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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 머리말
2. 근대자본주의 정신의 배경
3. 근대자본주의 정신의 본질
4. 칼빈주의(Calvinism)의 윤리관
5. 칼빈주의와 근대자본주의 정신
6. 칼빈주의와 경제성장 메카니즘
7. 칼빈주의(Calvinism)와 하나님의 경제플랜(God's plan of economy)
요절: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잠 22:29)
["Seest thou a man diligent in his business? he shall stand
before kings; he shall not stand before mean men."
(ProV. 22:29)]
1. 머리말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의 배경(background)인 근대 자본주의(近代資本主義)에 대하여 일찍이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그의 논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倫理)와 자본주의(資本主義)의 정신(精神)"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zuerst 1904-1905)]에서 다음과 같은 요점들(points)을 주장했다.
근대자본주의(近代資本主義)는 역사상 다른 지역에서는 한 번도 형성된 적이 없는 새로운 형태로, 오직 근대 서구(近代 西歐)에서만 발생했는데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객관적 측면(시스템)
(형식상의) 자유노동[(自由勞動, 임금(상품)노동]으로 구성되는 합리적(合理的), 자본가적(資本家的) 조직(組織)을 발생시켰다.
(2) 주관적 측면(정신)
근대자본주의는 그것을 탄생시킨 독특한 정신(精神)과 윤리(倫理)가 있다. 그것은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 특히 칼빈주의(Calvinism)의 윤리(직업관과 금욕윤리)이다. [그래서 이 근대자본주의를 윤리적 자본주의(倫理的 資本主義)라고도 부른다]
이 글은 근대 자본주의의 발생의 정신적 배경을 해석한 막스 베버(M.Weber)의 논거들(arguments)을 소개함으로써 오늘을 사는 사람들(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지혜와 교훈을 드리고자 한다.
2.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배경
근대 자본주의 정신은 중세의 종교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인간 중심의 삶을 영위하려는 르네상스(Renaissance)로부터 싹튼 합리주의(合理主義, Rationalism)와 자본 축적을 가능케 한 칼빈주의(Calvinism)의 금욕주의(禁慾主義, Asceticism)에 그 바탕을 두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합리주의와 금욕주의의 배경을 고찰함으로써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 및 윤리관을 살피고자 한다.
(1) 르네상스(Renaissance)의 합리주의 정신
근대 전기에 있어서의 정치적 발전과 함께 지적(知的), 종교적(宗敎的) 운동이 근대 자본주의 경제의 발흥(勃興)에 중요한 의미를 주었다. 이 시대의 지적 운동(知的 運動)으로서는 14세기 이태리에서 일어나 전 구라파에 파급되어 16세기에 최고조에 달한 르네상스(Renaissance) 운동이다.
이 운동은 인간을 중세적 교회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인간 본성(人間 本性)의 자유로운 발휘와 완성을 지향케 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는 합리적 정신을 낳아 자연계에의 관심을 높이고 자연과학적 지식이 생산 차원에 응용되어 생산수단(生産手段)의 의식적 개량(意識的 改良)을 자극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과학기술의 발달을 초래했다.
그리고 르네상스(Renaissance)는 상류계급에서 새로운 취향(趣向)과 높은 소비성향(消費性向)을 낳게 함으로써 고급 유리 등 사치적인 공업생산품이라든가, 화려하고 우아한 건축에 대한 수요를 확대시켰고, 그에 대응해서 고도로 숙련된 수공업 생산자(手工業生産者), 예술가 및 건축가를 낳게 했다.
(2) 종교개혁(宗敎改革, the Reformation)과 칼빈주의(Calvinism)
종교개혁(the Reformation)은 직접적으로는 카톨릭교회(Catholic Church)의 형식화 및 세속화(世俗化)에 대한 저항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의 결과로써 생긴 로마 카톨릭교회와 개신교(protestantism)와의 교회 분열은 정치권력과 관계되어 신구교간의 상호 불관용, 박해, 내란, 전쟁을 야기시켰으며, 그것은 많은 사회·경제적 영향을 끼쳤다. 그 가운데서 많은 비자발적 이주가 이루어졌다.
