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미리보기 맛보기
2018. 7. 금계
10. 오거리
7월 11일 아침, 자전거를 목포역으로 몬다. 오늘은 목포역에서 가까운 ‘오거리’ 부근을 돌아다닐 예정이다. 오거리가 한두 군데일까만 목포 사람들은 ‘오거리’라고 하면 다 알아듣는다.
위 사진은 일제강점기 목포 개항 이후의 오거리 모습 미니어처. 이 미니어처는 목포 근대역사관(1)에 가면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오거리 부근이 목포의 중심가였다.
오거리 가는 길, 내 자전거는 번번이 백년로가 시작되는 교차로 부근에 자리한 ‘은성마트’에서 멈춘다. 저 차일 아래 의자에 앉아 자판기에서 500원짜리 동전을 하나 넣고 얼음커피를 한 잔 뽑아 마신다.
나는 커피 전문점 3000-5000원짜리 커피를 아주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마시지 않는다. 동행과 함께 들어가 하는 수 없이 주문하면 ‘에스프레소’를 시키는데 소주잔만큼 작은 컵에다 병아리 눈물만큼 인색한 에스프레소를 홀짝거릴라치면 꼭 동전을 삼키는 것 같아 심사가 불편하다. 나한테는 이 은성마트 자판기 양촌리 커피가 제격이다.
백년로 사거리의 한가운데 뜰에 세워진 돌지 않는 물레방아
중앙초등학교, 옛날에는 ‘중앙’이 맞고 학생들도 바글거렸을 텐데, 요즘에는 전교생이 116명으로 푹 줄었다. 목포 인구가 하당 신도심, 남악 신도심으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이른바 구도심은 ‘공동화’ 현상이 진행되면서 변방으로 추락하고 있다.
목포역 못 미쳐서 한국은행 목포지점. 모르긴 해도 아마 한국은행은 수십 년 동안 목포 경제를 지켜보면서 묵묵히 맡은 바 임무를 수행했을 것이다.
목포역 언저리의 조각상, 나는 이런저런 조각상을 만날 때마다 무척 반갑다. 참, 우리나라 많이 살 만해졌다. 예전에는 먹을 것도 모자라서 껄떡거리는 바람에 예술이고 조각 작품이고 꿈도 꾸지 못했었다.
목포 역전 파출소 부근. 저기에서 좀 더 들어가면 오거리가 나온다.
오거리 ‘덕인집’. 예전에는 메뉴가 다양했지만 요즘은 흑산 홍어, 고래 고기를 주로 취급한다.
이 집의 특별한 술이 ‘동동주’다. 주인아주머니의 친정아버지가 반주를 좋아하셔서 친정어머니가 꼭 동동주를 빚었는데 그 따님이었던 주인아주머니가 배웠단다. 다른 곳에서 동동주를 마시면 골치를 패기 일쑤인데 이 집 술은 깨끗하고 뒷맛이 좋다. 나는 외지에서 어려운 손님이 오시면 꼭 이 집으로 모신다.
오거리에 설치된 루미나리에. 밤에 울긋불긋 화려한 색등을 밝히면 손님들이 꾀어야 할 텐데 글쎄, 저 루미나리에 덕분에 구도심으로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지는 의문이다.
목포 토박이가 운영하는 오거리 식당. 밥 먹고 간단히 술도 마실 만한 맛난 안주들이 나온다. 주인아주머니의 반찬 솜씨도 만만치 않다. 나이가 좀 되신 분들 가운데 오거리 근방에 오셔서 어느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고 반주라도 한 잔 할까 망설이시는 분이라면 이곳을 택하셔도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것이다.
목포환경운동연합. 목포의 환경보전운동은 수십 년 동안 서한태 박사님이 주도하셨다. 영산포 주정공장 반대운동, 삼학도 시멘트 적치장 반대운동, 유달산 케이블카 설치 반대운동, 4대강 사업 반대운동, 핵발전소 반대운동 등을 통하여 목포의 자연환경을 보전하고 나아가서는 후손들한테 깨끗한 지구를 물려주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셨다.
지난봄에 91세를 일기로 홀연 떠나고 안 계시니 허전하기 짝이 없다.
예전에 은행 건물이었던가 보다. 목포문화원은 목포 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지금도 나와 가까운 한학자 도화 선생은 이곳에서 사서삼경을 강의하고 계신다.
