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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사림파의 현실인식과 대응
제 1편 사림파의 동향
1장 조선전기 중앙권력과 향촌세력의 대응을 통한 사림정치의 성립
1.연구목적-조선 초의 정치, 사회사를 중앙세력(훈구파)과 향촌세력간(사림파)의 상호관계 및 그 변천과정 그리고 양 세력간의 갈등과 사림의 성장을 종합적으로 파악하여 이해하고자 함
2.향촌세력의 변화
1)향촌세력 흐름
-고려시대(13-14C) 토성으로서 재지 이족이 중심세력->고려후기(14C) 성리학의 접촉과 관직의 제수로 인한 재지사족으로 점차 양분->선초(14C말)의 정국변화로 재지사족 낙향->선초(15C) 재지 이족의 세력약화(성리학적 향촌질서수립)->재지사족의 학문과 후진교육활동 전개->조선전기(16C)사림배출의 공급원
2)재지 이족의 세력약화
-향리의 본관이동규제, 도민(유민)억제, 악덕향리규제
-수령을 보좌하는 행정 사역인으로 유도
-재지사족중심의 향촌질서로 개편시도(유향소 설치 등, 중앙집권세력+재지사족의 공동노력)
3)재지사족의 성장
-불교적 향촌질서를 성리학적 향촌질서 수립에 중앙집권세력과 공감
-향촌질서의 운영면에서 중앙세력과 갈등(수령에의한 직접지배, 구심적 성격<->성리학적요소로의 체계운영, 원심적 성격)
-한계성을 인식하고 향촌사회의 성리학적 이상을 실현하기위해 중앙정계로 진출모색
-군현제 정비(성리학적 사회질서 장악의도)<-중앙집권세력+재지사족의 공동노력
-유향소(왕권과 훈구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비판하고 향촌의 재지사족세력에게 새로운 향촌질서 수립에 자율적으로 참여기회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 사마소, 서원의 건립으로 사족의 성장 및 재상산 유도
4)향촌사회의 사회실상
-성리학적 향촌질서 형성의 일환인 유향소가 훈구파의 경제소를 통한 장악됨으로 인하여 오히려 조세포탈, 농민 향리 침탈, 수령권한 능가
-농장확대의 지주전호제, 공납의 방납화, 균역제의 변질=>농민의 몰락, 유민 및 도적(임꺽정)의 발생
-이시기의 토지경영방식은 소농민 경영에서 지주전호제로 바뀌어가고 있음. 즉 영세자영농이 전호로 전락하여 지주의 토지를 소작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는 중세적 토지경영의 기본적인 틀이 형성되어 가는 시기
-조선왕조의 대건적 수취의 하나인 역은 중앙둘로서 정부차원의 역이 소경역, 지방관아의 사역은 잡역이었으며 세종이후 계전법으로 8결당 년 1인 6일간 역에 종사케 함이 원칙이나 지켜지지 않음
-이러한 향촌의 이탈방지 처방으로 향촌 자치규약인 향약실시
3.훈구의 성립과 중앙세력
1)생성배경
-고려말 신진사대부의 일부 조선왕조의 개국에 참여
-초기 3공신(태조-태종)이 구세력의 특권적, 정치세력 확대재상산 도모
-공신의 책록과 그 자손에 특권 세습(개국공신(開國功臣),정사공신(定社功臣),좌명공신(佐命功臣),정난공신(靖難功臣)좌익공신(佐翼功臣),적개공신(敵愾功臣),익대공신(翊戴功臣),좌리공신(佐理功臣),정국공신(靖國功臣),정난공신(定難功臣), 위사공신(衛社功臣))
-척신, 외척으로의 왕실관계진출
-근기호지방이 세력중심지
2)훈구파의 정치적 행보
-성종 중기까지 독존적 집권세력
-훈구세력 주도체계를 영속화하기위해 새로운 법제의 마련
-수취제의 원할한 운영을 위한 지리지 편찬
-민중을 지배체제에의 흡수를 위한 시혜적 문화사업 등을 장기간 지속적으로 전개
3)지배세력(훈구<->사림)의 갈등의 의미
-사회변동요인, 역사발전의 자극제로서의 긍정적인 의미
-점진적 지배세력으로 성장하는 사림파가 세력간의 갈등을 딛고 정치적 주도세력으로서 본격적인 성리학적 개혁정치의 토대마련
4.사림의 성향과 정계진출
1)사림파의 성립
(1)사림용어
여말사용(성리학자+사장학의 인사: 선비의 무리)->선초(성리학자의 무리)->중앙정계진출->사림파형성(중종 중기에 정치세력으로서의 사림파라는 역사적 의미의 용어사용)
(2)사림파의 성향
a.사림파 형성의 흐름
-초기영남을 근거로 시작하여 기호지방으로 분포
(정몽주-길재(영남)-김숙현(영남)-김종직(영남)-김굉필(영남)-정여창(영남)-조광조(기호))
b.사림의 학문적 동향
-초기에 김종직, 정여창, 김굉필은 사장학과 경학을 불가분성으로 파악 했으나 후에 문하들은 둘로 나뉘어지는 경향
-김종직문하(영남사림) 사장학+경학(위기지학)->수기지향,
-김굉필문하(기호사림) 경학중시(치인지학)->치인지향
-사림파의 입지가 어느 정도 다져진 후에는 경학(성리학) 탐구에 주력하는 세력으로 귀결
c.사림파의 인적구성과 출신가문 및 사림의 분당
-영남사림과 기호사림의 인적구성->성리학의 초기 학문적 전통이 주로 영남지방 출신으로 그 맥이 이루어졌으나 중종대의 개혁정치를 주도한 세력은 기호지방에 근거지를 둔 기호사림이였으며 그 인적 구성(본관이 아니고 생활 근거지)은 영남과 기호지방이 대등한 수로 파악
-사림의 가문구성->거족 성씨의 가문(훈구가문 출신 포함) 1/3, 비거족 출신 가문1/3, 1급거족가문과 기타가 1/3 ==>거족가문과 비거족가문과 엇비슷한 비율
-중종대의 사림이 성종조의 사림파에 비해 거족, 특히 일급거족이 증가된 추세
-사림파의 영남 및 기호학파의 분리-두지역의 사림이 독자적인 학문영역, 문화영역을 보다 분명히 확인되는 시기는 정치적 주도세력으로 성장하게 됨과 아울러 성리학의 이기철학으 수준으로 발전하는 시기(명종후기)에 볼 수 있다
2)사림파의 정계진출 및 정국변화
(1)사림파의 성립기(성종15년)->연산군초
-성종중기(15년) 사림의 중앙정계진출 본격화(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등 영남사림, 홍문관(언론계) 진출로 훈구파 중심의 정치운영에 견제적 기능 담당)
-학문적 경향은 경학과 사장학의 겸비를 중시<->사장학(한문학, 시와 문장)을 중시한 훈구와 차별성
-재지사족이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등의 인물중심으로 결속된 조직성 경향
-성리학과 주자가례의 보급을 통한 제도개혁 도모
-자파세력 확립 추구
-강렬한 동류의식, 상호 지속적인 교류, 성리학적 가치관에 의해 스스로 규제
(2)무오(김종직 조의제문), 갑자사화(폐비윤씨)이후-중종9년
-김종직 문인-두 사화의 직접적 피해
-김굉필, 정여창의 문인의 피해는 경미(대개 연소하여 출사전 상황)
-두 사화(연산군-중종초) 이후에 재지 사림파의 지속적인 성장기
-김굉필, 정여창의 유배지의 교육활동 중요한 의미-김굉필과 조광조, 김안국의 학문적 연결을 통하여 조선 성리학의 정맥형성, 성리학의 정맥과 법통이 영남에서 기호지방으로 연결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
(3)중종9년-기묘사화 전
-중종8년이전은 공신세력(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의 천권기간(반정세력의 허구성 및 도덕성 결여)
-명분 약한 공신집단의 두 가지 자구책(집단 내 주 공격목표 되는 인물을 언론에 방치하여 도퇴시킴, 모반의 무고를 조장함으로서 집단에 대한 비판의 통로를 차단)
a.중종9년이후 조광조, 김안국 등의 기호사림파 정계 급성장 배경(기호사림이 개혁정치 주도)
-향촌사회의 자연적 성장에 따른 상대적 성장
-성리학의 보급범위 확대 및 이해수준의 향상과 그에 따른 윤리질서, 통치질서의 성숙
-사림자신의 노력(교육활동, 현량과 실시)
-일부 대신의 인도(영의정 정광필, 이조판서 안당(중종10년 조광조 천거), 신용개)->정국공신의 사망으로 비공신세력(훈구적, 보수적, 시대변화 상황에 적응성향)에 의정부 장악됨
