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
사업은 나라를 위한 것 전 재산 사회 환원 구두 두 켤레 남기고 떠나-②
全재산 사회에 기부하며 장남에게 남긴 말 "대학 졸업…"
6·25 전쟁 중에서도 기술개발 멈추지 않은 유한양행 유일한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하자 유한양행의 앞날에도 희망과 활력이 넘치고,
일제 말기 배일사상 혐의로 구금되었던 임직원들은 풀려나 회사로 돌아왔다.
이제부터는 일제의 부당한 간섭 없이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펴나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이 활기찬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광복을 맞이한 한국에 이데올로기적 시련이 다가왔다.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한이 미국과 소련에 분할 점령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유한양행은 38선 이북과 과거 만주 및
중국대륙까지 진출해 기업 활동을 펼치고 있었는데,
그 지역 모든 상권을 일시에 잃고 말았다.
대륙에 구축하고 있던 기업자산은 유한 전체 자산의 80%에 이르는 엄청난 것이었다.
한편 미 군정 시기에 미국 의약품이
대량으로 들어왔다.
미제 의약품은 품질이 좋았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때 개발된 약품들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나 한국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신제품들이었다.
항생제인 다이야진·페니실린이나 결핵치료제로 쓰이는 파스 등은 그 효력이 경이적이었다.
국내에서 생산해 내는 제품은 그 질이나 가격으로는
도저히 미국 제품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1946년 7월 유일한은 광복된 조국에 돌아왔다.
그 무렵 한국의 기업가들은 대한상공회의소를 결성하고,
유일한에게 초대 회두(會頭)를 맡아달라고 간청했다.
그들은 한국 기업계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유일한이 가장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뜻밖의 부탁에 유일한은 고심했지만, 이 일은 해방된 조국에서 절실한
재계를 건설하는 가치 있는 사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그는 국내 상공업계를 공정하게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 유한양행 사장직을 사임했다.
이때 일한은 구영숙을 사장으로 영입하고 자신은 일선에서 물러나 회장이 되었다.
유일한과 구영숙은 미국의 한인소년병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이며,
구영숙은 성품이 곧고 강직하며 패기와 능력이 있어서
유일한은 일찍부터 그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구영숙은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의학계에 몸담고 있었다.
이런 사람에게 회사를 맡기면 자기가 일일이
관여하지 않더라도 잘 운영되어 가리라 믿었다.
유일한은 대한상공회의소 회두 자격으로, 그 무렵
이화장(梨花莊)에 머물고 있는 이승만을 인사차 방문했다.
이승만과는 미국에서 여러 차례 만난 일이 있었으나 가까이 모신 일은 없었다.
이승만은 유일한을 정중히 맞아주었다. 그 자리에는
조병옥을 비롯 저명한 정치인들이 함께했다.
이때에 이승만은 그에게 상공부 장관 입각을 권했으나
유일한은 정중하게 거절한다.
그로부터 3개월 뒤 그해 12월 유일한은 돌연 다시
미국으로 떠난다. 계속되는 입각 강권 때문이었다.
6·25전쟁은 민족의 비극이며 한국 역사의 오점이다.
그 상흔은 휴전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이 전쟁 아닌 전쟁, 민족상잔의 동란으로 남북한 전 지역은 황폐해졌다.
북한군은 한때 부산과 대구를 제외한 남한 전 지역으로 쳐들어왔으며,
군인만이 아니라 일반 국민까지도 수백만 명이 죽고 가족은 흩어졌다.
산업시설은 파괴되고 특히 경인지역 공장지대가 입은 피해는 물론,
전 국토가 잿더미로 뒤덮였다.
유일한은 미국에서 일본으로 거처를 옮겨 꾸준히 본사 직원들과 연락,
지시를 내리며 회사를 온전히 보전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유한양행은 전쟁 초기 시설과 자재에서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보관하고 있던 약품은 징발되었으나 북한군은 공장시설을 파괴하지 않았다.
서울 수복으로 회사는 활기를 되찾는 듯했으나
그해 겨울 다시 중공군 참전으로 정부와 국민들은
서울을 다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유한양행은 가까스로 시설 일부와 약품원료를
피란지로 옮겨놓을 수 있었다.
임시수도가 된 부산에 도착한 유한양행은
범일동 삼광제약 사옥을 얻어 가까스로 업무를 시작했다.
