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촉,오 의 삼국시대가 패망한 이후 약천백년 지났을때 쓰여진 작품인데 9세기 이전 장안(長安) 중심의 한족(漢族)과 서화, 항성의 동쪽에 동이(東夷)의 영역이 나관중시대에는 명(明)의 영역이 되어 동이역사를 축소시키고 명의 역사로 둔갑시키는 목적으로 창작된 작품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기, 한서, 삼국지, 후한서, 위서, 송서, 남제서, 양서, 북사, 남사, 구당서, 당서가 있는 한 한족과 동이의 경계는 요서(遼西)와 요동(遼東: 遼之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6-7세기의 경계를 보면 은산, 고대인성, 신성, 석문, 석성, 항성, 덕안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산서성 요(遼)중심의 동쪽에 남북으로 있는 지명입니다
서화, 항성 동쪽에 있었던 동이역사를 밀어내기 위하여 '삼국지연의'를 중국대륙 전체의 사건으로 볼 수 있게 소설화시켰던 것입니다
9세기 이전 BC11세기까지 한족 어느 국가도 중국 전체를 통일한 국가는 없었습니다
만약 있었다면 중국25사는 모두가 거짓이 되고 말 것입니다
중국25사를 인정하는 한 '삼국지연의'는 동이(東夷)역사를 대륙에서 삭제시키려는 명(明) 조정의 의도에 의하여 지원되고 창작되었다고 볼 수 밖에 없는데 우리학자들은 사서를 숨기면서까지 이 소설을 극구 칭찬하고만 있는 것입니다
즉 불과 60년 동안 서화/항성 서쪽에서 있었던 위오촉(魏吳蜀)의 역사를
마치 중국 대륙 전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과대포장한 소설책 삼국지연의에 미치고 환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900년을 이어온 고구려,백제 700년,신라 1000년의 장구한 우리 역사에 비하면 저것들을 나라라 할수있을까????? ㅡㅡ;;
제갈량,유비,관우는 역사속의 인물을 가공해서 만든 인물이지만 광개토대왕, 장수왕, 계백, 김유신, 화랑관창, 명림답부, 을파소 재상, 연개소문, 을지문덕 등은 실제로 세상을 움직였던분들입니다
왜 우리의 위인들은 폄하하고 쳐다보지 않나요 제갈량보다 서희의 외교력이 훨씬 월등했고 유비보다 광대토대왕이 추진력이나 전쟁에서의 승율이 훨씬 좋았고 관우보다 더 대단했던 장수는 수를헤아릴수없이 많습니다 저들의 가공의 인물들에 반해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짓은 하지말아야겠습니다
그리고 한류의 시작이 이분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고구려 폐망 후 유민 20만명이 당나라로 가서 일으킨 제국 제나라
(이정기의 나라 해신에 이사도 군영으로 나옴.......) 이 나라도 존속년수가 200년가까이 됩니다 그리고 당나라의 수도근처까지 쳐들어갈정도로 강성했었습니다
tv에서 모교수가 말하길 중국교수가 한국에 와보고 놀라면서 자기에게 말하길,
한국인들이 삼국지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지 놀라서 자빠질뻔 했답니다
자기들은 중국사에서 너무나도 단명한 나라들이라 이름만 알고 지나치는 정도였는데,
한국에 오니까 삼국지의 인물들은 물론, 제갈량이 무슨 병법을 펼치고, 삼국의 지명들이 어떻고...
