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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조 2차 발표”(홍은파, 민자혜, 정미림)
-현대 미술 간보기-
Intro.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렘브란트의 야경, 루벤스의 레우키포스 딸들의 납치, 모네의 수련 연작,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 샤갈의 산책, 고갱의 타히티의 여인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고전 미술, 나아가 후기인상주의까지의 미술들은 우리 모두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그러나 현대 미술은? 수십억에 팔리는 워홀의 실크 스크린들, 폴락의 물감 뿌린 캔버스들은 대체 왜 그런 가치를 가지는 것일까? 우리는. 그것에서. 대체. 무엇을 볼 수 있단 말인가?
많은 사람들이 현대 미술을 보면서 ‘저건 나도 할 수 있겠다’ 라든지, 혹은 즐거움이 아닌 불쾌함을 느끼는 수많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가치들이, 그 안에 숨어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대체 그것이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정답은 아직 없다. 다양한 예술작품 만큼이나 너무도 많은 이야기들이 난무하고, 서로 부딪히며 으르렁대거나 조롱하기도 한다. 그러나 또한, 그러한 예술에 대해 무작정 문외한인 채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쨌거나 우리 모두 좀 더 어른이 되고 언젠가 꽤나 중요한 자리들에 앉아있을 무렵에도 난해한 현대미술들은 그 가치를 더욱 견고하게 할 것이다. 적어도 그 때, 우아한 칵테일 파티에 나가 그저 웃으며 ‘나는 문외한이오.’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 모두, 이 잘난 미술에 대해 스치는 이야기라도 나누어보자. 소더비에서 새로운 최고가를 기록한 폴락의 그림에 대해 ‘그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이야기만 반복했다가는 우리의 라이벌들에 의해 ‘무식하기 그지없다’는 경멸을 감내해야 할 순간이 올 수도 있으니까. 뭐, 사실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 교양수업에서 한 번쯤 들었던, 하지만 까먹기 십상인 그저 그런 이야기일 수도 있다.
<표현의 벽, 세기를 넘다.>
예술에 있어서 프랑스 혁명과 영국 산업혁명이라는 시대적 상황변화는 신고전주의, 사실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라는 활기차고 새로운 르네상르를 창출시켰고, 그 뒤를 잇는 인상주의의 발전과 변모가 100여 년의 긴 시간동안 진행되었다.
유럽 문화에서 그리스로마의 황제(인간)중심 문화가 교황(신)중심의 중세 그리스도교 문화로 경도되었으며 18세기 이후 절대 왕권을 확립한 프랑스가 그 중심축이 되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지속적인 예술 활동과 변화는 있어왔지만 근대의 대표적인 유파의 형성과 발전, 핵심적인 작가를 포함한 그 영향력은 단연 프랑스가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 1,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미국에 문화의 성두주자 역을 넘겨주게 되었지만 그 자존심만은 변함없어 새로운 21세기에 다시 문화의 축을 유럽으로 이동시키고자 각종 비엔날레나 기획 추모전 등을 지속적으로 개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9세기의 미술은 수많은 유파들의 명멸을 통해 어떤 주장과 기법이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고 안주하게 되면 다른 한편이 무언가 상실되었다고 느끼며 새로움을 부르짖었고, 새로움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은 다음 세대에 발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인상주의는 대상에 반사하는 빛과 인상을 기록하는 순간적 감각의 발견으로 원근법과 고유색의 원리를 파기시키며 색채를 그림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부각시켰지만 입체감의 상실과 정신적 내용의 결핍을 보였다. 이에 반해 세잔은 자연의 굳건하고 변함없는 형태를 통해 균형과 질서를 찾고자 했고, 고갱은 원색의 단일 색면과 평면적 구성으로 회화의 평면성과 장식성을 실험했으며, 고흐는 강렬한 색과 붓질로 주관적인 자기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세잔의 모색과 실험은 궁극적으로 프랑스 입체파를 태동시켰고, 고갱의 해결방법은 다양한 형태의 종합상징주의를, 고흐는 독일 중심의 표현주의를 낳게 했다.
절망적인 고독 속에서 살았던 이 세 사람은 자기들의 예술이 이해 받으리라고는 거의 기대를 하지 않았으나, 각자 느꼈던 예술적 문제에 대한 강렬한 인식과 끊임없는 시도들은 점차 젊은 세대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점차 자연 대상에 대한 재현의 문제가 입체감의 묘사나 원근법을 무시할 정도의 참신한 방법으로 자리 잡게 되자 젊은 미술가들은 점점 더 대담한 길로 나아가게 된다.
