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독교 이야기는 우리가 어떤 것을 그냥 바라보게 하는 (look at)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무언가를 볼 수 있게 하는(look through) 안경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 레슬리 뉴비긴은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 속에서 세상 속에는 문화 내러티브 즉 성경과 다르지만 일반사람들이 진리같이 생각하는 공리가 있다고 말하고 그것을 깨뜨려줄 때 비로소 기독교가 말하는 전제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 2. 계몽주의 이후에 발생된 다원주의는 기독교적 진리를 사적영역의 하나의 진리라고 말하고 공적 영역에는 과학적으로 검증된 이야기만 올라와야 한다고 압박한다. 이것을 뉴비긴은 타당성구조(plausibility structures)라고 말하는데, 특정 사회에서 어떤 신념을 더 타당하다고 믿는 사회적 구조를 말한다. 오늘날은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타당성 구조 속에서 이성이 종교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세계관 속에 있다는 것이다. . 그래서 다윈주의 사회에서는 단순히 복음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계몽주의 사회가 가지는 모순을 드러내주는 것이 복음의 장애물을 해결하는 첫 번째 시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을 먼저 걷어내야 복음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 3. 팀 켈러는 다윈주의 사회는 항상 우리의 신앙을 개인화하게 함으로써 공공문화에 동화시키려는 압박을 가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직장이나 사회에서 신앙을 고수하려는 움직임을 가질 때 어떤 문화적 압박이 있어야 정상이라는 것이다. 문화적 압박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미 동화되어 있기 때문이라 결론을 내린다. .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과 그 친구들처럼, 외부적 압박이 거세지고 있고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는 개인의 신앙을 공적인 영역으로 적용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부담스러워한다. 이런 시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뜻을 정해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용기와 문화를 이원화 하지 않는 지혜가 동시에 필요하다. . 4.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의 복음을 거짓복음으로 만드는 상황 속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도들과 친교의 악수를 나눈다. 복음의 연합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바나바와 함께 헬라인 디도를 데리고 가는데,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는다. 가만히 들어온 거짓형제들의 시도에 대해 바울은 강하게 저항한다. .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다." (갈 2:5)고 강하게 말한다. 다윈주의의 압박으로부터 신앙을 고수하려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분별하며 저항해야 한다. 월터 브루그만은 <안식일은 저항이다>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은 애굽의 파라오의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라고 설명한다. . 5. "파라오의 시스템 안에서 안식일의 쉼은 있을 수 없다. 파라오가 생각하는 감독기능에는 쉼이 없다. 쉬게해주는 것이 없다. 매일 생산 스케줄을 감시한다. 소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피로한 시스템 속으로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 뚫고 들어오신다. 노예살이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그 착취 시스템에서 해방시키기로 결심하시고 모세를 부르셨다." . 오늘날 과학적 세계관은 결국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배제하고 보이고 검증가능한 세계만 공리로 인정하기 때문에 자연주의 세계관은 결국 물질주의로 흐르게 된다. 물질주의, 자본주의, 소비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성취와 돈 즉 눈에 보이는 무엇을 구원의 단계로 격상시키며 산다. . 6.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에서도 이전에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시대였는데, 지금은 자신 스스로가 착취하는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구분되지 않기에 더욱 심각한 피로사회를 살게 된다고 경고했다. 왜 우리는 자신이 스스로를 착취하는 피로사회를 살고 있는가? 오늘날의 타당성 구조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 신앙을 회복하려면 먼저 내가 속해 있는 문화의 내러티브 즉 타당성 구조에 아무생각없이 동화되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그것을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그래서 복음의 타당성 구조 위에 신앙을 세울 때만 공공영역 속에서도 복음이 빛을 발할 수 있게 된다. . 7. 이런 타당성 구조 속에서 우리를 눈 멀게 하는 것 중의 하나는 스마트 폰이다. 데이비드 키네먼과 마크 매틀록이 공저한 <디지털 바벨론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오늘날 우리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설명한다. 스마트폰 속에서 문화내러티브를 지속적으로 공급받는 또 다른 종교를 섬기고 있는 셈이다. . 이런 '디지털 바벨론 세상'에서 경계해야 하는 것은 유투브를 오래보고, 쇼츠로 시간을 보내는 정도가 아니다. 스마트폰을 통해 또 다른 종교가 심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또 다른 종교적 메시지는 '능력주의'다. 어느 사격 선수가 이런 인터뷰를 했다. "남들이 150발 쏘면, 저는 300발, 500발 쏘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해야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압박이 안식하지 못하게 하는 주범이다. . 8. 이것이 오늘날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다른 복음, 변질된 복음일 것이다. 바울은 가만히 들어온 가짜 복음을 분별하고 그것과 싸우고 있다. 그 가짜 복음은 결국 우리의 자유를 변화시켜 종노릇하게 할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율법주의는 믿음의 구원에 무엇을 더하는 행위다. 믿음으로 구원받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행위를 더해야 완전해질 수 있다고 유혹한다. . 종교가 말하는 율법주의와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복음은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가? 복음은 다른 사람들 사격할 때 놀아도 된다는 말인가? 결국 무엇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순서의 문제이다. 율법은 나의 행위를 통해 더 의로워져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복음은 이미 나를 위해 행하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누리면서 그 은혜가 노력의 동기로 작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 9. 율법은 늘 나를 피로하게 하고 노력하게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자기정죄뿐이다. 우울과 실망으로 끝나게 된다. 끝없이 노력해도 늘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모든 면에서 다 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율법주의 종교가 가지는 폐해다. 오늘날 율법주의는 능력주의 성취주의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피로하게 하고 안식하지 못하게 한다. . 복음은 더 이상의 정죄가 없다는 선언이다.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셨다는 선언이다. 그 사랑안에서, 그 안정감 안에서 출발할 수 있게 한다. 다른 누군가보다 100발을 더 쏘아야 하는 경쟁의 문제가 아니라, 은혜가 동기가 되어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기 위해 열심을 내는 것이다. 열심이 결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순종으로 이어지는 삶이다. . 10. 칭의와 성화의 순서를 회복하는 것이 복음의 정수이며,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출애굽 당시에도 율법이 주어지고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다. 은혜로 구원하시고 그 다음에 율법을 주셨다. 은혜와 율법과 순종과 축복이라는 패턴이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 복음의 패턴이다. . 복음은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 열심을 통해 무엇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열심의 동기로 작용하게 한다. 결국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은 복음이다. 복음이 종교로 변신될 때 우리는 늘 안식이 없는 노예로 살아가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