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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두 가지 조건 3-1
박현 선생님 이야기 마당
입력: 2025년 9월 8일(월)/ 녹취 서해진
Two Conditions - 이족보행(二足步行)과 언어 3-1
(업로드 일정이 늦어도 너무 늦었습니다. 선생님의 세 번째 시간을 나누어 그 1부를 올립니다.)
몸과 언어 이야기
첫 번째 시간도 그랬고, 두 번째 시간도 그랬고 앞으로 여덟 번째까지 계속 그럴 건데요. 앞에 일정 부분은 언어가 아닌 사람의 몸과 관련된 부분을 이야기하고 이어갑니다.
지난번 시간에는 그랬죠. 사람의 삶이 감각이나 영성이 아니라, 그 중간에 있는 지성과 이성의 개울을 건너고 있는 단계라고요. 감각이라 하더라도 엄밀하게는 우리가 이성적 지성적으로 인지할 수 있고 해석 가능한 영역 속에서의 감각이에요. 그래서 그걸 감성이라고 표현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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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도 왜 아픈지 어떻게 아픈지 이해되는 범위 내에서 하는 거죠. 우리의 시대에서 감각에 대한 것은 분석이에요. 분석되지 않는 감각은 신뢰가 없는 감각이에요.
예를 들어서 올해 저는 이상하게 땀을 덜 흘려요. 평년 같으면 제가 29도 되면 땀이 나요. 그리고 걸어 다닌다는 전제하에서는 27도만 해도 땀이 나요. 그런데 올해는 33도까지 갔는데 땀이 잘 안 나요.
이것 자체를 해석할 수도 있겠죠. 저는 해석을 그렇게 해요. 매년 매년 사람의 몸은 그 해에 다가올 상황을 미리 자각하고 감각해서, 그 감각에 맞춰서 자기 몸을 세팅을 하거든요. 예를 들어서 작년에 26도나 27도에서 걸어 다니면 땀을 흘렸고, 29도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는 그런 상황이었다면, 작년에는 그 정도 되면 견딜 수 있는 정도로 세팅돼 있는 데서 견딜 수 있는 더위가 온다는 거죠.
올해는 그보다는 더위가 더 심할 것 같으니까 아예 제 몸 자체가 감각한 거죠. 감각해서 세팅을 더 높은 데로 맞춰 놓은 거죠. 그러니까 작년에 37도 올라갔고 올해는 41도 간다고 치면, 작년보다는 3, 4도 높은 데서 땀을 흘리기 시작하는 걸로 세팅이 되는 거죠.
그런데 이것 자체는 증명이 안 돼 있잖아요. 그냥 제가 감각적으로, 감성적으로 얘기를 했지 증명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우리 사회에서는 이성과 지성으로 분석되지 않는 감각이니까 그렇게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아요.
여러 가지 원인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다른 현상을 이렇게 설명해 보죠. 돔이라는 이름을 가진 생선이 있어요. 돔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사실은 도미 계열이 아니고 우럭 볼락 계통의 생선이죠. 걔들은 왜 타고나면서 생선인지, 달리 붙여 놓은 이름이 없으니까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우리가 생선이라고 그러면 살아 돌아다니는 개념이 아니라 아예 우리 먹이처럼 붙여 놓은 면이 좀 있기 때문인데요.
그 생선 중에서 ‘돗돔’이라는 게 있어요. 돗돔의 뜻을 아시겠죠? 돔은 원래 입이 그렇게 크진 않아요. 오히려 돔의 특징은 비늘이 날카롭죠. 그런데 돗돔은 우럭처럼 머리가 커요. 머리가 절반이죠. 돗돔의 ‘돗’은 돼지의 돗이에요. 그러니까 ‘돼지 돔’이라는 이야기예요. 왜? 엄청 뚱뚱하고 무거워요. 머리도 엄청 커요. 길이가 길면 2m까지 돼요. 무게는 200kg를 넘어가기도 해요. 그러니까 돼지 돔이 맞죠. 엄연하게 보면 돼지 우럭이죠. 갈루파 계통의 생선이니까.
이 친구들은 한국에서는 기후 관계상 거의 안 잡혀요. 어쩌다가 로또처럼 잡혀요. 그런데 요즘 부산 앞바다에서 트롤링 낚시를 하거나 아니면 굵은 낚싯대로 배 낚시를 하면 막 잡힌대요. 이게 뭔 일이냐고 그러는데, 사람들은 이런 얘기도 하는 거예요. 이걸 기후 변화로 말미암은 것으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 친구는 참고로 심해어예요. 깊은 바다에 살아요. 일본 쪽에 살던 애들인데 날씨 변화로 올라왔다는 거죠. 이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우리 이성의 분석 틀 안에 있는 영역이에요. 그렇게 설명하면 신뢰도가 생겨요.
그런데 이렇게 얘기해 봐요. ‘일본이 진짜 지진 나려나 보다!’ 그래서 ‘애들이 도망 왔나 봐!’ 쥐가 도망을 오고 뱀이 도망을 오듯이! 그러면 여기에는 신뢰가 없어져요. 사실 신뢰가 없는 이야기가 맞는지 신뢰 있게 지성적으로 이성적으로 설명한 것이 맞는지 알 수가 없죠.
어쨌든 우리는 그런 지성의 범위 내에서 다른 세상을 생각하고, 우리 속에 있는 동물적인 감각도 그 범위 내에서 해석을 해요. 그게 이른바 감성 우리의 지성이라고 하는데, 사실 크게 보면 지성의 틀 안에 다 있는 거죠.
미래의 세계조차도, SF적인 세계조차도 또는 우리의 죽음 이후의 세계조차도 우리의 지성의 범위 내에서 이야기를 하면 설득력이 있어요. 그렇지 않고 종교적 영역에서 얘기하면 근거가 없다고 얘기를 해요.
그래서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지성화 돼 가면서, 감성 지성 영성이라는 3대 성격 중에서 세 번째 것이 사라지고 있어요. 영성이라는 표현을 거의 안 써요.
