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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耽羅) 土産 “대모(玳瑁), 공작포(孔雀腊), 앵무젓(鸚鵡鮓)” [제1편]
2022년 06월 18일
○ 오늘날의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에서 “제주도(濟州島)”의 옛 이름은 “탐라(耽羅) 또는 섭라(涉羅)”라고 했다고 말하는데, 여기에 이의(異意)를 말하거나 반론(反論)을 제기(提起)하면 한마디로 “정신(精神)나간 놈” 쯤으로 매도(罵倒)당하고도 남을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大韓民國) 정치(政治)판처럼 “초짜가, 아마추어가, 능력(能力)이 담보(擔保)되지 않은 무능력(無能力)한 자(者)들이 치고 달리는 중(中)”인 것처럼 환상(喚想)을 보는 것과 같이, 누가, 누구를 비난(非難)하고, 비판(批判)해야 하는지를 분별(分別)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민중(民衆)들 앞에 서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 그 외(外), “탐모라(耽牟羅)·섭라(涉羅)·담라(儋羅)·탁라(乇羅)”라고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러한 ‘제주도(濟州島)=탐라(耽羅)=섭라(涉羅)’의 토산물(土産物)을 유심(留心)히 들여다보면 : 이상(異狀)한 것을 발견(發見)할 수 있다. 즉(卽),
➊ 하나는, 땅(뭍: 地)에서 산출(産出)되는 특이(特異) 토산물(土産物)과
➋ 둘째는, 바다 가운데(海中)에서 산출(産出)되는 특이(特異) 산물(産物)이 그것이다.
물론(勿論), ‘제주도(濟州島)가 해중(海中)에 있는 큰 섬(大島)’이기 때문에 땅(뭍: 地)에서 나오는 물산(物産)과 해중(海中)에서 나오는 물산(物産)이 있어, “뭐가 이상(異狀)한가?”라고 되묻을 수 있으나,
『땅(뭍: 地)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땅(뭍: 地)이 될 수 없고, 해중(海中)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해중(海中)이라고 할 수 없다.』는 얘기다. 즉(卽) “자연환경(自然環境)이 다르다 보니, 그곳에서 산출(産出)되는 물산(物産) 자체(自體)가 서로 다르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자연환경(自然環境)에 따라, “땅(뭍: 地)에서, 해중(海中)에서 살아가는 생물(生物)들이 모두 다르게 분포(分布)되어 있다.”는 뜻이다.
예(例)를 들면, ‘동정귤(洞庭橘)’은, 동정호(洞庭湖) 주변(周邊)에 있는 ‘동정산(洞庭山)의 특산(特産)’이라고 전해진다. 이게 ‘제주(濟州)의 특산(特産)’이라고 한다면, “제주(濟州)는 곧 동정산(洞庭山)이 있는 동정호(洞庭湖) 주변(周邊) 땅의 이름”이어야 한다.
이러한 예(例)에서 보듯이 토산물(土産物)은, 각 지역(地域)에 따라 다르게 분포(分布)되어 있고, 이러한 토산물(土産物)은, 아무 땅에서나 산출(産出)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을 염두(念頭)에 두고 “제주도(濟州島), 탐라(耽羅), 섭라(涉羅)”를 바라보기로 하자.
1. 옥(珂)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 高句麗本紀第七.文咨王[文咨明王] : 《十三年, 夏四月, 遣使入魏朝貢, 世宗引見其使芮悉弗於東堂. : 13년 여름 4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세종(世宗)이 그 사신 예실불(芮悉弗)을 동당(東堂)에서 접견하였다. 悉弗進曰: “小國係誠天極, 累葉純誠, 地産土毛, 無愆王貢. 但黃金出自扶餘, 珂則涉羅所産. 扶餘爲勿吉所逐, 涉羅爲百濟所幷, 二品所以不登王府, 實兩賊是爲.” : 예실불(芮悉弗)이 나아가 말하기를 : “소국(小國)이 하늘을 섬기기로 약속한 것을 누대에 걸쳐 성실하게 지켰으며, 토산물을 바치는 조공도 어긴 적이 없었다. 다만 황금(黃金)은 부여(扶餘)에서 생산되고, 옥(珂)은 섭라(涉羅)의 소산인데, 부여(扶餘)는 물길(勿吉)에게 쫓기고, 섭라(涉羅)는 백제(百濟)에게 병합(倂合)되었으니, 두 가지 물품이 왕부(王府)에 오르지 못하는 것은, 실로 두 적국의 탓입니다.“하였다.》고 하였다.