부산 피란지에서의 제약 사업은 수많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유한양행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간유(肝油)에서
비타민을 추출, 정제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다.
창의적인 생각과 기술개발은 언제 어느 때에도 성공의 비결임을 절감케 했다.
번창하는 사업만큼 정치자금의 압박이 거셌지만 굴복하지 않아
공방전을 거듭하던 평택 오산전투에서 중국군과
북한군이 밀리기 시작하자 전세는 뒤바뀌었다.
중국군과 북한군이 북으로 달아나면서 서울은 다시 수복되었다.
38선 이북 철의 삼각지대에서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전쟁 기간 내내 양군의 성과 없이 지루한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휴전회담이 개시되고 마침내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유한양행은 서울 종로구 신문로 본사로 돌아왔다.
이제 유일한의 진두지휘 아래 활기를 되찾게 되었으며
그간 구상해 오던 새로운 계획들도 차질 없이 착착 진행해 나갔다.
“6·25전쟁 동안 회사를 지켜낸 것은 유한양행의 사원들 덕분입니다.
유한양행은 국민의 것이라는 제 기업관을 사원 여러분
또한 이어받아 불사조 같은 정신으로 지켜낸 덕분입니다.”
유일한은 경기도 소사 제약공장 복구와 확장에 손을 댔다.
회사 자본을 대폭 증자하고 정부에서 주선하는 ICA자금 25만달러를 대부받아
소사공장 생산시설을 개선, 제품 생산에 힘썼다.
일한은 또 아메리칸 사이아나미드회사와 기술제휴를 체결하고
현대식 항생물질 소분소를 기동시켜 1957년 한국 최초로 항생물질제품을 생산해 냈다.
유일한은 사장직을 전무인 이건웅에게
물려주고 회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회사 운영 합리화를 위해 기구를 개편했다.
또 회사에 농축부를 두고 가축약품을 생산했다.
이 가축약품 생산은 유일한이 제약회사를 세울 때부터의 계획이었으며,
그는 한국 농촌을 위해 도움이 되고자 늘 고심하고 있었다.
유일한이 유한양행을 처음 세웠을 때에도 한국 농촌에서
농민들이 제작하는 특산물을 해외로 수출하는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가축약품 생산에 착수한 것은 농촌을 위하는 그의 의지 표현이었다.
1960년대 들어서자 유한양행은 더욱 번성해 나갔다.
이 시기 유일한은 동남아 각국을 순회하며 판로를 개척했다.
또 유럽과 미국의 이름난 제약회사를 찾아 기술제휴하며 자체 기술개발에 힘썼다.
그는 유한양행을 최신 기술과 최고 시설을 갖춘 국내 제일의
제약회사로 발전시킬 뿐만 아니라 세계 제약업계로 웅비하는 꿈을 갖고 있었다.
1960년대 소사공장에 최신설비를 갖춘 실험연구실을 준공했고,
속초에 어간유제유소를 신설, 다음 해에는
이를 속초 수산공장으로 발전시켜 나아갔다.
또 이해에는 인삼네오톤을 홍콩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유한양행이 날로 커지자 정치자금 압박 또한 거세졌다.
정부와 공생관계를 이루며 특별융자 등
갖은 혜택을 받는 정치재벌들이 생겨났다.
정부 특혜를 받지 못하는 기업은 그만큼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도 이를 모르지 않았으나 그는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기업이 정부와 유착, 부정한 돈으로 경영하면
그들에게 종속될 위험이 있다.
그건 기업이 아니라 정치가들 머슴일 뿐이다.”
유한양행이 정치자금을 내놓지 않자 세무서와
치안국 경제계에서 세무사찰로 압박을 가했다.
회계과 직원들이 치안국에 끌려가 매를 맞기도 했다.
사장 이건웅은 유일한에게 하소연했다.
“회사마다 얼마씩 할당된 모양입니다.
1 더하기 1은 2가 아니라 3, 4도 될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리니 회사가 초상나게 생겼습니다.
회장님, 이번만은 회사를 위해서도 좀 굽히는 게 어떻겠습니까?”
“1 더하기 1은 2일 뿐이야! 돈보다는 실력으로 승부를 해야 하지 않겠나!
