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과일인데... 동글동글한데, 두 자인데... 과일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몇 분을 집중해도 생각이 나지 않더니만, 마지막에 스마트폰으로 네이버를 접속하려는 순간 떠올랐습니다. 그래, 멜론!
요즘 들어 한 번씩 단어나 사람 이름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익숙한 사물, 친지임에도 그러할 때가 있습니다. 건망증이 치매는 아니지만 치매의 예비증상이라는 얘기들도 합니다. 건망증과 치매의 구분법을 우스갯소리로, 곰방대를 들고 팔을 앞뒤로 흔들며 걷던 양반이 보였다 보이지 않았다 하는 곰방대를 보며 “이게 어디 갔지?” 하면 건망증이고, “이게 어디 쓰는 물건인고?” 하면 치매로 치부하면 된다고도 합니다. 어찌 되었건, 이순의 나이에 벌써 단어가 머릿속에, 입안에 맴돌며 튀어나오지를 않으니 참 기가 찰 노릇입니다. 친구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런 상태를 호소해 오기도 했습니다. 지능은 25세 정도에 절정이라니 그 이후부터 기억력이나 반응 속도가 더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그래도 서글픈 일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러려니 하고, ‘나도 이제 나이 먹은 표가 나기 시작하고 있네.’ 정도로 넘기고 맙니다.
하지만 노모의 경우는 다릅니다. 올해 미수이신 어머니께서 수년 전부터 의지가 약해지시고 판단력, 이해력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누나가 어머니 포함 4남매의 단톡방을 두고 4남매만의 단톡방을 개설하여 어머니의 요즘 상황에 대한 우려의 얘기를 꺼냈습니다. 4남매 각각이 조금씩은 느끼고 있었지만, 막상 공론의 장으로 나오니 걱정하는 마음이 증폭되었습니다. 수일 전 어머니께서 카톡에 ‘13’을 여러 번 올리시는 걸 보고 그냥, 오타로 치부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누나 얘기로는, 그날 TV프로 볼 게 없다 하시기에 EBS(13번)에서 '세계 테마기행' 알프스 설경 구경하시라 말씀드렸는데 좋아하시더랍니다. 그런데 리모컨이 아닌 전화기에서 13번을 계속 누르셨다는 거지요. TV에 나오는 인물에 대해서도 “저 사람 트럼프 맞지?”, “저 가수 이찬원 맞지?”, 자꾸 질문을 통해 확인하십니다. 요즘 자주 "내가 요즘 등신 같아."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엄마 연세에 그 정도면 양호하시지요. 친구분들과만 비교하더라도...”라 대꾸했지만, 그냥 그리 치부하고 말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래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미 부모님의 치매가 시작되어 요양원으로 모신 이들이 적지 않은데, 그들은 공통으로, 닥쳐서 대응하지 말고 미리 좋은 요양 시설 알아봐 두랍디다. 조금 거부감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론 바람직한 대비책 중 하나라는 생각은 듭니다. 미리 알아두고 준비하여 나쁠 일은 없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치매가 오지 않도록 당신이, 자식들이 함께 노력하는 것, 오는 치매를 더디게 오도록 진단하고 약이라도 드시게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머니께서는 연초에 치매 검진을 한 번 받으셨는데, 의사는 어머니께서 자기보다 총기 있으시다며 걱정하지 말라 하셨는데, 요즘 이러시니 더 걱정됩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보고, 지인들에게 물어보았는데, 공통으로 추천하는 방법은 일단 보건소에 가서 한 번 씩 보이는 아주 미세한 이상 증상에 관해 설명하고 소견서를 받아 치매 전문병원에서 검진을 제대로 받고, 필요하다면 아니 가능하다면 치매를 늦추는 약을 처방받아 드시게 하는 게 좋겠다는 겁니다. 이 주말 편지를 보시는 분 중에서 좋은 방법 알려주시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일단 다음 주에 어머니 모시고 보건소, 병원 가 볼 생각입니다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걱정이 옅어질 수 있는 건 어머니의 단체카톡방에서 한 말씀 덕분입니다. 얼마 전 실수로 어머니께서 단톡방을 탈퇴하셨기에 다시 초청을 하였더니 “집 나갔다 다시 오셨네.ㅎㅎ”하는 문자를 보시곤 “그래 됐다. 나가보니 별 볼일이 없더구나.”라고 답을 주셔 모두가 파안대소했었습니다. 이 정도 순발력, 총기가 있으시면 걱정 붙들어 매도되겠다 하고 잠시 위안 삼습니다. 가는 세월은 어쩔 수 없지만 멀어지려는 총기는 붙잡아 매 두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더욱 긍정적인 생각, 더 많은 독서, 글쓰기로 의식을 정갈하게 다듬어야겠습니다.
어느덧 아내와 함께한 세월이 어머니 슬하에 산 시절보다 길어졌습니다. 아래 모셔온, 시인이 아내에게 하는 말, 거기에 몇 배 보태고픈 어머니에 대한 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오랜만에 들판으로 나갔습니다. 코로나19로 너무나 한적한 반곡지, 그래도 좋았습니다.
https://blog.naver.com/bornfreelee/222074491893
시낭송가 공혜경 님이 낭송하신 ‘늙어가는 아내에게’
https://youtu.be/_V2Q_Zk7cjk
늙어가는 아내에게(모셔온 글)============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곱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알 한 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 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을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대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황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