위의 글에서 언급(言及)된 ‘옥(珂)’의 산출지(産出地)가 “섭라(涉羅)”라는 곳인데,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에서는 이를 ‘제주도(濟州島)’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지형지리(地形地理) 측면(側面)에서 바라봐도 이건 ‘순 어거지’지만, 뭐 교역(交易)할 수 있다는 것으로 대체(代替)한다면 가능(可能)한 일일 것이나, 문제(問題)는,
‘섭라(涉羅)’ 즉(卽) ‘탐라(耽羅)=제주도(濟州島)’에서 ‘옥(珂)’이 산출(産出)되었다면, 지금(只今)도 산출(産出)되어야 마땅한 이야기다. 허나 마구잡이로 파내어 고갈(枯渴)되어버렸다면, 채굴(採掘)한 정황(情況)이나 흔적(痕迹)등이라도 그것을 증거(證據)해 줄 수 있어야 함은 당연(當然)한 것이다. 우선(于先) “옥(珂)”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珂” : (1) 옥(玉) 비슷한 흰 돌 (2) 조개이름 (3) 홍자옥편(弘字玉篇) : ‘白瑪瑙珂’라고 하였다. 이로 보면 : 가(珂)란?
“흰(白) 마노(瑪瑙)”를 말하는 확률(確率)이 높다. 한자사전을 찾아보면 :〈석영(石英)ㆍ단백석(蛋白石)ㆍ옥수(玉髓)의 혼합물(混合物). 화학(化學) 성분(成分)은 송진(松津)과 같은 규산(硅酸)으로, 광택(光澤)이 있고, 때때로 다른 광물질(鑛物質)이 삼투(滲透)하여 고운 적갈색(赤葛色)이나, 백색(白色)의 무늬를 나타냄. 아름다운 것은 장식품(裝飾品)이나 보석(寶石)으로 쓰이고, 기타는 세공물ㆍ조각(彫刻) 재료(材料) 따위로 쓰인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마노(瑪瑙)’는 칠보(七寶) 중의 하나로, 특히 “이것을 지니고 있으면 재앙(災殃)을 미리 막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예(例)를 보면, 삼국시대(三國時代) 그 이전(以前)부터 이런 유형(類型)의 장신구(裝身具)들이 상류(上流)층에서 애용(愛用)했다는 것이 유물유적(遺物遺蹟)으로 증명(證明)되고 있다.
오늘날의 ‘제주도(濟州島)가 탐라(耽羅)이고, 섭라(涉羅)’라고 한다면 : “섭라(涉羅)”에서 산출(産出)되는 ‘옥(珂)’을 고구려(高駒驪)가 위(魏)에게 헌상(獻上)했으나, 「이 땅을 백제(百濟)가 병합(倂合)해버린 바람에 “옥(珂)”을 구할 수 없어 조공품(朝貢品)에 포함(包含)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고,
이후(以後), 백제(百濟)는 이러한 ‘옥(珂) 광산(鑛山)’을 차지했으니, 더 많은 옥(珂)이 산출(産出)되어 여러 나라로 교역(交易)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증명(證明)할 수 있는 어떤 것들도 없다. 즉(卽),
‘제주도(濟州島)=탐라(耽羅)=섭라(涉羅)’에서 옥(珂)이 산출(産出)되었다는 어떤 정황(情況)이나 흔적(痕迹)조차 발견(發見)되지 않고 있으며, 그에 대한 기록(記錄)조차 찾을 길이 없다. 이 무슨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일일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 《마노의 생산지는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으며, 생산지가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생산·가공되었다. 선사시대의 지석묘에서 마노로 만든 장신구가 출토되고, 낙랑고분에서도 대추모양의 마노가 출토되었다. 또 신라의 금관총에서는 마노제 관옥과 다면옥이 출토되었다. 수정·백옥·청석과 함께 홍마노를 혼합한 목걸이가 출토된 적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마노가 장신구와 장식품에 널리 이용되었다. 남자용의 풍잠(風簪)을 비롯하여 갓끈 그리고 비녀·가락지·노리개·향집·장도 등에 마노가 부분 혹은 전체를 장식하였다.》고 설명(說明)해주고 있는데,
이렇게 유명(有名)했던 ‘옥(珂)’의 산출지(産出地)도 모른다? 그런데 왜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섭라(涉羅)에서 산출(産出)된다.’고 한 것인가?