이 거리에는 일제강점기 일본식 주택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저 언저리에 내 단골 식당이 있었다. 조기 매운탕, 서대 매운탕을 맛깔나게 먹을 수 있었는데 손님이 바글거리는 바람에 예약을 하지 않고는 허탕치고 돌아서기 일쑤였다. 연전에 주인아주머니의 건강 문제로 그만두고 식당 간판이 바뀌었다. 아이고, 이제 어디에서 알맞게 간간하고 매콤하여 혀를 즐겁게 해주는 서대 매운탕을 맛볼거나.
갑자옥 모자점은 갑자년인 1926년에 문을 열었다 한다. 전국에서 상인들이 몰려와 갑자옥에서 만든 모자를 사갔다 한다. 꽤 돈을 잘 벌었다지만 이제는 다 흘러간 옛 노래가 되고 말았다. 세월은 그 무엇이든 영원히 승승장구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영란횟집도 역사가 꽤 오래 되었다.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서 옆집을 사서 대기실까지 마련했다. 민어회 전문인데 꾸준하고 변함없는 맛이 성업의 비결이다. 목포 사람들은 특히 이 집의 된장과 겨자 맛이 좋다고 말한다.
영란횟집 근처에 횟집이 여럿 들어섰다. 우리는 한때 영란횟집이 북적거려서 싫다고 몇 집 건너 유림횟집으로 자주 다녔다. 한 번은 2층으로 올라갔는데 우리 앞에 민어회를 먹고 나간 손님들의 상을 미처 치우기 전이었다. 손님들 배가 따땃했던지 뜻밖에도 상마다 민어회가 반 접시가량 남아 있었다. 그 날 유림횟집은 우리한테 많은 매상을 올리지 못했다.
목포진(木浦鎭) 역사공원 올라가는 길.
주요 세곡 운반로.
세종 21년(1439) 목포진 설치. 연산군 8년(1502) 성을 쌓고 종사품 무관인 만호 배치.
지금도 목포진 부근을 만호동이라 부름.
2014년 고증을 거쳐 일부 복원.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 137호.
복원된 목포진 건물.
목포진에서 건너다본 노적봉
목포진에서 내려다본 삼학도
국도 1, 2호선 기점 기념비
국도 1호선은 신의주 가는 길, 신의주까지 939km, 판문점까지 498km.
국도 2호선은 부산 가는 길.
뒤에 보이는 건물이 근대역사기념관 1
근대역사기념관 1.
노적봉 아래 가장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옛 목포 일본 영사관. 1900년 완공. 르네상스 건축양식. 목포부청, 목포시청, 목포시립도서관,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다가 근대역사관으로 바뀌었다.
근대역사기념관 1에 전시된 옛 목포의 모습
근대역사기념관1 앞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
근대역사기념관1에 전시된 삼학도의 옛 모습.
목포근대역사관 2. 1921년 신축 동양척식주식회사. 2006년에 근대역사관으로 개보수.
일제 침략의 실증적 증거. 일제의 잔학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난징 대학살 기념관에 간 적이 있었다. 일본군은 기관총 등으로 중국인을 6주에 걸쳐 30만 명 살해했단다. 학살기념관에는 죽은 이들의 유골이 그대로 묻혀 있었다. 그 기념관에 들른 중국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Forgiveable but unforgettable
(용서해주겠다, 하지만 잊지는 않겠다)
前事不忘 後事之師 (앞일을 잊지 않으면 뒷일의 스승이 된다)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도 말씀하셨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
쌀, 목화, 소금 - 목포는 개항하면서부터 일본의 조선 착취 교두보가 되었다. 내 나이 73세, 광복한 지도 어언 73년. 우리는 근대역사관을 둘러보면서 대한민국의 역사가 적폐를 제대로 청산했는지 냉정히 뒤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근대역사관 2 부근의 경동 천주교 성당. 1954년 완공.
김대건 신부 조각상과 성 골롬반 조각상이 있음.
목포여자중학교. 1989년 여름, 나는 전교조에서 탈퇴하지 않고 뻗댄다고 이 학교에서 쫓겨났다가 4년 반 만에 복직되었다. 2층에서 3층에서 떠나지 마시라고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아우성치던 학생들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목포유달초등학교. 1898년 개교. 이 학교에는 현재 유일한 한국 호랑이가 박제로 전시되어 있는데 1907년 영광 불갑사에서 잡혀 히라구치 쇼지로가 사서 박제하여 1908년 당시 일본인 학교이던 유달초등학교에 기증했다 한다.
