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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0일 부활과 영생의 이해(3)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 생명의 정의(定義)
➜ 생명(生命 Life)이란 세포 상호간의 활동에 의한 생물의 생활현상 일체에서 추출되는 일반적 개념이다.
자연법칙에 따라 본질을 규명하는 기계설(機械說)과 신비력의 지배를 주장하는 생기설(生氣說)이 있다. - 국어대사전.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창2:7) 하나님에 의해 보존된다. (시66:9). - 기독교 낱말 큰 사전.
성서는 육체의 생명이 피(blood)에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피를 먹는 것을 금하였다. (레17:11)
생명이란 단백질의 존재양식이다. - F. 엥겔스. 이는 물질대사를 생명현상의 기본으로 간주하는 견해이다.
모든 생물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속성 또는 특성을 말한다. - 세계대백과사전.
생물은 DNA에 의한 물질대사와 제어의 현상으로 그 체제를 유지한다.
생명론에는 생물 개체와 그 환경과는 하나로 묶어 생각해야 된다는 전체론(全體論)도 있다.
사실 생명에 대한 개념을 엄밀하게 정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상태에 있다.
서술할 수 없지만 서술해야 하는 인간의 생명에 대한 자연과학의 진술은 필연적으로 한계가 있다. - 김균진
➜ 존재론적 개념에서 볼 때 생명은 잠재적 가능성이 실재가 되는 변화의 과정이다. - P. J. Tillich
생물학적 차원의 생명은 유전자의 우연과 환경의 필연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 E. O. Wilson
생물학적 차원의 존재는 단순히 살기 위해 산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도 하나의 생물일 뿐이다.
통속적으로 생명은 무생명(無生命)에 대한 대립개념이며 생(生)은 사(死)의 대립개념이다.
생자필멸의 관점에서 볼 때 죽음이란 다름 아닌 생명의 한계현상(限界現狀)이다. 주어진 시간이 끝났다는 말이다.
생명이란 생물(生物)에게만 있는 속성으로써 살아가는 원리(原理)요 동력(動力)이다.
생명은 그 자체에 내재적 역학(力學 mechanics)을 갖고 있다.
즉 성장(成長)과 생존(生存), 활동(活動)과 주어진 역할(役割)을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자연에는 상호투쟁의 법칙과 상호협동의 법칙도 있다. 생태계의 균형이 이뤄질 때 그것을 상생(相生)이라고 한다.
➜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가 98.4%가 동일하지만 침팬지와 인간은 비교할 수 없는 별개의 종이며
그 차이는 하늘과 땅보다도 더 커 보인다. - 김기석
대사, 생식, 진화의 세 가지 요소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필요한 기본적 요소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이 인간답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필요하다.
인간의 생명은 자연과학의 모든 설명을 초월한다.
인간 생명의 가치와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과학은 전혀 설명할 수 없다. - Schröberth
자연과학의 안목으로 보는 인간은 그냥 우연히 생겨난 어떤 것일 뿐이다.
➜ 인간의 생명은 자기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네트워크 속에 있는 존재이다. 사회적 존재란 말이다. 인간의 생명은 제한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합성과 잠재성을 갖는다.
인간의 뇌는 사회적 본성을 가진다고 한다. 감옥의 죄수들은 독방(獨房)을 가장 무서워한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생명은 죽는 순간까지 돌이킬 수 없는 현재진행형이다. 단 한 번만 살고 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모든 객관적 정의와 보편적 개념 그 이상의 것이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진술은 어떤 형태의 것이든 규범적, 윤리적 범주가 내포되어 있다.
인간의 존재와 생명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규정은 하나님의 형상답게 살아야 한다는 절대 명제를 갖는다. 인간의 생명은 인간다운 생명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 생물(生物)은 생식력과 물질대사 기능이 있고 자극에 반응하는 세포의 집합으로 일정한 현상을 가진 것을 말한다.
자연계를 생물계와 무생물계로 나누기도 하지만 바이러스(virus)의 발견으로 그 경계가 불분명해졌다.
생물계에는 오늘날까지 알려진 종만 해도 150만 종이 넘는데, 이러한 다양성이 생물계의 중요한 특징이다. 세대를 거듭하면서 계속되는 유전과 진화의 현상을 보이는 생명의 연속성도 생물의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어떤 생물이든 생명현상에 따르는 생리학적 시간을 갖는다.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위해 규정된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지구상의 동물이나 식물은 섞여 살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성 안에서 유기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다.
생명과학에는 생물학, 동물학, 식물학, 미생물학, 생물지리학, 생리학, 심리학, 의학, 인류학, 사회학 등이 포함된다.
생명철학(生命哲學)은 인생관을 정립하기 위한 것으로서, 인생철학, 처세철학, 실천철학 등이 포함된다.