당시 대개 중산층(中産層)이던 개신교인(프로테스탄트, protestant)들의 이주(移住)는 자본(Capitel)과 기술(technology)의 국제적 이동을 통해서 이주국(移住國)의 경제발전에 기여하였다. 종교개혁(the Reformation)이 자본주의 발달과의 관련에서 주목되는 것은 특히 칼빈주의(Calvinism)의 윤리(Ethik)였다고 한다.
3.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본질
자본주의 정신의 본질에 관하여는 논의가 많다. 브렌타노(L. Brentano)에 있어서는 자본주의의 정신의 본질은 인간의 무한한 영리욕·화폐욕이며, 이것은 초역사적(超歷史的) 개념이다. 다만, 그 영리욕(營利慾)은 중세에 있어서는 카톨릭 교리에 의하여 그 발현(發現)이 속박되었던 것이나 르네상스(Renaissance) 이후에 점차로 중세적 제약에서 해방되어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한편, 솜바르트(W. Sombart)에 있어서도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정신은 영리욕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브렌타노(L. Brentano)와는 달리 영리욕·화폐욕 그 자체가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한 것은 아니며, 다만 영리욕(營利慾)이 기업(企業)이라든가 시민도덕(市民道德)과 결합할 때에만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솜바르트(W. Sombart)는 초기 자본주의 정신(Frühkapitalismus)과 고도 자본주의 정신(Hoch kapitalismus)을 비교해서, 전자의 시대에는 인간적 요소와 종교적 색채가 잔존함으로써 합리성의 완전한 실현(實現)이 저지된 반면, 후자의 시대에는 개인이 중세의 종교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고 이윤획득을 위한 어떠한 수단도 용인되었다고 보았다.
요컨대 솜바르트(W. Sombart)에 있어서는 브렌타노(L. Brentano)의 초역사적 인식과는 달리 자본주의 시대에 대응하는 전개적(展開的) 개념으로 인식하였다는 데 차이가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근사(近似)한 이론이다.
이에 대하여 막스 베버(Max. Weber)는 근대 자본주의 정신과 그 이전의 전통주의 정신(傳統主義, Traditionalismus)과의 단절을 보았다. 그에 의하면 근대 이전의 대상인(大商人) 및 금융업자들의 윤리적 색채없는 영리추구욕(營利追求慾)을 천민자본주의(賤民資本主義, Pariakapitalismus)라고 부르고, 그러한 전통주의(傳統主義)의 경제윤리(經濟倫理)는 그 시대의 필요악(必要惡, Necessary evil)이였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근대 자본주의(윤리적 자본주의) 정신에서는 영리의 추구가 하나의 자기목적화(自己目的化)되고, 그것은 윤리적으로 선(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의무(義務)로서 일상생활에 적용하고 조직화(組織化)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칼빈주의(Calvinism)에 의한 윤리적 전환(倫理的 轉換)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이것은 근본적으로 칼빈(J. Calvin)의 금욕윤리(禁慾倫理)에 근거한다고 보았다.(주1)
4. 칼빈주의 윤리관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칼빈주의(Calvinism)의 윤리관을 요약적으로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1) 예정설(豫定說, Predestination)
하나님(God)은 영생(永生)에 예정(豫定)된 자를 소명(召命)하며, 인류가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의 자기영화(自己榮華)에 이바지 하고자 함이며, 택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율법(계명)을 실천하여 각기(各己)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냄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바라는 바는 그들의 사회적 활동(社會的 活動)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생활의 사회적 구성이 하나님의 율법에 합당하고 또 그 목적에 일치하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에 있어서 사회적 활동은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더하기 위한(In majorem gloriam Dei) 것에 지나지 않는다.