(예를 들어서) 누가 아파서 왔어요? 갑자기 실실 웃다가 화내다가 이상해져서 왔어요. 정신 분석하러 왔겠죠. 그런데 정신 심리 상담을 하거나 의학적으로 신경 내외과적인 의미에서 설명을 하면은 이건 치료예요. 심지어 의료보험 혜택도 적용돼요. 그런데 종교적인 영역으로 가서 치료를 받으려고 갔어요. 내가 뭐 빙의 됐나! 어디 저기 저 뭐 구마술이라도 행해야 되나! 이건 근거 없는 미신이에요. 하지만 현실은 어느 것이 맞는지 몰라요.
지성이 발전하는 배경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지성적 영역 속에서 분석의 틀 속에 들어온 내용들, 그 속에서만 근거를 갖고 신뢰하며 살아요. 이게 우리의 지성이에요. 이제 지성이 발전했으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아오잖아요.
그러면 지성은 어떻게 발전하는가? 지성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알아야 하고 또는 그것을 해야 지성이 발전해 왔을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사회가 조금 더 조직되고 조금 더 분석의 틀이 오밀조밀 해지고, 분석의 영역이 넓어지고, 그 분석을 믿는 사람들의 범위 또는 밀도가 더 짜임새가 있어지고, 그래서 이렇게 지성이 발달한다고 치면! 지성은 어떻게 스스로 발전했는가?
지성의 발전은 첫 번째 집착이 있어야 해요. 집착이 없는, 집착으로 무장이 안 된 지성은 결코 발전하지 않아요. 집착이라는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집착을 버려라! 그런데 안 버려지잖아요. 왜? 집착은 두 이름을 갖고 있는 거예요.
아까 얘기했지만 비현실적이고 비과학적이라고 불리는 영역에서 갑자기 구마술을 받아요. 그럴 때 기독교에서는 이런 얘기가 나오죠. “악마의 이름을 불러주면 악마가 갑자기 힘이 없어진다”는 얘기가 있죠. 그 얘기는 이런 거예요. “니가 니 속에 있는 것의 정체를 아는 순간 반은 이긴 것”이라는 얘기예요.
그런데 집착도 그냥 집착이라고 그렇지만 꽉 잡고 있는 거니까 이름이 아닌 거예요. 집착을 더 들어가 보면 무엇이 집착일까? 집착은 왜 집착될까? 집착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저도 지성적 이성적인 영역에서 지금 (가급적) 설명을 합니다.
집착의 뿌리의 하나는 애정이에요. 애착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수 있겠죠. 집착(執着)에 착(着)자가 나오니까요. 애정은 그냥 아낌이죠. 누군가가 나무에 매달려 있어요. 그 나무 위에는 자기가 익숙하게 걸어 다니던 그 마당이 있어요. 그런데 떨어지면 다른 데죠.
근데 사실 그 누군가가 멀리서 보니까 그가 매달려 있는데 그의 발로부터 다음 바닥까지는 1m도 안 돼요. 떨어져도 안 다쳐요. 근데 매달려 있어요. 왜일까요? 위에만 올라가려고 위의 마당을 못 놓는 거죠.
이게 애착이죠. 근데 또 한 가지 집착이 애착만 갖고는 집착이 이렇게 굴러가질 않아요.
공포에 밑에 1m밖에 안 되는데 사실 남이 볼 때 1m밖에 안 되는데 자기는 엄청난 공포를 느끼는 거예요.
무언가 새로운 이동이 일어날 때에 대한 공포, 그 공포가 한편으로는 애착을 키우고 애착이 공포를 더 크게 키우는 거죠. 두 개가 상호작용하면서 집착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한테 ‘공포가 있구나!’ ‘새로운 것에 대한 공포가 있구나!’ 하는 순간, 그 공포라는 정체를 알아버리면 집착을 많이 줄일 수가 있죠.
내가 어디 매달려서 그렇구나! 매달린 걸 놓으면 집착은 많이 줄어들 수 있죠. 그런데 집착이라는 이름 자체만 갖고는 벗어날 수 없다는 거죠. 집착에 두 기둥이 있다는 것! 하나는 애정! 하나는 공포!
집착의 이름이 되는 공포와 애정
그러다 보니까 불교 <반야심경> 같은 데는 이런 얘기도 해요. “어찌어찌 하면 공포가 없어지고” 하는데, 공포가 이름인 거예요. 착심(着心)의 이름이 공포와 애정인 거예요. 그러니까 공포와 애정이라는 걸 아는 순간 집착에서 이렇게 한 시름 놓을 수 있는 거예요. 한 손을 놓을 수 있는 일이죠.
그렇게 집착이 없으면 지성은 발전하지 않아요. 그 다음에 욕심이 없으면 지성은 발전하지 않아요. 욕심이 있어야 지성이 발전해요. 우리가 논리적으로 구성되는 지성의 기본적인 논리적 구조는 두 가지입니다. 논리가 발전하는 구조는요. 또는 혼선 오는 것도 마찬가지인데요. 하나는 귀납이에요. 귀납은 욕심 없이 쌓일 수가 없어요. 욕심을 내야 귀납을 해서 계속 쌓아요.
케이스, 케이스, 그런 수많은 케이스를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또 욕심이죠. 그 욕심이 없으면 기본적으로 지성은 발전하지 않아요. 욕심을 없애자! 욕심을 없애자! 안 없어지거든요. 욕심 그 안에 있는, 진짜 욕심을 구성하는 존재의 이름을 못 불러준 거죠.
욕심의 이름이 되는 무기력과 고독감
욕심의 이름은 뭐냐? 하나는 무기력증이에요. 무기력증을 싫어하는 거죠. 그러니까 무기력을 혐오하는 거예요. 무기력을 싫어하는 순간 힘을 가져야 되겠죠. 그게 현실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느냐?
예를 들어 똑같은 분인데 어느 날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돈이 하나도 없어요. 무기력해요. 근데 어느 날 (돈이) 있어요. 똑같은 사람인데 주머니에 뭐가 들었냐 안 들었냐에 따라 가지고 갑자기 자신감이 달라져요. 그래서 뭔가 가지려고 하는 것 자체가 무기력증이 싫어서, 무기력하기 싫어서 그래요. 그 무기력을 혐오하는 거예요. 무기력을 혐오하니까, 이 욕심이 유지가 되는 거예요.