훤히 다 꿰더란다.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서길수란 교수님이 TV강연에서 삼국지는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역사를 너무 잘 만든게 문제라면 문제라는겁니다
사회과학적 시각으로 나관중 삼국지를 새롭게 파헤친 `삼국지 바로 읽기'(전 2권.삼인 펴냄)의 저자 김운회(43) 동양대 경영관광학부 교수는 삼국지를 `중국판 용비어천가', `동북공정보다 더 위험한 촉한공정(蜀漢工程)'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나관중 삼국지는 정사(正史) 삼국지에서 출발해 한족이 이민족의 압박을 받거나 정치적 통합을 꾀하는 시기마다 새로운 해석이나 주석이 보태져 완성됐습니다. 한(漢) 황실을 계승한 유비의 촉나라가 정통성을 가졌다는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을 담은 촉한공정인 셈이죠. 동북공정은 100년이면 끝나겠지만, 촉한공정은 벌써 1천 년이 넘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북공정보다 삼국지에 담겨 있는 촉한공정을 더 경계해야 합니다.김 교수는 정사 삼국지뿐 아니라 후한서(後漢書), 진서(晉書) 등을 직접 해독해 나관중 삼국지의 사실과 허구를 가려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촉나라는 진나라에 비하면 `깡촌'이었고, 유비는 `쪼다'가 아니라 `히딩크식 올라운드 플레이어'였으며, 제갈량은 제대로 이긴 전쟁이 없고, 관우는 촉한공정의 최대 수혜자였습니다
특히 고우영이 지은 만화삼국지에서는 더그렇죠 관우삼국지라고 할만큼 비중을 높게잡앗는데
처음부터 아주 치졸한 인물관을 가지고 그것을 미화하거나 깍아내리기를 했다는것입니다
이미 1천500만 권이 팔렸다는 이문열 씨의 삼국지는 중고서점에서도 없어서 못 팔 지경이랍니다. 심지어 삼국지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중고서점이 있을 정도였죠. 문제는 모두가 삼국지를 성역처럼 받들고 그 안에 담긴 문제점을 보려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유비현덕
유비현덕의 족보를 살펴보자면 한나라 경제의 19대 현손쯤이 되는데 정사에 기록된 이는 유승, 유정, 유
웅, 유홍 만이 등장하며, 『삼국지』와 『화양국지』에 의하면, 유승의 아들 유정은 한(漢) 무제(武帝) 원
수(元狩) 6년(기원전 117년)에 탁현 육성정후로 봉해집니다 그러나 훗날 조정의 규정에 따른 주금(제후가 고조(高祖)의 제사를 위하여 황제에게 헌납하는 황금)을 헌납하지 않아 작위를 박탈당합니다 이로 인해 유정의 가계가 일찍히 몰락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럼 소설속에서 유비가 한나라 황손이라는 사실을 믿고 도원결의를 맺은 관우와 장비는 속은 것인가? 유비가 자신의 족보를 거들먹 거린 것이 한 두번인가? 심지어 한중왕에 오를때도 족보를 언급하였습니다 유비가 실존인물이라면 자신만의 땅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며 거짓된 족보로 지방호족들을 속이고 다니던 양아치가 아닌가?
형주사령관에 관우를 임명하고 서촉으로 돌진한다. 그리고 자신의 논리로 본다면 같
은 집안끼리 싸움을 하고 서촉지방을 얻는데... 양아치에서 산적으로 한단계 발전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조조세력을 한중에서 몰아내고 한중왕에 등극! ...그럼 뭐하나 황제를 옹립하고 있는 중앙세력들이 인정
을 안해주는데... 그리고 서촉지방 백성들이 유비세력을 어떻게 생각했겠나? 한 왕실의 진정한 수호자이
자 한나라 경제의 19대 자손으로 생각했겠는가? 글도 모르고 그저 농사 짖기 바쁜 산골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식량을 수탈해가는 지배자가 바꿨을 뿐인 것입니다
@제갈공명
실존인물이라고 가정하고, 세간에서 최고의 지성이란 말을 듣던 그가 왜 양아치 유비
를 따라가게 되었나? 유비의 족보를 보고 유교적 사고주의로 한나라 황실을 받들고 싶다 하고 유비를 따
랐을까? 아니면 거짓된 족보인줄 알면서도 유비의 인품과 화술에 반하여 유비를 따랐을까? 다른 견해를 하나 내 보자면 제갈공명은 엄청난 야망가인게 아닐까? 이미 많은 책사들이 자리를 잡고있던 조조진영에가 봤자 유비가 방통에게 그랬듯 마을 하나 맏길것이 다 가 아닌가? 해적질로 강남을 휘어잡고 있던 손씨들에게 가봤자 이미 자리를 잡고있던 기득권층에게 밀려 아무것도 못하였을 것 아닌가? 결국 자신의 영토가 없던 유비야말로 자신의 야망을 실현시켜줄 꼭두각시로 적합했기에 유비에게 가지 않았을까. 공명의 실력으로 어딜가나 성공할 수 있었 라고 하시면... 그렇게 고르고 고른 유비에게 가서도 관우라는 꽉막힌 권력자와 심한 마찰을 겪는 것은 어떻게 설명하실런지?