(2) 칼빈주의(Calvinism)의 노동관(직업관)
사회 전체의 지상 생활을 위한 노동(직업) 의무는 그 교리의 윤리적 체계 중의 특징적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들의 교리인 "이웃사랑"은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God)의 영광에 이바지하는 것이어야 하므로) 우선 첫째로 자연법(Lex nature)에 의하여 주어진 직무의무(職務義務)의 이행에서 나타나야 한다고 한다.(주2)
이런 경우 그것은 특히 물적(物的), 비인격적(非人格的)인 성질(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질서의 합리적 구성에 이바지 하는)을 띄게 된다. 사회적 질서(Kosmos)의 조직과 구성은 놀라울 정도로 합목적적인 것으로서 성서(Bible)의 계시에서 보던, 자연의 직관에서 보던 그것이 인류의 복지를 위한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인격적·사회적 복지에 봉사할 노동(勞動)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일 뿐더러 그의 뜻(God's will)에도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칼빈주의(Calvinism)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구원(Salvation)의 자기확신(自己確信)을 획득함에 있어서의 최선의 방법으로서 부단한 직업노동(職業勞動, Rastlose Berufsarbeit)이 요구되고 있다. 이 직업노동에 의해서만 신앙적 의혹(信仰的 疑惑)이 제거될 수 있고 구원(Salvation)의 활실성이 보증될 수 있다고 믿는다. 즉, 칼빈(J. Calvin)에 의하면 신앙(信仰, Faith)이 구원의 확증(確證)에 대한 분명한 기초가 되기 위하여는 그의 객관적(客觀的)인 작용(作用 또는 행위)에 의해서 확인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신앙은 유효한 신앙(Fides efficax)임을 필요로 하며, 구원에의 소명(召命)도 유효한 소명(Effectual calling)임을 필요로 한다.(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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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프로테스탄티즘의 倫理와 資本主義의 精神, 서울, 一潮閣, 1978, p.92.
[자연법(Lex nature)의 직무의무: 카톨릭 교리에서는 직무의무는 "이웃사랑"을 위한 자연법적 질서에 속하고 물적·비인격적인 성질을 띈다. 그러므로 직업에 특별한 윤리성이 강조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칼빈주의에서는 직업노동은 구원(Salvation)의 확증의 객관적 작용이고 하나님의 소명(Calling)이다.]
(3) 칼빈주의(Calvinism)의 금욕윤리(禁慾倫理)
칼빈(J. Calvin)는 향락(享樂)은 금지했으나 그렇다고 현세도피(現世逃避)나 둔세(遁世, 속세에서 은둔함)를 허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은 누구도 현세에서 하나님(God)이 그에게 부여한 사물(事物)의 관리자로서 합리적으로 협력하는 것이 종교적 임무라고 생각했다.(주4)
그러므로 일반 신자들(Believers)의 윤리생활로부터 무계획(無計劃)과 무체계(無體系)가 제거되고 생활전반을 규제하는 일관된 방법(Method)이 요구되었다.(주5)
따라서 칼빈주의에서의 금욕(asceticism, 禁慾)은 일정의 규율(規律) 바른생활 태도의 실행(實行)을 의미한다.(주6) 그래서 이 금욕은 합리적 생활태도를 조직적으로 완성하게 되었다. 금육의 목적은 자연의 상태(Status nature)를 극복하여 비합리적인 충동력과 세상 및 자연에의 의존심(依存心)을 인간으로부터 절단(切斷)함에 있으며 인간을 계획적인 의지의 지배에 복종시킴에 있고, 인간의 행위를 부단한 자기심사(自己審査)와 윤리적 결과의 평량(評量, 가치판단)과에 종속시킴으로써 신자(信者)를 (객관적으로는) 천국(하늘나라)의 노동자로 훈육(訓育)함과 아울러, (주관적으로는) 그들의 영혼의 구원을 확실케 함에 있다.