또 하나는 고독감을 싫어하는 거예요. 고독을 싫어하는 것이 욕심을 만들어요. 싯다르타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 걸으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하면서 고독의 당연함을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독이 싫으니까 가족도 있어야겠고 친구도 있어야 해요. 하다못해 반려동물이라도 있어야겠고, 하다못해 물건이라도 있어야겠고, 하다못해 돈이라도 있어야 겠다는 거예요. 고독할 수 없는 거예요. 아무것도 갖지 않고 있는 무소유의 존재가 혐오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무기력과 고독이죠. 그 혐오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그게 욕심의 뿌리에요. 그러니까 무기력증에 대한 자기 혐오증과 무기력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부담이 없다면, 고독함에 대해서 아무런 부담이 없다면 욕심은 갑자기 줄어들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도 고독감을 더 느끼는 분도 있잖아요. 그렇게 고독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무기력감을 더 느낄 수도 있죠. 무기력감을 더 느끼는 말년과 고독감을 더 느끼는 노년은 더 욕심스러워져요.
더 욕심스러워져서 더 오래 살고 싶어지고, 더 뭘 가지려고, 자식 놈들 안 오면 더 화나고 그래요. 주머니에 칠성사이다 사 먹을 돈이 없으면 더 맥이 없어지고 이렇게 돼요. 그런 욕심에 의해서 외롭지 않기 위해서 케이스가 늘어나요. 그 케이스가 스스로 힘을 가지기 위해서 케이스가 늘어나야 돼요.
그것이 귀납의 체계를 만들고, 우리의 지성은 그 귀납을 1차 하나의 바탕으로 해요. 그런다고 해서 지성이 발전할 수 있는 모든 요소가 쌓인 건 아니어요. 지성이 쌓이려면 그렇게 집착도 해야 되고 욕심도 내야 되지만 의심이 있어야 돼요. 지성은 의심에 의해서 또 발전해요. 그건 너무도 잘 느끼실 거예요.
의심의 이름이 되는 어두움과 주견
자꾸 의심하라고 하죠. 물론 어떤 종류의 의심인가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요. 의심은 왜 있을까요? 의심도 이름 자체가 이름이 아니어요. 그냥 하고 있는 행위예요. 욕심처럼 하고 있는 일이고, 집착처럼 하고 있는 일이어요.
그것의 진짜 뿌리가 되는 하나를 자기가 못 봐서 그래요. 제대로 보면, 제대로 봤으면, 앞이 환 하면 설명하지 않아요. 그냥 이야기하면 돼요. 서술하면 돼요. 술이부작(述而不作)하면 돼요. 지어내서 굳이 짜 맞춰서 얘기하지 않아도 돼요. 앞이 환하게 보이면 보이는 대로 그냥 받아들이고 이야기하면 돼요.
그런데 안 보이는 거예요. 안 보이는데 살아야 돼요. 안 보이는데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야 되니까 어떻게 하느냐? 자기 견해가 있어야 돼요. 주견이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내가 받아들이지 못한 것과 주견은 서로 물리는 거예요.
알면 주견이라는 게 없어요. 그냥 본 대로 얘기하면 되지, 주견이 뭐 필요해요? 모르니까 주견이 필요해요. 어두우니까 주견이 필요한데 이 주견이 엄청난 건 줄 알고 잡아요. 이 두 개가 결국은 그 중에 주견이 결국은 정말 귀납이 돼서 연역의 논리 틀을 만드는 게 아니라 어쩌면 그와 무관하게 그 주견이 연역이에요. 엄밀하게 보면 귀납해봐야 다 욕심에 의해 쌓인 일부예요. 거기에서 연역이 나와 봐야 그 다 주견이어요. 주견이 또 귀납을 만들어요.
저도 어떤 얘기를 할 때 드리는 이야기가 주견과 견해가 돼서 그쪽으로 유도할까 봐 제일 무서워요. 제일 무서운 게 그것이어요.
아무튼 그 세 가지, 의심과 욕심과 집착 그리고 그 밑에 있는 것들, 즉 집착 밑에 있는 애정과 공포 그리고 무기력과 고독 그리고 어둠과 주견 이런 것들이 물리면서 지성은 발전해요. 그 세 가지 중에 하나라도 빠지기 시작하면 개인사적인 면에서도 시대사적인 면에서도 지성은 덜 발전해요.
개인적인 면을 떠나서 중세에 의심 못하게 강요합니다. 다크 에이지라고 불리는 유럽의 중세에서 의심하면 마녀가 됩니다. 죽습니다. 욕심은 통제당합니다. 한 가지! 이 현실에 대해서 집착만 할 수 있게 허용합니다.
지성의 시대별 특성
세 가지 중에서 하나만 허용됩니다. 그래서 시대적으로 의심 못하게 하고 욕심 못 내게 해요. 욕심. 물론 전체적으로 통제는 하지 않았죠. 애는 더 놓든 말든, 일은 더 하든 말든 통제는 하지 않았죠. 그러한 시대에서 지성의 발전은 멈춰요. 중세가 지성보다는 비지성으로 반지성으로 물들어진 이유예요. 그러니까 그 세 가지 요소 중에서 하나만 멈춰도 지성은 많이 사라져요.
현대에 와서는 세 가지가 왕성합니다. 지성은 산업혁명 이후로 엄청나게 발전해 옵니다. 놀라운 속도의 발전이 인류의 2천 년 가운데 200년, 10분의 1에 불과한 200년이 훨씬 더 많은 변화를 일으킬 만큼 지성의 발전이 이루어집니다.
세 가지가 왕성했기 때문이죠. 세 가지 중에 하나만 통제를 당해도, 아니 사라져도 그래서 그렇게 하다 보면, 종교에서 말하는 교리대로 살았다면 욕심이 줄어들어요. 집착이 덜해요. 그리고 자기 견해보다는 밝은 이의 말을 믿어요.
이 사람들은 지성을 발전시키지 않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를 하죠. “종교인과 종교학자는 다르다!” 종교학자는 의심하는 사람이고 더 파고들어 집착하는 사람이고, 거기에 비해서 종교인들은 지성을 멈추는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지성이라는 것은 긍정성, 부정성을 떠나서 그 세 가지의 행위의 6가지의 이름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그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절반은 이긴 거예요. 그래서 그런 것이 아마 상징적으로 귀신SF, 구마SF 같은 데서 그 이름을 불러주면, 가령 ‘몰로!’ 그러면 ‘몰로’가 그냥 바로 빠지는 거예요. 이름을 부르면 힘이 빠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긍정적인 것도 이름을 불러줘야 되지만은 부정적인 것도 그래요.