@손권,손책
강남이 사람 살만하고 농사지을 만한 땅이 된게 언제쯤일까?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 서를 보면 금나라에 밀린 송나라가 양쯔강 이남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강남 개발이 이루어 졌다고 합니다 그런 곳에 한나라 말기에 나라가 있었다? 단순히 손씨들은 규모가 큰 해적집단이 아닐까?
손씨들은 화북에서 이미 자리를 굳히고 있던 조조세력을 걷어낼 방법이 없으니 형주를 원합니다 그 이유
가 무었일까? 쌀이 부족해서 아니겠는가? 손권은 대륙으로의 진출따위는 바라지도 않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런
데 왜 형주에 집착하였을까? 더 이상 해적질을 수행할 장소가 없으니 인구는 넘쳐나고 쌀은 없고... 자연
스럽다. 강남에 나라따윈 없었던 것이 아닐까?
@조조
자신의 안위에 조금이라도 누가되면 자차없이 죽이던 조조. 소설 속에서 유비가 조조보다 나은 점이라면인격 이겠죠. 그 조조가 냉정해 질 수 밖에 없는 이유? 여러가지 있겠지만 후계자 미결정문제때문이아닐까
실지 후계자 책봉때문에 꽤 진통을 겪었지 않은가. 그는 자신이 죽으면 다시혼돈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잘알았다 엄청나게 비약해서 본다면 조조야말로 화북백성들을 진정 생각한 위인아닌가? 해가 되면 부하고 뭐고 다 죽였지만 동탁이나 그 후계자들처럼 죄없는 백성을 죽이는 짓따윈 하지 않았습니다 학교를 세우고 세금조율을 하는 등 그가 백성을 위해 한 일들은 분명 많습니다 소설 속에서 너무 조금 나와서 문제지. 진나라 국가 기반이 조조때 부터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의 업적도 유비에 밀리지 않습니다
연의 원문을 보면 조조에 대해 동이족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해당 대목을 보면...
조조는 원래 다른 집안의 자녀였는데, 조씨집안에 양자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때 친부가 당부하길...
"우리는 자랑스러운 동이족이다. 오늘날 이렇게 기울어 양자로 가게 되었지만, 결코 자신의 핏줄을 잊지 말고 동이족의 자긍심을 지키며 살아라..." 라는 당부를 하며 조상들의 위패에 제례를 올리게 합니다.
또 유명인사인 하후씨 형제들의 경우 조조의 원 친가의 가까운 친척집안의 형제들이라 쓰고 있지요.
삼국지는 3개의 큰 싸움으로 그 줄거리를 잡습니다.
첫째는 천하의 패권을 놓고 원소와 조조의 싸움인 관도대전입니다.
둘째가 조조가 나머지 시골 잔당인 유비와 손권을 토벌하기 위해 벌이는 적벽대전입니다.
마지막이 유비와 손권이 짜투리 땅을 놓고 싸움을 벌이는 이릉 대전입니다.
이 세 개의 큰 싸움을 벌이는 과정이 삼국지의 줄거리입니다.
나관중의 역사 왜곡은 우선 중국 최초의 민중봉기인 황건적을 마치 화적떼처럼 그리고 있습니다.
후한말기의 정치적 문란과 환관들의 권력남용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견디다 못한 민중의 봉기를 조조 유비 손책등 귀족들이 진압하면서 시작됩니다. 동학혁명과 같던 황건적에 의한 농민반란은 삼국지에서 도적떼로 취급 됩니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노도와 같은 개혁 불길을 한족의 유신들이 짓밟음으로써 망해가는 한족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고자 했던 유비는 역사의 반역자이지만 송대의 지식인들은 그런 유비를 삼국지를 통해 송대에 다시 불러 일으킨 것입니다.
