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4회 사드반대 김천촛불집회(22.6.12)
https://youtu.be/YsitA7g4mCU
유 정님
0612(일) 사드반대 김천촛불집회 🤗제 864회🤗
생각해 보면 이 자리에 1천여 명이 되는 김천 시민들이 나왔을 때, 어떤 남자들이 그 뒤에 서서 ‘저 사람들 틀림없이 김천 사람 아니다. 김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나올 리가 없다.’ 라고 했습니다. 그 천여 명의 사람들이 여기에 온 것은 물론 자기의 이익 때문입니다.
(대구 : 6·10 민주항쟁 35주년 기념식)
(서울 : 6·11 효순·미선 20주기 촛불정신계승 평화대회)
하지만 자기 이익 때문에 나왔다가 우리 배운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효순이와 미선이가 장갑차에 깔려 죽음으로서 우리는 주한미군지위협정 보통 SOFA라고 하죠. 이 불합리를 알았습니다. 우리 소성리 사드 기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군들이 이 땅을 달라고 하니까 어떤 법적 절차를 제대로 따르지도 않고 이 땅을 미군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은 군사 기지로 너네들은 여기서 집회 하면 안 된다고 전날에 금지 제한 통보를 내립니다.
(서울 : 6·11 반미자주 노동자대회)
제가 며칠 동안 찰스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었는데요. 책에서 말을 잠시 옮기자면, ⌜모든 유기체들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변이를 일으키고 그의 후손을 남긴다. 그게 다른 종에게 해를 입히려는 것도 아니고 이익을 주려는 것도 아니다. 자기 이익 때문이다.⌟그 말이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또한 자신의 이익 때문에 나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성리 : 6·11 봉정할배 노제)
미군을 위한 모든 법이 헌법 위에 있습니다. 모든 표현의 자유 이러한 것들이 여기서는 도무지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알게 된 겁니다. 만 6년 햇수로는 7년 동안 여기서 많이 배웠습니다. 이 배움을 통해서 이 땅이 이렇게 미군에게 마음대로 넘어가는 것은 우리에게 정말로 주권이 제대로 없는 것이고 우리가 미국의 식민지나 다름없다는 슬픈 역사를 인식하는 그러한 배움이었습니다.
(김천 : 6·11 CPTPP가입저지, 통일쌀 손모내기)
그리고 이 슬픈 역사가 우리 밑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믿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말 침묵 속에 잘 견뎌냅니다. 그러다 어느 한 순간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그 역동성은 세계가 깜짝 놀랍니다. 그래서 저는 그 힘이 언젠가는 발휘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은 많이 가라앉아 있지만 머지않아 우리들의 힘은 다시 나타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저항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내 자신이 너무나 소중하고 우리가 너무나 소중하며, 남의 나라에게 이렇게 짓밟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내 인격이 이렇게 모독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에게 외치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들의 이익을 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를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거죠.
우리는 우리의 이익을 찾아나가야 하는 겁니다. 비록 우리가 약한 나라로 살아왔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꿋꿋한 문화와 전통이 있습니다. 이러한 힘이 우리를 이 굴욕의 현실에서 일어서게 해서 분명히 저항하게 만들 것이고 외치게 만들 것이고 그리고 우리의 자존감을 되찾을 수 있게 될 것이라 굳게 믿습니다.
언젠가는 승리할 것이라 믿기 때문에 오늘도 머릿 수 하나 보태려 나왔습니다. 끝까지 아니 끝까지라고 제가 함부로 약속은 못하지만 늘 그 자리에 함께 하면서 함께 외치도록 하겠습니다. (by 구자숙)
● 이끄미 : 장재호 사무국장
안타까운 사연을 전해드립니다. 소성리의 고 이채구 어르신께서 저희와 함께 하시다가 먼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우리랑 항상 함께 하셨고 미군의 공사차량을 함께 막아왔던 이채구 어르신, 우리 봉정 할배의 명복을 비는 묵념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내일은 효순이 미선이 두 여중생이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2002년 6월 13일) 운명을 달리한 20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하여 어제 토요일에 서울에서 6·11 평화대회가 이루어져, 성주와 김천 함께 동참해서 성주의 사드 투쟁에 관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왔습니다. 그 소식도 함께 전하겠습니다.