이러한 적극적인 자기지배(自己支配, Self-control)는 일반적으로 최고 형태의 합리적인 성직자 윤리(신부·수녀들의 도덕윤리)의 목표였던 바와 마찬가지로, 청교주의(淸敎主義)의 실천생활(實踐生活)에 있어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상(理想)이었다. 즉, 청교주의(Puritanism)의 금욕(禁慾)이 갖는 작용(作用)은 즉흥적인 감정(感情, Affekte)에 대항하여 영속적인 동기[특히 그러한 합리적인 금욕에 의해서 수련(修練)된 동기]를 유지하고 활용할 능력을 인간에게 주는 데 있다. 여기서의 금욕의 목적은 일반적으로 흔히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자각적(自覺的), 의식적(意識的)인 투명한 생활을 영위하는데 있으며(자유방종한 본능적 쾌락을 극복하는 일이 절실한 과제로 되어 있고), 또한 금욕(禁慾)의 최중요한 수단은 이에 복종하는 사람들의 생활태도에 규율(Ordnung)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결정적인 입장은 칼빈주의자(Calvinist)의 생활 원리에서나, 카톨릭적 성직자 생활의 규율에서나 마찬가지로 나타났었다. 이 두 신앙(카톨릭적 신앙과 개신교 신앙)의 현세(現世)를 극복하는 강력한 힘과 특히 칼빈주의(Calvinism)가 루터주의(Lutheranism)와는 달리 전투적 교회(戰鬪的 敎會, Ecclesia militans)로서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을 영속시킬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은 바로 이러한 전인격(全人格)에 대한 조직적 지배(組織的 支配)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주7)
5. 칼빈주의(Calvinism)와 근대 자본주의 정신
(1) 칼빈주의(Calvinism)의 직업관과 자본주의 정신
(가) 칼빈주의(Calvinism)의 직업관과 자본주의적 인간 형성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개신교인)에 있어서 직업(beruf, calling)이 밝혀진 결과, 먼저 근대의 기업자가 놀라운 정도로 선량한 양심을 갖게 되었고, 더욱이 이에 따라 노동을 혐오(嫌惡)하지 않는 노동자가 공급되었다. 노동자 계급은 그 직업(職業)에 대하여 금욕적으로 헌신하게 되었고, 그들은 그의 보수(報酬)로서 영원한 축복(祝福)을 기뻐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직업은 바로 하나님의 소명(召命, Calling)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축복이란 무형(無形)의 보수가 어느 정도 의미가 있을까 의심하는 사람도 있지만 당시와 같이 교회의 규율이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현대인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신앙생활의 전분야를 지배하던 그 시대에 있어서는 이 영원한 축복이라는 것은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실재(實在, Reality)였다고 한다. 물론 카톨릭 교회나 루터 교회도 각각 그 교회의 규율(規律)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신교도(新敎徒)의 금욕단체에 있어서는 성찬식(Communion Service, 聖餐式)의 모임에의 허부(許否)는 도덕상의 완전무결 여부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직업상의 정직성(正直性)에서 판단되었다.
따라서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았다고 한다. 자본주의적 인간 형성에 있어서 이러한 칼빈주의(Calvinism)를 능가하는 신앙 윤리는 카톨릭(Catholic) 뿐만 아니라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나) 칼빈주의(Calvinism)와 르네상스(Renaissance)의 비중(比重) 관계
근대 자본주의 시스템의 형성에 있어서 함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칼빈주의(Calvinism)와 문예부흥(Ranaissance) 운동의 비중 관계에 대하여 막스 베버(Max Weber)는 문예부흥(Renaissance)이 자본주의 발흥(勃興)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할지라도 칼빈주의(Calvinism)에 비하면 대단치 않다고 단언했다.