그중에 제일 뻥이심한 적벽대전을 들여다 봅시다
왜 우리민족이 남의 나라 역사인 삼국지의 적벽대전을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자 세계문화유산인 판소리 다섯마당의 하나인 적벽가로 노래하고 있는지 궁금증을 품은 채 살펴보겠습니다
적벽대전은 화북(華北)을 평정한 조조가 중국을 통일하려고 8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양자강 부근의 적벽에서 오·촉 연합군과 싸울 때 오나라 주유와 황개(黃蓋)의 화공계(火攻計)로 전선(戰船)이 불타 대패를 당하고 후퇴한 전투로 요약됩니다
유명 외국 저술가가 쓴 책에서, 제갈량(諸葛亮 : 181~234)이 빈 성 위에서 홀로 거문고를 타면서 사마의(司馬懿 : 179~251)의 수만 대군을 물리친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과연 병법의 대가라고 하는 대목을 읽었습니다. 이 사건은 있을 수도 없고 실제로 없었던 사건인데 마치 사실처럼 묘사되어 있어서 짜증이 나더군요
수만의 대군이 운집해 있는데 성 위에서 거문고 연주를 한다고 사마의가 그 연주소리에 살기를 느끼고 수만의 군대가 후퇴를한다라... 수만의 군사들이 모여 말울음 소리, 창검 소리로 소란한 벌판에서 성위에서 타는 거문고 소리를 어떻게 들었을까요..... 아무리 과거의 일이지만 제갈량을 빼고 모두 바보만 살던 저능아보호시설이었나요
그래도 짚으로 만든 고물 조각배로 화살 십만개를 주어오고, 말 한마디에 왕랑(王朗)이 말에서 떨어져 죽고 편지 한통으로 적장을 죽이고, 동남풍을 불어오고 하는 만화(漫畵)같은 사건들을 인용하지 않아서 차라리 다행입니다. 저는 가끔 이런 내용을 사실로 믿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냉수 한 사발을 드리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제갈량은 제대로 이긴 전쟁이 없다
정사를 가만히 살펴보면 제갈량이 제대로 이긴 전쟁이 없습니다. 제갈량이 실제로 군대를 지휘한 것은 유비가 죽고 난 뒤의 이야기입니다. 적벽대전(赤壁大戰 : 208)은 제갈량이 개전(開戰)에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전투의 지휘관은 아니었죠. 이 때 제갈량의 공적은 외교관(外交官)으로서의 역할이었습니다. ‘
제갈량이 군사 전략가로서 위대한 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위나라의 대군과 싸우면서 결정적인 패전(敗戰)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만큼 촉의 군사력이 열세였기 때문이죠. 제갈량은 정사‘삼국지’의 편저자인 진수의 지적처럼, 군사전략가보다는 차라리 훌륭한 정치가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일단 실제로 제갈량이 한 전투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제갈량이 군대를 지휘하기 전 촉은 이미 형주(荊州)라는 전략상 요충지를 잃었습니다. 촉은 지형상으로는 천연요새이지만, 다른 지방을 공격하기도 매우 어려운 특성을 가지고 있어 항상 군수품 보급로 문제가 발생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에 있어서 군수품 보급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갈량은 위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형주와 익주에서 북상하여 위를 서ㆍ남방에서 각각 협공하는 작전을 지론으로 삼고 있었는데 이 양동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죠. 어쨌든 제갈량은 유비의 뜻을 받들어 중원 정벌의 준비를 한 후 유명한 출사표(出師表)를 올립니다.
서기 227년, 제갈량은 성도(成都 : 촉의 수도)에서 대군을 이끌고 북벌의 길에 오릅니다. 제갈량은 먼저 원래 촉의 부장으로 있다가 위나라에 투항해 있던 신성(新城) 태수 맹달(孟達)을 포섭하려 합니다. 그러나 사마의는 이를 알아차리고 완(宛)에서 신성을 급습하여 맹달을 침으로서 제갈량의 위나라 침공 계획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228년 사실상 시작된 북벌을 위해 제갈량은 한중(漢中)에 주둔합니다. 제갈량은 전격적으로 기산(祁山)을 공격하여 3군을 장악했으나 가정(街亭)으로 진출한 선봉장 마속(馬謖)이 군율을 어기고 위의 총공격에 대패하고 철수합니다. 가정은 설령 촉군이 장악했다 해도 위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으면 오히려 고립되는 지역입니다.