‘일천여년(一千餘年)’ 동안 왕실(王室)에서, 상류층(上流層) 고관대작(高官大爵), 기타 부유층(富裕層)들이 애용(愛用)했다던 그 옥(珂)의 산출지(産出地)가 바다 가운데 제주도(濟州島)에서 나온다는 것도 몰랐다는 말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며, “조선민족(朝鮮民族)”을 깔보는 것이고, 무식(無識)한 조선(朝鮮)족으로 몰아붙이는 비열(鄙劣)한 책동(策動)이다. 그러나 그 진실(眞實)은,
〈‘제주도(濟州島)=탐라(耽羅)’의 토산물(土産物)로, ‘옥(珂)’을 임금(王)에게 헌상(獻上)했다는 기록(記錄)이 없다.〉는 것은, 〈“제주도(濟州島)=탐라(耽羅)”에서 그런 “옥(珂)”이 산출(産出)된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證明)해준다.
➤ 여기서 우리가 주목(注目)해야 할 것은, 발상(發想)의 전환(轉換)이 필요(必要)한 것이다. 즉(卽) “제주도(濟州島)와 탐라(耽羅), 섭라(涉羅)가 같은 땅(地)이냐?” 하는 문제(問題)다.
토산물(土産物) 편으로 보면 : 〈‘제주도(濟州島)’, ‘탐라(耽羅)’, ‘섭라(涉羅)’는 서로 다른 땅〉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제주(濟州)는 제주(濟州)일 뿐’이며, ‘탐라(耽羅)’, ‘섭라(涉羅)’는 또 다른 땅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主張)하고 있는 것이다.
‘옥(珂)=마노(瑪瑙)’의 산출지(産出地) : 동서양고(東西洋考)【明 張燮(1574年-1640年): 萬曆四十五年(1617年) 完成】에서는,
➊ 啞齊郎蘇門答刺國[一名蘇文達那,西洋之要會也]을 말하고 있다. : 瑪瑙 〈格古論曰:非玉非石,堅而且脆,中有人物鳥獸形者最貴。負喧錄曰:瑪瑙產有南北,南瑪瑙產大食,色正紅無瑕,可作杯斝〉고 하였는데,
소문답랄(蘇門答剌)은, 만랄가[滿剌加 : 말라카]의 서(西)쪽에 있다. 소문답랄(蘇門答剌)은, “수마트라”를 말한다고 한다.
➋ 日本[古倭奴也] : 瑪瑙〈華夷考曰:出日本,生土石間,種有三般,紅黑而白紋如纏絲者咸妙。砑木不見熱者才真〉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왜노(倭奴)의 땅은, 오늘날의 열도(列島)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본시(本是)의 “왜노(倭奴)” 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대모(玳瑁)【新增東國輿地勝覽 : 玳瑁,貝,鸚鵡螺。已上三物竝出牛島及大靜加波島】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등에서 말하기를, 대표적(代表的)인 토산(土産)으로 “대모(玳瑁)”가 기록(記錄)되어있는데, 대모(玳瑁)는 “인도양(印度洋)·태평양(太平洋)의 열대(熱帶) 바다에서 많이 난다”고 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대모(玳瑁))]
주요(主要) 분포지역(分布地域)은, ‘인도양(印度洋), 태평양(太平洋)과 대서양(大西洋)의 열대(熱帶) 산호초(珊瑚礁)’등이며, ‘대모(玳瑁)’는 ‘전형적(典型的)인 열대(熱帶)수역(水域)의 해구(海龜)’[중국어 위키-백과]라고 설명하고 있다.
