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곡마을 교휼비(矯恤碑)
우리가 매주 목요일이면 찾는 증심사 버스 종점에서 운림정사 방향으로 30m쯤 가다 보면
예전 1수원지 관리소와 등 된 언덕빼기에 비석 하나 있으니 ‘ 碧悽 鄭相鉉 矯恤碑’ 이다.
‘교휼(矯恤)’ 은 바로잡을 교, 구휼할 휼, 이니 아마도 평생에 남을 돕는 일을 하였든지
지역 유지들이 ‘愈久仰止’ 한다며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구체적인 적선 내용은
잘 모르겠으나 비문 중 ‘雲谷’ 이라는 지명이 보여 몇 생각하며 올린다.
민병승(閔丙承)이 쓴 ‘운림당기’ 기문에는 <광주의 동남쪽 몇 리 떨어진 곳, 선원(仙源)마을에
‘운림당’이 있는데 운곡(雲谷)과 홍림(洪林)이 서로 비치고 어울려 있어 운림당(雲林堂)이라고
하였다> 는 내용이 있다. ‘운곡’ 과 ‘홍림’은 운림당을 기준으로 좌우에 있었던 광주군
지한면과 부동방면에 각각 속했던 마을 이름이다. 이곳이 지금의 동구 운림동이다.
운림당은 조선대학교 뒷산 언저리에 있었던 정자이다. 1871년에 지어진 정자 주인
가운 최석휴(崔錫休·1894∼1946)는 지응현(池應鉉·1868∼1957),
정낙교(鄭洛敎·1863∼1938) 등과 같은 광주의 부호로 조선말에 참서(參書)를 지냈다.
운림당은 그의 선대부터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부호답게 정자 주변에는 팔각의 담장을 쌓고
연못을 만들어 고기를 길렀다. 주변에 언덕을 쌓아 화초를 심고 샘 물을 끌어다가
수 천주의 과실수와 약초를 심어 울창한 숲을 이루는 전원을 꾸미기도 했다.
민병승(閔丙承)은 1866(고종 3)년 출생.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아버지는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의 피신을 도와 출세한 민응식(閔應植)이다. 탁지부(度支部) 주사,
이조정랑(吏曹正郞), 성균관대사성, 홍문관부제학, 이조참의, 이조참판을 지냈다.
하운(河雲) 최석휴(崔錫休)는 광주의 부호로 대한제국 말 참서(參書)를 지냈으며
운림당(雲林堂) 정자는 1871년(고종8년)에 지어졌고 이곳에서 시문에도 뛰어나
유유상종한 인물들과 시주(詩酒)를 즐기며 살다 떠났다.
1933년 펴낸 운림당시문집(雲林堂詩文集)이 남아 있다.
이 책에는 광주의 전경을 묘사한 남농 허건(南農 許楗)의 그림이
권두화(卷頭畵)로 실려 있어 그의 인맥을 대변하고 있다.
하운(河雲)의 경수에 비친 붉은 연꽃을 보고 지은 詩 한 수 소개한다.
쟁반같은 경수위에 푸른 연기 둘렀는데
한가롭게 기대앉아 북창바람 맞는다네.
바람따라 오고 가는 맑은 향기 들려오니
부용꽃이 모두 피어 그의 빛이 붉는구나.
붕남(鵬南) 지응현(池應鉉) 호남의 부호로 라때시절 광주에서 제일 높은 건물(4층)인‘붕남빌딩’
소유자로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애국정신과 반일사상을 선양하고자 1924년 고려 말 충신
정몽주(鄭夢周), 고려 말 공신 지용기(池湧奇), 조선조 공신 정충신(鄭忠信), 병자호란 때
활약한 지여해(池汝海) 등 5인을 모신 청주지씨 사당인 병천사를 건립했다.
그의 후손들도 광주 쌍촌동 대건신학교(현 가톨릭 평생교육원), 지산동 살레시오여자고등학교,
금호동 상무초등학교 부지를 사회에 기증하며 솔선수범을 이어갔다. 사위가 오지호 화백이다.
광주의 대부호 양파(楊波) 정낙교(鄭洛敎)는 일제시대 부자 동네인 양림동에 살았다.
광주 일원에 거대한 농토를 소유했고, 이것을 관리하기 위해 주식회사 양파농장을
경영했던 사람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양림동 이장우 가옥’은 본디 정낙교의 소유였다.
광주사직공원 입구 계단을 오르면 있는 양파정(楊波亭)을 건립했다.
조선시대 후기 기록인 『여지도서』, 『호구총수』에 따르면 광주목(光州牧) 지한면(池漢面)은
태봉(台峰, 학동 행복재활원 앞), 소태곡(所台谷), 주남촌(周南村), 남계(南溪), 내지(內池), 한교(閑橋),
항촌(項村), 중지촌(中旨村), 녹동(鹿洞), 칠전(漆田), 용강(龍崗), 화산(花山) 마을이 있었다.
지명은 명명된 시대를 담고 있다. 경관이 변해도 화석처럼 남아 있어 복원 실마리가 된다. 땅이름은
큰 문화자산이며, 시민 합의체다. 작명과 풀이가 바로 서야 한다. 현 도로명주소는 불편하다.
첫댓글 무언가 탐구심이 가득한 白雲공의 성과에 그저 감흠입니다.
일용한 양식을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