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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불차(三不借) 전통의 주실마을과 청록파(靑鹿派) 시인 조지훈(趙芝薰)
2012. 10. 9 영양은 주실(舟室)마을의 시인ㆍ국문학자인 조지훈(趙芝薰), 감천마을의 시인 오일도(吳一島), 현재 활동중인 두들마을의 소설가 이문열(李文烈)을 탄생한 문향(文鄕)의 고장이다. 외씨버선길 Route 7인 치유의길(일월자생화공원-우련전)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유서 깊은 주실 마을과 현대 시인이며 국문학자인 조지훈(趙芝薰)문학관을 둘러보게 되었다.
영양관광지도
조지훈이 태어난 주실(舟室)마을은 행정상으로는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통(傳統)마을이면서도 실학자(實學者)들과의 교류와 개화(開化) 개혁(改革)으로 이어진 진취적(進取的)인 문화를 간직한 매우 유서(由緖) 깊은 마을이기도 하다.
주실마을 그림지도
주실교(舟室橋)를 건너 마을 입구 주차장에서 바라본 주실마을은 고풍(古風)이 넘쳐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을 연상하게 한다. 길가와 방천길 옆에 피어있는 코스모스는 가을의 시골 정취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가을을 알리는 방천둑의 코스모스
마을 전경(全景)을 카메라에 담기위해 주실교쪽으로 뒤돌아와 마을 살펴보니 말로만 들었던 개화문물(開化文物)의 산실(産室) 역할을 했던 교회(敎會)와 전통학문(傳統學問)을 전수(傳授)한 월록서당(月麓書堂)이 마을의 중앙과 동쪽 고지대(高地帶)에 위치하고 있다. 서당(書堂)과 교회(敎會)가 이 마을 사람들을 일찍이 학문과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역할(窓口役割)을 한 것 같다.
주실마을 전경(흰 건물이 서양 문물을 전파한 교회이다)
월록서당(시간에 쫓기어 직접 촬영하지 못했음) - 자료제공 문화재청
주실마을 전경 2
주실(舟室)마을은 한양(漢陽) 조씨(趙氏)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주실(舟室)이란 이름은 마을의 모습이 배의 모습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먼저 조지훈(趙芝薰)의 생가인 호은(壺隱)종택을 찾았다. 호은(壺隱)종택은 이 마을 입구 주실교(舟室橋)우측에 위치해 있다. 마을 중심에 자리 잡은 호은종택(壺隱宗宅)은 주실마을 조씨들의 시조(始祖)이자 조지훈(趙芝薰)의 선조(先祖)인 호은공(壺隱公)이 세운 집이다. 한양(漢陽) 조씨(趙氏)인 호은공(壺隱公)의 선대(先代)는 한양에서 거주하다가 1519년 조광조(趙光祖)의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전국 각지로 흩어졌는데, 그 후손 중 하나인 호은공(壺隱公)은 1629년 주실(舟室)에 자리를 잡고 한양(漢陽) 조씨(趙氏)들의 집성촌(集姓村)을 만들었다.
조지훈이 태어난 호은 종택
이곳 호은종택(壺隱宗宅)은 4백년 가까운 세월을 이어온 집인 셈이다. 이 고택은 그 소박한 규모가 청빈(淸貧)한 선비의 풍모(風貌)를 연상케 한다. 이 집터를 잡은 일화(逸話)가 몹시 흥미롭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호은공(壺隱公)이 매방산(梅坊山)에 올라가 매(鷹)를 날려 집터를 잡았다는데, 이 매가 앉은 자리가 늪지대였다고 한다. 왜 매를 날려 집터를 잡고, 더욱이 늪지대를 메우면서까지 그곳에 집을 세웠을까? 불가(佛家)에서는 절터를 잡을 때 고승(高僧)들이 오리를 날려 그 오리가 착지(着地)하는 지점에 터를 정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는 오리를 해수관음(海水觀音:뱃사람들은 해수관음을 바다의 풍랑을 다스리는 신으로 여겼다)의 화현(化現)으로 보는 까닭이다. 아마도 날짐승들은 땅에 내려앉을 때 본능적(本能的)으로 유리한 지점을 잡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오리나 매를 날려 터를 정하는 것은 사람에 비해 발달된 동물의 감각(感覺)을 이용한 일종의 동물점이라 보는 해석이 있다. 늪지대에 집터를 잡은 것 역시 불가적(佛家的) 택지법(擇地法)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늪지를 메워 사찰((寺刹)을 세우는 방법은 고대(古代) 불교(佛敎)에서 행하던 풍습으로, 익산(益山)의 미륵사(彌勒寺), 치악산(雉岳山)의 구룡사(龜龍寺), 고창(高敞) 선운사(禪雲寺)의 대웅전(大雄殿) 자리가 늪지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하튼 불교(佛敎) 사찰(寺刹)이 아닌 유교 선비의 집터를 늪지에, 더욱이 매를 날려 잡았다는 것은 인상적인 일화(逸話)다. 유가(儒家) 선비이되 도가적(道家的)인 취향(趣向)마저 갖춘 호은공(壺隱公)의 범상치 않은 정신세계(精神世界)를 짐작해볼 수 있다.