● 묵념과 ‘임을 위한 행진곡’제창
● 여는 발언 : 박태정 공동위원장
시골은 지금 많이 바쁩니다. 농사짓는 분이 아니더라도 많은 분들의 일상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갑니다. 그 모든 힘겨움에도 전쟁없는 세상,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해주심에 맘이 넉넉해집니다. 힘들고 더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평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끝까지 함께 하셔야 합니다.
미국은 지금 중국이 조금 팽창하려고 하니까 자기들하고 그동안 친했던 나라들을 갈라치기 해서 계속 지구를 두 조각 내려고 상당히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절대로 우리나라는 동참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 지금 대한민국이 하는 꼬락서니 보니까 ‘미국 아니면 죽을 상 싶은가?’ 대통령의 행보는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폼만 잡고 있어도 미국은 우리 한반도를 절대적으로 버리지 못합니다. 배짱을 튕겨야 되는데 줄 거 다 주고 챙기지도 못하는 그런 외교 앞으로 지양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 국민은 절대로 그냥 잊지 않고 다 나서서 막았습니다. 지금 그렇게 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래도 우리 마음대로 선거를 하는 그런 일을 만들었습니다. 군사 독재가 많은 악행을 저질어도 그에 굴하지 않고 목숨 바쳐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한 열사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여기서 호흡하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후손들을 위해서도, 우리 조상들이 5천년을 지켜 온 이 금수강산을 위해서도, 우리는 이 조국을 외세의 군사적, 경제적 압박에서 꼭 지켜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끝까지 평화를 지키고 전쟁을 막는 일에 꼭 함께 해 주시기 바랍니다.
● 봉정할배의 벗, 고희림 시인의 추모시 낭독
봉정할배가
안보이신지 3주가 지났다고 들었습니다
누군가는 봉정할배가
돌아가셨다고 하지만
저는 봉정할배가
어디로 가셨는지 모릅니다
매일 뜨는 저 햇살 속 어딘가에
허청허청 걸어 오실 것 같고
저기 뒷 편 정자에서도
정자 옆 손수 지은 허름하고
양지바른 아지트에서
한 잔 하시고 계실 것 같고
저기 저 소파에도
저기 저 마당 끄트머리에서도
경찰들에게 지팡이를 휘두실 것도 같고
매일 같은 모습으로
여기 오래된 싸움 속에 함께
그런 우리의 기억 속에
할배는 계속 계십니다
현철이도 안보이고
집실댁도 안보이고
오늘은
우리 봉정할배도 안보이지만
여기 이 자리는
함께 있었던 자리이고
함께 있어야 할 자리이고
함께 했으므로
계속 함께 해야 할 자리라서
사시는 마을이고
그래서 한반도 평화의 진원지
소성리이겠지요
평화를 깨는 전쟁
평화를 깨는 무기
평화를 깨는 사드
평화를 깨는 명령
평화를 깨는 모든 이기적인 행동을
버리자고 외친 마음이 모여
평화의 마을이 완성 되어가고 있는 이곳에 산다는 것은
놀랍고
자랑스럽고
감사한
오늘도 특별한 날입니다
“사드 저거 참 아무 쓸모도 없는 거
저거 빼긴 빼야 하는데...
작고 보잘것없는 노인의
얘기를 들어주고
술도 받아주고 해서
참말로 고마워요”
집에 가실 때마다 항상 하시던 말씀이
귓가에 맴돕니다
왕소금 찍어 술 자시며
할배가 가끔 노래도 부르셨습니다
저거는 저거끼리 우리는 우리끼리
눈을 딱 감자는 말씀은 한번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지팡이로 땅을 치며 구르는
흥얼흥얼 숭얼숭얼
검버섯 꽃 무성한 가락에는
아무 일이 없었던 것이 결코 아닌 노래
인민들 세상에서 잠시 배웠던 노래!
장군들의 노래! 에서부터
두만강의 노래
농민들의 노래 국군의 노래
숨길 것도 숨을 곳도 이제는 없을
숱한 노래를 들었습니다
전쟁을 치른 마을의
잇몸에서 새어나오던 가락들이었습니다
할배의 표정과 부녀자들에 대한 태도를느끼고 알았습니다
빵공장에서 배급받던 동정품과
작은 마을에서 없어진 소 두 마리의 행방과 월북양반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끊임없이 불어오는 세월과 바람의
힘 부친 배고픈 날들을
들었습니다.