-중종의 입장(훈구세력의 견제로 왕권강화)
-갑자사화 이후 일부 훈구피해세력이 사림파로의 전향->기호사림파 가운데 훈구가문 다수 포함
b.중종조 사림의 3계열
-조광조 주축-위훈삭제와 같은 직접적이고 급진성향
-김안국 주축-점진적인 사회, 문화적 풍토와 기반의 조성 추구(향촌교화, 향약실시)
-권발, 이언적 주축-사림파와 훈구파사이의 완충역활
c.중종대 사림파의 개혁정치-과격성(위훈삭제), 성급성(왕권에 영향력행사)
-전통적 명분회복, 궁중인습혁파, 구제도의 혁파(소릉복위, 소격소 및 기신제 폐지, 내수사장리(궁중세력의 장리행위 및 그들과 결탁되어 있던 훈구파의 잉여농산물 고리대 행위) 혁파 등
-새 통치질서 수립(성리학적 학문체계의 정립, 현랑과(새 인재등용) 실시, 위훈삭제, 향촌교육과 향약의 보급, 경연활동 강화)
-성종대의 사림파의 개혁노력의 연장선에서 물려받은 역사적 과제
-후일의 성취를 위한 역사적 단초를 마련
-사림파의 한계(언관에 결정적 우세를 보인반면 의정부, 육조에서는 열세적인 상황에서 전주권, 병권을 행시할 수 없었고 개혁과정에서 훈구세력, 궁중세력, 불교교단세력 등과의 갈등 초래함으로서 고립)
(4)기묘사화 후->김안로집권기(세시기로 구분)
첫째, 기묘사화-중종26년-남곤,심정의 기화인을 주축으로 훈구파 정국주도
-기화인은 기묘인처럼 응집력이 강하고, 개혁의지가 뚜렷하며 성향이 분명한 인물들 제거가 목적
둘째, 중종26년-중종32년-권신 김안로의 천단기
-사화이후 일부 사림파 잔존세력과 관력이 짧은 소장사림의 존재는 사림파의 정계복귀의 근거와 명분 및 분위기 제공
-김안로는 기묘사화 때에 훈구파로 변신하고 심정과 권력다툼에 의해 파직되어 귀향, 그의 재서용은 정치적 변수로 작용(이언적은 재서용 반대, 기묘인조정이라는 담보적 성격, 즉 정계복귀의 명분)
-조광조 신원거론, 김인후의 기호사림의 소학, 향약 실시 건의 후 대신들에 의해 좌절
셋째, 중종33년-중종39년
-김안로 실각후 훈구파 다시 주도+일부사림파 재등용
-김안국,김정국, 신광한, 권발, 이언적 등의 재서용과 신진사림파의 새로운 진출이 구심적으로 형성되어 세가 크게 신장
-중종의 조광조에 대한 인식변화(사무아 애국우민한 인물로 격상)
-이시기의 사림의 성장은 기묘인의 신원, 복권논의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만든 요인
-중종말의 사림파 상황이 인종대에도 그대로 유지 및 비중 높아짐 (사림파의 성장 및 성리학의 보급으로 지배세력 가치체계의 변화의 복합적 작용)
-인종말에 기묘인의 복권과 현량과의 복과가 이루어짐
-인종의 환후에 대한 대사면이 기묘인의 복직과 현량과 복과와 과거 급제자의 등용
(5)을사사화(외척간)이후->문정왕후
-대윤인 윤임, 유권 유인숙과 명분상 세자(인종) 측을 옹호하는 입장이 사화의 직접적인 피화의 원인
-당초 외척간의 갈등에서 유발되었으나 사림파의 일부가 그 사건의 가장자리에 머물면서 사화의 가해자가 됨(이언적, 윤경, 송세형 등)->이후 윤원형, 이기 등은 그들과 성향을 같이하는 사림100여인까지 확대
-기화인은 소수 특권층(척신)에 의한 과두지배방식의 선호로 공론에 입각한 사림파의 통치원리에 거부감을 사화로 해결(점진적이고 온건적인 사림도 희생)
-사화는 본질적으로 외척 윤임만의 제거가 목적이 아니라 공론정치를 봉쇄하려는데 그 목적
-양제역 벽서사건 및 이약빙 아들의 역모 무고사건으로 피화범위 확대
-을사인의 성향->보편화를 통한 다수체제 지향
-개혁의지 면에서 다소 약화되었지만 공도, 공론의 창출자 내지 주도세력으로서 사회변혁을 이끔
-학문적으로 실천성리학의 바탕위에 차원을 달리한 이기철학의 체계를 수립하는데 깊은 관심을 보여 성리학사 맥락에서 상당한 진전을 이룸
-심연원과 윤개는 김안국의 문인으로서 척신세력과 상황에 따라 부침하는 처신
-세력의 저변확대를 위한 서원건립활동(훈구파의 경계를 피함, 이황이 주도적 역할)으로 명종 말에 20개 서원 건립, 강명도학의 실천장으로서 서원 강조, 훈구파의 경계를 피하는 방법으로 활용
-서원설립 등으로 사림의 통치기반 조성을 위한 노력은 선조의 즉위와 동시에 기묘인, 을화인의 복권과 정계복귀 및 공론정치로 특징지어지는 사림정치의 성립을 가져오게 하는 요인
-권신 이기와 척신 윤원형의 정국주도
(6)명종말-선초
a. 기묘인에 대한 인식상황의 변화
-명종의 친정이후 성리학적 질서가 저변에 확대 및 정착되면서 실질적인 통치이념으로 자리 메김
-조광조의 역사적 기능 및 실천을 부분적 수용
-중종대의 사림파의 초보적이고 실천적인 성리학 이해수준에서 벗어나 보다 심층적으로 정제된 이해체계가 정립되어지는 시기(이황, 이이, 기대승 등)
b.사림파의 집권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선조의 즉위가 이루어지면서 언관이나 시종에 사림파 장악-이황, 이이, 기대승, 유희춘, 노수진(선조 초는 조정에 척신, 구신들이 다수 존재)
-척신 심의겸은 심연원의 손자로 사림파에게 현실대응의식이나 자세면에서 일정한 관계유지
-선조 즉위년부터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인과 이언적을 비롯한 을사인에 대한 신원과 복직조치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짐
-사림파의 정치적 주도세력으로의 정착과정은 조광조에 대한 인식의 변화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음. (실세-잠정적복관-반전-복관-추증-사액-문묘종사)의 과정의 함축
-사림파의 집권 이후 성리학이 명실상부한 국가의 통치이념 및 국가정책으로 연결(정착)
-경전의 편찬(성리서, 주자서절요, 성학절요)
-사림파는 드디어 기존세력에 도전하여 그들 주도의 지배체제를 개혁하려는 재야단계를 벗어나 주체적으로 그들의 이상을 사림정치의 틀 속에서 자유로이 담을 수 있는 정치세력으로 정착
6.사림의 정계진출 과정과 집권의 역사적, 내재적 요인
1)사림의 정계진출 과정
-중앙세력간의 갈등과 좌절은 정책결정과 집행의 핵심인 정조에의 진출이 봉쇄되었던 것이 역사적 기능의 한계
-재지사족의 시대상황 변화와 한계성인식->성종의 문치적 성격과 훈구세력의 견제로 사림 본격등용(김종직 등)-->연산군 때 무오, 갑자사화로 인한 좌절-->중종의 훈구세력견제 사림급성장(조광조 등)-->기묘사화(중종),을사사화(명종)로 좌절-->명종후반과 선조 때 사림의 중앙정치세력화 등장(이황, 이이, 기대승 등)-->성리학적 이상을 실현하기위해 개혁정치를 펼치면서 다음시대를 예비하는 전향적, 전망적 세력으로 성장-->왜란, 호란, 인조반정후 상대세력과의 공존을 추구하는 붕당정치로 발전
2)사림파의 집권 역사적, 내재적요인
-사림파의 집권은 역사적 갈등과 진통을 통해 사림파의 철학, 그리고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으로서의 성리학의 학문체계와 가치관, 윤리규범 등이 더욱 체계화하고 통치방법을 다듬을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지속적으로 확산되어가는 시대적 상황이 지배체제의 수립을 가능케 함
-기묘인, 을사인 및 그 문인, 후손들이 그 실천의 주체
-종래의 극명한 차이를 보인 두 세력간의 시대적 흐름에 따라 성리학적 상호접근(공통성)
(1)훈구파-유교국가의 통치이념과 분리도리 수 없는 치자층으로서의 성리학 질서에 점진적으로 적응되어감
(2)사림파-성리학적 이념을 정치에 구현하려면 관료지향적, 권력지향적 성향을 배재못할 입장->기묘사화이후 원초적 성격이 일정하게 희석되면서 두세력간의 구분이 어렵게 되는 원인
-사림정치를 전개하면서 중앙과 향촌에서 그들의 이념과 이상을 구현할 수 있었으며 자체내의 새로운 갈등을 체험하며 그 해소방법을 발전적으로 승화시키는 통치형태로서의 붕당정치를 이끌어 내게 되었다.