상공인들이 정치인에게 자금을 바치면
그만큼의 돈을 제품값에서 뽑아내야 하고,
결국 골탕먹는 건 국민들이네. 알겠나!”
무시무시한 일제 총독부 세무사찰도 이겨냈던
유한양행의 회계장부는 이번에도 완벽했다.
그러자 치안국은 아예 유한양행 사무실을 샅샅이 뒤져
예금통장과 도장까지 압수하고는
몰래 은행에서 9600만원이라는 큰돈을 빼내가고 말았다.
교육의 중요성 알고 유일한은 학교를 세웠다
1962년 유한양행은 서울 영등포 대방동에 대지 6600㎡(2000평),
건면적 4800㎡(1460평) 사옥을 신축하여 본사를 옮기고
전국 규모의 특약점 조직을 구축했다.
이해 유일한은 기업을 공개하면서 주식시장에 상장했다.
또 유일한은 사원지주제(社員持株制)를 도입, 신주(新株)를 사원들에게 분배했다.
기업 성공의 혜택을 받도록 하면 사원들도 회사와
함께하는 운명공동체 의식을 갖게 된다고 생각했다.
유한양행 주식 가격은 날로 상승해 갔다.
이는 사회가 유한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믿는 증거였다.
주식상장 뒤 유한양행 임직원들은 회사 운영에 책임과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이 무렵 유한양행은 사보도 발간했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한국 제약업계,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 제약업계 정보들을 사보를 통해 사원들에게 알리면서
경영합리화를 수시로 토론토록 했다.
사원에게 회사 운영 실태를 알리는 것은 오늘의 기업사회 사조이며,
그렇게 해야만 노사갈등도 해소되고 모든 기업가족은
책임과 사명을 갖게 된다는 것이 유일한의 신념이었다.
유한양행은 날로 발전해 갔다.
끊임없는 기술혁신으로 1965년에는 PAS 원료생산을 개시했다.
1968년에는 한국 최초 IBM 전자자료처리실을 설치했다.
이어 소사 공장을 ‘펄 벅 재단’에 인계하고, 새로운 시설의 공장을 신축하고자
시흥에 대지 8만2600㎡(2만5000평)를 매입,
1969년에 건면적 5780㎡(1748평) 영등포공장을 준공했다.
이어 미국 킴벌리 클라크회사와 합작해 ㈜유한킴벌리를 설립,
유한양행은 세계 제약업계와 어깨를 겨루는 발전을 이룩해 나아갔다.
유일한은 교육은 타고난 인간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계발해주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교육을 받은 사람은 능력이 계발되어 사회에 기여할 수 있으나,
교육을 받지 못하면 잠재된 능력이 빛을 보지 못하고 시들어 버리고 만다.
일한은 한민족은 세계 어느 민족에도 뒤지지 않는 자질을 갖고 있으나,
당파싸움에 빠져 이를 길러주는 교육이 부실했기에
일제강점기라는 수모를 겪은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유일한은 6·25전쟁이 휴전은 되었지만 집을 잃고 가난해
학교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한 청소년들이
거리를 떠도는 모습을 보며 가슴 아파했다.
그는 이들을 버려둘 수만은 없다고 생각,
1952년 소사 공장 안에 임시교실을 만들고
청소년을 모집해 학비와 숙식비를 제공하면서 기술교육을 실시키로 했다.
이것이 ‘고려공과기술학교’의 시초였다.
이 학원에서의 기술교육은 그 뒤에도 계속 이어져
많은 어려운 청소년들이 기술을 습득하고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1957년 서울 본사가 있는 대방동에서 다시 ‘고려공과학원’을 개교,
역시 청소년들에게 기술을 가르쳤다.
교육연한 수업내용은 정규 공업학교와 다를 바 없었지만
정부인가를 받지 않아 우수한 학생들의 응모가 적었다.
유일한은 정부 교육령에 따른 정규 고등학교 신설을 서둘렀다.
1963년 어느 날 그는 세브란스의전 교수와
원자력병원장을 역임한 김명선을 불렀다.
김명선은 유일한이 새 만년필을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못 보던 만년필이군요. 새로 사셨습니까?”
“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셰퍼 만년필을 사서 19년간 써 왔거든.
설명서에 언제든 무료 수리해 준다고 써 있었는데 얼마 전에 고장이 났어.
