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인쇄를 할 때는 지금처럼 컴퓨터에서 직접 편집해서 인쇄소로 넘기지 않고 사식을 쳐서 판형을 만들어 인쇄소에
넘겨야 했다. 아르바이트로 교정을 하다가 부산에 출장을 갈 일 있었다.
제법 부피가 나가는 판형을 가지고 열차 안에서 교정을 보면서 갔다. 옆 좌석에 앉아있던
꼬질 꼬질한 양복 차림의 촌노가 물끄러미 내가 일을 하는 모습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높으신 분인가 보지요?”하면서 순박한 웃음을 보이면서 물었다. 나는 순간 ‘내가 무엇을 잘못 들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다음 순간 ‘아! 이 분이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촌노는 흔히 볼 수 있는 종이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비싸게 보이는 두꺼운 종이에 붉은 펜으로 마음데로 표시를 하고 고치고 하는 나의 행위가 대단하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빈민운동을 할
때 사고나 불행을 당했을 때 사돈의 8촌 까지 뒤져 보아도 자기에게 힘이 되어줄 9 급 공무원 한 사람이 없는 사람이 보통이었다. 나는 이들을 진짜
민중이라고 부르고 싶다. 요즘 동아 일보의 사설을 보면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사람들의 사돈의 8촌 안에 노동자나 농민, 도시빈민이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지에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인 가운데 집안도
좋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고 인격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흠 잡을 것이 없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한국에 한 번 갔다 올 때 마다 “한국 사람들 잘 살아.”를
되풀이 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의 주위에는 잘 사는 사람들 뿐이고 한국 사회의 밑바닥 사람들과
마주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집권 이후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집권 세력과 한국 사회 실질적 지배층과의 갈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것이
엊그제 문재인 대통령 두 돌 기념 기자회견에서 KBS 기자의 태도에서 나타난 것이다. 기자의 자세는 한 마디로 인정하고 싶지 않는 자세이었다.
질문의 내용도
논란이었지만 표정에 대하여도 논란이 많았다. 한 마디로 ‘똥
씹은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얼굴의 표정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사람을 만나면 서로 얼굴을 본다.
얼굴에 대해서
가장 심오한 이야기를 한 사람은 프랑스의 유대인 철학자 임마뉴엘 레비나스이다. 그는 리투아니아 출신
유태인으로 히틀러의 수용소에서 부모와 형제를 읽고 자신도 독일군의 포로로 잡혀 수용소 생활을 하다 전쟁이 끝나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유대인으로서 개 보다 못한 취급을 받다가 구사일생으로 집에 돌아오면서 기르던 개가 자기를 반길 때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개는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낯선 사람에 대해서 항상 기대를 걸고 바라보고 있는데, 인간은 자기 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얼굴이
자기 스스로 내보이는 방식을 '계시'라고 부른다. 그가 다른 말이 아닌 '계시'라는
종교적 언어를 굳이 사용하고 있는 까닭은, 얼굴과의 만남은 절대적 경험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타인은 나에게 얼굴을 통해 다가온다.
얼굴과 머리는
다르다 .머리는 하나의 물체지만, 얼굴은 표정을 말하고 그
표정 안에는 모든 게 다 들어있다. 그래서 얼굴은 메시지를 주고 느낌을 전달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KBS의 기자가 인터뷰에서 표정으로 보여준
메시지에 많은 사람이 공감을 하지 못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