르네상스(Renaissance) 제창자(提唱者)들은 최고급의 실험가들로서 기술문제에 몰두하여 기술진보 또는 광업개발 등에 기여하였으나 역사적 견지에서 이것을 보면, 문예부흥은 제왕(帝王)들의 정책결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인류의 정신을 변화시킨 점에서는 종교개혁(the Reformation)의 혁신 작용에는 훨씬 뒤지고 있다고 한다. 16세기와 17세기 초두에 걸친 위대한 과학적 발견은 거의 카톨릭교의 지반 위에서 발생했다고 본다.[예컨대 코페리니쿠스(Copernicus, N.)도 카톨릭교도였다.] 그러나 그 발견에 대해서 루터나 메랑히톤 등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이것을 신앙(信仰)에 차선(次善)하는 것으로 보았다. 일반적 견해로서도 과학의 진보는 신교(新敎, Protestantism)의 중심적 교리의 영역과는 거리가 있다고 한다. 신교 특유의 공헌이 있다면 그것은 기술과 경제를 위해서 과학(科學)을 잘 이용했다는 점이라고 한다.(주8)
(2) 금욕과 자본주의 정신
(가) 금욕(Asceticism)과 노동(Labour)
신앙인(Believer)들에게 있어서 노동은 금욕(禁慾)의 수단이 되어 왔다. 특히 노동(Labour)은 청교주의(Protestantism)가 저 부정(不淨)한 생활(Unclean life)이라는 관념으로 일괄하고 있는 일체의 유혹(temptation)에 대한 독자적인 예방수단인 바, 그 역할은 결코 적은데 그치지 않는다. 바로 노동은 하나님(God)이 명한 생활일반의 자기목적(自己目的)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살후 3:10)는 바울(Paul)의 명령은 만인에게 절대적으로 타당한 명제(命題)이다. 노동의 혐오(嫌惡)는 신앙생활이 부족하다는 증거로 여겨졌다.(주9)
(나) 금욕과 시간(Time)의 절제
시간 낭비는 원칙상으로 최대의 죄악이다. 인생은 자기의 소명(召命)을 견고히 하기 위하여는 한없이 짧고 귀중하다. 그러므로 시간을 합리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교제라든가, 무용한 잡담, 사치 등으로 인한 시간 손실 뿐만 아니라 건강에 필요한 분량(6-8시간) 이상의 수면(잠)으로 인한 시간 손실도 도덕상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 시간은 대단히 고가하다(비싸다). 왜냐하면 소실(消失)된 시간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노동(Labour)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위(無爲)한 묵상(默想)도, 적어도 직업노동을 희생해서 얻어지는 한, 전연 무가치하고 때로는 전적으로 배척할 행위인 것이다. 왜냐하면 묵상은 직업(職業)에 의한 적극적인 하나님의 의지(God's will)의 실행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묵상을 위하여는 일요일(주일)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하여 박스터(Baxter)에 의하면 직업에 태만한 사람치고 의례히 시간은 많아도 하나님을 위한 시간은 없다고 한다.(주10)
이와 같이 시간을 절약하고 합리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칼빈(J. Calvin)의 주장은 오늘날 시간을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 보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 금욕과 자본형성(資本形成)
청교도(淸敎徒, Puritan)들은, 인생의 모든 섭리(攝理) 가운데서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믿고 있는데, 그러한 하나님이 자기의 신자들에게 이득기회(利得機會)를 열어 준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신앙(Faith)이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기회를 이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영혼이나 타인을 해하지 않고도 합법적 방법으로써 다른 방법보다 많은 수익(收益)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이 계시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이를 거절하고 이익이 적은 방법을 취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소명(Calling)의 목적의 하나는 방해되고 만다. 이렇게 될 때는 하나님의 요구에 반하여 하나님의 관리인(청지기)이 되기를 거절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선물을 사용하기를 거절하는 것이다. 물론 육욕이나 죄악의 목적으로서는 용납될 수 없으나 하나님을 위하여 부자가 되도록 노동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주11)
부(富, Wealth)가 위험하다는 것은 다만 태만과 죄악적 쾌락에의 유혹(誘惑) 때문일 뿐이며, 이에 반하여 직업의무의 이행으로서라면 이는 도덕적으로 허용될 뿐만 아니라 실은 명령되고 있다. (주12)
확정적 직업(일정한 직업)에 대한 금욕적인 의미의 강조는 근대의 전문화된 노동을 윤리적으로 강화하는 것이며, 이윤의 기회를 섭리적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함은 기업가의 활동을 정당화하고 이윤의 추구를 합법화하는 논거(argument)가 된다.