그래서 미국 셰퍼 본사로 고쳐달라고 보냈는데,
자기들 제품을 19년이나 써주어서 고맙다며
수리 대신 새 만년필을 보내주더군.”
“19년 쓴 만년필을 고쳐달라고 보내는 사람이나,
그 대신 새 제품을 보낸 사람이나 다들 예사롭지가 않습니다그려. 허허.”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말인데, 기업활동으로 얻은 이윤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게 내 경영철학이자 국민에 대한 약속이네.
그래서 이제부터 교육사업에 힘을 쏟으려 해.
자네가 내 뜻을 알고 책임을 맡아주었으면 하네.”
그리하여 1963년 ‘재단법인 유한학원’을 설립,
이사장에 세브란스의전 교수 김명선 박사를 초빙,
학교 설립을 준비해 1964년 ‘유한공업고등학교’를 개교했다.
유한공업고등학교에 대한 유일한의 기대와 열성은 대단했다.
그는 사재를 들여 학교 설립 및 운영에 필요한 비품을 모두 준비했다.
1966년에는 유한중학교를 병설했다.
학생들 모두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으며 시설도 전국에서 손꼽힐 만큼 좋았다.
학교 운영도 순조로웠고 교육 내용도 충실해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유한학원은 1977년 12월 유한공업전문학교를 설립,
1979년 유한공업전문대학으로 개편했으며 1991년 12월 유한전문대학,
1998년 유한대학, 2011년 유한대학교로 발전을 이룬다.
메카트로닉스·IT·콘텐츠디자인·지식서비스 등
모두 4개 학부 22학과를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유일한은 민족기업을 창업해 성공적으로 운영해 왔으며,
또 거액의 재산을 내놓아 학교를 세우고 청소년들에게
교육받을 기회를 주면서 한민족의 근대적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평생 근면·성실·정직을 실천한 참된 기업가 유일한
1971년 3월 11일, 유일한은 일흔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수많은 내빈이 참석하여 거인의 가는 길을 눈물로 지켜보았다.
그의 주검을 실은 차는 ‘할아버지 고이 잠드소서’
플래카드가 내걸린 유한공고 교정으로 향했다.
찬송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그는 ‘유한동산’에 안장되었다.
저만큼 세워진 그의 동상이 흙으로 돌아가는 그를 굽어보고 있었다.
정부는 그 공로를 기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유일한은 유언에서, 자신의 모든 주식을 학교재단에 넘기고,
딸 유재라에게는 묘지 주변 땅 1만6500㎡(5000평)를 주어
유한동산으로 꾸며 학생들이 마음껏 즐기게 했다.
미국의 장남 유일선에게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대학까지 졸업했으니 앞으로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그러면서 재산을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
그동안 회사를 키워준 사회에 모든 것을 되돌려 준 유
일한에게 남은 것은 양복 두 벌과 구두 두 켤레뿐이었다.
그의 이런 행적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유일한의 행적을 되짚어 보면 오직 경탄과 존경을 금할 수 없다.
보통 사람이라면 부모 슬하에서 응석을 부릴 아홉 살 나이에
태평양을 건너 머나먼 이국땅에 갔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하물며 말도 다르고 풍습도 다르고 모양새도
다른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 자기 힘으로
생활을 개척하면서 대학까지 마쳤다.
그곳에서 신문팔이에서부터 사업을 시작해 성공한
그 굳은 의지와 실천력은 경외감마저 들게 한다.
일한은 사생활도 대단히 검소했다.
그가 갖고 있는 재산이라면 호화로운 저택에서
사치스럽게 생활할 수 있었으나 그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
자기 개인의 생활이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사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유일한은 또 자기의 직계 가족들은 물론이고
일가친척 누구도 무턱대고 중용하지 않았다.
그와 친분이 있다 하면 어김없이
일자리 청탁을 했으나 절대 응하지 않았다.
그 사람의 모든 능력을 꼼꼼히 살펴,
일을 맡겨도 괜찮겠다는 판단이 설 때에만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렇기에 그는 때때로 친척이나 친지들로부터
피붙이에 대한 정이 없다는 비난도 받았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인 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몸에 밴 서구적 정서에서 나온 그의 신념이었다.
유일한은 ‘근면·성실·정직’을 평생의 신조로 삼았다.