유달초등학교 언저리의 일본식 가옥. 나는 교토에서 이와 거의 똑같은 건축양식의 집을 본 적이 있다. 백 년이 넘었을 텐데 아직도 건재한 걸 보면 일본의 꼼꼼한 건축술은 알아줄 만하다. 목포에는 아직도 일본식 가옥이 원형에 가깝게, 또는 개보수하여 많이 남아 있다.
노적봉 아패 성옥기념관. 성옥 이훈동 씨는 목포의 대표적인 기업인. 조선내화벽돌 사장. 해남 옥 광산. 기념관에는 진기하고 귀한 서화, 도자기 등의 수집품이 전시되어 있다.
성옥 기념관 로비에 걸린 사진 목포시 전경.
나도 가끔 이 영해복집에 들러 복어탕을 먹는다. 비싼 복어탕이 원래 뭐 그리 입에 짝짝 달라붙는 맛은 아니더라도 술꾼들은 많이들 선호한다.
콜롬방 제과점. 코롬방이라고도 하는데 영어로 봐서는 콜롬방이 더 적확할 듯. 꽤 유서 깊은, 목포에서는 이름 있는 빵집. 언젠가 저 가게에서 팥빙수를 먹었는데 맛도 좋고 거의 한 끼 식사에 육박하는 떡, 단팥이 푸짐했다.
콜롬방 제과점 바로 옆에 오거리 문화센터. 본래는 일본 사찰 법당이었는데 교회로 이용되다가 최근에 문화 센터가 들어서서 전시 문화 시설로 이용하고 있다.
차 없는 거리. 예전에는 목포의 내로라하는 청춘남녀들이 북적대던 곳이었는데 구도심 공동화 현상으로 이제는 한산하고 을씨년스런 거리가 되고 말았다.
차 없는 거리의 로데오 광장. 풍차도 그렇고 간판 ‘이니스프리’도 그렇고 살짝 이국적인 냄새를 풍긴다. 이곳에서는 8월 31일부터 9월 2일까지 목포 ‘갯돌’ 극단 주선으로 세계 마당극 페스티벌이 열린다.
오거리에서 우리 집 방향으로 자전거 핸들을 돌린다.
정명여고 가는 길목의 호남마트. 여기는 예전에 약국이었다. 약국 주인은 학교 운영위원을 맡았다가 시의원으로도 뽑혔다가 이제는 꿈을 먹고 사는 시인이 되었다.
정명여중고 교문. 정명여고는 선교사 스트레퍼가 1902년에 정명여학교로 설립했다. 1919년 4.8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해서 지금도 해마다 4월 8일이면 기념행사를 한다. 1937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했다. 현재 학교법인 호남기독학원 산하.
정명여고 뒤쪽 담장 너머 박승희 열사의 흉상.
박승희 열사는 정명여고를 졸업하고 전남대 재학 중 1991년 미국 반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하여 겨레의 딸로 산화했다. 삼가 명복을 빈다.
정명여고 가까운 곳에 목포여자고등학교.
교정에 ‘부용산’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엄마야 누나야’를 작곡한 남평 출신 안성현이 목포항도여중 재직시 빅기동 교사의 시에다 곡을 붙인 노래. 안성현은 월북하고, ‘부용산’은 금지곡이 되고, 작사가 박기동은 호주로 이민 갔다. 작곡가 안성현은 북한에서 2006년에 사망하고, 작사가 박기동은 2002년에 귀국 후 사망했다.
동부시장 동문 밖 ‘우연 포차’ 이 집의 주 메뉴는 ‘아구찜’ 맛도 좋고 양도 많고 값도 싸다. 광주, 서울 사는 우리 동생들이 목포 와서 맛 보고는 나보다 더 단골이 되었다. 특별히 부탁하면 동부시장의 생선회도 뭐든지 가져다 먹을 수 있다.
전부터 목포상업고등학교를 줄여서 ‘목상고’라고 불렀는데 학교가 인문계로 바뀌면서 그냥 학교 이름을 ‘목상고’로 정했다.
목상고 뜰에 서 있는 이 학교 출신 김대중 대통령의 동상.
우리나라 대통령 가운데는 감옥에 간 대통령들이 많은데 그래도 그 가운데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아 체면을 세우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