아무튼 지성으로 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몸에서 세 가지 측면을 다 갖고 있어요. 여전히 감각해요. 그런데 지성의 영역에 의해서 갇혀 있죠. 그래서 지성이 발전되면 발전될수록 감각은 해석돼야 돼요. 해석되지 못하는 감각은 일단 고개를 갸웃거리고 누구도 도와줄 수 없고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감각이 되어버려요.
예를 들어서 심리학에서 정신상담학이 계속 발전하잖아요. 논리적으로 그러면 분석할 게 많아져요. 그런데 그 영역에 안 들어오잖아요. (영역에 안 들어오는) 그런 증상을 앓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인정이 안 되어요.
심지어 “저는 막 이상해요. 꿈만 꾸면 막 이래요.” 이에 대해 밝혀 놓은 게 있어요. “현실적으로 이러한 과거가 있고 이러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그런 꿈을 꾸게 됩니다.” 이건 틀이죠. 그런데 이 틀을 가지고 치료했는데 안 돼요. 더 심해져요. 그래서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의 말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아픈 게 아닙니다. 나를 괴롭히려고 찾아온 겁니다.” 서로 이렇게 돼요.
정신과 이름 하에 지성과 이성을 통해서 우리 틀을 분해하더라도 분석하더라도 있기는 있어요. 단 인정받지 못한 채 눌려 있는 거죠. 영성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이성과 지성의 영역 가운데, 현대 사회에 오면서 감각의 영역은 상당히 해석하기 시작했어요. 기쁨도 슬픔도 노여움도 화냄도 해석하기 시작했어요
해석하지 못한 부분도 있고, 해석하지 못한 부분이 훨씬 더 많을 수 있지만, 비율상 영성이라는 영역에서는 아직 상당한 부분 지성의 잣대가 안 가 있어요. 지성의 분석 대상조차 아니어요. 분명히 그래요. 그러니까 영성이라는 건 마침내 이름마저 잃어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있어요. 그게 사람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이족(二足)으로 선 이상, 그렇게 감각해서 그렇게 분석해서 자기를 발전시켜 간다는 거지요. 그걸 발전시키는 데 가장 필요한 도구가 있었던 거예요. 그 필요한 도구가 결국은 몸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 소리
지난 번에 ‘아, 어, 오, 우, 으, 이’에 대한 소리를 했어요. 인터넷에 ‘지렁이’를 검색하면 지렁이가 이렇게 (길게 한 선으로) 돼 있잖아요. 지렁이가 활동이 왕성할 때 또는 활동이 왕성하기 좋은 조건에 놓일 때, 지렁이 가운데 무언가 토막이 보여요. 시골에 사시는 분들은 보셨죠?
그런데 무언가 조건이 안 좋으면 같은 지렁이 인데 이 토막 부위가 불분명해지기 시작해요. 약간 오돌토돌한 건 남아 있는데 색깔마저 바뀌고 그런 게 사라져요. 지렁이는 처음에 나와 가지고 수분이 있는 조건에서 꿈틀꿈틀거릴 때는 전체 지렁이 중간 부분이 색깔이 약간 옅고, 팽팽해요. 그런데 마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쪼글쪼글쪼글해지더니 색깔은 비슷해지고 자세히 봐야만 보일 정도로 남아요.
그게 뭐냐? 점이었던 시절의 지렁이에요. 사람이 점이었던 시절에는 ‘배’여요. 배 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 점이었던 시절의 감각은 사람에게서 소리로도 반영이 돼요. 자기 몸에서 뭔가 반영을 해줘야 처음에 언어를 만들 수 있어요. 안 그러면 언어를 만들 수가 없어요. 태초의 소리는 하늘에 있지만 하늘은 사람 안에 있어요.
그런데 그 태초의 소리 속에서 결국 소리가 분화되면서, 정보가 되고 지성이 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지죠. 그 첫 소리가 ‘아’와 ‘어’였던 거예요. 이게 점으로 탁 에너지를 발산하면 ‘아’예요. 그래서 ’아’ 하면 다 느낀다고 그랬잖아요. 해봤잖아요. ‘어’도 해봤어요. 그건 점의 소리예요. 점이 지렁이가 돼요.
제가 늘 비유하잖아요. ‘아구 아구’예요. 아구라고 그래요. 입 구(口)자 한자어 같지만 다른 말로도 그냥 아구예요. 아구에 해당되는 아구는 투입하는 데죠. (지렁이처럼) 늘어놓았을 때 투입하는 데가 ‘아구’예요. 반대로 내보내는 데가 ‘아고’예요. 오늘날 ‘아고’라는 말은 많이 바뀌었어요. 오줌이 나오는 곳이 아고예요. 똥이 나오는 곳이 아고가 아니에요. 똥이 나오는 데는 똥꼬예요.
몸의 진화와 소리의 대응
둘은 같은 건데 우리가 진화상에서 있었을 때의 특징으로 보면 먼저 물을 먹고 물을 내뱉는 거예요. 고체를 먹고 고체를 내뱉는 단계는 나중의 단계예요. 지렁이 단계에서 어느 날 변환되어 지금은 똥이 연결됐죠. 그러면서 오히려 주선(오줌이 나오는 곳)이 지선이 되고, 지선(똥이 나오는 곳)이 주선이 됐어요. 그게 진화고 변화죠. 아무튼 그 끝에서 나오는 소리는 ‘오’ 였죠. ‘오!’ 하는 순간, 우리는 항문과 오줌보에서 배출을 느끼게 되죠.
그러면 ‘우’를 볼까요. 아이가 태어났을 때 처음부터 밥 먹이면 어떻게 되죠? 못 먹죠. 먹이는 부모는 ‘똘갱이’죠. 우리가 돈 사람을 ‘똘갱이’라고 그러죠. 또라이라는 말은 이상한 말이어요. 어디 정체 불명의 말이어요. 우리 말로는 똘갱이라고 그러잖아요.