동서양고(東西洋考)[明 張燮]에서 “대모(玳瑁)”의 산출지(産出地)로 :
“交阯(暹羅·下港[加留:一名順塔.唐稱闍婆,在南海中者也.一名訶陵,亦曰社婆.元稱爪哇.]·大泥[卽古浡泥也。本闍婆屬國,今隸暹羅]·麻六甲[郎滿刺加也]·“啞齊郎蘇門答刺國[一名蘇文達那,西洋之要會也]·彭亨[東南島中之國也.星槎勝覽,名彭坑。續文獻通考曰:暹羅迤西.]·柔佛[一名烏丁礁林]·思吉港[蘇吉丹之訛也,為爪哇屬國]·呂宋[在東海中,初為小國,而後寖大:이곳에 대모항(玳瑁港)이 있다. 灣名玳瑁,然玳瑁非其所出]·蘇祿[蘇祿在東南海中.高藥與蘇祿相近,出玳瑁.]·文萊郎婆羅國[東洋盡處,西洋所自起也]의 물산(物産)편에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서 말하는 ‘대모(玳瑁)의 산출지(産出地)’는, 『필리핀[Philippines], 인도지나반도(印度支那半島) 및 인도네시아[Indonesia], 보르네오[Borneo], 뉴기니[New Guinea], 벵골만[ Bengal 灣] 연안(沿岸), 인도양(印度洋), 아라비아해[Arabia, 海』등지(等地)를 말해주고 있다.
‘한반도(韓半島) 또는 열도(列島)’의 이야기가 아니다.
3. 빈주(蠙珠)
東國輿地志 卷五 上 全羅道 濟州牧 : 土産 : 蠙珠(빈주)
新增東國輿地勝覽 : 蠙珠。《高麗忠烈王二年,元遣林惟幹採珠于耽羅不得,乃取民所藏百餘枚以還. : 고려 충렬왕(忠烈王) 2년에 원 나라에서 임유간(林惟幹)을 보내어 탐라에서 구슬을 채취하다가 얻지 못하고, 민간이 간직하여 둔 것을 백여 개 가지고 돌아갔다.》고 하였으니, 이곳에서 산출되는 빈주(蠙珠)는 없었다는 뜻이다.
‘원사(元史),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사강목(東史綱目)’등에서 말하기를 「“원(元)” 조정(朝庭)에서는 “탐라(耽羅)의 진주(珍珠)를 요구하고, 채취(採取)할 수 있는 감독관(監督官)까지 파견(派遣)하기도 했다」고 전해지지만, 이곳 즉(卽) 탐라(耽羅)에서 빈주(蠙珠)를 채취(採取)했다고 하는 기록(記錄)은 없다.
기언(記言) 제32권 원집 외편 / 동사(東事) 서(序) : 《乇羅南海中小國。出善馬,蠙珠,玳瑁。始通於新羅。國號耽羅。附於新羅之下。: 탁라(乇羅)는 남해(南海) 가운데에 있는 작은 나라로 좋은 말과 진주[蠙珠]와 대모(玳瑁)가 나는데, 처음으로 신라(新羅)와 통교하고 국호를 탐라(耽羅)라 하였다. 그러므로 신라 다음에 붙였다.》하였다.
➤ 여러 지지(地志)의 토산(土産)편에 “빈주(蠙珠)”가 기록(記錄)되어있으나 “제주(濟州)=탐라(耽羅)”에서 산출(産出)되었다는 근거(根據)가 없다. 토산(土産)편에 기록(記錄)이 되고 외국(外國)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면, ‘그곳에서 분명(分明) 산출되었다’는 이다.