229년 제갈량은 진수의 아버지인 진식(陳式)을 파견하여 무도, 음평을 공격하여 평정합니다. 후방을 안정화시키려고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231년 서부 지구 전투가 지구전(持久戰)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한 후, 제갈량은 다시 기산으로 진격하여 사마의의 군과 대치하게 되었지만 사마의는 제갈량의 의도와는 달리 수비 태세만을 견지하였고 결국 제갈량은 보급 문제로 철수합니다. 이 때 위나라 장수 장합(張郃)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는 합니다.
234년 봄, 제갈량은 다시 북벌을 단행하여 오장원(五丈原)에 포진하여 사마의가 이끄는 위군과 대치하면서 장기전에 대비하기도 했지만, 1백여 일 만에 제갈량은 진중에서 54세로 병으로 죽습니다.
나관중‘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이 사마의(司馬懿) 부자(父子)를 몇 번씩 죽일 수도 있었고 위나라를 위기에 빠뜨리기 직전까지 간 듯이 이야기하지만 실은 장안(長安)의 외곽 방어 기지인 미성도 함락한 바가 없습니다. 장안 공격을 위한 교두보 하나 확보하지 못했다는 얘깁니다. 쉽게 말해서 당시 장안은 위나라 서부 지역 방위 사령부였는데 촉군은 장안 근방에도 못 갔다는 말입니다. 설령 장안을 점령한다 했더라도 위나라를 함락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안이 함락될 경우, 위나라는 대대적으로 병력을 동원하여 촉군과 싸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제갈량의 북벌이 위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장기적으로 장안 주변의 지역을 서서히 잠식해서 위나라를 여러 방향에서 공격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제갈량의 주공격로를 보더라도(오장원 진출을 제외하면) 직접적으로 위나라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죠.
촉군이 위나라와 대전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위나라와 지속적인 전쟁을 하게되면 새로운 딜레마에 빠집니다. 바로 경제(經濟) 문제입니다. 군사적 대치를 통해 국가 위기를 조성하여 국민적 단합을 유도해낼 수 있지만 이것은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죠. 왜냐하면 전쟁의 바탕이 되는 것은 결국은 경제력(經濟力)이기 때문입니다.
@융중대책(隆中對策 : 천하삼분지계)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비롯하여 대부분의‘삼국지’전문가들이 한 목소리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가 제갈량의 천재성이라 주장합니다. 이것을 흔히 제갈량이 은거하였던 장소(융중)를 따서 융중대책(隆中對策)이라고 합니다. 융중대책은 유비가 제갈량을 삼고초려(三顧草廬)할 때 제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나관중‘삼국지’에는 이것이 모든 문제를 풀어내는 ‘마스터 키’처럼 등장하고 있습니다. 글쎄요. 이것은 과연 타당한 얘기일까요?
제갈량의 융중대책에 대한 분석은 두 가지 방향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융중대책이 시의에 적절했는가 하는 점, 다른 하나는 융중대책이 과연 제갈량의 작품인가 하는 점입니다.
첫째, 융중대책은 당시 유비가 처한 상황, 즉 조조군(曹操軍)이 남하하려는 상황에서는 별로 적절한 대책이 아니었습니다. 융중대책은 거시적 안목에서 유비가 취할 수 있는 방도였지, 당시 조조군의 형주 침공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에 시의에 적절한 것은 아니었지요. 생각해 보세요. 회사가 오늘 오후 4시면 부도나는 마당에 최고의 참모라는 사람이 아침에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한가로이 앉아서 강남에는 땅값이 비싸니 회사를 강원도의 소도시로 옮깁시다 라고 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일단은 무슨 짓을 하든지 단기 자금이라도 끌어들여 급한 불을 꺼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다른 회사와 인수ㆍ합병을 해야지요.