태어나면서 바로 이유식을 먹을 수도 없죠. 이유식(離乳食)이 뭔 뜻이에요? 젖을 떼는 음식이잖아요. 그러면 젖부터 먹어야 된다는 얘기이죠. 젖 아니면 물을 먹어야죠. 그러면 젖 아니면 물을 먹어야 되는 이유가 뭘 까요? 처음에는 식도가 다 안 열려서 그러는 거예요. 물밖에 안 들어가요. 점점 훈련이 되고 먹고 하면서 식도가 조금 넓어져요.
그렇게 조금 넓어지면 이유식을 먹을 수 있어요. 아이가 일어설 때와 이유식을 먹을 때는 거의 비슷해요. 요즘 아이가 조금씩은 다를 수 있어도 큰 차이는 없어요. 직립을 한 순간부터 이유식을 먹을 때가 됐다는 거예요. 만일 직립을 못 했다면 위는 아직 안 열려 있어요. 부분적으로 열릴 수는 있는데 직립을 하는 순간 위가 열리기 시작해요.
이유식은 과도기 음식인데요. 이유식은 그전에도(직립이전에도) 묽으면 먹을 수 있지만 이유식다운 이유식 또는 음식다운 음식에 접근하는 건 직립해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는 (식도에서 들어오는) 내림의 소리예요. 소리 중에서 깔대기 모양이 있어요. ‘우’ 하는 소리는 깔대기 모양(어깨 견정에서 명치 쪽으로 내리는 모양)으로, 실제로 ‘우’를 하는 순간 신체는 (식도 부위)가 울어요. 그래서 우그러지는 것도 그런 거예요. 그렇게 돼야만 성대도 울 수 있어요. 식도가 다 늘어져 있잖아요. 울 때 소리를 낼 수가 없어요. 멀쩡한 사람도 ‘우’ 소리를 내려면 아니 소리 자체를 내려면, 이 울대가 깔때기처럼 돼 있어야 울어요. 그래서 나팔처럼 무언가 모여야 돼요.
‘이’와 ‘으’
‘이’와 ‘으’도 했죠. 이 지렁이가 생겼는데 지렁이가 점점 발전하네요. 뭘 주렁주렁 달기 시작해요. 부속품을 어떻게 해요? 짝대기(뼈대) 몇 개 갖다 이렇게 해가지고 (장기들을) 걸어 놓아야 하죠. 그냥 걸어 놓으면 비 맞잖아요. 그러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짝대기에다가 마대(피부) 하나 씌워놓는 거예요. 밖에서는 물 안 들어오고 안에서는 물 빠지는 마대 하나 씌워놓는 거예요. 삼투압 되는 피부를 씌워놓는 거죠. 그렇게 뼈라는 것이 생기는 거죠.
그러면 이제 면이 된 거예요. 공간이 된 거예요. 면이 내는 양의 소리 즉 내보내는 소리와 그 다음에 음의 소리로 꺼지는 소리가 있겠죠. 그게 ‘이’와 ‘으’이죠. 해 보셨죠? ‘이’ 하면 면(面)이 다 서요. 사실은 등뼈와 허리뼈만 선다고 말씀드렸지만, 사실은 다 서죠.
다시 한번만 더 해봅시다. 이렇게 (허리를 숙이면서) ‘으’를 해보시면 어떻죠? 너무 자연스럽죠. 그러면서 일어나 보시죠. 천천히 같은 속도로요. 같은 ‘으’를 하면서요. 잘 안 되죠. 아니 ‘으’ 자체가 잘 안 되죠?
그런데 (허리를 숙인) 상태에서 ‘이’를 하면, ‘이’가 안 되죠? 끊겨요. 소리 자체가 그 면에 작용해서 다르게 나오는 거예요. 여기까지는 뭐냐? 크게 보면, 자기 몸 내부의 반응이 에너지화 돼서 나오는 소리예요.
‘나’와 ‘너’ 그리고 ‘노’와 ‘누’
배 그리고 (배)아래와 (머리)위의 끝으로 선분, 이것이 구성하는 전체로서 면! 그러니까 점과 선과 면이 내부적인 차원에서 내는 소리예요. 그런데 사람이 그러고 살 수 없잖아요. 어딘가와 접촉해야 되잖아요. 외부라고 불릴 수 있는 영역과 맞닿아 있어야만 되거든요. 그렇게 맞닿았을 때 감각이 발생할 수밖에 없잖아요. 여러 가지 공기와 맞닿고, 사람이랑 맞닿고, 다른 사물이랑도 맞닿아야 되잖아요.
맞닿았을 때 그 맞닿음에 대한 기본 소리가 있는 거죠. 그게 자음으로 치면 ‘니은’이에요. ‘ㄴ’(니은)이 일단 점으로서 먼저 되면 ‘나’와 ‘너’가 돼요. ‘나’와 ‘너’! ‘나’와 ‘너’라는 소리를 하는 순간에 사람의 감각인 거죠. 지성적으로 분석이 됐든 안 됐든 간에, 사람에게 감각은 내부와 외부의 연결선에서 감각이라는 게 있는 거잖아요.
물론 내부도 감각이 있어요. 내부도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부딪힐 때, 또 운동하면서 감각이 있어요. 사람의 어떤 신체 부위는 암에 걸려도 죽을 때까지 무감각하다고 하잖아요. 어떤 건 초기부터 감각이 있다고 하잖아요. 왜 그럴까? 폐는 어쩌고저쩌고 그렇죠.
“간은 소리 없는 병, 위는 소리 있는 병”이라고 그러잖아요. 그건 위가 다른 곳과 부딪힘이 많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소리 있는 병이 돼요. 다른 것과 부딪힘이 감각적으로 적으면 소리 없는 병이 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소리 있는 병이 허파의 특징이냐 간의 특징이냐가 아니라, 간이 다른 것과 부딪히지 않고 자기 역할만 하면서 자기 자리만 지키고 있기 때문에 감각이 안 오거나 늦게 오는 거예요. 언제 오냐면, 간이 자기가 감당 못하고 다른 것과 부딪혀서 특징을 드러낼 때는 안 올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오면 말기라고 하는 거죠.