이것은 그에게 신앙과 같은 생활의 계율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유기연으로부터 이어받은 교훈인 동시에
그가 미국에서 배우고 체험으로 익힌 진정한
자본주의 정신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늘 가족이나 직원들에게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
“근면하지 않으면
경쟁사회에서는 살아갈 수 없으며,
성실하지 않으면 일을 성취할 수 없고,
정직하지 않으면 남이 믿어주지 않는다.”
유일한은 기업 운영의 몇 가지 성공비결을 강조했다.
“먼저 좋은 물건을
값싸게 생산해야 하고
고객이 원하는 상품이 무엇인가를 알아내야 하며,
그뿐 아니라 고객이 사고 싶도록 새로운 제품을 생산해야 한다.
기업인은 수요를 찾아다닐 뿐만 아니라 수요를 창조해야 한다.
그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신기술을 개발해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고,
또 눈은 늘 밖으로 세계로 돌려 남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착상이 기업 성장의 원동력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슘페터의 창조적 개척정신 주장과 상통한다.
또 그는 한국의 경영인들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기업은 개인의 영화(榮華) 수단이 될 수 없다.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이며 기업주 개인은 이를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기업인은 사회의 기업을 맡은 이상 이를 합리적으로 운영해
많은 이윤을 창출해 내며 기업을 번영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나는 사업의 목적은 명예로운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임을 명심해 왔다.
또한 인생의 목적은 선(善)을 행하는 것임을 잊지 않으려 힘써 왔다.”
일찍 세상을 떠난 카네기멜론 대학 랜디 포시 교수.
《마지막 강의》를 통해 전 세계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신 비운의 교수로 기억되지만
사실 그는 췌장암에 걸리기 전부터 뛰어난 프로그램머로 이름을 날리며
그럴 때마다 랜디 교수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유일했다고 말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은행의 복리이자 같은 겁니다.
반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부자가 많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정말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세계 최고의 부자 가문이 나올 것이다.
세월을 보내는 것이 결혼의 정규 과정이었다.
한 눈을 감으라는 말이 있다.
스포츠거나 연예인들에 대한 것이다.
TV 속의 주인공들임을 깨달아야 한다.
줄줄 꿰면서도 대차대조표는 볼 줄 모른다면,
반 보 앞서서 세상을 읽어 내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 곳에 먼저 가 있어야 한다.
지식과 다양한 경험에서 나온다.
산삼이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자산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학위를 받은 뒤 교수로 재직할 때 일이다.
한 대학의 제의로 한국에 돌아왔는데,
고등학교 동기동창 몇몇이 마침 그 대학의 조교수로 있었다.
이 전 총장은 부교수로 임명을 받았다.
독일 대학에서의 교수 자격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오늘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늘 조금은 '밑진 듯이 살아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합니다."
그가
가천의대 총장이 될 때도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고
판단하는 밑거름으로 삼았던 것은, 그의 밑지고 사는 태도였다.
단기적으로 볼 땐 손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장기적으로는 신망이란 보답으로
더 크게 돌아온 것이다.
당장은 조금 '밑진 듯이' 살더라도 먼저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 끄트머리에 있는 암석 곶의 이름이다.
1488년, 포르투갈인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유럽인 최초로 희망봉을 발견했을 당시
파도와 송요돌이가 심하기 때문이다.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 남단을 밟기 전,
암초와 폭풍에 막혀 죄초되거나 파선했다.
그만큼 그곳을 지나는 것은 목숨 건 모험이었지만,
폭풍의 봉은 당시 최대의 무역국이던
인도로 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고국으로 돌아간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국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암초투성이에 폭풍이 거세 매우 위험합니다.
어느 누가 그곳을 지나 인도로 가려 하겠느냐.
다행히 자네가 이미 그곳에 발을 디뎌 큰 점을 찍었으니,
우리에겐 이미 인도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그곳을 절망과 죽음이 가득한
'폭풍의 봉'이 아니 '희망봉'이라 명명한다."
그 뒤로 인도로 향하던 수많은 항해자들이
희망봉을 지나 위험천만한 항해를 완수 했다.
희망봉 앞바다는 여전히 높은 바도와 폭풍이 몰아쳤지만,
그 이름처럼 이 지점만
지나면 잔잔한 바다가 나타나리라는
희망을 품고 죽음의 바다를 건너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