둘째,‘천하삼분지계(융중대책)’는 당시 제갈량의 생각이었다기보다는 지식인들에게 유행했던 생각이었지요. 예를 들면, 노숙(魯肅), 방통(龐統), 감녕(甘寧), 주유(周瑜), 법정(法正) 등이 모두 ‘천하삼분’을 거론하고 있지요. 따라서 명석했던 유비가 몰랐을 리도 없지요. 왜냐하면 융중대책은 당시의 상황을 따져보면 그리 놀랍거나 새로운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당시 대세력은 조조와 원소이고 나머지는 여포, 원술, 손권(강동), 유표(형주), 유장(익주) 등이었는데 이들은 상호간의 갈등과 대립을 이용하는 것이 거의 일반적인 전략적 관행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조가 형주를 정벌할 당시에는 남아있는 세력이라고는 유표, 유장, 손권뿐이니 자연스럽게 ‘천하삼분지계’가 나올 수밖에 없지요. 정사의 기록으로만 봐도 ‘천하삼분지계’는 제갈량이 처음으로 제시한 것은 아닙니다. 천하삼분지계를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오나라의 노숙(魯肅)입니다.
정사에 따르면 일찍이 노숙이 몸을 굽혀 손권을 찾아왔을 때, 손권이 장기적인 전략을 묻자 노숙은 손권에게“장군을 위한 계책은 오직 강동을 솥의 발의 하나로 삼아서 천하의 변화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將軍計, 惟有鼎足江東, 以觀天下之)”라고 하고 있죠(정사, 오서, 노숙전). 그런데 반하여 애당초 제갈량은 오나라를 하나의 국가로 인정한다기보다는 조조를 정벌하는 데 손권의 무력을 이용하려는 의도였지요. 제갈량이 이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손권을 적벽대전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설득할 때입니다. 제갈량은 손권을 설득하면서“만약 조조의 군대를 (유비와 연합하여) 격파하면 조조는 반드시 북쪽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형주와 오의 세력이 강대해져서 솥발처럼 삼국이 정립하는 형태가 되게 됩니다(操軍破, 必北還, 如此則荊吳之勢彊, 鼎足之形成矣)”라고 하였지요(정사, 촉서 제갈량전)
나관중‘삼국지’에는 노숙이 마음씨만 좋은 한심한 모사로 나오지만 사실은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의 연구에 따르면 노숙은 천하를 보는 눈이 탁월하였다고 합니다. 노숙은 손권보다는 십년이나 나이가 많았으므로 손권에게 노숙은 마치 아버지이자 삼촌이며 형님의 역할도 동시에 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손책(孫策)의 죽음으로 근심으로 날을 지새우던 손권은 노숙을 보자 큰 시름을 덜었다고 합니다.
노숙은 일찍부터 국제 정세에 밝아 손권에게 강동(오나라)을 보전하는 길은 원소(袁紹)ㆍ조조(曹操)의 대립을 이용하여 강동을 보전하는 것 즉 천하가 원소ㆍ조조ㆍ강동(손권)으로 나눠지도록 만들어 조조가 함부로 강동을 넘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노숙이 손권에게 권한 것은 이제 한나라는 다시 부흥시킬 수 없을 것이고 조조도 쉽게 제거할 수도 없으니 남은 것은 솥의 세 발처럼 오나라가 강동에 버티고 있으면서 조조와 원소의 싸움을 적절히 이용하라는 것이죠. 그런데 조조에 의해 원소가 제거되자 이제는 유표(劉表)가 유일한 대안이 될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유표가 죽고 맙니다. 노숙은 조문 사절을 구실로 당시 정황을 파악하러 형주로 갔다가 조조군의 남하 소식을 접하고 유표를 대신할 사람으로 유비를 택한 것입니다. 유비가 새로운 파트너로 부상한 지금 노숙의 전략은 다소 수정이 불가피해졌지요. 일단 촉과 오가 연합하여 공동의 적인 위나라를 멸한 뒤에 위나라 의 8개 주를 양분하여 지형적으로 가까운 곳을 중심으로 촉과 오의 영토에 귀속을 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이 말을 위나라 지식인들이 들었으면 콧방귀를 뀌었겠지만 오나라에서는 상당히 진지한 이야기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천하삼분지계(융즁대책)라는 것은 제갈량이 가장 먼저 제시한 것도 아니고 그것을 주도한 세력도 촉이 아니라 오나라였던 것이지요. 나관중‘삼국지’에서처럼 그것이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무슨 비단 주머니식으로 말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당시 유비가 처한 상황을 당장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실제로 제갈량은 위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방책으로서 ‘천하삼분’을 구상한 반면 오나라는 강동의 현상유지를 위해서만 ‘천하삼분’을 구상하지요. 정사를 보면 삼고초려(三顧草廬) 당시 제갈량은 유비에게‘천하삼분’이라는 말보다는 형주와 익주에서 동시에 위나라를 공격할 수 있는 양동작전을 제시합니다.