아무튼 처음에는 점으로 와요. 감각이 제일 처음오는 ‘나’와 ‘너’는 머리에서 와요. ‘나’ 하는 순간 머리 어딘가에서 뿔이 서요. 쌍 안테나가 서요. ‘나’ 하는 순간에 그렇죠? 그것도 살짝 앞쪽, 너무 앞쪽이 아닌 그 어디인데, 그곳이 어디냐면 아이들이 처음 태어났을 때 (머리 위의) 정문이 안 닫히죠. 그런데 자라면서 그 정문이 닫혔죠. ‘나’ 소리를 하면 정문이 닫힌 각도의 옆에서 와요.
그래서 ‘나’ 하는 순간 어디선가부터 두 개의 안테나가 오는데, 표면에서 오는 게 아니라 안 어딘가에서 오는데요. 정문이 닫힌 자리가 사람마다 조금 다를 수 있잖아요. 닫힌 자리 그 옆에서 와요. 그러면 ‘너’는? 뒤에서 와요. 안테나가 이렇게 섰다가 눕는 거예요. 가령, 짐승들이 뿔이 나는 자리가 ‘나’ 소리 부위라면, ‘너’ 소리는 뿔이 났다가 뿔이 꺼지는 부위예요.
뒤로 완벽하게 내려가지 않고 이렇게 45도 정도 내려가기 때문에, ‘너’ 할 때 꺼지는 뒤쪽에서 느낌이 나죠. 그래서 ‘나’ 할 때는 뿔 느낌이고, ‘너’ 하면 불이 꺼지는 느낌이에요. 그 다음에 이제 ‘노’와 ‘누’가 있겠죠? ‘노’는 어디서 오느냐? 바깥을 향해서 배출되는 거죠. 그러니까 내부가 아니어요. ‘노’를 하는 순간에 피부나 등으로 느낌이 있어요. ‘누’를 하는 순간에 약간 그 외부적 감각을 쓰러뜨리고 낮춰요. ‘드러놉지’ 못해요. 드러누워야 하죠. ‘누르는’ 것이지, ‘노르는’ 것이 아니어요. 다시 말해서 그런 정보를 느꼈다는 거죠.
위 아래와 아와 우
사람이 살면서 엄밀하게 아래 위가 없어요. 우리는 점에서 선으로 발전해 갔고, 선에서 면으로 발전해 갔잖아요. 따라서 중심과 가장자리가 있을 뿐이지 아래 위는 사실 없어요. 아래 위는 우리가 걸으면서 생긴 우리의 임의적인 지성이에요.
그렇지만 언어를 만들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결국 ‘아’는 여기 (배에) 있어요. 이게 아래가 되는 거예요. 현실적으로 위(목 부위)에 ‘우’가 있어요. 이게 ‘우’가 되고, 의미 전성도 그렇게 되어 가요.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우’라고 해요.
방향을 가리키며 설명하는데 여기 몸에서 느끼는 것으로, 즉 위를 가리키면서 ‘우’로 하는 거죠. 여기 (아래에) 있는 것을 설명할 때 아래가 되는 거죠. 그래서 어느 나라 언어든, 라틴어가 됐든 희랍어가 됐든 드라비드어가 됐든 뭐가 됐든 간에, ‘’아 자체를 갖고 ‘위’로 하는 데는 없어요. ‘우’를 가지고 전부 다 위를 말해요.
만주어를 볼까요? 우리는 ‘별’이라고 그러는데, 이 모음을 보면 뭔가 음운변화가 일어났다는 느낌이 오죠. 처음부터 ‘여’였을 가능성은 적어요. 그렇죠? 제가 물론 말씀은 드렸어요. 이 세상에 중모음은 없다고요. 우리가 우리의 언어를 통해서 분석하니 중모음이죠. 영어로는 wi, 우리 말로는 ‘ㅟ’가 되죠. 여기 ‘ㅟ’를 두 개의 모음이 있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우리가 표기해서 두 개의 모음이 있는 것이지 그 소리는 자체로서 하나예요. 우리가 분석해서 설명하자니 중모음이지 세상에 중모음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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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글을 만들어 놓고 라틴어를 만들어 놨으니, 이 (모음) 두 개가 붙으니까 중모음이라 하는 것이고, 이건 우리의 표현이지 세상사에는 다 원음이에요. 원음을 우리는 중모음 단모음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우’와 ‘이’를 해서 ‘위’가 되는 게 아니고, ‘위’는 그냥 위로서 존재해요. 우리가 한글을 배우다 보니까 ‘우’와 ‘이’가 붙어서 ‘위’가 됐다고 착각을 자꾸 해요. 시험도 그렇게 봐요. 이름하여 중모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이름하여 중모음이지 실제 중모음은 없다는 것!
음소(音素)와 어소(語素)와 어휘의 관계식
그리고 이제 이런 것을 뭐라고 하느냐 음소(音素)라고 하죠. 어소라는 말은 영어에 없어요. 아무리 뒤져봐도 없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음소만 갖고 어소를 잠깐 만들었다가 바로 어휘를 만들잖아요. 음소를 이용해서 바로 어휘를 만들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음소밖에 없어요.
오존(O3)에 대해서 설명이 없어요. 그러니까 영어에는 음소라는 말만 있지 어소란 말이 없어요. 우리는 음소를 갖고 어소를 만든 다음에 어소를 갖고 어휘를 만들어요. 한국은 어소란 말이 필요해요. 반대로 일본 사람들에게 음소라는 게 없어요. 그래서 일본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가 언어학을 배우고, 번역하잖아요. 일본 사람들이 볼 때는 어소만 있고 어휘가 있는 거죠. 음소는 없어요. 일본어 ざ 이것을 어떻게 쪼갤 건데요? 쪼갤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음소가 없는 거예요.
그런 일본이 서양 언어학을 받아들여 번역을 하니까 어소가 음소가 된 거예요. 어소라고 그러기도 하고 음소라고 그러기도 하는 거예요. 엄밀하게 말하면 일본에는 어소가 있고 어휘가 있는 거예요. 서양 사람들은 음소가 있고 어휘가 있는 거죠. 중간에 잠시 살짝 생겼다가 바로 어휘로 넘어가는 거예요.