연대자들을 기다리는
애 타는 마음위로
흰 머리카락 같은 구름을 이고 계셨습니다
가끔씩 부풀어 오르는 쌈지에
주홍글씨를 새기는 조각가 같았던
할배의 심정을 참 얼핏 설핏 많이도
들었습니다
끝까지 끝까지
듣지 못한 시간들과
그동안의 기억이 지나갑니다
할배요
감사했습니다
우리나라 일제치하, 전쟁, 학살의 구비구비
근현대사를 버텨오신
봉정할배요
참 감사합니다
많이 듣고 배웠습니다
항상 평안하십시오
봉정할매는 우리가 잘 보살필께요
우리와 함께 항상 계실 봉정할배요
“사드는 침략이다!” 사드 뽑기 위해 끝까지 싸울 것
효순미선 20주기를 맞아 열린 평화대회에서 전국 곳곳에서 미군기지 때문에 고통 받는 민중들의 목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일주일에 5일이나 미군 활주로 확보를 위해 주민들을 끌어내고 있다는 소성리 이야기입니다.후원안내※ 일시 후원 우리은행 1005-501-779765 / 예금주 : 주식...
● 박수규 성주대책위 대변인 발언 <효순 미선 20주기 촛불정신 계승 평화대회>
● 최현정 공동부위원장
어제 <효순 미선 20주기 촛불정신 계승 평화대회>에 성주 박수규 대변인의 발언이 있었고, 김천에서는 이동욱 위원장님, 장재호 국장님과 함께 <반미자주 노동자대회>에서 위원장님의 연대 발언이 있었습니다.
봉정할배의 노제만 참석하고 김천에서 조금 일찍 출발했었습니다. 소성리에 와 본 연대자치고 봉정 할배를 모르는 이 없었던 터라 함께 애도하기도 하였습니다.
뜨거운 날씨의 아스팔트 온도처럼 집회의 현장은 뜨거웠습니다. 효순이와 미선 두 여중생의 죽음으로 진실규명, 책임자 처벌, 불평등한 SOFA 개정 등 그 무엇 하나 제대로 되지 않고 그 불평등은 20년 동안 심화되고 미군의 횡포에도 처벌하나 제대로 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평화대회에서 성주를 포함한 용산, 동두천, 평택, 군산, 부산의 미군기지 현장에서 투쟁하는 주민들의 목소리를 한자리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발암물질이 범벅인 용산 공원을 복구도 하지 않은 채 윤석열 정부는 나몰라라 국민들에게 공개하고, 말로는 도민들의 숙원사업인 국제공항을 만든다며 새만금에 미군의 활주로를 만들려하고, 미 본토나 그 어떤 나라 미군기지에서도 하지 않는 세균실험을 수백만의 인구가 사는 부산에서 하고 있지만, 그 어떠한 것도 미군은 설명이나 사실 확인을 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 현장 어디에도 자국민을 대변하는 정부도, 국민을 지켜주는 곳은 경찰도 없었습니다. 그저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대한민국 전체를 미군 기지화 하는 것에 부역하는 정부만 있었습니다.
평화대회서 나눠주는 뱃지 봉투에 “2002년 효순이 미선이 촛불을 기억하는 당신, 참 고맙습니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촛불이 된 효순 미선이의 이야기를 저는 한 참이 지난 후에 알았고 부끄럽지만 저의 촛불은 이 사드반대가 처음이었습니다.
2002년 6월 13일 미군 장갑차에 압사당해 죽은 14살의 두 소녀를 보며 14살의 딸을 키우는 엄마로서, 무엇하나 바뀐 것이 없는 것 같아 효순이 미선이에게도... 사드를 막아내지 못 함에 내 딸에게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20년의 세월동안 여전히 바뀌지 않은 불평등한 한미관계! 우리가 제대로 바꿔냅시다! 사드빼고 평화심는 그날까지 우리의 자주 주권 지켜냅시다!
이 땅은 미국의 전쟁기지가 아니다!
불평등한 한미관계 바꿔내자!
● 구자숙 기록팀장
봉정할배께서 돌아가셨다고 지난 6월 9일 새벽 소성리 길거리에 들었습니다. 구호를 외치는 중에 참으로 많이도 울었습니다. 우리의 슬픈 마음은 아랑곳없이, 경찰은 미군차량진입을 위해 주 5일 작전을 하겠다고 합니다. 정권이 세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박근혜 정부는 성주에 사드를 배치하겠다고 했고 성주 주민들이 들불처럼 일어나니까 깜짝 놀라서, 그곳을 롯데골프장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탄핵되는 와중에 황교안은 사드 발사대 2기를 반입했습니다. 또 한밤중에 모든 주민들을 집 안에 가둬 놓고 못 나오게 하고, 소식을 듣고 달려가던 김천 사람들이나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을 다 요소요소 길목에서 막고 그렇게 발사대 2기를 들여보냈습니다.