제 2장 16세기의 정국과 영남사림파의 동향
1.연구목적
당시 정국은 훈구파와 사림파라는 신진 정치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의 진행과정인 동시에 사림파가 주도적 정치세력으로 정착하여 공론에 기초한 사림정치를 전개해 나간 것으로 규정지을 때 영남 사림파의 비중은 어느 정도였으며, 그 구성상의 특징 및 역사적 기능을 살펴보고자 함
2.영남 사림파의 태동
성종대 사림파는 학문적 계보를 통해 볼 때 대략 105인 정도로 그 중 영남 사림파에 속하는 인물은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을 위시하여 약 50인정도로 사림파가 영남지방에 그 연원을 두고 형성되었음을 파악
3.영남사림파의 시대별 정치적 활동
1)성종대의 언론활동-홍문과, 사헌부, 사간원 등의 언관직에 한정
2)언론내용-훈구세력 탄핵, 소릉복위, 조위제문의 사장화, 등 일반적 언론활동에서 정치적인 내용으로 점진적 귀결
3)무오사화-성종의 보호막제거, 유자광, 이극돈, 윤필상 주도, 언관도전에 관한 훈구파의 정조계 노성대신의 대응행위결과, 김일손의 사초에 비롯(궁중비사, 조의제문의 사장화)-->김종직의 문인(영남사림파)으로 확대
-김종직 부관참시, 김일손 권오복 죽음, 강겸, 표연말, 정여창, 이종준, 강백진, 이주, 김굉필, 강혼, 조위 등은 극변으로 유배
-김종직의 문인인 영남사림파의 피해 집중
-기호사림파와는 같은 피화인이라는 유대의식을 통한 결속의 계기
4)갑자사와(궁중파와 부중파간의 갈등)->사림파가 궁중파 자신들의 권력 농단에 방해가 될 것으로 간주하여 사화의 대상을 사림파로 확대(상당수 영남 사림파 인물)
-조위, 표연말, 정여창은 부관참시
-박한주, 강겸, 변형량, 강백진, 김굉필, 이주, 등은 죽음
-정붕 등은 유배
-양 사화로 사림파는 중앙정계에 거의 도태
-사화로 피화된 일부 훈구파로부터 사림파로 전향이루어짐->후일 중요한 정치적 및 사회, 문화적인 기능행사
5)중종초
-중종9년이후 정조 및 언관에 활발히 진출을 통한 훈구세력의 견제와 기호사림의 이상정치실현을 위한 개혁정치 추진
-대부분의 영남사림파는 당시 개혁정치와 일정한 거리 유지(훈구파와 기호사림과 완충역활)->기묘사화->기호사림파에 비해 사화피해 적게 받음->후일 사림파의 재진출에 일정한 기여토대로 작용->이언적, 박소의 등은 김안로의 정계복귀에 반대하는 영남 사림의 자세는 후일 사림파가 정계에 다시 복귀할 수 있는 명분과 분위기 조성에 일조
6)중종말
-중종말기에는 앞 시기에 비하여 다소 활발하게 이루어짐
-대, 소윤 갈등시 영남사림파는 대의명분상 세자측을 옹호입장
-현철군주론(도덕정치), 위민정치(지배층의 민의에 대한 일정한 양보를 전제로 함)의 기반마련
7)인종기
-중종말과 비슷하나 중앙정부구성상 사림파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확대->이러한 성장은 조광조 등 기묘인의 복권과 현량과의 복과가 성취되는 원동력으로 작용
8)명종기의 을사사화
-영남사림파의 이언적, 권발은 강경한 언론을 행사 및 그 세력의 확대로 인하여 훈척세력의 정치적의도 견제시도->을사사화의 피화로 이어짐->정치현장으로부터 일탈->이황(온건하고 우회적인 양상), 조식, 이희안(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비판적 대응자세)->공론정치와 무관하게 운영되어지는 척신정치에 비판적 인식과 대응자세 견지
-문정왕후 사후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 조정에 다수 포진
-관인과 영남유생의 연합(보우의 탄핵상소)이라는 새로운 방식에 의해 척신정치의 청산이 이루어지고 영남사림파의 지대한 역할->척신세력 몰락 후 정계주도의 예고
9)선조초
-정치세력 재편(척신정치 부정하던 구신, 을사피화인, 신진사류로 대체)
-영남사림파가 정계와 학계를 주도
-이황(조광조 신원, 신진사류의 의견 대변)의 문인-노수신, 유성룡, 김성일, 김우옹, 김우굉, 구봉령, 구사맹, 정유일, 정탁 등
-조식의 문인-오건, 곽월, 조원, 구변, 정인홍, 최영경
-무오, 갑자, 기묘, 을사사화의 피화인 신원회복, 오현의 문묘종사운동(유생중심), 위사공신의 삭훈(이이), 윤임의 복관, 현량과 복과
4.선조초의 사림의 분파와 갈등
-집권세력 간의 이념상의 차이로 사림계, 구신계로 나누어짐(낭천제, 문소전 변통논의, 구신들의 기대승 등의 사류제거모의 등)
-사림계-성리학적인 이상정치의 구현과 함께 척신의 과감한 청산 주장
-구신계-미온적인 태도
-선조4년 이준경의 영의정사직과 죽음으로 구신계 실세->선조8년 사림계의 사실상 정국주도->사림파는 사림파 특유의 엄정한 비판정신에 입각하여 자체내부의 비리와 약점을 척결문제로 갈등->동인, 서인으로 분당->상호 비판과 견제를 기본운영원리로 하는 붕당정치 전개
5.영남사림파의 분당
서인(이이, 성혼의 문인, 기호사림파), 동인(이황, 조식의 문인, 영남사림파)으로 분당->동인이 남북으로 분당->북인(조식과 서경덕 학통), 남인(이황과 우성룡 문인)->남북의 정치적 대립은 기축옥사(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발단), 임난을 거치며 심화 및 지속->17세기 붕당정치 본격화후 ->조락의 길
6.영남사림파의 평가
사림파의 미래지향적인 가치관과 비판적 현실대응의식 및 자세에 의해 성취된 사림정치(공론, 공의, 공도)는 선조 초에 이르러 영남사림파 주도로 정치궤도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
제 2편 사림파의 사전개혁운동
-부분적으로 지배세력과 공동 관심사였으나 사림파에게 더욱 절실한 현실문제로 인식
제 1장 사림파의 내불당, 기신제, 소격소의 혁파논의와 그 추이
1.연구목적
조선왕조는 토속신앙 및 그 의식, 내불당과 기신제(왕실불교), 소격소(도교전례), 등의 의식의 정비는 음사로 규정지었으며 이는 조선왕조가 반드시 관철해야할 역사적 과제였다. 하지만 상당한 시일과 수많은 갈등의 극복과정을 요하는 문제들로서 이에 대한 논의와 그 추이를 15-16세기로 범위를 한정하여 살펴보고자 함
2.시대적 현황
1) 당위성- 조선왕조가 건국 후 관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제도의 개혁과 함께 낡은 전례, 의식을 정리하고 새 의례를 정착시키고자 함. 즉 토속신앙과 그 의식을 음사로 규정하여 정리하고 고려 이래 보편화되어 있던 불교와 그 의례를 척불의 명분으로 정리함과 동시에 성리학 및 그 전례를 왕조의 기본적인 윤리규범으로 대체하고자함
2) 한계성
-조선왕조는 건국하면서 척불정책을 표방함에 따라 일련의 시책(태종대의 사사전, 사사노비의 혁파, 사원의 건립금지, 세종의 선교 양종의 정리 등)을 펼쳤으나 뿌리 깊은 신앙의 생명력은 형식적인 정책만에 의해 간단히 끊어질 성질의 것이 아님
-전 왕조의 구례를 청산해야 할 일차적인 책임을 지니고 있던 국왕이나 신료들도 막상 그 신앙의 인습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유불교잠의 사상적 갈등, 공인으로서의 국왕과 사인으로서의 가부장 사이의 종교적 갈등증폭, 후비세력의 비호)
-건국초기의 정치사회적 분위기가 아직 조선왕조 고유의 새 모습으로 바뀌지 않음
3.내불당, 기신제, 소격소의 혁파논의와 그 추이
1) 내불당(대궐 내에 세워져 있는 불당)
1-1) 세종
-말년에 내불당을 건립하는 등 불교정책의 수행에 명료하지 못한 양면성을 드러내어 신료들의 반발야기
-말년의 자신의 병약과 왕비의 죽음, 어린 왕자의 요절 등 왕실 내의 불우한 환경에 영향받음
1-2) 세조
-원각사를 창건한 사실에서 보듯이 불교를 혹신하여 승도를 보호하고 사찰을 지원, 수많은 경전의 간행 등 승불에 가까운 정책을 폄으로서 유교국가의 군주와 합당치 않은 모습을 보임
1-3) 성종
-궐외이건이란 선에서 쟁점을 내장한 채 잠정적 마무리
1-4) 명종
-문정왕후와 보우의 결탁
1-5) 선조
-성리학의 국가통치이념으로 정착되어짐과 맞물려 공식적인 청산
2) 기신제(역대 왕과 왕비의 기일제를 불교식 제례의 형식을 빌려 거행하던 고려 이래 및 조선전기의 왕실제례)
2-1)성종이전-혁파논의 및 타당성 여부에 대한 논의조차 없음
-불교사전을 대신할 유교의 정례, 즉 주자가례에 대한 국왕이나 지배층의 인식이 불교의례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이끌어낼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탓으로 볼 수 있음
-궁중의 후비세력과 내명부세력 속에 뿌리박힌 불교의례의 강인성
2-2)성종 대 이르러 기신제 혁파논의는 그 후의 단서 제공이란 의미부여
-근본적인 혁파는 안되었지만 혁파 절차상에서 선왕, 선후에게 욕이 된다고 지적된 무례한 행동부분은 배제하는 성과 거둠
2-3)중종 대에 집중적 논의 및 중종 11년 혁파
불교의례의 비판적 의식을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제한한 사림세력의 등장으로 폐단개혁의 한 대상으로 인식상황(훈구와 사림) 확대
2-4)명종 초 문정왕후의 섭정기의 척신지배기에 복행
2-5)선조대의 성리학적 통치이념이 자리잡음으로서 폐지
-이후 선왕, 선후의 기일제는 중종 때처럼 능침에서 유교식 정례에 따라 봉행되는 관례정착
2-6)내불당과 기신제의 폐지어려움의 요인들
-불교신앙 및 그 의례의 뿌리의 강인성과 불교적 분위기의 광범성
-궁중세력과 사대부가 부인층의 비호
-불교교단세력의 저항
-역대 국왕이나 지배층의 척불의지 취약성
3) 소격소(원래의 소격전을 개칭한 것으로 삼청성진의 초제를 관장하던 기관)
-조선왕조의 불철저성으로 인한 소격서만은 경국대전에 등재된 법제적 기관으로 존속
-불교처럼 국시의 금압에 비껴있던 바 부정적 관심이 약함