우리는 처음부터 음소와 어소가 같이 존재해요. 음소를 갖고 어소를 만들고, 어소를 갖고 어휘를 만들어야 되는 2단계예요. 일본과 서양은 1단계예요. 우리는 원스톱이고 이들은 논스톱이에요. 다른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음소라는 말과 영어에 존재하지 어소라는 말을 같이 써야만 돼요.
그런데 지금까지는 동양 언어학을 누가 번역해 왔느냐? 전부 일본에서 해왔고 또 2차적으로 누가 해 왔느냐? 상하이 쪽에서 해왔습니다. 옛날 상하이가 굉장히 학문적으로 발전했던 곳입니다. 소위 산업 혁명적 기술도 굉장히 발전했던 데죠.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전 세계에서 가장 고급진 시계는 전부 상하이 아니면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들었어요. 제네바에 만든 시계보다 상하이의 시계가 더 우위에 있기도 했어요. 파텍 필립이 상하이에서 시계를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 명문이 된 거예요. 가장 핵심 라인이 상하이 라인이에요. 영국의 처치스라는 신발도 상하이에서 신발을 만들었기 때문에 더 명문 신발이 된 거예요. 처치스는 지금까지 가장 존중하고 가장 비싼 라인이 상하이 라인이에요. 바닥에 고무는 고무인데 쇠처럼 안 떨어지는 게 있어요.
상하이 사람들도 언어를 번역하죠. 이 상하이 사람들도 어소만 있어요. 음소가 없어요. 부수는 있어요. 하지만 부수는 음소가 아니죠. 부수를 끼워 맞춘다고 소리가 나오지 않잖아요. 뜻을 만들어 뜻이 나오지, 소리는 나오지 않죠. 그러니까 그쪽 사람들도 일본 사람과 처지가 비슷한 거예요. 이 사람들은 부수라는 영역을 가지고 있을 뿐 음소를 갖고 있진 않아요. 그러다 보니까 (서양의) 영향을 받아요. 음소가 있다는 서양의 영향을 받지만, 상하이 사람들은 일본보다는 좀 나았죠. ‘한 쪽은 뜻, 한 쪽은 소리’라는 식으로 이상한 (형성) 회의 문자라는 개념을 왕구규라는 사람이 만들어내요. 그 이전에는 이런 게 없었어요. 그냥 부수만 있는 거예요. “오른쪽에 있는 것은 발음, 왼쪽에 있는 것은 뜻”이라고 하잖아요. 이것은 바로 서양 언어학을 받아들이면서 한자를 새로 분석하는 신중국 과정에서 나온 거예요.
어쨌든 이렇게 되죠. ‘이’는 늘어요. 이렇게 설명해 볼 게요. 젊었을 때는 ‘니’라고 그래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요. 그러면 뭐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니들이’라고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가잖아요. 그러면 ‘느그들이’라고 자기도 모르게 그러죠.
자기가 감각하는 힘이 꺼지니까 ‘니’가 ‘느’로 바뀌어요. ‘니’가 있을 때는 지성적인 자신의 감각이 작용해요. 그런데 ‘느’가 되면 정말 순수 감각 단계로 떨어져요. 느낌으로 가요.
2군의 소리 ‘가’와 ‘다’
앞서 ‘마, 가, 다’도 한 적 있죠. ‘가’가 뭐였죠? 톡 치고 내려간 에너지였죠. 그게 ‘가’예요. ‘가’에서 가락도 오겠죠. 우리 말 ‘같다’라는 말도 여기서 와요.
제가 어소사전을 내면서 늘 고민하고 있는 게 받침을 제외하고 하는 거예요. 왜 받침을 제외하느냐? 받침은 원래 뒤에 다른 어떤 어소가 축약된 거거든요. 그래서 두 개 축약된 언어를 어소로 보면 받침이 들어가야 돼요. 순수하게 어소만 하면 앞에 것만 해야 되죠. 받침 없이 하면 이론적으로는 264개의 어소가 나와요.
그런데 그 중에서 결합하면 발음이 안 되는 게 있어요. 그걸 빼고 나면 200개가 좀 넘어요. 그래서 200여 개 어소라고 그러는 거예요. 문제는 2개의 어소까지 놓고 어소 사전을 내면 받침을 이용해야 되는데 받침을 이용하면, 어소는 200개라고 그랬지만 사전을 쓰면 이 어소가 600개로 늘어나요. 받침 없어도 그래요. 왜냐면 장단이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나라 말이 그렇죠 우리나라 말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기본 어소에 다 있어요. 희랍어가 됐든, 라틴어가 됐든, 어디가 됐든 우리는 지금 안 쓰고 있는 것뿐이어요. 그런데 거기서도 장단이 적용되지 않는 어소들이 있어요. 그럼 400개로 줄어들어요. 그럼 400개를 놓고 400개 단위로 쭉 써 가면 되는데 받침까지 쓰면 이게 무한히 늘어나요. 그래서 단어들을 분석해 놓고도 지금 사전 편집을 제가 못하고 있는 이유예요.
아무튼 이제 여기 ‘가’에서 ‘같다’가 와요. 왜? 이게(팔이) 같은 거예요. ‘같다’의 뿌리는 팔 두 개가 같은 거예요. 물론 중간에 부러져 다를 수는 있어요. 그러나 원래 ‘같다’라는 말은 팔에서부터 오는 말이어요. ‘같지 않다’는 것은 영어로 보면 디퍼런트죠. 디프런트, 다판트, 다르판트죠. 다르 판트가 디퍼런트가 됐어요. 원래 디퍼런트의 원 어근은 ‘디’가 아니고 ‘다’예요.
그러면 ‘같지 않다’의 한국어 동의어가 뭐죠? ‘다르다’인 가요? 부정어가 안 들어가고 그냥 원어로 쓰니까 더 좋아 보이죠. 그런데 뜻이 완전히 달라요. 오늘날은 이 둘이 동의어가 되어 있어요. 하지만 너무너무 다른 말이어요. ‘다르다’는 것과 관련, 제가 평상시에 사람의 삶은 빛과 닻이라고 얘기했어요. 빛과 닻에서 그 ‘다’예요. 뭐냐면, 내가 이렇게 느끼는 것, 눈도 뜨지 않고 이렇게 느끼는 거예요. 가서 딱 그 순간에 느낀 거예요. 그의 체온이 아니라 ‘체감 온(溫)’이에요. 그의 존재로서의 체감 온이에요. 그 누구라도 전부 그의 체감온으로서 구분이 되는 거예요. 존재는 그것(체감온)이 다른 거예요.