다시 정권이 바뀌어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지만 9월에 사드 발사대 4기를 추가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소소한 차량들이 들어간 건 다 치우더라도 2020년 코로나가 아주 극성을 떨쳐서 거리 두기를 하는 와중에 수천의 경찰을 보내어서 사드 성량 개량할 수 있는 장비를 들여보냈습니다.
다시 2021년에 와서는 주2회 경찰을 보내서 기지에 차량을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차들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하루 종일 들어가는데 어떤 날은 170대가 들어가는 날도 있습니다. 그러나 점차 그 횟수가 줄어드는데 오히려 경찰이 들어오는 횟수는 늘어났습니다.
정권이 바뀔 무렵인 2022년 3월에는 주 3회로 바뀌었습니다. 그것도 부족한지 윤석열 정부는 매일같이 공사 차량을 들여서 사드 기지 안정화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길바닥에서 소성리 주민들과 저희들 성주와 김천 그리고 원불교 사람들은 그냥 맨몸인 채로 길바닥에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자리에 맨 앞 자리에는 금연 어머니가 앉아 계셨고 그리고 우리 어머니들이 진 치고 뒤쪽에는 우리 아버지들이, 그리고 가장 뒤쪽에 봉정 할배가 앉아 계셨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나이 드신 분들이 무슨 연유로 이 자리에 와 있는지 아무도 거기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경찰들은 왜 그 자리에 와 있는가? 그것은 ‘사드기지 정상화’라는 게 딴 게 아니고 저 대구나 외관처럼 미군들이 무시로 아무 때나 무기도 들이고 미군 차량도 들이고 자유롭게 통행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들은 우리 몰아내고 난 다음에 하루 종일 차량들을 들여보내는데 정말 별 거 아니거든요. 화장실차 쓰레기차 물차 부식차... 정말 우리가 평소에 충분히 협의해서 보내주는 것들이거든요. 그런데도 막무가내로 들여보내는 이유는 오로지 자유롭게 다니겠다는 겁니다. 이곳을 확보해서 자기들의 확실한 땅으로 만들겠다고 그렇게 하는 거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은 우리 땅이다.’ ‘이 땅을 마음대로 그렇게 드나들게 해서는 안 된다’는 그러한 생각에서 그 길에 나섰던 것이고, 그 길에서 끌려나올 수 밖에 없었고 경찰에게는 범법자 취급을 받는 겁니다. 우리인 들 왜 겁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벌금내는 거 감옥가는 거 겁납니다. 뭐가 우리가 통뼈라고 그 길에 그냥 버티고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 땅이 그렇게 미국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밝혀주기 위해서입니다.
그 길에서 우리 봉정 할배가 떠나셨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여러 분들이 돌아가셨지만 사실 그때만 해도 잘 모르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봉정 할미가 돌아가신 그 소식은 정말 사람을 슬프게 했습니다. 특히나 저와 같이 60세가 넘은 사람들은 그 소식이 세상스럽게 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나한테도 어쩌면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나의 남은 시간을 이렇게 끌려오는 이런 굴욕적인 삶에 이런 투쟁에 바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되게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승리할 것이라 믿기 때문에 오늘도 머릿 수 하나 보태려 나왔습니다. 끝까지 아니 끝까지라고 제가 함부로 약속은 못하지만 늘 그 자리에 함께 하면서 함께 외치도록 하겠습니다.
● 박석민 자문위원장
지금부터 4년 전, 2018년 6월 12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번 기억을 떠올려보시죠? 4년 전 오늘이 역사적으로 처음 북·미간의 회담이 있었던 북미 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있었던 날입니다.
그래서 크게 네 가지 북미 간의 합의를 통해서 이제 정말 지긋지긋한 분단을 걷어내고 평화와 통일로 나갈 수 있겠구나~ 우리가 이런 희망을 갖게 됐습니다. 물론 그 전에 4월 27일 판문점 남북 정상 합의도 있었구요. 물론 문재인 정부는 ‘모두 다 Yes라고 할 때 No할 수 있어야 된다’ 라는 말처럼, 미국의 요구에 한 번도 No를 안 해보고는 양산 사저로 내려갔지만...
