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을 꿈꾸는 우리집 여인들
김은식
하기휴가를 맞아 고향을 방문하였다.
막 떠나려는 순간 서울에 사시는 누님의 연락으로, 이번 휴가는 함께 안동 부모님을 찾아뵙기로 하면서 누님과 예정에 없던 휴가가 시작되었다. 하루 앞을 모르는 복잡한 시류 속에서 갑작스런 누나와의 번개팅은 기쁨과 설렘으로 찾아왔다.
서울생활이 지루하셨을까, 조카의 사업 뒷바라지에다 집안일로 지친 누님의 마음이 엿보였다. 하루 일찍 부모님이 계시는 안동에 도착하여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한 엄마를 마주한 순간 반가움보다 더한 죄송함에 절을 올리고, 몰라보게 여위신 모습에 코끝이 저려왔다.
오후 늦은 시간에 도착한 누님을 마중하기 위해 안동 터미널로 차를 몰았다. 이전한 사실을 모르고 어정거리다 뒤늦게야 송현동으로 엑셀을 밟았다.
의미 있는 일을 도모하는 설렘은 기쁨이다.
까만 선글라스를 먹고 여행용 가방을 끌고 나타난 누님, 저 여인이 누나 맞나 싶을 정도로 서울물을 먹더니 많이 세련되어 보인다는 생각이 뇌리에서 끝나기도 전에 내 옆으로 다가온 누님, 야~ 은식아 임마야, 니 증말 반갑다 야이야~
지방에 오시니 금새 변하는 누님의 말씨, 동생을 보니 마음이 편하셨던지 마구 사투리를 쏟아내신다. 까만 선글라스를 쓴 고운 피부의 누님과 경상도사투리, 오랜만의 누님의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무엇하나 거침없었던 누님의 활달한 성격, 이젠 좀 나약해지긴 했지만 그 성격이 변할 수가 있겠는가.
엄마가 계시는 집으로 차를 모는 동안 오랜만에 만난 재회의 정을 토닥토닥 나누던 우리는 엄마께 안동에서 맛으로 소문난 헛제사밥을 사드리기로 하고 저녁외식을 하였다. 얼마만인가, 그간 자주 찾아뵙지 못한 아쉬운 시간들을 뒤로 물리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월영교의 달빛은 그날 참 아름다웠다. 태풍영향권으로 밤공기마저 서늘한 강바람을 불어주곤 했다. 휴가 이튿날은 큰집을 찾아 집안의 종부이신 새 아지매를 찾아뵙고 인사하기로 계획하였다.
고향을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엄마와 누님의 얼굴에 번지는 환한 미소를 보니 참 잘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내 고향은 안동군 오천동에 위치한 군자마을, 언제나 가보고 싶은 옛 향기 그윽한 곳, 그곳에 가면 우리를 반기는 얼굴이 계신다. 영해에서 시집오셔서 50여년 세월을 한집안의 종부로 그 삶을 그윽한 향기인양 피어내시며 살고 계시는 새 아지매, 연세가 벌써 칠십이 넘으신 고령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으신 모습, 속내를 감내하며 집안의 구심으로 계시는 모습이 한결같으신 분,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고향 마을 관장으로 계신 형님과 둘러앉아 반갑게 안부가 오고 갈 무렵, 지인 문상차 포항에 다녀와야 한다는 나의 절박한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형님께서 하시는 말씀, 새 아지매 모시고 어디든 좋으니 다녀오라 하신다. 한곳에서 늘 대소가 잦은 행사에 마음이 지치고 답답하셨던 터라 형님께서 내게 특별히 부탁하시는 말씀 앞에 쌍수를 들고 좋아하는 누님.
남의 속도 모르고 모두들 합세해 나를 몰아세우는 기세가 대단했다. 한마디 반문할 틈도 주지 않으시고 먼저들 들떠서 난리법석이시다. 정황이 정황인 만큼 그분들 앞에서 나는 그 기세에 밀려 동의하고 말았다. 바람잡이 누님을 당해낼 수 없었던 사연인 즉, 발통도 없는 이여인들 코에 바람 좀 넣게 해다오. 그 한마디에 나는 케이오패 당하고 만다. 내심 얼마나 일상을 탈출하고 싶었으면 발통도 없다는 항변을...