〈땅이되, 그 땅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4. 탐라(耽羅)의 토산(土産) / 앵무자(鸚鵡鮓: 앵무젓), 공작석(孔雀腊: 공작포)
芝峯類說 卷二 諸國部 風俗 :《耽羅 : 桂海志曰.土人以鸚鵡爲鮓.孔雀爲腊云.乃土産.非怪也. : 계해지(桂海志)에서 이르기를, 토인(토착민)들은 앵무(鸚鵡)를 소금에 절이고, 공작(孔雀)을 포(腊)로 만든다고 이르는데, 이곳 지방의 산물(産物)이다. 기이하지 않다.》 라고 하였는데,
▷ 芝峯類說卷二 諸國部 風俗 : 原文 : 《耽羅在絶海中.居人以海爲家.以漁採爲食。歲多漂溺.男子之得葬者寡矣.以其男少女多。故一夫而數十妻者有之.雖甚貧窶者.亦不下十婦.其婦常力作.以食其夫焉。濟州村巷之女.鮮有伉儷.每歲三月.援兵入歸時.女輩凝粧携酒.來待於別刀浦.勸酒相狎.迎至其家.八月罷防.則涕泣追送。林子順作迎郞送郞曲.備記其事.桂海志曰.土人以鸚鵡爲鮓.孔雀爲腊云.乃土産.非怪也.》
➊ 계해지(桂海志)를 인용(引用)하면서 ‘탐라(耽羅) 토인(土人)들의 풍속(風俗)’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계해지(桂海志)”란 계해우형지(桂海虞衡志)를 말하는 것이고, ‘해남도(海南島)를 포함(包含)한 남중국해(南中國海) 주변일대(周邊一帶)’를 말하는 것인데,
‘지봉유설(芝峯類說)’에 따르면 : 〈당시(當時) ‘탐라(耽羅)’는, ‘해남도(海南島)’일 가능성(可能性)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는데, 〈계해지(桂海志)와 연관(聯關)시켜보면, 이곳에 “탐라(耽羅)”가 있었다는 것이고, 이때가 송(宋) 때이며, 12세기(世紀)다.〉
계해지(桂海志) : 송(宋)나라 때의 범성대【范成大, 1126~1193: 宋史巻386 范成大列傳】가 편찬한 것으로, 계해우형지(桂海虞衡志)를 말한다. 『광남(廣南) 지역의 자연지리, 산천명승, 동식물, 광물자원, 특산품, 소수민족 등을 기술한 지방지(地方志)로, 1권 총 1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范成大(1126年-1193年),字致能,一字幼元,早年自號此山居士,晚號石湖居士,諡文穆,吳郡(今江蘇蘇州)人,南宋官員、詩人、文學家。]
여기서 ‘광남(廣南)’지방이란 어디를 말하는가? 바로 해남도(海南島)를 포함(包含)한 남중국해(南中國海)를 말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송(宋)’나라 때의 “탐라(耽羅)”는, “해남도(海南島) 또는 남중국해(南中國海)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證明)해 주고 있는 것이다.
➋ 앵무자(鸚鵡鮓) : ‘앵무(鸚鵡)를 소금에 절인 것을 말하는 것’으로, 앵무(鸚鵡)란 앵무새를 말하는 것이다.
동서양고(東西洋考)[明張燮撰。燮字紹和,龍溪人]에서는 : 交阯[鸚鵡:林元凱詩:隴頭春樹拂雲紅,學語聲嬌弄晚風。上國抵今辭遠貢,莫愁彩羽閉雕籠]·占城·暹羅·下港[加留:一名順塔.唐稱闍婆,在南海中者也.一名訶陵,亦曰社婆.元稱爪哇.]·柬埔寨[卽古真臘國也]·大泥[卽古浡泥也。本闍婆屬國,今隸暹羅]·麻六甲[郎滿刺加也]·啞齊郎蘇門答刺國·思吉港[蘇吉丹之訛也,為爪哇屬國]··文郎馬神國·蘇祿[高藥]등지(等地)로,
이곳에서 말하는 ‘앵무(鸚鵡)의 산출지(産出地)’는, 『필리핀[Philippines], 인도지나반도(印度支那半島) 및 인도네시아[Indonesia], 보르네오[Borneo], 뉴기니[New Guinea], 벵골만[ Bengal 灣] 연안(沿岸), 인도양(印度洋), 아라비아해[Arabia, 海』등지(等地)를 말해주고 있다.