3-1) 성종, 연산군대의 태동기
-연산군 초에 그 문란함이 제기되어 비용이 삭감됨
-왕실이 소격서 및 도교사전에 집착(정현왕후의 병환을 계기 예, 왕실의 질병치유의 기도 및 기복, 오래된 인습)
-훈구파가 초기부터 찬동하지 않은 것은 구제도가 갖는 역사적 의미와 그와 관련된 자기 세력의 현실상황, 그에서 연유한 현실대응의식의 보수성 때문
3-2) 중종기의 본격적 전개 및 실현기
-중종 6년에 본격적 혁파논의제기
-조광조의 주도적인 노력으로 인한 소격서 혁파가 소릉복위, 기신제, 내수사장리 혁파등과 깊은 연관을 가진 사림파의 개혁과제란 인식의 바탕 형성
-성리학 및 그 전례를 확대, 보급하는 과정에서 도교사전을 마땅히 정리해야 할 장애요인으로 인식한 미온적인 훈구대신 및 성리학자의 공통적 사명감에 적극적 혁파주장 제기
3-3) 기묘사화 후의 복립기
-기우제, 기청제에 대한 소격소 복립논의 후 정현왕후의 병환 후 복립
-중종 본인도 도교를 좌도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누대의 구례를 자기대에 혁파할 수 없다는 조종에 대한 사명감 및 소격소 전례에 대한 집착(기도, 기복, 기우, 기청, 기융 등 정신적 위안거리)
-영구적인 혁파는 성리학적 전례가 정착되어가던 임란이후에 실현
제 3편 사림파의 현실인식과 대응
제1장 김일손의 현식인식과 대응
1.머리말
-김일손이 살았던 시기가 갖는 역사적 성격과 의의를 살피고, 나아가 그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기능했고 그 의미는 무엇이며, 사림파 내에서 그 위상은 어떠했나를 살펴보고자 함
2.훈구파의 천권과 정국의 추이
1)정치적 격동과 변혁의 시기
1-1)격동
왕조의 기반을 다지는 과정에서 수많은 정치적 변란 및 그 출생이후 이시애의 난, 남이옥사, 성종의 즉위
1-2)변혁
훈구파가 정치적, 토지경제의 기반을 독점적으로 장악한 상태에서 정국운영을 천단하던 시기에 대극적 성향을 띤 사림파가 등장하여 양자 간에 갈등과 대립의 양상이 전개되기 시작
2)훈구파의 천권
-개국공신과 더불어 3공신 후 세조 이후의 5공신 세력이 왕실과 혼인을 통하여 확대 재생산되어지면서 대응세력이 없는 유일한 정치세력인 훈구 또는 훈구파로 자리잡음
-적개공신(이시애의 난)-비공신집단의 불만을 무마목적, 좌리공신(성종등극)-대규모 공신책록, 친인척관계의 다수가 포함
-훈구주도의 정국운영체제의 영구화도모(법제의 마련, 지리지편찬, 명분적 시혜적 문화사업)
3.사림파의 구조와 성격
-왕권이 약화되고 소외계층의 불만이 고조되는 정치, 사회적 모순의 극복과 새로운 정치운영체제로의 전환이 대두
-사림파의 수장인 김종직이 서제교육, 성균관에서의 공교육활동이나 현직관리로서 행사한 여러 가지 기능과 성과를 토대로 그의 문인과 김굉필, 정여창의 사우, 문인 등이 주축을 이룬 사림이 성종 5년부터 16년경 이후에 중앙정계, 문과 급제자, 언관직 보임자 수가 현격히 증가
-영남, 기호 사림간의 접촉을 통한 결속이 진전되고 영남 선배당(김종직 주축)이란 상대성 인정 분위기에 정치세력으로 사림파로 결성있었음
-성종대의 사림파는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세사람의 문인들로 구성되었으며 그 수가 100여인 정도 도달
-무, 갑사화는 다른 한편으로 사림파 성장의 새로운 계기제공, 즉 양 사화 후 김굉필, 정여창의 유배지에서 교육활동 전개는 경학중심의 사림세력을 확대하여 중종대 개혁정치를 주도 함에 기여
-무오 갑자사화의 피화인은 학문이나 교육을 통해 문인배출은 못했으나 그들의 저작은 중종기에 증보된 속동문선 속에 큰 비중을 차지하며 그 자취를 남김
4.김일손의 개혁론과 그 성격
세조 10년(1464)에 경상도 청도에서 출생하여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 죽은 초기사림파의 인물
-17세에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업시작, 성종17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후 10여년간 내외직을 경력
-진주의 교수제직시 진양수계를 조직하여 정여창, 김굉필, 남효온, 홍예손, 우선언, 최한, 강휘 등과 교류를 통한 사귐은 중앙정계의 유익한 바탕과 개혁추진에 큰 도움으로 작용
-성종으로부터 문사로서 인정받고 학자적 신뢰를 얻음
-훈구파 주도의 정국하에서 야기되는 일체의 모순과 비리를 통렬히 비판하고 그에 대체되어야 할 대안을 제시하여 이전 사림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이며 전향적인 특성을 보임(충청도 도사 재직시 상소, 연산군초에 전개한 언론활동 등)
-연산군 즉위 후 사간원 헌납에 제수되어 대간으로서 활동
-노산군의 봉사손 입후 진청, 사관에 입직하여 사초정리 및 김종직의 조의제문 사초에 수록, 소릉복위 거론, 이극돈 성준의 탄핵
-연산군 1년에 근조이병이십육사 상소(그의 치인성향을 종합적으로 나타남)
-연산군과의 갈등(수룍제 행사와 조제문제, 정주 및 윤채의 옥사에 관련된 말의 출처, 사간원의 풍문에 의한 탄핵하는 언론행위를 둘러싸고 연산군과 갈등)
-김종직의 과도기적 양면성이 그 문인의 대에 이르러 학문적 경향이 분기되어 나타나는데 김일손은 사장학 쪽에 근접하며 현실대응에 있어서 절의나 명분을 중시하는 각도에서 언론을 행사
-무오사화의 진행과정에 다른 계열(기호사림)에 비하여 상대적 혹독한 참화를 입게됨
-무오사화의 근본적 원인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누적된 갈등
5.무오사화와 김일손의 대응
1)무오사화의 직접적 단초 및 확대
1-1)사화이전의 감정적 사건
유자광과 김종직-> 김종직이 밀양군수 재직시 유자광이 지은 현판을 불태움
이극돈과 김일손->이극돈이 이조판서 재직시 김일손의 과거급제의 순위와 낭직의 발령을 미루고 마지못해 형조낭직으로 발령
1-2)사화의 단초(김일손이 기록한 이극돈과 관련된 사초가 빌미)
-세조조에 불경을 잘외워 벼슬을 얻어 전라도 관찰사가 된 것, 정희왕후의 상을 당하여 서울에 향을 바치지 않고 장흥의 관기 등을 가까이 한일, 뇌물을 받은 일
-이극돈은 김일손의 사초를 삭제하려는 계획이 실폐로 돌아가자 주변인물들과 함께 신료로서는 거론해서는 아니될 세조대의 궁중비사를 김일손이 사초화 했음을 국왕에게 고하였고 그에따라 사림파 인물들을 치죄하기 시작
1-3)-훈구파는 김종직의 문집에서 조의제문과 화술시(도연명의 술주에 화답하는 화도연명술주의 서문)의 서문을 찾아내어 김종직의 사주로 김일손 등이 사초를 쓴 것으로 간주하여 사림파에 대한 치죄의 강도를 높임
-김종직은 성덕을 기망하면서 불신의 마음으로 세 조정을 섬긴 인물로 규정하여 부관참시
2)김일손의 대응
2-1)국문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의 사초
크게 단종과 세조와 관련된 궁금의 비서와 세조의 집권과정에서 발생한 일들에 관한 것
2-2)김일손의 대응
세조와 그를 옹립한 훈구대신의 불법성과 비윤리성을 밝히고 나아가 소릉의 복위와 노산군 봉사손의 입후를 통하여 왕조의 정통성을 회복하고 유교적 윤리를 고취하려는 의지를 보임
2-3)김일손의 평가
-15세기 후반이라는 역사적 시점에 서서 시대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 현실을 냉철히 인식하고 추호의 망설임 없이 그 현실에 대응한 초기 사림파 중의 대표적 인물
-그의 이러한 현실대응의식과 자세는 후일 사림파가 점차 성장함에 따라 그 역사적 가치를 조금씩 인정받게 되었고 더욱 먼 훗날 사림파가 그들의 이념과 이상에 따라 정국을 운영하게 되는 사림정치기에 이르러 역사 속에 뚜렷한 좌표를 확보하게 됨
제 2장 김안국과 개혁정치
역사-오늘날의 문제의식, 현실의식을 통하여 과거를 재 해석하고 재평가하는 것
1.머리말
김안국의 생애와 학문 등 그와 그의 주변을 살펴보고 나아가 그의 개혁론과 개혁정치의 실체를 살펴 그것이 지닌 성격을 파악함과 아울러 중종조 사림파 안에서 그의 위상을 설정해 보고자 함
2.생애와 학문
1)생애
-의성 김씨 가문에서 태어나 성종초(9년 1478)에서 중종말(38년, 1543)까지 살았으며 연산군대(9년)에 입사하여 1품직(경상도 관찰사, 공조판서, 의정부 우참찬, 전라도 관찰사 등)에까지 올랐던 인물
중종대에 들어서 조광조를 비롯한 기호사림파와 함께 개혁정치를 펼치다 기묘사화에 의해 파직되어 20여년 간 은거생활 후 권신 김안로의 실각 후 복관되어 5년여 여생을 관직생활로 생을 마무리
-기묘사화시 조광조의 우익으로 분류되어 동류 32인과 함께 삭파되어 이천, 여주에서 20년간 은거
-향리에 은거하며 40여명의 문인 배출
-김인후, 유희춘 등은 학문과 현실대응에서 그의 맥을 이어받음으로써 사상사에 큰 자치 남김
-그외 일부 인물은 권력지향적, 현실안주를 추구하여 후일 김안국에 대한 비판의 대상이 됨
2)학문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조선 성리학맥을 이어받았으며 그 이해수준을 향상하는데 공헌
-관념적, 사변적 원리이외에 문장, 외교문서의 찬술에도 기여
-사문, 천문지리, 농업, 의술, 음양학, 종이제작(수태지) 등 실생활과 관련 깊은 부문에 많은 노력과 기여
3.개혁정치와 그 성격
1)제도개혁론과 그 실제
-노산군, 연산군의 입후 및 소릉복위와 같은 명분의 회복 문제와 종래 통폐로 여겨져 내려온 내수사장리나 불교식 전례인 기신제의 혁파같은 낡은 제도의 개혁
-향촌의 사회문화적 풍토의 쇄신 및 그에 입각한 새로운 통치질서 수립의 기반조성
-직접적이고 구체적, 능동적인 제도개혁보다 완만하고 온건한 개혁론 치중
-조광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폄하되게 만드는 한계로 작용