호은 종택 안채
문필봉(文筆峰)의 정기를 받은 주실 마을은 호은종택의 대문을 등지고 정면을 바라보면 정삼각형의 반듯한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것이 문필봉(文筆峰)이다. 호은종택의 안산(案山:집터나 묘터의 정면에 위치한 산)에 해당되는 문필봉(文筆峰)이다. 문필봉은 붓의 형태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풍수학(風水學)에서는 문필봉(文筆峰)을 정면에 두면 문필가(文筆家)나 학자(學者)가 많이 나온다고 본다. 주실 마을의 집들은 거의 이 문필봉을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다. 그러고 보니 박사(博士)만 14명을 배출한 주실 마을이다. 조그만 산골 마을에서 박사가 14명이나 나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일찍이 신학문을 받아들이는 이 마을사람들의 개방된 마인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주실마을의 집들이 모두 문필봉을 향하고 있다
호은종택(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은 주실(舟室)마을에 처음 들어온 입향조(入鄕祖) 조전(趙佺)의 둘째 아들 조정형(趙廷珩)이 조선 인조(仁祖) 때 지은 것이다. 이 집은 경상도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가(兩班家)의 모습을 하고 있는 ‘ㅁ'자형집으로 정침(正寢)과 대문채로 나누어진다.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7칸이며 정면의 사랑채는 정자 형식으로 되어 있고 서쪽에는 선생의 태실(胎室)이 있다. 대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고 솟을대문이 있다. 6.25전쟁 당시 일부가 소실(燒失)되었으나 1963년 복구(復舊)되었다. 문필봉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대한 주실(舟室)마을 사람들의 믿음은 남다르다. 마을에 하나뿐인 우물도 그 때문이다. 주실(舟室)마을에는 예부터 마을 전체를 통틀어 우물이 하나뿐이었다. 이유인즉, 주실(舟室)이 배 모양의 지형(地形)이라 우물을 파면 배 밑바닥에 구멍이 뚫린다고 믿었던 것이다. 구멍이 뚫리면 배가 침몰(沈沒)할 것이고, 그래서 우물을 파면 동네에 인물(人物)이 안 나온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50여 가구가 사는 동네에 우물이 하나뿐이니 상당히 불편했을 터인데, 사람들은 우물을 절대 여러 개 파지 않고 오직 하나만 이용했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주실(舟室)에는 우물이 없다. 대신 50리나 떨어진 곳에 수도 파이프를 연결하여 식수를 해결한다. 비합리적(非合理的)인 사고(思考) 같지만 이는 4백년 전통(傳統)을 지닌 유서 깊은 마을다운 미담(美談)이기도 하다. 조상의 유업(遺業)과 법도(法度)를 지키려는 정신이 살아있는 까닭이다.
주실마을과 호은종택에 내려오는 전설 중에는 또 하나의 인상적인 이야기가 있다. 호랑이에게 제 목숨을 내어 주면서까지 집안의 번영(繁榮)을 도모(圖謀)했던 한 종부(宗婦)의 일화(逸話)다. 어느 날 호은종택 사랑방에 스님이 찾아와 이야기하길, '저기 저 산에 묘를 쓰면 대대로 자식이 번성하고 재물이 이어지며 글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이 집의 종부가 “호식(虎食:호랑이에게 물려간다)을 당할 것이다“라고 했다. 부인이 화를 당한다 하니 어찌하지 못하고 있던 차, 우연히 그 이야기를 들은 종부가 남편에게 간곡(懇曲)히 청을 했다고 한다. 저 하나만 화(禍)를 당하면 가문(家門)이 번성(繁盛)할 터이니, 부디 그곳에 묘(墓)를 쓰라는 당부였다. 결국 종손(宗孫)은 스님이 말한 터에 묘를 썼고, 밤새도록 사람들이 종택(宗宅)을 지켰으나, 스님의 말과 같이 종부(宗婦)는 호식을 당했다는 전설이다. 구전(口傳)되어 오는 것이라 어느 대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전하는바에 의하면 6.25 전까지만 해도 호은종택에선 그 종부를 기리는 특별한 제사(祭祀)를 지냈다고 한다. 종부의 유해(遺骸)가 발견된 매방산의 한 소나무 앞에서 지내는 고사였다.