코에 바람만 넣어주면 되니 아무 신경 쓰지 말라는 말끝에 그날 예정에도 없었던 세 여인과 포항 길을 나섰다. 관장형님께서도 대찬성, 만장일치의 가결로 밀어붙인 판세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로 나를 몰아갔다.
출발의 설렘은 곧바로 은빛바다로 향했다. 연로하신 팔, 구십 노인을 모시고 떠나는 나의 행로여, 길이여, 부디 잔잔 하소서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모처럼의 일탈은 아름다운 것. 우울감이 한 번씩 느껴지신다는 엄마와 새 아지매, 두말없으시고 따라나서 주시니 내게도 힘이 된다.
햇볕이 따가운 아스팔트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자동차, 빵빵한 에어컨, 길치를 응원할 네비속 아가씨의 음성이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나를 도울 수 있는 모든 것을 5분대기 시키고 자동차는 도로를 신나게 달렸다.
가는 동안 세 여인의 웃음과 이야기소리, 연세를 무색케 하는 환한 표정들, 작은 차에 여인 셋을 태우고 가는 여행길은 과히 시끄러웠다.
별의 고장. 영천을 지나는 길에 문득, 몇 해 전에 시골집을 새로 단장하고 살고 계시는 육촌누님이 생각났다. 이번에 수필집 내시고 페이스 북에서만 인사드렸을 뿐 일상으로 돌아가면 쉽게 찾아보기 힘든 터에, 누님 댁 근처일까 싶은 곳에서 문득 생각이 떠올라 전화를 드렸더니 반가운 목소리로 놀라신다. 여차저차 찾아간 육촌누님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새 형님과 동화 같은 집을 짓고 사시네. 마당으로 마중 나오는 모습이 꼭 은발머리의 서양 인형 같다. 입을 귀에 걸고 반갑게 웃으며 걸어 나오신다.
이번 휴가는 모두 번개팅의 연속이다. 그러기에 더 반가운 이들...
바람
문득 만나는 이여
소리 소문 없이 오는 이여
놀라움에 더 반가운
약속도 없이 오는 이여
온다간다 말도 없어
마음을 비웠더니
밉도록 보고 싶어
밉도록 잊었더니
어디로 불어가다
창문을 두드리나
놀라움에 더 설렌
바람 같은 이여
육촌누님 서재에서 한 구절 생각해둔 글을 되뇌어보고, 정다운 사진도 찍다보니 반가운 정담에 밀려 예정된 도착시간이 어려워진 일행. 재차 길을 나섰다.
어차피 바람같이 떠나온 일탈. 늦으면 어떠리. 목적은 간데없고 오고가는 시간이 마냥 즐거운 여행이여, 그 넉넉한 마음에 일행은 포항 죽도시장에 도착했다. 시장의 분위기는 비릿한 어전 내음과 왁자지껄한 소음, 사람 사는 내음이 난다는 새 아지매 말씀
“이게 좋은 게래, 이게 좋은 게래” 연신 나를 안도시키신다.
항포의 분위기는 산촌에서 온 우리들을 사정없이 자맥질시킨다. 횟집에서 횟감을 뜨고 식당에 앉은 은빛모시적삼의 양반들, 그 앉으신 모습들은 세월에의 항거일까. 어떻게 이분들이 포항 어시장에 앉아있는가? 순간 이동된 그분들의 모습에서 한때 싱그러운 여름지느러미를 봤다.
그날 밤 돌아오는 길에 새 아지매는 연신 나를 안도시키시고 엄마는 걱정이시다. 출발할 때 잔뜩 믿어둔 네비속 아가씨가 변심했다. 어느 깊은 골짜기로 우리 일행을 자꾸 끌고 가는 아가씨. 여우에 홀린 듯 깊은 산중에 우리를 두고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 경상북부의 오지 태백준령의 밤길은 무섭게 깊어만 갔다.
그날 일행은 밤 11시를 넘어 고향에 도착했다. 무사귀환에 집이 반갑다.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계획 없이 출발했던 여심의 민란은 참으로 싱그럽고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