생존경쟁(生存競爭)은 진화론의 중심 개념으로써 약육강식ㆍ적자생존ㆍ자연도태 현상을 갖는다.
➜ 인간의 생명 속에는 언제나 적대적 현상인 죽음이 현존한다. - M. Heidegger.
생명의 내적 차원에는 ➊ 시간적 측면과 ➋ 물리적 측면과 ➌ 정신적 측면이 있다.
시간적 측면은 생명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죽음의 시간이 가까이 온다는 것이다.
물리적 측면은 건강한 생명일지라도 그 속에 생명을 위협하는 죽음의 요소 곧 병원체와 결함(불완전)을 갖고 있다. 정신적 측면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욕망의 무한계성과 좌절이 죽음의 처참한 현실을 강화시킨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고 욕망에 눈이 어두워진 인간의 생명은 필연적으로 그릇된 가치관을 갖는다.
죽음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은 생명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 환경 파괴와 오염으로 인해 이미 수많은 종들이 사라졌고 이기적인 문명의 발당로 인간 생명의 기초가 무너지고 있다.
지옥은 먼저 자기중심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이 사는 그곳에 있다.
종교의 존재이유는 죽음의 세력을 극복하고 생명의 세계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종교의 진리가 왜곡될 때 그것은 인간의 생명을 기만하는 해가 된다.
➜ 성서는 영생으로 가는 과정을 말해주는 까닭에 생명에 관련된 여러 가지 개념을 말해준다.
생명강(生命江)은 생명수의 강으로서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흐른다. 영생의 복음을 비유하기도 한다.
계22: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생명나무는 그 열매를 먹으면 영생한다는 (창3:22) 나무로써 에덴동산과 새 예루살렘의 생명강 가에 나타난다.
창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계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생명책(Book of Life)은 생명록(生命錄 List of Congregation)으로써 영생을 얻은 성도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다.
계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생명선(生命線 life line)은 사느냐 죽느냐를 가름하는 경계선을 말한다. 최소한의 삶의 조건을 가리킨다. 생명의 길은 영생으로 가는 좁은 길로서 (마7:13)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요14:6) 그분이 열어놓은 새롭고 산 길이다.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 길이 있지만 새롭고 산 길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번제단에서 지성소까지의 길이다.
히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생명의 떡(bread of life)은 영생하는 양식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가리켜 이르신 말씀이다.
요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eternal life)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생명의 주는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그분을 따르는 자는 그분과 더불어 이 영원한 생명을 공유한다. (행3:15)
생명의 말씀은 사도들에게 위임된 복음을 가리키며 (행5:20) 오늘날의 교회에게도 같은 책임이 주어졌다.
➜ 인간의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데서 그 정점을 찾는다.
인간은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야 하며 세계 속에 그것을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에게는 획일성 대신 통일성 안에 있는 다양성과 다양성 안에 있는 통일성이 있다.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는 것은 생명을 사랑하고 긍정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우주적 차원의 부활은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정을 다시 확인한다.
죽음의 세력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고 영원한 소망이 있다.
오늘 세상에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생명에의 긍정과 사랑의 정신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친교의 대상이요 땅 위에 있는 하나님 자신의 현실이자 실현이다.
➜ 우주가 하나의 생명, 곧 온생명이고 모든 개체 생명은 온생명을 이루는 낱생명들이란 논리도 있다.
온생명은 개개의 낱생명들 안에 있으며 그들을 통해 자신의 생명성을 유지한다고도 한다.
모든 낱생명들은 단독으로는 생존할 수 없으며 온생명의 구성원으로만 생존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이 공감을 얻는 것은 모든 조직과 세포가 유기적 통일체인 몸이 되기 위해 합목적성을 갖는다는 경우이다.
하나님의 나팔이 울리는 날, 머리 되신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가 연합될 때 비로소 우주적 생명의 실재가 된다. 합목적성을 이탈한 세포들을 의학에서는 암세포(癌細胞)라고 한다.
오늘날 이 땅에 많은 이단들이 온갖 거짓말로 활개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현상이다.
♦ 옛 생명과 새 생명, 유한 생명과 무한 생명
➜ 모든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성서는 처음부터 밝히고 있다. (창1:20, 창2:7)
하나님만이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써 만물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신다. (욥1:21)
따라서 인간으로써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 그분의 거룩한 뜻에 순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인간이 살아야 할 이유와 가치는, 그리고 그 원천은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신8:3) 하늘 공의와 사랑을 생명의 본질로 얻어야만 한다.
여기서 인간은 생물학적 생명을 초월하여 영원한 생명의 차원으로 가는 것이다.
➜ 인간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체계이다. 거기에는 도덕이란 윤활유가 필요하다.
따라서 모든 생명은 살기 위한 갈망과 사랑의 갈망을 갖는다.