호은 종택의 옆모습
가문의 영광을 위해 죽음도 불사했던 종부의 이야기는 호은종택의 명성과 함께 늘 언급되는또 하나의 이야기는 <삼불차(三不借)>이다. 삼불차(三不借)란 다음 세 가지를 빌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첫째는 '재불차(財不借)' 재물을 다른 사람에게 빌리지 않고, 둘째는 '인불차(人不借)' 사람을 빌리지 않으며, 셋째는 '문불차(文不借)' 즉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재불차(財不借)'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재물을 빌리지 않는다. 재물을 빌리지 않기 위한 최후의 마지노선이 종가 앞에 위치한 종토(宗土) 50마지기의 논이다. 수백년 동안 이 종토(宗土) 는 누구도 함부로 팔거나 저당(抵當) 잡힐 수 없는 최후의 보루(堡壘)의 땅이었다. '인불차(人不借)'는 양자를 들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조선시대 명문가에서 아들이 없으면 양자(養子)를 들여 대를 잇는 것이 관례(慣例)였는데, 양자를 들이려면 상대방 집에 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간청을 해야만 하였다. 양자 달라고 굽실거리지 않겠다는 말이다. 흥미롭게도 조지훈의 집안에서는 370년 동안 양자를 들이지 않고 혈손(血孫)으로 대(代)를 이어왔다 종손을 이어감에 양자를 들인 적도 없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새벽에 부부간에 합방을 했다는 설도 있다. '문불차(文不借)'는 선비 집안이 글을 못해서 다른 집안으로 글을 빌리러 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주실 조씨들은 어렸을 때부터 글공부에 매진(邁進)하였다. 비록 벼슬은 못해도 학문이 높으면 선비로 대접받을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문불차(文不借)의 전통이 대대로 문필가(文筆家)와 학자(學者)들을 배출해온 호은종택의 명성(名聲)을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는 한마디인 듯싶다. 삼불차(三不借)를 이어갈 수 있었던 호은종택의 저력(底力)엔 가문의 번영(繁榮)을 위해 죽음도 불사(不辭)했던 종부의 염원, 문필봉의 정기가 뒷받침된 것일까. 가문에 대한 긍지(矜持)와 자부심(自負心) 속에 오늘날에도 조상의 유업(遺業)을 받들고 전통(傳統)을 수호(守護)하는 호은공의 후손들. 주실마을 한양 조씨들의 피에 흐르는 지조(志操)의 가풍(家風)은 대를 물려 계속될 것이다.
호은 종택 앞의 종토
호은 종택과 지훈 문학관 중간에 새로이 조성한 지훈 시공원에 갔다. 시공원에 왔으니 청록파(靑鹿派) 시인 조지훈 선생에 대해서 알아보면 조지훈은 소월(素月)과 영랑(永郞)에서 비롯하여 서정주(徐廷柱)와 류치환(柳致環)을 거쳐 청록파에 이르는 한국 현대의 시류(詩流)를 완성함으로써 20세기의 전반기와 후반기를 연결해주는 큰 시인이다. 조지훈은 1939년 ‘문장지’,의 추천을 받고 문단에 데뷔한 이래 해방 후 김동리(金東里) 등과 함께 청년문학가협회를 창립, 문학의 순수성과 민족문화운동에 힘썼다. 박목월(朴木月), 박두진(朴斗鎭)과 함께 청록파의 한 사람이었으며, ‘승무’, ‘풀잎 단장’, ‘역사 앞에서’, ‘봉황수’ 등 250여 편의 시를 남겼다.
산밑에 아담하게 조성된 지훈 시공원에는 지훈선생의 시 가운데 뽑은 17편이 돌에 음각(陰刻)되어 있으며, 쉴수있는 쉼터와 자그마한 공연장도 있다. 돌에 새겨진 한 작품 한작품을 감상하며 나무계단을 따라 가보면 지훈 선생의 시의 세계에 푹 빠질 것 같다. 시공원 입구에는 영상, 묘망, 완화삼, 절정, 고풍의상, 추일 단장, 지옥기, 월광곡, 코스모스, 산방 12편의 시가 있고, 계곡 다리 건너편에는 계림애창, 다부원에서, 산상의 노래, 역사 앞에서, 앵음설법, 석문, 화체개현, 범종, 정야1, 고사1, 고사2 11편이 있으며, 정자 쪽에는 봉황수, 승무, 파초우, 낙화 4편의 시가 있다.
