로 회장과 김종륜 루카를 만나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고, 나무 그릇을 만들어 팔아 가족의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이처럼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그는 묵상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자주 순교의 원의를 드러내곤 하였다.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전국 각지에서 신자들이 체포되었을 때도 죽령 교우촌은 비교적 안전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에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허 야고보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로 끌려갔다. 이때 그는 가족에게 이르기를 “나를 위해 기도하거라. 그리고 바르바라 성녀의 순교 행적을 기억하도록 하거라.” 하고 당부하였다.
경주 진영에 이르자, 곧 문초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허 야고보는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였을 뿐, 천주교 서적이 있는 곳을 대거나 다른 신자를 밀고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관장은 화가 나서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이내 그의 몸에서는 피가 나고 다리뼈가 드러나게 되었지만, 그의 신앙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허 야고보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한결같이 신앙을 증언하였기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중구 남외동)로 끌려 나가 이양등 베드로 회장과 김종륜 루카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순교 당시에 허인백 야고보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아내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허인백 야고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김종륜 루카(1819-1868년)
김종륜(金宗倫) 루카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충청도 공주에서 천주교에 입교한 다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본관은 경주요, 족보에 기록된 이름은 ‘경희’(敬熙)이다.
김 루카는 평소에 화목함을 특히 강조하였고, 어느 누구와도 화목하게 지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부모님을 모시고 경상도 상주 멍에목(현, 경북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다시 언양 간월(현, 경남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을 거쳐 울산 죽령(현, 경남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죽령 교우촌에서 김 루카는 이양등 베드로 회장과 허인백 야고보를 만나 서로 권면해 가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때까지도 이곳은 비교적 안전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에는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김 루카는 얼마 되지 않아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가는 동안 김 루카는 동료들의 권면을 잘 받아들여 순교하기로 결심하였다. 실제로 그는 경주 진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굳건하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어서 김 루카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당하고 신앙을 한결같이 증언하였기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중구 남외동)로 끌려 나가 이양등 베드로 회장과 허인백 야고보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순교 당시에 김종륜 루카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 야고보의 아내 박조예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종륜 루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이양등 베드로(?-1868년)
이양등(李陽登) 베드로는 경상도 울산의 죽령 교우촌(현, 경남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회장이었다. 본디 성품이 선량하였던 그는 꿀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열심히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였다.
이 베드로는, 1866년의 병인박해를 피해 죽령 교우촌으로 이주해 온 허인백 야고보와 김종륜 루카를 만나 서로 권면해 가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때까지도 이곳은 비교적 안전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에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이 베드로는 얼마 되지 않아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가는 동안 이 베드로는 동료들의 권면을 잘 받아들여 순교를 결심하였다. 실제로 그는 경주 진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굳건하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어 이 베드로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당하고 신앙을 한결같이 증언하였기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중구 남외동)로 끌려 나가 김종륜 루카, 허인백 야고보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이었다. 순교 당시에 이양등 베드로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의 야고보의 아내 박조예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이양등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