물질적 부요는 편리성과 평안함을 줄 수는 있어도 행복은 줄 수 없다.
사랑은 정의를 내포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요일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인간의 생명이 생명답게 되는 길은 먼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 안에서 사는 데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상실한 생명은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가치도 없다.
➜ 생명은 과정이고 관계이며 사건이다. 생명의 본질은 관계성에 있다. - 이찬수
성서는 인간의 생명을 사회적 존재로 파악하는 동시에 개별적 존재로 파악한다.
인간의 생명은 끝없는 개별화와 참여, 자기구별과 상생의 긴장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야 할 인간의 생명은 이웃과 더불어 살도록 창조되었다.
인간의 생명은 이웃과의 관계성 안에서 시작한다. 인간의 정체성(正體性)은 언제나 사회적 정체성이다.
이웃은 우리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이웃이 없으면 누구도 생존할 수 없다.
메말라가는 현대인의 생명에 필요한 것은 사랑을 통한 참된 인식의 길이다.
이웃의 눈으로 자기를 보는 것이 삶의 지혜이다.
민심이 천심이라고 한다. 이웃의 마음을 잃는 것은 곧 하나님을 잃는 하나의 과정이다.
성서가 말하는 이웃은 인간의 범위를 넘어 자연의 모든 피조물을 포함한다.
성서가 말하는 인간생명의 참된 본질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로운 세계, 새로운 우주의 꿈과 기다림에 있다.
➜ 신약에 이르러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결론을 맺는다.
인간은 원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생자필멸의 길을 가야만 했다. (롬6:23)
창조주의 뜻을 거스려 육체의 욕심을 따름으로써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고 말았다. (엡2:1-3)
그러나 하나님은 성육신하신 독생자를 보내어 죄를 대속함으로써 하나님과의 화목의 길을 열어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영원한 생명으로 주신 것이다. (요6:33, 요14:6)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 때 신자는 참 생명을 얻는다.
➜ 성서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생명을 두 차원에서 말한다. 현생에 속한 생명과 새 우주에 속한 생명이 그것이다.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를 나타낼 때 생명은 옛 생명과 새 생명으로 구분된다.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옛 생명은 아담 안에 있는 생명이고 새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다.
고전15:20,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옛 생명은 유한(有限)생명이고 피조물의 생명이며 새 생명은 무한(無限)생명이고 창조주의 생명이다.
새 생명을 얻음으로 인간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그 생명에 참여한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성서는 옛 생명으로 살다 가는 사람을 옛 사람이라 하고 새 생명으로 영원히 사는 사람을 새 사람이라 한다.
엡4: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골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새 생명이 바로 참 생명이다. 참 생명을 얻을 때 참 사람(眞人)이 된다. 이 새 생명이 바로 하늘나라의 영원한 유업(遺業)이다.
➜ 예수께서 참 생명을 이 세상에 밝히 보이셨다. 예수는 하늘 사랑의 삶을 죽음이라는 극한까지 실천하셨던 것이다.
딤후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오직 전 인류를 포괄하시는 하나님의 구속행위에 의해서만 각자의 삶이 죄와 사망에서 해방을 얻는다.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덧없이 사멸(死滅)로 가던 인간의 생명이 재생될 수 있었다.
그는 참 생명의 본질이기에 그 생명을 희생함으로써 인류의 생명을 무한생명으로까지 승화시키신 것이다.
예수로 말미암아 온 새 생명은 단순한 소망에 그치지 않고 현재의 경험이 될 수 있다. (롬6:4, 요5:24)
그리스도 안에서 이 새 생명은 바로 믿는 자에게 제공된다. (딛3:7). 이 생명을 받은 자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
➜ 무한생명을 받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그것에 합당해야만 한다. 예수를 바로 믿는 것만이 오직 그 길이다. 신앙은 사변적(思辨的)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실험적(實驗的)으로 믿는다.
신앙은 교단의 신조(信條)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生命)의 사실로 확인하는 것이다.
신자는 삶의 행위를 가지고 자기 안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실재(實在)를 증명해야 한다.
신자는 지금 산상수훈(山上垂訓)의 삶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보여주어야 한다.
기독교 신자의 생애는 하나님 나라를 증명하기 위한 생애이다. 기독교인의 삶에는 중립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증거 하는 삶이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소중한 목적을 잃는다.
➜ 신자(信者)는 주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며 옛 생명에 관하여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신자는 불사의 새로운 생명을 찾는 자이지 낡은 생명의 연장(延長)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다.
히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벧후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자, 이것이 참 신자요, 참 인간이다.
하나님도 의지하고 이 세상 세력도 의지하려 하는 자, 이것이 거짓 신자요 거짓 선지자이다.