그러나 만들어 놓은 조지훈 시공원이 부지가 너무 좁고 협소하여 시공원이라고 말하기는 너무나 부족한 것 같다. 전시된 석판시(石板詩)의 판석이 천평 일률적으로 돌의 색깔이 희어서 글자색도 희니 시를 읽는데 눈의 피로감을 더해준다. 석각(石刻)도 천각(淺刻)을 해서 글씨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석판을 선택할 때 색상(色相)을 고려해서 다양하게 사용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시를 각자 할 때 심각(深刻)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그리고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김삿갓 시공원에 조성된 전시물과 같이 다양한 서체(書體)로 각자(刻字)해서 전시했으면 이 시공원을 거닐면서 시를 읽는 재미가 한결 더 해질 것이라고 본다. 물론 예산관계도 있지만 졸속으로 만들어진 조지훈 시공원의 문제점을 제시해본다.
조지훈 시공원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지훈 문학관에 도착했다. 문학관 입구로 들어서면 조지훈의 대표적인 시 '승무(僧舞)'가 흘러나오고, 단층으로 이뤄진 전시실에서는 조지훈의 소년시절 자료와 청록집 관련 자료 등 선생의 삶을 알 수 있는 많은 전시물이 저시되어 있었다. 선생이 직접 쓴 주례사와 여러 곳에서 받은 감사장 그리고 평소 사용했던 문갑과 서랍 외에도 검은색 모자, 가죽 장갑, 부채 등 많은 유품도 전시돼 있었다.
지훈문학관
지훈문학관 2
조지훈(趙芝薰, 1920년 12월 3일 ~ 1968년 5월 17일)선생은 일제 강점기(强點期) 이후로 활동한 시인으로, 청록파 시인 중 한 사람이다. 본관은 한양(漢陽)이며, 본명은 조동탁(趙東卓)이다. 서당에서 한문을 읽고 독학으로 중학 과정을 마친 뒤 동국대학교(당시 혜화전문학교)에 입학하여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39년 <문장>지에 <고풍의상>과 <승무>를 추천받아 문단에 등장하였다. 광복 후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와 동국대학교 강사, 고려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 1961년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 시인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듬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에 취임하면서부터 민족문화 개발에 주력하였다. 그는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명시(名詩)를 많이 남겼다. 그의 시는 주로 자연(自然), 무속(巫俗), 선(禪) 등을 소재로 한 민족적인 색채가 짙은 것이며, 불교 세계에 대한 관심은 종교의식을 일깨워 주어 작품에 반영되었다. 박목월(朴木月), 박두진(朴斗鎭) 등 다른 청록파(靑鹿派) 시인들이 후에 시 세계의 근본적 변혁(變革)을 가져온 데 반하여, 그는 초기의 자연 친화의 시 세계를 비교적 많이 유지하였다. 1956년 자유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청록집> <조지훈 시선> 등이 있으며, 수필집 <창에 기대어>, 논문집 <한국 민족운동사> 등이 있다.
주실(舟室)마을의 입향조(入鄕祖) 호은공(壺隱公)은 삼불차(三不借)를 씨족의 가훈(家訓)으로 후손을 번성(繁盛)하게 하고 훌륭한 인재를 배출하게 인물이다. 조씨가문은 실학사상(實學思想)과 개화기(開化期)에 들어온 신문명(新文明)을 빨리 받아들여 일찍이 신학문(新學問)에 눈뜨게 한 그들 후손의 안목(眼目)이 예사롭지 않다. 왜정시대 아이들을 도시 유학(留學)을 보내고 온 가족이 다 모이는 기회는 양력설이란 것을 알았다. 주변의 온갖 비난을 다 받으면서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양력설을 쇠었고 지금까지 이 마을에는 양력설을 쇠는 전통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참으로 깨어있는 마을이다. 삼불차(三不借)의 강골(强骨)정신을 계승한 젊은이들은 '문불차(文不借)'를 좌우명(座右銘)으로 향학열(向學熱)를 불태웠을 것이다. 그래서 조지훈 같은 훌륭한 시인을 배출한 것이 아닐까!
원경에서 잡아본 지훈문학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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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기 올리는 답사기를 모아서 < 자료와 함께 돌아보는 답사 > 책을 묶어내는건 어떨까 ?
아마 유 홍준의 나의 문화유적답사기 보다 더 좋은 베스트셀러가 될것 같은데.....
야~ 정말 너무 멋있는 답사후기다. 난 주실마을을 3번 가 봤는데 이렇게 자세하게 본건 처음일세....
세삼 공부를 하게 되어서 너무 고맙고 정말 지금까지 자룔 모아서 책으로 엮어내 놓아도 훌륭한 답사집이 될것 같네 그려.....
잘 보았습니다. 좋은 글들 책으로 한 번 만들어보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