그러니까 37.5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다가가는 건 무엇으로 다가가죠? 허벅지로 다가가죠. 다가갔을 때 ‘같고’ ‘같지 않음’이어요. 그게 ‘다르다’예요. ‘다 하다’예요. 사람의 몸은 ‘다를 느끼다’예요. 쉽게 말하면, 그의 ‘다’를 느끼는 게 ‘다르다’예요. 그 모든 개체가 다 다른 거예요.
달라요. 이것을 체온으로 보면 아무리 나눠가지고 0.01도까지 나눠 본들 몇 명이 다르겠어요? 그래서 ‘체감온’이라고 제가 표현하는 거예요. 이 체감온을 느낄 때 이 체감온이 안 맞잖아요. 서로가 다 하는데, 각자가 다 다 하니까 다르다가 되는 거죠. 그런데 이게 서로가 사맞지 아니하면 ‘사맞다’는 말은 또 다르겠죠. 사맞지 않은 건 뭘까요? 그리고 ‘맞다’는 뭐죠? 발을 맞추다에 맞다예요.
의미로 보면 ‘가다’는 손이 움직이는 것이고, 거기에 따라서 발을 맞추는 거예요. 근데 사맞지 않아요. 가는 보폭이나 속도나 이런 게 안 맞는 것이 ‘사’가 안 맞는 거예요. 아무튼 이야기가 더가지만 다르다는 그런 뜻이에요. 근데 이 다른데 각각 다 다 하고 있어요. ‘다’를 하고 있어요.
다를 하고 있는데, 그 ‘다’가 서로 같지 않으면 안 어울리는 거죠. 그러면 싸움 나는 거죠. 으르렁거리는 거죠. 남녀라면 그냥 맨날 싸우는 거죠. 부모 자식이 그래도 싸울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다르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는 능력이에요. 다름을 받아들일 때 현재 식으로 말하면 팍스(pax)가 있고 피스(peace)가 있는 거죠. 그러면 팍스가 뭐죠? 통제이죠. 팍스 아메리카! 이것을 아메리카의 영광이라고 하지만 사실 피스는 어근이 원래 팍스에서 오죠. 팍스는 묶어놓는 거예요. 통제가 눌러놓는 거예요. 팍 때려놓는 거죠. 그래서 이 팍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어울림이 아니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서양어의 평화라는 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는 그 평화가 아니어요. 미국이 가서 이란과 이스라엘을 팍 눌러놓죠. 팍스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게 피스예요. 이란을 설득하고 이스라엘을 설득하고 서로의 ‘다’를 받아들이고 주고받고 하면서 만들어지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예요. 그런데 그런 평화는 아닌 거예요. 뜻이 다 다를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어소가 적용되는 이유가 다른 거죠. 같은 평화라는 말에 대해서 영어는 왜 피스와 팍스로 가고, 중국 한자에는 왜 평화(平和)로 가고, 우리는 다르다로 가고 ‘어울려’와 더불어로 가는데, 이렇게 어소가 왜 다르게 적용될까요? 애초에 접근하는 어소의 뜻이 달랐기 때문이죠.
한자는 자유(自由)라고 그래요. 우리 말로 자유가 뭔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렇죠? 자유라고 그래요. 영어에서는 freedom이라고 그래요. 적용된 어소가 너무 다르죠. 애초에 시작된 기본 어소의 개념이 달랐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는 거예요. freedom은 뭐죠? 가서 세금 안 내는 거잖아요. 뭔가 제약이 없는 게 free에요. 그렇죠? 자유(自由)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예요. 제약에 관련된 외부적 조건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내 자유 의지가 더 중요한 거예요.
어소가 미치는 사회적 영향력
첫 어소를 선택했을 때 선택된 어소가 다르잖아요. 뜻도 다를 수밖에 없는 거죠. 서양 사람들은 조건이 제한적이냐 제한적이지 않냐, 그러면서 제한이 없는 게 free에요. 동양 사람은 제한이 있든 없든 쉽게 말하면 동양 문화는 촌놈 문화라 할 수가 있어요. 서양 문화가 도시 문화라고 한할 수 있죠. 왜냐면 freedom을 하는 사람들이 도시 문화를 만들었고, 동양 문화가 결국은 촌에 눌려 살았잖아요.
오늘날 촌놈과 도시 사람을 어떻게 구분하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막 하는 건 촌놈이죠. 서양 문화에 영향을 안 받았으니까, 내가 똥 누고 싶으면 여기 똥 누고 내가 오줌 누고 싶으면 오줌 누고, 내가 그림 그리고 싶으면 낙서하고 노래 부르고 싶은 노래를 하는 거잖아요. 그 쪽 어소에서 온 거예요. 이 사람들이 도시화를 한 건 아니잖아요.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 사람들이 도시화를 했잖아요.
사람이 도시에 가면은 이건 해야 되는 곳, 하면 안 되는 곳 등으로 구분되잖아요. 조건으로 구분되잖아요. 여기는 오줌 누는 곳, 여기는 그림 그릴 수 있는 곳, 노래 부르면 안 되는 곳 등등이 정해지잖아요. 그러니까 도시문화를 만든 그 사람들의 문화와 어소가 도시를 만들었으니까, 도시 문화는 그렇게 그게 교양이 된 거죠.
(만일 이 상황이) 바뀌었더라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되 서로 안 부딪히게 ‘다’를 인정하고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게 도시 문화가 됐겠죠. 도시가 동양의 문화에 눌렸더라면, 그 사람들의 문화는 할 수 있는 것 하고 못하는 건 못하는 촌 문화로 됐겠죠.
촌 문화와 도시 문화도 어떻게 보면 서로 다른 뜻의 어소로 문명을 발전시켜 온 것에 영향을 받은 거죠. 그 중에서 현실적으로는 산업 혁명을 앞세운 사람들이 도시를 먼저 점령하고 현대 도시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의 것이 교양이 된 거죠.
아무튼 ‘소리’ 얘기로 좀 더 갑니다.(1부 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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