6월 12일, 오늘은 ILO가 정한 ‘세계 아동 노동 금지의 날’이기도 합니다. 전 세계에 2억 4천만이 넘는 아이들이 강제노동에 착취된다고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진 자와 지배력을 갖고 있는 자들이 피지배 계급인 사람들을 억압하는 이 사회 구조가 전 세계에 만연되어 있으며, 우리 또한 지배·피지배 식의 한미 관계를 바꿔야 되는 과제가 남겨져 있습니다.
유월입니다. 잠시 1987년 유월의 그 날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6월 항쟁은 광주민중을 학살하고 군사구테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에 맞선 민중들의 항쟁이고 봉기였습니다. 아시는 대로 전두환은 80년 8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10대 대통령 최규하의 남은 임기를 채우는 11대 대통령이 됩니다. 그때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인원이 2524명이었는데, 2523표가 찬성이었고 1표가 무효표였습니다. 하여 그 다음부터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과서에 ‘북한은 독재’라는 식의 표현이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똑같거든요. 2500명 넘게 모여 다 찬성표 찍었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그가 81년 2월에 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 그 당시의 언론 보도를 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 때 KBS보도가 ⌜남북이 군사적으로 대결하고 지척에 있는 이런 상태에서 전두환 장군 같은 이런 훌륭한 장군을 대통령으로 내려주신 하늘에게 감사한다.⌟지금으로서는 상상도 안 되는 그런 치하였지요. 그러한 철권 통치도 87년 박종철의 죽음으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해 1월에 ‘운동권 선배(박종운) 거처하는 곳을 불어라’면서 끌려갔던 박종철이 ⌜책상을 쳤는데 ‘억!’하고 죽었다⌟라는 의사의 판정에, 전국에서 데모가 시작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2월 7일, 3월 3일, 많은 이들이 연행되고 힘겨운 싸움들을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사건 주도자로 구속된 경찰 두 명은 서울남부구치소에 수감됐고 당시 구치소 보안계장은 이들을 접하는 과정에서 그들 외에 추가로 경찰관 3명이 고문에 관여하였고, 경찰은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한다는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보안계장은 마침 수감 중이었던 이부영 당시 전민련 상임의장에게 그 사실을 전달하였고, 이 씨는 쪽지에 추가 관여 은폐 사실을 적은 뒤 서로 친분이 있었던 교도관을 통해 쪽지가 외부에 전달토록 하였습니다. 해당 쪽지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와 함세웅 신부에게까지 전달되어
5월 24일, 마침내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에서 폭로기자회견을 합니다. 이제 들불처럼 싸움이 번져가기 시작한 거죠. 박종철 죽음 이후에 전두환의 폭정에 맞선 그리고 그런 싸움 한가운데 6월 9일 이한열이라고 하는 연세대 학생이 연세대 출정식에 나가서 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7월 5일 후유증으로 사망하여 6.10 민주 항쟁의 도화선이 된 것입니다.
결국 전두환이 항복 선언을 하고, 노태우가 ⌜6·19 선언⌟을 통해서 헌법을 개정시키고 국민의 손으로 직접 선거하는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일부 진전하는 거죠. 그 뒤,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이제 민주주의가 안착할 수 있도록 하는 대중적인 전체의 싸움으로 발전한 겁니다. 그 이후부터 이른 바 시민운동이 생기기 시작한 겁니다.
이렇듯, 이 긴 기간 동안 민주주의와 인권과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쌓아왔던 이 역사의 힘이 우리한테 있는 거고 그 힘으로 역사는 발전해 온 겁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온 것이구요. 30년 정도가 지금 우리 사회는 훨씬 더 진보의 방향으로 나와 있는 겁니다. ‘그 싸움을 우리가 해 온 거고, 우리가 시대적으로 살아야 하는 과제’라고 하는 생각한다는 이런 말씀을 6월 항쟁 얘기와 더불어서 다시 한 번 강조해 보았습니다.
사드 뽑아야죠. 왜?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가 싸우는 것 맞죠. 그런데 우리의 목표와 요구는 단순히 사드를 뽑아서 우리들의 일상을 돌려받으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싸움을 하는 겁니다. 사드가 뽑히고 그래서 한미 관계의 굴욕적인 관계가 개선되고 이 땅의 진정한 평화를 만드는 이 싸움이 우리 시대의 과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 서 있는 것입니다. 힘들고 험난하고 어렵지만 이 자리를 지키고 또 함께 어깨 걸고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 마물 율동 : 가자, 통일로~~
0613. 소성리 진밭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