2)윤리서의 보급과 실천(성리학적 윤리질서 정착목표)
과거제도의 강경규식의 부분적 개선, 경연기능의 강화, 주문공가례, 삼강행실, 주자가례의, 이륜행실의 보급, 소학교육의 장려,
3)향촌교화책과 그 실천(재지기반의 확대 및 재정비의 노력)
-국가의 관학체계인 향교가 유명무실해지자 향교의 부흥을 부르짖고 진흥에 기여
-향촌(국가통치의 기초단위, 사림재지적 기반)의 윤리질서를 성리학적 원리에 맞게 정립하고, 공동체적 자치능력을 지향하는 방안으로서 향약의 보급에 앞장(여씨향약의 언해)-기묘사화 후 환란규휼만 남기고 나머지는 잡목으로 인식
-향풍의 교정, 유생의 천거
4)개혁정치의 성격
-조광조가 전국가적인 차원의 제도개혁에 주력하였다면 김안국은 향촌사회에 보다 깊은 관심을 보여, 그곳의 교화 안정을 통해 왕조의 새로운 통치질서 수립에 접근하는 방식 채택
-생시에는 큰 빛을 발하지 못하였으나 사림파가 정치적 주도세력으로 정착하면서 치자층의 개혁논리로서 공감을 얻게되고 그 개혁의 맥은 국가차원의 시책으로 연결됨으로서 역사속에 정착
-그의 학문, 개혁론이나 개혁정치가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할지라도 역사속에서 확고한 좌표를 가진 개혁론자, 개혁정치가로서의 일생과 현실대응방식은 오늘날 우리의 의식과 자세를 돌아보는데 시사점 제공
제 3장 김정국의 개혁론과 그 성격
1.머리말
중종기의 변혁이 극심한 시대를 살면서 그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여 현실을 도모하고, 나아가 성리학적 질서가 지배하는 보다 새로운 미래를 이룩하기 위해 무던히도 치열한 삶을 살다간 그 생애와 그가 펼친 개혁론 및 그 성격을 살핌으로써 역사적 교훈과 함께 급변하는 현실에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와 삶의 방식을 발견하고자 함
2.가계와 생애
1)김안국의 동생
2)성종 16년에 태어나 중종 4년에 급제이래 14년간 관직에 복무하며 사화 이전에 주로 언관과, 시종 및 낭관 등 청요직에 머물며서 개혁론을 펼치며 기묘사화시에 황해도 관찰사로 재직중 파직되어 18년간 향리인 고향에 은거
3)은거기간 후진교육에 몰두하면서 전원생활의 여유를 누렸으나 다른 한편으로 정국변화에 따른 인심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체험
4)김안로의 패사후 재서용되어 짧은 사관생활을 하며 향촌의 당면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질곡을 정확히 분석하여 그 구제책을 건의하였고 중종 36년에 생을 마감
3.개혁론의 내용구조
1)명분론
사화 이전에 당시 그의 동류집단인 기호사림파가 주로 관심을 가졌던 명분의 회복, 구제의 혁파 부분에 함께 참여(소릉복위, 금성대군 후손의 사면 및 방면 등)
2)군주론
군주의 자질에 따라 일의 성패가 좌우된다는 인식하에 경연교육의 강화와 그를 통한 군주의 대체 함양과 군신간의 의사소통 기회의 확대를 도모함으로서 훌륭한 군주가 될 수 있음을 전개(기호사림의 현철군주론에 포함되는 부분)
3)관직론 및 관인론
-재상의 선택은 재덕을 겸비한 인물로 신중히 할 것과 직언, 극간할 줄 아는 이를 사간의 관리로 임용해야함을 강조
4)인재론
-기묘인들이 주장한 인재등용에 있어서 천거제(현량과) 중심보다 과거와 천거제를 병행한 과천병행론을 주장
5)향촌교화론
5-1)사화이전
향촌민에게 강상군주론을 침투시키는 등의 교화방면에 힘씀
5-2)사화이후
향촌민이 당면하고 있던 매우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질곡을 정확히 분석하여 그의 해결에 최적한 구제책을 건의
6)향촌구폐론
군정, 마정, 민정의 셋으로 범주화되는 구폐론<-향촌의 긴 판한생활로 인하여 향민의 애환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갖게됨
4.개혁론의 성격
1)개혁의지 및 현실상황논리
정귀시의론-시대가 바뀌면 선왕지제를 시왕지속에 합당하게 변통하여 민심에 부응하도록 해야 낡은 습속에 병들지 않게한다는 것으로 그의 개혁기본정신
1-1)사화이전
주로 명분이나 제도의 문제에 한정하여 제기
1-2)사화이후
향민의 질곡에 개선에 관심을 보임(구폐책)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며, 명분적이지 않고 실제적이며, 형식적이지 않고 실용적.
2)개혁론의 성격
그의 개혁의지와 그에 기초한 개혁론이 지니는 실제적, 실용적 성격은 그의 강정, 방직, 순정, 온후한 성품과 안빈지족하는 청빈한 생활태도와 결합되면서 그를 지성과 간절한 마음의 소유자로 또는 청백무구한 인물로, 나아가 도덕과 문장이 조광조와 견줄만한 인물로 평가됨
제 4장 이현보의 시대와 그의 현실대응
역사-변화와 발전을 추구하고 그 결과를 확인하는 학문
세조13년 출생, 명종10년 사망, 연산군4년에 급제로 16세기 전반 50년을 수령, 관찰사 등 외직에 종사
1.머리말
영남사림파의 중요 거점인 예안에 재지적 기반을 가진 이현보가 그 시대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하였나를 살피고, 나아가서 그의 대응방식을 통해 영남사림파의 현실대응의 한 단면을 살펴보고자 시도
2.16세기 전반기의 정국과 그 추이
1)연산군대의 정국과 사화
2)중종대의 정국과 사림파의 개혁정치
3)권신 김안로 천단전후의 정국과 사림파의 동향
4)명종초의 사화와 척신정치의 전개
3.이현보의 현실인식과 대응
1)관력상의 특징
-위친걸외의 결과로 아홉 고을의 수령과 한도의 관찰사를 역임
-연산군대에 사관과 대간으로서 직언으로 안동의 정역됨으로서, 이러한 좌절의 체험이 권력의 핵심을 벗어나고자 하는 외향의지로 작용했을 가능성
-이에 따른 결과로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나 변혁의 전환기에 늘 현장에서 먼 거리에 위치
-그의 현실대응방식은 스스로 명철보신을 가능케 한 기능으로 작용한 반면, 그의 역사적 가치를 평가절하 시키고 사림파 내에서의 위상을 크게 격하시키는 부정적 기능으로 작용
2)경관직 재직시의 현실대응
-사림파와의 인간적 교섭은 좁은 범위에서나마 가졌으면서도 그들과 함께 개혁에 참여한 자취는 남기지 못하였으며, 늘 그 주변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파악(임관 초의 피화 후 명철보신에 늘 유념한 듯)
-내면적으로는 사림파의 현실인식의 방향, 방법 및 대응자세의 기본적인 틀과 수준을 어느정도 이어받음
3)수령 재직 시 및 퇴로기의 향촌질서 수립운동
-이황과 더불어 예안을 중심으로 안동지방의 향약보급운동 전개(예안향약)
-향약은 중종기의 기묘사림파에 의해 의욕적으로 추진되었다가 사화로 인해 원점으로 환원되었던 것을 훈구파의 거부의식이 상존하고 있던 경직된 정치적, 사회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과감히 시행되어었다는 데 큰 의의
제 5장 권발의 시대와 그의 현실대응
사림정치-공론에 의해 지배되고 공도에 의해 운영되는 정치
성종9년에 출생하여 중종2년에 출사하여 명종3년에 사망
1.머리말
기묘, 을사사화의 두차례의 사화를 몸소 체험한 권발은 영남지방 출신이면서도 기호 출신의 개혁론자들과 긴밀히 접촉하면서 개혁정치에 깊이 관여한 매우 드문 인물로서 그가 두 사화기에 당면하여 어떻게 대응해 나갔는가를 우선 살피고 나아가서 사림파내에 있어서의 그의 위상을 설정해 보고자 시도
2.중종기의 정국과 권발의 대응
1)기묘사화 이전
-주로 언관에 봉직하며 무오사림의 신원, 노산군 및 연산군의 봉사손의 입후를 주장하며 조광조, 김안국 등의 기호사림파와 긴밀한 교우관계를 가지게 되면서 개혁정치의 핵심에까지 접근
-조광조의 급진파와 훈구파 간의 완충적 기능을 행사함으로 조광조 계열로부터 배척당하여 외직으로 물러남으로써 기묘사화 당시에는 그 현장에서 떨어짐,
-사화이후 10여년간 파직
2)기묘사화 이후
-김안로가 천권하던 중종28년에 정계에 복귀하여 재 서용된 김안국, 신광한 등과 함께 국왕의 인식전환과 기묘인의 신원을 위해 노력
-인종의 말기에 기묘인의 복권과 현량과의 복과가 내려짐에 큰 역활
3.명종대의 정국과 권발의 대응
윤임, 유권, 유인숙 등 세사람의 치죄에 적극 변론 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주에 유배뒤 사망
-사화의 확산과정에서 그가 사림파 보호에 적극적인 대응방식과 절직한 언론은 중종대에서 보여주었던 그것보다 확대, 강화된 면모를 보임
4.권발의 현실대응의 역사적 의미
조광조, 김정, 김안국 등과 긴밀한 연결을 가지고 개혁정치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기묘제현전에 기록되었고 이언적 등과 함께 을사인의 대표적, 상징적 인물로서 파악되면서 사림정치의 성립기에 이르러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기묘인과 을사인의 두 집단 속에서 함께 커다란 무게를 지니는 희귀한 역사적 존재로 자리잡음
제 6장 이언적의 시대와 그의 현실대응
1.머리말
무오에서 을사사화에 이르는 4대사화의 정치적 격변과 사림파의 개혁정치에 따른 시대적 변혁을 총체적으로 체험하였던 이언적의 현실대응의식과 자세를 살피고, 그의 역사적 기능과 사림내에서의 위상을 파악해보고자 함
2.권신 김안로 주도의 정국과 이언적
1)기묘사화 후의 정국과 사림의 동향
-중앙정계에 잔존한 사림파는 개혁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거나 처음부터 기묘인들과 김밀한 관계를 설정하지 않은 인물들로서 이중 이언적은 관력이 짧아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음.