➌ 공작포(孔雀腊) : 탐라(耽羅)의 토산(土産) : ‘공작석(孔雀腊) 즉 공작포(孔雀脯)’를 말하는 것으로 “공작(孔雀)을 포(脯) 떠서 말린 고기”를 말하는 것이다. 공작어(孔雀魚)보다는 공작(孔雀) 새(鳥)를 말하는 것일 게다. 왜냐하면 “고기 맛이 좋아, 예로부터 고급(高級) 요리(料理)에 사용(使用)했다”고 전하니 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작 [peacock, 孔雀] (두산백과)> : 조류 꿩과 공작(孔雀)속의 총칭. 인도(印度)공작과 녹색공작(말레이공작)의 두 종류이며, 인도공작은 스리랑카에 분포하며 가슴, 머리를 걸쳐 보라 빛 기운이 도는 파란색이고, 녹색공작(말레이공작)은 인도의 아샘, 버마, 타이, 말레이지아, 자바 섬에 분포하며 녹색이다. 염색체가 호로호로새 및 공작과 매우 비슷하여 분류학상 이들의 중간에 위치한다.
크기 : 자바공작 수컷의 날개 약 55cm, 꽁지 약 60cm, 인도공작의 날개 약 50cm
몸의 빛깔 : 녹색(자바공작 수컷), 청색(인도공작 수컷)
서식 장소 : 밀림 물가
분포지역 : 인도·스리랑카·인도차이나반도·미얀마·말레이반도
자바공작(P. muticus)과 인도공작(P. cristatus)의 두 종류가 있다. 두 종류 모두 밀림의 물가에서 나무열매와 벌레 따위를 먹으며 산다. 둥지는 땅 위에 잔가지나 풀을 모아서 만들고, 6∼10개의 흰색 알을 낳아 암컷이 품는다. 새끼는 약 24일 만에 부화하며 부화하는 즉시 걸을 수 있다. 유럽에서는 옛날부터 고기 맛이 매우 좋아 고급 요리에 사용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용(引用) / 끝)
공작(孔雀)의 산출지(産出地)로 ‘동서양고(東西洋考)’에서는 : 《交阯·暹羅[孔雀 : 本朝尾充貢]·暹羅·下港[加留:一名順塔.唐稱闍婆,在南海中者也.一名訶陵,亦曰社婆.元稱爪哇.]·柬埔寨[卽古真臘國也]·大泥[卽古浡泥也。本闍婆屬國,今隸暹羅]· 思吉港[蘇吉丹之訛也,為爪哇屬國]·文郎馬神國》
이곳에서 말하는 ‘공작(孔雀)의 산출지(産出地)’는, 『필리핀[Philippines], 인도지나반도(印度支那半島) 및 인도네시아[Indonesia], 보르네오[Borneo], 뉴기니[New Guinea], 벵골만[ Bengal 灣] 연안(沿岸), 인도양(印度洋), 아라비아해[Arabia, 海』등지(等地)를 말해주고 있다.
➤ 오늘날의 제주도(濟州島)에 “공작(孔雀)이나 앵무(鸚鵡)”가 살았다는 기록(記錄)은 찾아볼 길이 없다. 특히 ‘공작(孔雀)이나 앵무(鸚鵡)’는, 특이(特異) 기후(氣候)대의 밀림(密林)지대에서 자생하는 조류(鳥類)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제주도(濟州島)에서 공작(孔雀)이나 앵무(鸚鵡)를 말한다는 것은, 블랙코메디의 한 장면(場面)일 뿐이다.