그리고 무제한한 소유의 향락과 호사한 소비를 억제함으로써(즉 금욕함으로써), 그들의 이윤추구는 소위 금욕적 강제저축(禁慾的 强制貯蓄, Ashetischer Sparzwang)에 의한 자본형성(資本形成)의 동기가 된다.(주13)
벌어들인 부(富)의 소비적 사용을 억제한 요인이 투자형태(投資形態)로서 부의 생산적인 사용을 촉진했던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실례로써 뉴일글랜드(New England)에서는 이 논리(論理)가 뚜렷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바, 도일(Doyle)과 같은 비범한 역사학자는 이점을 강조하고 있다.(주14)
화란(Halland)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칼빈주의(Calvinism)가 실제로 지배한 기간이 불과 7년간밖에 안되는데도 불구하고 신앙이 열렬한 사람들이 거대한 재산을 가지고도 소박(검소)한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자본축적(Capital accumulation) 성향이 고도화되어 갔다고 한다.(주15)
6. 칼빈주의(Calvinism) 윤리와 경제성장의 메카니즘(mechanism)
막스 베버(Max Weber)의 연구 결과의 요지를 정리하면, 근대 자본주의[소위 윤리적 자본주의, 이것은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용어임] 시스템의 두 지주(支柱)인 노동(Labour)과 자본(Calital)의 제공은 칼비니즘(Calvinism)의 "직업윤리관"에 의한 신교도들(Protestants)의 노동력 제공과 "금욕적 신앙윤리"에 의한 절제적(節制的, Self-Control) 소비생활이 결과한 자본축적(Capital accumulation)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두 요인의 상승작용(相乘作用)의 메카니즘(Mechanism)과 그 시너지(Synergy) 효과는 다음과 같다.
↗ 직업(소명)관 → 노동력제공↘
칼빈주의 윤리 생산력증대→경제성장
↘ 금욕윤리 → 자본 축적 ↗
[해설]
① 직업노동을 하나님의 소명(召命, Calling)으로 믿는(참고 살후 3:10) 칼빈주의자(Calvinist)들의 성실·근면한 노동력이 축적된 자본과 결합되어 우회생산(迂廻生産, round-about production)을 가능케하여 생산력을 높여갔다.
② 금욕(禁慾)은 ㉠ 소비면에서 사치성 소비를 억제하고, 그 심리적 효과로서 재산의 획득을 합리화할 뿐만 아니라 자기목적화(自己目的化)함으로써 자본축적(資本蓄積, Capital accumulation)을 촉진하였다.
㉡ 생산면에서는 금욕은 부정(不正)뿐만 아니라 충동적 물욕과 탐욕을 배척하면서 축적된 자본의 생산적 이용(生産的 利用)을 촉진시켰다. (참고. 마 25:14-30) 그 결과 노동의 자본 장비율(자본/노동)이 높아져서 생산력의 시너지(synergy) 효과를 증대시켰다.
7. 칼빈주의(Calvinism)와 하나님의 경제플랜
근대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던 칼빈주의 윤리는 이미 퇴색(褪色)해 버린지 오래다. 그 사실을 막스 베버(M. Weber)는 100여년전(이글을 쓰는 시점은 2003년 2월임)에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오늘날 영리(營利)가 최고도로 발달한 합중국(미국)에서 보면 영리활동이 종교적·윤리적 의미를 거세(去勢)당했기 때문에 순전히 경쟁적(競爭的)인 감정에 휩쓸리는 경향하에 있으며, 그 결과는 이미 경기(競技, race)의 성격까지 띠게 되는 경우조차 드물지 않다."