-이들이 중앙정계에 잔존하고 있었던 사실 자체가 이후 사림파 진출의 연결고리가 되었던 것
2)김안로의 정국주도와 이언적의 정치적 입장
-기묘사화를 계기로 훈구파로 돌아서면서 이조판서에 보임되어 정치적 주도권의 장악을 꾀하다가 남곤, 심정 등과 심각한 갈등을 빚은 끝에 유배되어진 후 아들이 부마임을 기화로 기묘인조정이란 기치로 정계에 복귀를 끈질기게 시도
-기묘인 조정이란 정계복귀를 위한 사림파 내의 여론조성과 훈구파 내의 반대세력이었던 심정 일파의 타도명분의 확보를 위한 것
-김안로의 정계복귀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공통된 반대 여론이 형성된 차에 김안로의 인간됨이 소인배로서 정계복귀에 반대하는 사림의 공론을 주도
-이 일은 당시 사림의 공론을 가시적으로 드러낸 매우 중요한 사례로 관력이 짧아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그를 사림의 공론을 주도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부각시켜주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현실대응자세의 일면을 보여주는 기회
-이로 말미암아 파직되어 이후 김안로가 실세할 때까지 7년간 향리에서 보냄
3)김안로 실세 후 정국의 추이와 이언적
-김안로 실세 후 재 등용되어 기묘인의 신원과 개혁정치의 재개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조광조의 순수한 뜻을 호전시키는데 만족해야 할 정도.
3.인종 재위기의 정국과 이언적
1)인종의 즉위와 훈구, 사림의 동향
인종 말의 대사면이 실시되는 과정에서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인의 복직과 현량과의 복과 및 급제자의 등용 등 구체적인 성과를 얻음
2)대, 소윤의 갈등과 이언적의 역할
명분상 왕세자편에 섰으며 명종의 즉위로 권, 척신인 윤원형, 이기 등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였을 때 반대입장에 서게 되었으며, 이시기의 그는 종전처럼 사림의 여론을 주도하면서 왕의 교화를 강조하는 현철군주론의 전개에 주력
4.척신 윤원형의 지배정국과 이언적
1)을사사화와 이언적의 대응
-사화는 윤원형, 이기 등이 윤임과 인종의 왕위 계승을 옹호하였던 사림파를 정계에서 축출하려는 목적으로 사화를 일으키고 점차 확대해 나감
-첫번째 제거대상인 윤임, 유권, 유인숙의 죄상을 대간을 통한 탄핵을 시도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왕에게 직접 고하고 충순당에 모여 그 치죄를 논하였을 시 우찬성의 권벌과 좌찬성의 이언적도 함께 참여하여 완곡하게 저지하려 하였으나 대세를 바꿀 수는 없음. 또한 이 와중에 위관으로서 사화인의 국문을 하기도 함
-충신당에 참여한 중신들은 거의 모두 2, 3등 공신에 책록되어지는 것과 병행하여 경기감사 김명윤이 봉성군의 역모를 고변함으로서 사림파의 사화 피해가 확산됨.
-공신책록 이후 훈구세력과는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사이이므로 윤원형의 탄핵을 받아 그 훈작을 삭탈당하고 향리로 돌아온 그는 세사를 사절하고 학문에 전념
-사화에 대한 우유부단한 대응은 그가 사화에 임하여 처음부터 강경하게 대응한다고 대세를 바꿀 수 없을뿐더러 도리어 사림파에게 화를 더 가중시킬 뿐이라는 현실인식에서 나온 행동으로 보임
2)양재역 벽서사건과 이언적
-명종2년에 척신체제의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건을 조작하거나 무고를 조장함으로써 잔존한 사림파마저 제거하려함
-양제역 벽서사건으로서 훈척들은 을사사화에 요행히 화를 면했거나 가벼운 처벌을 받았던 사림파에게 다시 위해를 가함(권발, 이언적도 이에 연루되어 강계에 안치)
-명종3년 안명세 옥사, 명종4년 이홍윤 옥사를 일으키며 사림파의 희생을 확대시킴
3)척신정치의 고착과 유배기의 이언적
이기가 명종5년에 병으로 정계에 은퇴함으로서 문정왕후의 죽음까지 윤원형이 권력장악 및 고착화
-명종8년까지 약 6년동안 유배지에서의 자신의 병약함과 대부인의 상을 당하는 육체적 공통과 정신적 고뇌에서서도 학문연구와 저술에서의 노력을 다함
5.이언적의 현실인식과 대응
1)권척세력과의 관계설정방식
김안로, 윤원형으로 대표되는 권척세력의 정국운영이 공론을 무시한 파행적인 정국운영으로 이언적에게 용납될 수 없는 것이며 그들에 대해서는 비판적 자세를 견지(김안로의 정계복귀반대, 을사사화의 정명공대한 처리를 주장, 윤원형의 비정상적인 정국운영비판 등)
-한편 그가 극간을 하지 못했다는 후대의 지적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대응반식은 적극이고 진취적인 일면을 결하고 있었던 것을 부인하기 어려우며 현실을 인정하는 수준에서 권척신으로 부터 일정한 양보를 얻어내려는 우회적인 대응방식을 취한 것으로 보임
2)개혁론과 그 성격
민생-위정자의 인정을 강조, 군주의 검약강조
군정-권척세력의 부정으로 의해 변장 및 수령의 침탈이 가열됨을 시정 촉구
인사행정-공론을 무시한 인사행정을 공론에 의한 인사시행에 노력
언론-공론이 수용될 수 있는 언로의 개방 및 국왕의 납간을 주장
개혁의 주체-개혁의 주체는 군주로 인식하고 경연을 통한 군주의 끊임없는 수양과 경과 성을 바탕으로 한 솔선수범을 강조
3)사림 내에서의 이언적의 위상
김안로의 정계복귀 과정에서 한 단계 격상된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김안로 실세 후 사림의 점진적 성장과 함께 더욱 큰 명망을 얻게됨. 비록 말년에 보여준 소극적이고 현실타협적인 자세와 그 결과로서의 공신책록이 그의 명망을 가리는 역기능으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그의 이부분의 모습에 불과
4)평가의 두 갈래
-이이 및 조식의 평가-그의 인간됨과 학문의 뛰어남은 인정하나 을사사화 때 보여준 소극적, 미온적인 태도와 위관으로서 사림을 적극적으로 구하지 못한 점 등 출처에 대절을 잃었다는 측면을 비중을 두면서 그의 평가에 인색
-이러한 평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을사인의 상징적 존재, 당시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학문적 업적과 정치적 기능이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하여 상승효과를 이끌어 낸 데에도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황의 사림 내에서의 위치가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굳어지면서 이언적에 대한 그의 평가방향과 내용 또한 후대인이 가필하기 힘들 정도로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는 전범이 된 데 힘입은 바가 크다
제 7장 퇴계 이황의 가계 및 생애와 현실대응
1.머리말
이황의 삶을 그 당시의 역사 속에서 파악하고 또 그것을 그의 시대와 연결시킴으로서 참모습에 보다 가까운 그를 부각시켜 보고자 함
2.이황의 가계
고려말의 향리에서 출발하여 선초에 와서 가까스로 양반의 반열에 끼였던 가문을 스스로 혁혁한 문지로 승차 및 정착시킴
3.이황의 생애
1)그의 성품과 생활태도
그의 성품에는 다소 소극적, 피동적인 일면이 있었는데 그것은 스스로의 학문의 성취와 인격의 수양에 만족하는 학자형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데는 매우 큰 도움
2)그의 관력과 관직관
-관직 초기에는 대체로 충직한 편이었으나 중종기의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로 인한 직접적인 충격과 사화 후의 사습의 퇴폐 및 세도의 혼란에 말미암은 점이 늘 그를 사직, 귀향할 것을 희망하게 하였고, 따라서 그의 관직생활은 공백기가 많은 산만한 것이 됨
-그는 관리로서의 청렴하고 조심스러운 그의 생활은 그를 권근지인으로 또는 청백리로 만듦으로서 여러 사람의 숭앙을 받음
3)그의 현실참여
-조광조가 적극적 능동적 현실참여적인 특징이 강한 관료형 인간이었다면, 이황은 순절, 겸허, 순정, 명백한 성격의 학자형 인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황의 성품, 생활태도라든지 관직관, 현실참여태도, 업적 등을 종합해볼 때, 그는 탁월한 행정능력과 적극적인 참여의식을 지닌 훌륭한 관료는 아니었다. 그러나 성실성과 침잠성을 지니고 학문에 집착하여 성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또 후대에까지 큰 영향력을 지닌 훌륭한 학자였다는 것은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제 8장 이덕홍의 시대와 현실대응
1.머리말
이덕홍은 이황의 문인 중에서 비교적 긴 세월에 걸쳐 그를 가까이서 모신 고제 중의 한사람으로서 그의 학문세계나 사상체계를 살펴보는 것은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제이나 사료의 부족으로 이 글에서는 그가 살았던 시대를 비교적 소상히 살펴봄으로서 그의 정체를 밝히는데 도움이 되고자 함
2.지배세력의 갈등과 그 추이
이덕홍이 생존한 시기는 16세기 중, 후반이며 이 시기는 권신, 척신주도의 정치체계가 사림정치로 이행되어 가던 때
-성종 중엽 훈구파의 대응세력으로 역사속에 그 모습을 드러낸 사림파는 양자간의 대립, 갈등 속에서 여러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도 그 성장을 지속되어짐.