참 선지자(先知者)에게 현세의 명망(名望)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하늘 공의와 하늘 사랑, 하나님의 명예와 예수가 지신 십자가, 이것이 삶의 원리요 동력인 자가 참 그리스도인이다. 계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 거듭남(重生)의 의미와 실제
➜ 거듭난다(to be regenerated)는 것은 위로부터 나는 것으로 이 세상 차원에서 하늘 차원 안으로 옮겨가는 일이다. 거듭남은 멸망하는 아담의 운명에서 영생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영적으로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인간이 처음 난 것은 육신으로 난 것이고 거듭 난 것은 성령으로 난 것이다.
거듭남은 하나님을 떠나 죄로 죽었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거듭남은 물과 성령으로 되는 것이며 (요3:5)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벧전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거듭남은 참으로 회개한 사람이 하나님이 주시는 새 생명으로 말미암아 새로 지으심을 받는 일이다. (갈6:15, 요1:13)
거듭남의 효과는 지속적이다.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며,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 자체이다. (딛3:5)
거듭남은 새 사람을 입는 것이며 (엡4:24) 향상하는 성장을 포함하고, 성별된 삶으로 가는 것이다.
거듭남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 것이고 구원의 종말론적 완성에 연결되어 있다.
➜ 거듭남은 새로운 창조요 (고후5:17)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전이이며 (요일3:4) 마음의 새로워짐이다. (롬12:2)
거듭남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며 (벧후1:4)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이다. (롬6:3)거듭남은 하나님께로서 나는 것이며 (요1:12),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이다. (벧전1:3)
거듭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고전3:16)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다. (롬8:9)
거듭남으로 우리는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되었고 (롬8:2) 내외적 변화로 성장한다. (엡4:13)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되고 (골3:10)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 (롬8:15)
거듭남으로 우리는 새 생명으로 행하고 세상을 이기며 (요일5:4) 형제를 사랑한다. (요일3:14)
➜ 단지 구원의 교리와 신앙생활의 원리를 배우는 일은 쉽다.
그러나 거듭남이란 우리가 자아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길로 올라가는 결단과 행동이 따르는 삶이다.
이 길로 부름을 받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그 길을 따르는 사람은 적다.
신자가 승리하는 삶으로 가지 못하면 사이비 신자로 머무른다.
➜ 믿음이란 신자의 삶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믿음이란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바뀌는 과정이다. 내가 주님을 버리면 하나님이 나를 버린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정하신 우주와 인류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부흥은 깊은 밤을 통하여 탄생한다. 고뇌와 찾음의 밤을 그대는 지새었는가?
거듭남은 반드시 내적 증거를 동반한다. 당신의 신앙은 어떤 신앙인가.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믿음 안에 굳게 서라. 신앙은 본질은 “하나님 중심”이다.
➜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퍼부어졌다. 십자가에 죽의심의 전체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죄가 심판 당했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 십자가 위에 드러난 것이다.
그리스도가 첫 사람(머리)으로 죽었을 때 그리스도 안의 모든 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이것을 도외시한 속죄는 눈이 먼 속죄이다. 죄가 온전히 심판 되고 나서야 믿는 자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은 죽는 일에 대하여 끝을 맺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옛 사람의 나와 그 운명에 대하여 완전히 관계를 끊었고 그래서 하늘에 속한 질서 속에 살아야 한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 율법의 정죄에 대하여 이미 죽었다.
➜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은 모두 나에게 속한 것이라는 것이 연합의 궁극적인 의미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나는 이미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죽었고 나의 옛 사람은 영원히 심판 되었다.
이것이 연합의 의미이다. 이 연합 안에서 우리는 영원히 살리심을 받았다. 살리심이 바로 거듭남을 의미한다.
중생은 새 생명의 원소가 사람 속에 심겨지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영혼의 주도적인 성향이 거룩해 지는 것이다.
성향은 기능들의 용법과 활동을 결정짓는 것이다. 이 말은 생명의 원리가 그에게 왔다는 뜻이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다.”는 것은 (요3:8)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이기에 충분하게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전에는 죽어 있었는데 지금은 살아 있다.” 이것은 바로 믿는 신자에게 신비요 하늘의 기적이다.
➜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은 거기에 합당한 삶이 있다. 이것이 바로 가는 기독교 신앙이다.
고후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4:13,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그리스도인은 사로잡힌 사람이다. 새 생명의 원리가 그 속에 들어오고 새로운 성향이 그를 사로잡는다.
그는 자기 속에 하늘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내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 성찬예식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고 (고전11:26) 그 본질은 그의 삶과 죽으심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이다.
요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주님 가신 고난의 길을 나도 가고 그의 죽으심 안에서 나도 나의 옛 사람을 죽음에 넘기는 것이 부활영생의 길이다.
출처 : 은하교회 www.eunhachurch.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