또한 대륙(大陸)의 동정호(洞庭湖) 주변에 ‘공작(孔雀)·앵무(鸚鵡)·앵무라(鸚鵡螺)·대모(玳瑁)’등이 산출(産出)된다? 이번 한마디로 한 참 ‘오버’하는 것이다.
➌ 앵무라(鸚鵡螺)【新增東國輿地勝覽】 : ‘앵무(鸚鵡)소라’를 말하는 것이다. “인도양·태평양의 열대해역(熱帶海域)에 광범위(廣範圍)하게 분포(分布)한다.”고 설명(說明)한다.
退溪先生文集攷證卷之八 / 別集詩 / 趙季任云云 : 鸚鵡螺 (杜註)螺。杯也。南海異物志。鸚鵡杯。狀似霞杯。形似鳥。頭向其腹似鸚鵡。故以爲名。○地志。出牛島及大靜,加波島。
藫庭遺藁卷之八 / 牛海異魚譜 / 附 螺 黃螺。紫螺。: 鸚鵡螺 : 鸚鵡螺殼形似鸚鵡。以爲酒盃甚竗。此處往往捕得。然不常有。且不及耽羅所產。
완당전집 제3권 / 서독(書牘) / 스물한 번째[二十一] : 《如西山貝葉。內賜鸚鵡螺甚奇。螺是洋製。萬曆以前。此物何日流傳而東出也。在於楡站寺中耳。: 그리고 서산(西山)의 패엽(貝葉)과 대내(大內)에서 하사한 앵무라(鸚鵡螺)는 매우 기이한데, 앵무라는 바로 서양(西洋)의 제품(製品)입니다. 만력(萬曆) 이전에 이런 물건이 어떻게 유전(流轉)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유점사(楡岾寺)에 있습니다.》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 / 人事篇 / 器用類 / 什物 / 鸚鵡盃辨證說 : 酒具金罍、玉瓚、兕觥、瓦尊諸品。見於經史傳紀者不少。而鸚鵡盃、鸕子杓、琉璃鍾、琥珀盃。見於唐代李白入詠。而鸚鵡未知何物。略辨之。唐時鸚鵡盃。未知何狀。而注亦未詳。我東《耽羅志》。濟州牧之牛島。大靜縣之蓋波島等處。出鸚鵡螺。其在水也。能飛四五丈如文鰩。故海人不易獲焉。或自死浮溢出于海澨。則始得磨鑢爲盃。虹暈射人。其狀絶奇。大不過一小拳。形略似酒船。又有海螺。俗呼小螺。磨琢去殼爲盃。亦有虹暈。而帶紅光。形亦弔詭。呼紅螺盃。博物者所可知也。
➤ 즉(卽), 〈대륙(大陸)의 동정호(洞庭湖) 주변 땅도 아니요, 한반도(韓半島) 남해(南海) 가운데에 있는 제주도(濟州島) 역시(亦是) 아니다.〉라는 것이다.
5. 소(牛)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牛,黑、黃、斑數種。角甚美,可爲觥。家家畜牧,至數百爲群. : 소(牛) : 검정소ㆍ누런소ㆍ얼룩소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뿔이 매우 아름다워 술잔을 만들 만하다. 집집마다 목축하여 수백 마리로 떼를 이룬다.》
➤ 한반도(韓半島) 남(南)쪽 해중(海中)에 있는 제주도(濟州島)에 “검정소ㆍ누런소ㆍ얼룩소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뿔이 매우 아름다워 술잔을 만들 만하다. 집집마다 목축하여 수백 마리로 떼를 이룬다.”고 하였다면 정말 얼마나 좋았을까?
가가호호(家家戶戶)가 목축(牧畜)하며, 수백(數百)마리씩을 길렀다고 한다면, 당시의 제주도(濟州島)에는 “수만(數萬), 수십만(數十萬) 마리의 소(牛)를 사육(飼育)했다”고 보아 지는데, 그러한 흔적(痕迹)이나 정황(情況), 유물유적(遺物遺蹟)은 어디에 잠만 자고 있는 것이냐?