3.사림정치의 성립과 전개
-성리학은 왕조의 건국이념이자 통치이념으로서 사림파는 바로 그 성리학적 이념과 이상을 현실에 구현하고 요, 순, 3대의 지치를 재현하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있음
4.이덕홍의 가계와 사우
-이덕홍이 태어난 중종36년은 사림파가 권척세력에 의해 크게 견제를 받는 시기
-이덕홍이 이황이 죽기까지 수학한 시기는 명종의 친정체제가 시작되어 사림의 중앙정계의 진출과 성리학의 이해수준이 높아지는 시기이며, 선조의 즉위 후 기묘, 을사사화의 피화인이 사면, 복권되거나 복직되고 사림정치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던 시기
5.이덕홍의 출처와 현실대응
-이덕홍의 출사는 스승의 사후 대신중심의 정치운영이 종언을 고하고 신진사류 주도의 사림정치가 궤도에 오르던 때였고 그가 퇴관한 시기는 사림정치가 붕당정치로의 전환조짐을 보이던 시기이며 생애의 마지막에 임진왜란을 격음
-사림계 일부 인물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위학, 수기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지만 치인 즉 출사를 완전히 배격하지는 않음으로서 사림의 일반적 수준에 못미치는 미관말직을 굳이 마다하지 않고 근면하게 종사하였고 기회시마다 스스로의 경륜을 펼치려 노력
-그의학문적 성과는 상당한 양질으로 그의 문집에 남아 그의 사상체계와 이황문도 내에서의 위상, 나아가 영남학파 내에서의 위상을 가늠하게 함.
-하지만 역사속에 남긴 족적은 그의 관적 및 현실인식 및 자세에서 드러나듯이 그리 뚜렷하지도 않고 독특한 성향을 지니 것도 아니어서 역사상의 한 인물로서의 그의 모습을 구성하는 작업의 어려움
*중국의 군현제
중앙집권적인 관료제 국가였던 고대 중국의 역대왕조에서 시행하던 군현제도에서의 현(縣)은 이미 춘추시대(春秋時代)에도 존재하였으나, 그것은 단순한 비읍(鄙邑), 즉 소읍(小邑)이라는 뜻에 지나지 않았다. 즉 이 당시의 현은 경대부(卿大夫)에게 주었던 봉지(封地)를 몰수하거나 새로 점령한 영토 등에 설치한 것으로, 중앙과의 통속관계(統屬關係)가 반드시 밀접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춘추시대 말기가 되자, 각국 사이의 싸움이 격화하여 일반 서민에게도 군역(軍役)을 부과할 필요가 생김에 따라 이를 반대하는 서민의 저항을 누르고 국왕으로서의 지배권 확립을 강화하여 징발(徵發) ·징세(徵稅)를 강행하기 위하여 중앙으로부터 관리를 파견하고, 현을 재편성하고 직할지화하여 지배하게 되었다. BC 350년 진(秦)나라 효공(孝公)이 상앙(商)의 건의를 받아들여 나라 안의 작은 촌락을 합쳐 41현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은 그 예라 할 수 있다.
군(郡)도 현과 거의 같은 경로로 내려왔으며, 군과 현 사이에 본래는 통속관계가 없었으나, 군은 변경지역에 설치된 경우가 많았다. 또 통할지역이 넓었기 때문에 군 안에 몇 개의 현이 설치되면서 통속관계가 발생하였다. 이어 BC 221년에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는 전국을 통일하자 전 영역에 현을 설치하고 전국을 36군으로 구획하여 통치하였다. 이것이 중국 군현제의 시초로, 이후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었으나 지방통치의 이념은 청대(淸代)까지 거의 2000년 동안 군현제가 존속하였다.
*한국의 군현제
한국의 군현제도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505년(지증왕 6) 국내에 주(州) ·군(郡) ·현(縣) 제도를 정하고, 실직주(悉直州:三陟)를 설치하여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삼은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군현제도는 전국에 실시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주 ·군 ·현 제도의 실시 이전에는 52읍륵(邑勒) 제도가 실시된 것으로 보인다. 통일 전 신라는 전국을 5주(五州)로 나누고, 주 밑에 군 ·현을 두고 촌주(村主)를 통하여 농민을 직접 다스렸다.
통일신라시대의 주 ·군 ·현 제도는 중앙에서 주에는 총관(摠管), 군에는 태수(太守), 현에는 현령(縣令)을 파견하여 다스렸다. 현의 예하단위인 촌(村)은 자치단위로 운영되고, 천민집단인 향(鄕) ·소(所) ·부곡(部曲)이 따로 있었다. 그리고 주 ·군 ·현의 명칭은 757년(경덕왕 16)에 모두 한식명(漢式名)으로 개칭되었으나, 혜공왕(惠恭王) 이후의 기사에는 대부분 구명칭으로 나타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행정구역을 보면 9주, 117군, 293현의 지방 행정체제를 갖추었다.
고려시대 지방행정기구는 군현제도로 운영되었다. 성종(成宗) 이전은 서경(지금의 평양)과 대도독부(大都督府) 기타 북부의 여러 진(鎭)을 제외한 이외의 주 ·부 ·군 ·현에는 중앙으로부터 상주관의 파견이 없고 단지 지방 호족으로 조직된 반독립적 자치(自治)에 맡겨져 있었다. 다만, 수시로 징수관(徵收官)의 관원이 중앙에서 출장 형태로 파견 순회하였다. 983년(성종 2)에 12목(牧)을 설치하면서 지방행정에 대한 통제와 중앙집권화를 위하여 지방관을 파견하여 상주하게 하고, 소관 주 ·군 ·현 내의 제향직(諸鄕職)을 감독하게 하였으나, 관할구역에 대한 수효는 알 길이 없다.
995년에는 전국을 10도(道)로 나누고 10도 소관 내의 행정구역은 128주, 449현, 7진(鎭)으로 나누어 확고한 지방행정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018년(현종 9)에는 전국 행정구획에 대한 3차개혁을 단행하여 전국을 4대도호부(四大都護府), 8목(牧), 56지주군사(知州郡事), 28진장(鎭將), 20현령(縣令)의 제도로 정비하였다. 성종 때 실시한 10도제(十道制)는 당(唐)의 10도제를 형식적으로 모방하여 명칭만 붙인 것이어서 행정구역으로서의 구실은 전혀 못하였다. 그리고 5도제(五道制)가 전국적으로 성립된 것은 예종 ·인종 이후인데, 도의 책임자인 안찰사(按察使) 역시 지방행정제도의 장관과는 무관하였다.
고려시대의 지방행정기구는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된 주군(主郡:領郡) ·주현(主縣:領縣)이 있고,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군(屬郡)과 속현(屬縣)이 있었다. 지방행정은 중앙정부와 직접 연결된 주군과 주현이, 외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군 ·속현을 간접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군현제도는 종전에 대호족과 그의 지배를 받던 작은 호족 간의 상하 주속(主屬)의 관계가 군현제의 편성 때에 군현 상호간의 주속관계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군현제도는 주군 ·주현보다는 속군 ·속현의 수가 더 많았고, 군현제의 편성은 신분적 구조 위에 형성된 점, 그리고 중앙에서 파견한 외관을 기준으로 구성된 점이 특징을 이루었다.