"이같은 문화적 발전(칼빈주의 같은 윤리가 없는 문화의 발전)의 '최후의 사람들'에 관하여는 다음의 말이 진리가 될 것이다.
「무정신(無精神)의 전문가(專門家), 무감성(無感性)의 향락인(享樂人), 이들 무(無)의 인간들은 인류가 지금껏 도달하지 못한 단계에 올랐다고 자부(自負)하리라.」"고.(주16)
막스 베버의 이 경고는 이 세상에서 적중된지 이미 오래다. 이 절망의 환경 속에서 구출(deliverance)될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칼빈주의(Calvinism) 윤리가 서구에 놀라운 경제적 번영을 초래한 근대 자본주의(윤리적 자본주의)를 발생시켰다는, 막스 베버(M. Weber)의 주장을, 사실(史實, historical evidence)에 의한 역사적 간증(historical testimony)으로 다시 음미(吟味)하면서, 하나님의 경제플랜(God's plan of economy)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구원(생명)과 풍성한 삶을 위한 하나님의 경제플랜(성경의 약속)은 영원히 유효(有效)하기 때문이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 10:10)
["I am come that they might have life, and they might
have it more abundantly."(Iohn. 10:10)]
주 1) 金宗炫著, 經濟史, 서울, 經文社, 1983, pp.146-147.
「國民經濟雜誌」第46卷 第3號, 東京, 東洋經濟新報社, 1929,
宗敎改革と近代資本主義, pp.29-34.
주 2) 權世元·姜命圭 共譯, 프로테스트탄티즘의 倫理와 資本主義의 精神, 서울,
一潮閣, 1978, p.92.
주 3) Ibid., p.97.
주 4) 墨正巖·靑山秀夫譯, マツクス·ウエ -バ- 一般社會經濟史要論, 東京,
岩波書店, 昭和 50年, p.225.
주 5) 權世元·姜命圭 共譯, 프로테스트탄티즘의 倫理와 資本主義의 精神, 서울,
一潮閣, 1978.
주 6) 靑山秀夫外 一人譯, マツクス·ウエ -バ- 一般社會經濟史要論, 東京,
岩波書店, 昭和 50年, p.252.
주 7) 權世元·姜命圭 共譯, 프로테스트탄티즘의 倫理와 資本主義의 精神, 서울,
一潮閣, 1978. p.103.
주 8) 靑山秀夫外 一人譯, マツクス·ウエ -バ- 一般社會經濟史要論, 東京,
岩波書店, 昭和 50年, p.256-257.
주 9) 權世元·姜命圭 共譯, 프로테스트탄티즘의 倫理와 資本主義의 精神, 서울, 一潮閣, 1978. p.139.
주 10) Ibid., p.138.
주 11) Baxter, a a o I On. X tit. I Dis g(20) Vol.1S.378. spalte Z.
주 12) 權世元·姜命圭 共譯, 프로테스트탄티즘의 倫理와 資本主義의 精神, 서울,
一潮閣, 1978. p.143.
주 13) Ibid., p.152.
주 14) Doyle, The English in America, Vol.11, ch.I.
주 15) 權世元·姜命圭 共譯, 프로테스트탄티즘의 倫理와 資本主義의 精神, 서울,
一潮閣, 1978. p.152.
주 16) Ibid., p.161.
Sources
權世元·姜命圭 共譯, 프로테스트탄티즘의 倫理와 資本主義의 精神,
서울, 一潮閣, 1978.
金宗炫著, 經濟史, 서울, 經文社, 1983.
「國民經濟雜誌」第46卷 第3號, 東京, 東洋經濟新報社,
宗敎改革と近代資本主義, 1929.
墨正巖·靑山秀夫譯, マツクス·ウエ -バ- 一般社會經濟史要論, 東京,
岩波書店, 昭和 50年.
經濟學大辭典, 東京, 東洋經濟新報社, 昭和 55年
Daniel Bell, The Cultural Contradictions of Capitalism,
林雄二郞譯, 東京, 講談社, 昭和 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