예(例)를 들면 : 世宗實錄 70卷, 17年(1435 乙卯 / 명 선덕(宣德) 10年) 12月 12日(己酉) : 《兵曹與政府諸曹同議啓:濟州三邑,人多地窄,民戶九千九百三十五,人口六萬三千九十三,田則九千六百十三結四十八卜.地利有限,食之者衆,救荒之弊,無歲無之.無田業良人,各從自願,徙居陸地,私賤亦從本主,自願出陸.從之. : 병조에서 정부·각 조(曹)와 더불어, 함께 의논하여 아뢰기를 : 제주 세 고을에는 사람은 많은데 땅은 좁아서민호(民戶)가 9천 9백 35호이요, 인구가 6만 3천 93명이며, 전지(田地)는 9천 6백 13결 48 짐[卜]이므로, 토지의 이익은 한정이 있는데 밥 먹는 사람은 많아서, 흉년을 구제하는 폐단이 해마다 없을 때가 없으니, 전지와 직업이 없는 양민(良民)은 각기 자원에 따라 육지(陸地)로 옮겨 살게 하고, 사천(私賤)도 또한 본 주인을 따라 자원하여 육지에 나오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고 하였다.
이런 기막힌 경우(境遇)가 있다는 것, 『반드시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를 정립(定立)해야 할 당위성(當爲性)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제주(濟州) 즉 탐라(耽羅)에 대해서 말하기를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풍속(風俗) : 地瘠民貧。高麗文宗十二年,門下省奏:“耽羅地瘠民貧,惟以木道經紀謀生。” : 땅은 척박하고 백성은 가난하다. 고려 문종(文宗) 12년에 문하성이 아뢰기를, “탐라는 땅이 척박하고 백성이 가난하여 오직 목도(木道)질로 생활을 영위한다.” 하였다.〉
무엇이 진실(眞實)의 역사(歷史)인가? 가가호호(家家戶戶) ‘수백(數百)’마리의 소를 길렀다고 한다면, 10호(戶)면 수천(數千)마리, 100호(戶)면 수만(數萬)마리, 1,000호(戶)면 수십만(數十萬)마리의 소(牛)을 길렀다는 얘기인데, 「세종(世宗)때 만 해도 이곳에는 “일만(一萬) 호(戶)”가 살고 있었다.」고 하였다.
더불어 역사서(歷史書)에서 말하기를 : ‘탐라(耽羅)의 쇠고기 맛’은 외국(外國)에 까지 알려져 ‘유명세(有名稅)를 탓다’고 하였는바, 우리는 왜 그것을 몰랐을까? 한반도(韓半島) 백성(百姓)들은 무지랭이들만이 모여 사는 곳이라서 이런 것들도 몰랐다?
… 해남도(海南島) 및 남중국해(南中國海) 연안(沿岸) 지도(地圖)
○ 위에서 언급(言及)한 “대모(玳瑁)·앵무라(鸚鵡螺)·앵무(鸚鵡)·공작(孔雀)”등의 토산(土産)은 주로, “해남도(海南島)를 포함한 남중국해(南中國海) 연안(沿岸)”에서 산출(産出)되는 것들이다.
특히 지봉유설(芝峯類說)은, 계해지[桂海志:계해우형지(桂海虞衡志)]를 인용(引用)하여, “탐라(耽羅)의 토산물(土産物)에 대해 기록(記錄)해 놓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탐라(耽羅)”의 본시 땅이 어디인가에 대해 “이제는 알 수 있다”고 장담(壯談)할 수 있을 것이다.
○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제주도(濟州島) 지리지(地理志)’는, 『“제주(濟州) + 탐라(耽羅: 涉羅)”를 짜깁기 해, 두리 뭉실 만들어 놓은 것이다.』라고 주장(主張)하는 바다. [제2편으로 계속(繼續)]
2022년 06월 18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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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훌륭한 글 ..공유하여 널리 알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러브 선"님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