조선시대의 군현제도를 보면 백성에 대한 향리나 토호의 사적 지배를 막고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한 일원적 지배체제를 갖춘 것이 특징이다. 조선시대의 외직(外職)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밑에 부 ·목 ·군 ·현을 두었고, 군 ·현 밑에 면(面) ·이(里)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두고 운영하였다.
도(道)에는 관찰사(觀察使)를 두고 모든 군현에 군수(郡守)와 현령(縣令:縣監)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였으며, 고려시대와는 달리 속군 ·속현 제도가 폐지된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군현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 때 8도를 23부로 개편하면서 폐지되고, 부(府) 밑에 군(郡)과 면(面)을 두게 되었다.
*유향소
수령의 아문(衙門)에 다음가는 중요한 관아라 하여 이아(貳衙)라고 불렀으며, 향소(鄕所) ·향소청(鄕所廳)이라고도 하였다. 이 제도는 고려의 사심관(事審官)에서 유래된 것으로, 초기에는 덕망이 높고 문벌이 좋은 사람을 사심관으로 삼다가 말기에는 전함(前銜:전직) 품관(品官)들을 사심관에 임명하면서 유향품관(留鄕品官) ·한량관(閑良官)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이들 유향품관 ·한량관들이 자의적(自意的)으로 유향소를 만들어 지방자치의 기능을 맡았다. 유향소는 벼슬에서 은퇴한 이들 지방 품관을 우두머리로 뽑아 지방의 풍기를 단속하고 향리(鄕吏)의 악폐를 막는 등 민간자치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맡았는데 태종 초에 와서 차차 지방 수령과 대립하여 중앙집권을 저해하는 성향을 띠게 되어 1406년(태종 6)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좀처럼 없어지지 않아 그 폐지가 불가능해지자 1428년(세종 10)에는 유향소의 설치를 다시 명하여 각 유향소의 품관 정원을 정하고 이를 감독하는 경재소(京在所) 제도를 강화하였으며, 수령의 비행(非行) 여부를 논할 수 없다는 법이 마련됨에 따라 유향소의 자치적 성격은 크게 줄어들어 품관들은 위축된 지위의 보존을 위해 수령들과 타협 결탁하기도 하였다.
유향소는 1467년(세조 13)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그들의 일부가 이에 가담함에 따라 다시 폐지되었는데, 이때 폐지된 이유 중의 하나는 유향소가 수령의 편에 서서 백성을 침학(侵虐)함이 심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뿌리를 내린 유향소는 쉽게 없어지지 않고, 꾸준한 복설(復設)운동의 결과 1488년(성종 19)에 다시 부활되어 향임(鄕任), 혹은 감관(監官) ·향정(
★사심관제도,기인제도(고려시대), 경재소(조선시대)
--> 중앙집권화를 위해..(왕권강화)
★유향소(조선시대)
--> 지방분권적 성격..(왕권약화)
1)사심관제도
국초에 고려는 지방통제가 힘들었죠.
사심관제도란 쉽게 말하자면 중앙공신들 중에서 자기 출신인 지방을 다스리게 한 제도예요.
그러니깐 중앙에 반발하는 지방토호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원래 그 지방 출신인 중앙공신들에게
작위를 내리고(공작 후작 백작 등등) 다스리게 하는겁니다.
제일 처음 이 사심관에 임명된 사람이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인데..
신라를 포기하고 통채로 고려에게 바쳐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죠.
왕건은 경순왕에게 정순공이란 작위를 내리고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경주지방을 다스리게햇습니다.
중앙에 반대하는 토호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공신들을 사심관으로 임명한겁니다.
2) 기인제도
이건 잘 아실꺼예요..일종의 인질이죠.
유력한 지방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 자식들에게 중앙관직을 내려주고
서울에 머물르게 하는 거죠. (실상은 인질)
3)유향소제도
조선시대 지방자치기구인데..
중앙의 세력이 아니라 지방의 토착세력들이 만든 기구라고 보면 됩니다.
중앙에서 지방관(관찰사, 수령 ,현감 등등)을 보내어 지방을 다스려야하는데..
지방에 원래 거주하던 지방세력들이 유향소같은 이런 자치기구를 만들어 세력을 키우니
당연히 중앙집권화에 역행하는 역할을 한거죠.
4)경재소제도
경재소는 유향소를 견제하기 위해 만든겁니다.
세종대왕때 중앙의 현직관리의 가족들이 유향소를 장악하도록 하려고
경재소를 세웠습니다.
지방세력들이 유향소따위를 만들어 중앙집권통치에 방해가 되니
경재소를 만들어 견제한거죠.
*향약-조선시대 향촌사회 자치규약
시행주체 ·규모 ·지역 등에 따라 향규(鄕規) ·일향약속(一鄕約束) ·향립약조(鄕立約條) ·향헌(鄕憲) ·면약(面約) ·동약(洞約) ·동계(洞契) ·동규(洞規) ·촌약(村約) ·촌계(村契) ·이약(里約) ·이사계(里社契)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렀다.
시행시기나 지역에 따라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유교적인 예속(禮俗)을 보급하고, 농민들을 향촌사회에 긴박시켜 토지로부터의 이탈을 막고 공동체적으로 결속시킴으로써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16세기에 농업 생산력의 증대, 이에 따른 상업의 발달 등 경제적 조건의 변화로 향촌사회가 동요하고, 훈구파의 향촌사회에 대한 수탈과 비리가 심화되었다. 이에 중종대에 정계에 진출한 조광조(趙光祖) 등의 사림파(士林派)는 훈척들의 지방통제 수단으로 이용되던 경재소(京在所) ·유향소(留鄕所) 등의 철폐를 주장하고 그 대안으로서 향약의 보급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소농민경제의 안정을 바탕으로 한 중소지주층의 향촌 지배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일단 좌절되었으나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한 선조대에 와서 각 지방의 여건에 따라 서원(書院)이 중심이 되어 자연촌, 즉 이(里)를 단위로 시행하였다.
이 시기에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에 의해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의 강령인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 잘못은 서로 바로잡아주며, 예속을 서로 권장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준다는 취지를 살려 조선의 실정에 맞는 향약이 마련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사족세력은 하층민들을 통제하고 사족 중심의 신분질서를 강화할 목적에서 양반신분의 상계(上契)와 상민신분의 하계(下契)를 합친 형태의 동약(洞約)을 만들었다.
보통 몇 개의 자연촌을 합친 규모로 운영되었으며, 목천동약(木川洞約)과 영조 때의 퇴계학파 최흥원(崔興遠)이 이황의 《예안향약(禮安鄕約)》을 증보하여 사용한 《부인동동약(夫仁洞洞約)》이 유명하다. 또한 1571년(선조 4) 이이는 《여씨향약》 및 《예안향약》을 근거로 《서원향약(西原鄕約)》과 이를 자신이 수정 증보하여 1577년에 《해주향약(海州鄕約)》을 만들었는데, 이들 향약은 조선후기에 가장 널리 보급된 한국 향약으로서는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7세기 후반부터 유향(儒鄕)이 나누어져 사족의 영향력이 약화된 반면에, 면리제(面里制)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수령권(守令權)이 강화되어, 지방관이 주도하여 향약이 확산되어 갔다. 면을 단위로 하여 기존의 동계 ·촌계를 하부단위로 편입시켜 신분에 관계없이 지역주민 전부를 의무적으로 참여시켰다. 18세기 중엽 이후 재지사족을 매개로 하던 기존의 수취체제가 수령에 의한 향약의 하부구조로서 공동납체계 속에 포함되면서 그 성격이 변모되어갔고, 동계운영에 있어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하층민의 요구와 입장이 첨예하게 표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층민이 참여하기를 꺼리거나 하계안이 없어지는 현상이 일반화되어, 사족이 주도하는 동약에서의 운영권은 기층민간의 생활공동체로서의 촌계류(村契類) 조직과 마찰을 일으키고 점차 기층민의 입장이 반영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19세기 중 후반 서학(西學) ·동학(東學) 등 주자학적 질서를 부정하는 새로운 사상이 등장함에 따라 향약의 조직은 위정척사운동에 활용되었다.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측에서 미풍양속이라는 미명 아래 식민통치에 활용하였다.
*사마소
16세기 초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인 사마시(司馬試) 출신의 젊은 유림(儒林)이, 그 당시 지방자치 기관으로서 수령의 자문기관 노릇을 한 훈구파(勳舊派)의 유향소(留鄕所)에 대항, 향권을 주도하기 위해 만든 자체 협의기구이다.
대개 각 고을의 관아 근처에 자리잡고 하나의 특수기관처럼 행세하면서, 생원·진사의 친목과 학문, 정치토론 및 교육활동 등을 펼침으로써 각 고을의 교화와 지방 행정에 기여하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뒤로 가면서 점차 노골적인 압력단체로 발전하여, 유향소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수령의 지방통치에 간섭하기에 이르렀다.
또 노비와 토지를 확보하여 재산을 늘이고, 향리·백성을 함부로 잡아다 형벌을 주는 등의 폐단을 가져왔는데 이런 폐단은 특히 호남·영남 지방에서 심하였다. 결국, 이러한 폐단과 유향소와의 끊임없는 마찰이 문제가 되어, 1603년(선조 36) 유성룡(柳成龍)의 건의로 폐지되었으나 지방에 따라서는 그 그릇된 습관이 계속되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