정사를 통해 분석해보면 제갈량이 유비 휘하에 든 것은 조조의 형주 정벌이 있기 전이었고 일단 서서(徐庶)와 함께 유비의 참모 역할을 해오면서 형주를 유비가 장악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지만 실패하였지요. 이러는 가운데 노숙이 유비를 만나러오자 그를 따라 오나라로 가서 위나라와 오나라를 적벽 대전으로 끌어 들입니다. 이 적벽대전은 제갈량의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여 결정적으로 유비의 신뢰를 받게 한 사건이었죠. 제갈량은 형주에서의 탈출과 적벽대전을 겪으면서 국제적인 감각을 가지게 되고 충분한 경험을 쌓게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천하삼분지계’란 제갈량이 처음으로 제기한 것도 아니요, 이 계책은 현상유지를 위한 시간벌기에 불과했으며 그것을 주도한 세력은 주로 오나라라는 것이지요. 쉽게 말하면 노숙과 손권이 천하삼분지계로 제갈량을 철저히 이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죠. 물론 적벽대전에서는 제갈량에게 선수를 빼앗겼지만 그 뒤의 손권은 형주를 빼앗고 철저히 촉을 이용합니다. 제갈량이 위나라를 공격할 때도 오나라는 대부분 침묵합니다. 오나라는 촉과 위의 전쟁에서 침묵함으로써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으려 한 것입니다. 이것은 제갈량의 책략이 오히려 오나라에 지속적으로 이용당했음을 의미하죠. 결국 촉은 일찍 멸망하고 오나라는 20년 뒤에 멸망합니다. 제갈량이 좀더 효과적으로 오나라를 활용하는 방법을 찾았으면 훨씬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을까요???
진시황의 전국 통일, 한무제의 서역 개척, 당태종의 창건, 거지에서 황제가 된 주원장, 정화의 대항해를 벌인 영락제, 청나라 번영의 삼두마차인 강희, 옹정, 건륭제... 이게 진짜 중국 문명의 위대함이죠. 삼국지 매니아들은 이런 부분들은 보지 않으려 하고, 60년 동안 중원에서 벌인 사소한 내전에만 골몰하더군요.
그리고 삼국지를 가지고 중국을 평가해선 안 되죠... 삼국지에 나오는 중국은 죽은 중국이자 일종의 환타지에요.
삼국지의 삼국시대는 중국 역사에서 아주 작은 부분이자 비중이 옅은 쪽입니다. 그 쪽에 너무 매몰돼면 중국의 진면목을 알아볼 수 없어요.
진시황의 전국 통일, 한무제의 서역 개척, 당태종의 창건, 거지에서 황제가 된 주원장, 정화의 대항해를 벌인 영락제, 청나라 번영의 삼두마차인 강희, 옹정, 건륭제... 이게 진짜 중국 문명의 위대함이죠. 삼국지 매니아들은 이런 부분들은 보지 않으려 하고, 60년 동안 중원에서 벌인 사소한 내전에만 골몰하더군요.
난 솔직히 삼국지 재밌던데...
삼국지가 대단한 것은 무슨 장수가 최강이고 몇십만이 싸웠기(사실이든 아니든)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서 보여지는 인간들의 천태만상 때문이 아닌지...
관우니, 조조니 제갈량이니 보다 광개토대왕과 이순신과 서희가 더 훌륭할지도 모르지만 삼국지 처럼 하나의 얘기로 재미있게 풀어나간 것이 또 있는지?
그리고 삼국지 배경 시대가 짧고 빈약할지 몰라도 삼국지 시대의 애기가 그 후의 중국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적지 않다고 봅니다. 중국을 이해하는데 한 방편이 될수도 있다고 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