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지방에 거주하는 정선 전씨 석릉군파(병산 전씨), 채미헌파(모솔 전씨), 임하군파(금학동 전씨)의 족보수권에 등재할 묘소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채미헌파와 임하군파는 이미 촬영하였고 오늘은 석릉군파(병산 전씨 혹은 경포하남 전씨)중에서 정선 전씨 45세 성균 생원 公信 공의 묘소사진을 찍기 위해서 아침 일찍 적십자 사거리에서 정선 전씨 강릉지회 전선집 회장을 기다렸습니다. 08시 50분경 조인하고 교동택지에서 제관들과 만났습니다.
강릉지구 종친회장 전선집, 유교신문 강원도 주재기자 전남표, 춘천교대 학장을 역임한 전성탁, 전재선 등 5명이었습니다.
약간의 시행착오 끝에 양양군 서면 범부리 산6번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양양군에 거주하는 제관들이 6명이 참석하여서 모두 11명이 시향을 거행하였습니다.
양양군 서면 범부리 산6번지
포근한 가을 햇살을 받으면서 10시 30분경 전성탁 집례에 의하여 엄숙히 봉행하였고, 남표 종인이 촬영을 끝마치었습니다. 후손들의 설명에 의하면 양양의 3대 명당에 해당한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양양의 3대명당은 1 장승리 함평이씨 묘소, 2 범부리 정선 전씨 묘소 , 3 사천리 강릉 최씨 묘소라고 알려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명당자리라는 설명을 들으니 마음이 푸근해졌습니다.
이어서 25m 정도 떨어진 公의 증손자(정선 전씨 48세 景達)의 묘소에서 시제를 엄숙히 봉행하였습니다. 두 분의 묘비가 오랜 세월 탓으로 거의 판독 불가할 정도로 마모가 되어 있었습니다. 다행히 옛 기록을 바탕으로 새로운 묘비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두 분은 모두 생원시 합격하여 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고 들었습니다.
음복(飮福)하는 시간에 양양에 거주하는 제관의 말에 따르면 장군석이 다른 망부석과 비교되는 특이한 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발부분에 발톱이 조각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확인하고 싶었지만 땅속에 묻혀 있어서 아쉽게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역사학자 정영호씨를 모시고 와서 오래된 비석과 특이점을 설명하였더니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문화재 지정을 추천해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문화재 신청서는 접수되었으나 아직 답변이 없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명당과 문화재 신청에 관한 설명을 들은 후 땅에 묻었던 술을 꺼내 왔습니다. 흙이 묻어있고 끈이 달려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매년 전사가 끝나면 대추와 솔잎을 넣은 술을 땅속에 묻어 놓았다가 1년이 경과한 후 개봉한다고 하였습니다. 좋은 전통이어서 더 많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제조된 술은 땅을 파고 마개로 아래로 가게 하여 약 35㎝ 깊이로 묻되 긴 끈을 묶어서 끈이 땅 밖으로 나오게 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제조한 사람이 바쁜 일정으로 참석 못하는 경우가 있고, 참석하여도 찾기가 쉽지 않아서 시행착오 끝에 고안한 아이디어였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작년에는 악천후로 묘소에 오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술은 2년산이라고 하였습니다. 솔향이 나는 술이어서 마시기가 편하였습니다.
매년 운동회 전날에 직원들이 용진문도 세우고 준비활동을 끝낸 후에 작년에 소주에 십전대보탕 (十全大補湯) 약재를 넣어서 1년을 숙성시킨 술을 꺼내서 피곤을 풀던 때가 회상되었습니다.
양양읍내로 와서 동해장터순대국집에서 소머리 국밥을 먹고 양양지역 제관들과 헤어졌습니다.
강릉시 저동 84
강릉시 포남동 산 156
오후 2시경 강릉으로 와서 강릉시 저동 84에 위치한 정선 전씨 46세 瓛(환)의 묘소 촬영하였습니다. 경포대 옆 전충사(全忠祠)부근이었습니다.
경포부근에 12하남(河南)이 있는데 아직 발복(發福)하지 않고 주인을 기다리는 명당이 있다는 설명도 들었습니다. 이어서 오후 2시 30분경 강릉시 포남동 산 156에 소재한 영모재 재실 촬영을 하였습니다.
강릉시 옥계면 북동리 산 136
그리고 한참을 달려서 오후 3시 30분경 옥계면 북동리 산 136에 소재한 정선 전씨 52세 덕원(德元)公의 묘소를 촬영하였습니다. 북동리 소재 산은 16,800㎡ 정도로 커서 후손들의 묘소가 여러 기가 있었습니다.
촬영이 끝난 후 옥계면 북동리와 임곡리가 도로에 연결되었다는 말을 듣고 한참을 달려가다가 마주 오는 자가용을 손짓으로 세워 질문하니 이쪽으로 가면 도로가 막혀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돌려서 백복령을 지나서 유턴하여 강릉에 도착하여 농촌한정식에서 돌솥밥을 먹고 왕산면 오봉리 후산에 위치한 公侃(평산부사 역임) 공의 묘소 촬영을 약속하고, 봉게로 과일 한 봉지를 받고 하루 일과를 끝냈습니다.
※ 전한[ 典翰 ]
요약 조선시대 홍문관(弘文館)의 관직.
종3품이며, 정원은 1명이었다. 궁중의 경적(經籍) 관리, 문한(文翰) 처리, 왕의 자문(諮問)에 응하는 일을 관장하던 홍문관은 언론삼사(言論三司)의 하나로 학술적인 성격과 정치적인 성격을 가지고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 기관이었다. 1463년(세조 9) 장서각(藏書閣)을 홍문관이라 하였는데, 이때의 홍문관직은 장서기관(藏書機關)이었을 뿐이었다. 1456년(세조 2) 세조에 의하여 혁파된 집현전의 기능이 부분적으로 예문관에서 계속되다가, 1478년(성종
전한은 홍문관에 새로 제정된 관직으로, 전임관이 임명되었고 부제학(副提學)이 전임관의 수석관(首席官)이었다. 경연관(經筵官)과 지제교(知製敎 : 교서를 짓는 관직)의 관직을 겸하였기때문에 전한이 되려면 지제교가 될만한 문장과 경연관이 될만한 학문과 인격이 있어야 함은 물론 가문에 허물이 없고 홍문록에 선발되어야 하였다. 홍문록이란 홍문관원의 후보로 결정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홍문관·이조·정부(政府 : 廟堂)의 투표를 통하여 다득점자의 순으로 결정되는 것이다.《경국대전》에 의하면 결원이 있을 때는 재직기한에 관계없이 순차대로 정4품의 응교(應敎)가 승진, 임용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한 [典翰]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