입체파 화가들은 세잔이 손을 대다가 버려둔 데서부터 형태실험을 계속했고 고흐, 고갱은 젊은 화가들에게 지나치게 세련된 미술의 치밀함을 버리고 솔직하게 형태와 색채를 다루도록 용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20세기의 새로운 미술은 인상주의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사실주의적 경향과 이에 대립되는 주관적인 표현주의적 경향이라는 두 진영이 양립하며 인상파의 예술적 결함을 회복시키고자 했던 후기인상파의 시점에서 이미 잉태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미술에 있어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주장들이 각각 입장을 달리하는 분화현상으로 발전했다면, 20세기에는 새로운 차원의 ‘종합’이 특색일 것이다.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 공예, 조각 등 모든 미술 분야 상호간의 관계들이 새로운 입장에서 서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게 되는데 특히 다양한 회화 이념들이 각 분야에 미친 영향은 압도적이었다.
세기 말이래 사회 구조의 격변으로 말미암은 세태의 변모와 자아확립, 개성의 주장, 개인자유존중 등으로 나타나는 주관적 표현정신이야말로 현대미술 창조의 원동력이 되었다. 20세기초 에 강력하게 대두되는 야수주의, 입체주의, 표현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추상주의 등등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수많은 유파들의 주장들은 서로를 자극하거나 종합되면서 새로운 조형 실험의 야심찬 시도들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순수한 조형성의 실험과 추구는 20세기 미술에 있어 그 추진력이 되었다.
폴록의 <no8 1949> 로스코의 <검정 위의 밝은 빨강>
1940년부터 1970년까지의 미술사는 미국이 주도하였다. 다른 영역에 있어서도 미국의 이미지는 거대했으며 그것은 2차대전이후까지 미술시장을 장악했던 파리와 그 주변의 유럽 문화가 전쟁의 결과로 피폐로 상대화되었다. 많은 유럽의 미술가들은 안전한 미국으로 망명길에 올랐으며 미국에서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게 된다. 미국은 전쟁을 통한 부와 내부적인 문제를 극복하고 일차적인 경제적인 난관에 봉착하자, 정책적으로 문화적인 후원을 통한 극복을 꾀한다.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써 연방미술정책(Fedral Art Project)이 미술을 공동체의 일상 생활과 통합시키기위해 결성된다. 벽화작업은 공공작업을 통한 노동의 수요와 미국적인 미술의 한 특징을 짓는 계기를 마련한다. 멕시코의 리베라 등이 추진한 벽화의 영향으로 큰 규모의 초대형회화의 캔버스가 생기는 계기가 된다.
추상표현주의자들은 정부의 관심과 미국에 형성된 작가들의 자각이 함께 어울려 탄생한 것이다. 이들은 미국적인 주체성은 확보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데 고대 신화나 원형적이 의미, 또는 원시미술 특히 인디언의 제의에서 비롯한 숭고함과 비장감을 자신들의 이념을 세우는데 기꺼이 받아들이는데 그것은 초현실주의 영향으로 원시적 주제에 의한 오토마티즘으로 연결된다. 융의 무의식에서 비롯된 신화, 상징의 집단무의식을 통해 인간내부의 공통의식을 예술로 승화하고자 했으며 미국의 지리적이고 정신적인 개척의 전통을 반영하기도 했다.
이들이 직면했던 예술적 문제는 형태면에서 입체주의 영향과 유럽미술 즉, 모더니즘 예술에 대해 고찰하게 된다. 일련의 평면성에 대한 인식은 마티스의 모호한 공간감, 모네의 비형태적인 표현주의 붓자국등에 주목하게 하며 동시에 입체주의의 화면분할을 통한 입축된 공간감을 인식한다. 추상표현주의에 갖는 의의는 피상적으로 미국미술의 국제화 분위기의 최조의 반영이자 미술메카로서의 상징적 첫발이다. 또 내용면에서는 추상이되 그 내용이 갖는 주제성은 몬드리안의 추상이 추구한 신지학적인 질서와 다른 철학적인 성찰이 따른다. 그것은 실존주의의 영향으로 작가의 실존적 문제의 적나라한 과정이 모두 공개되면서 고민의 흔적을 대중이 함께 공유하게 된다. 따라서 추상표현주의는 매우 지적인 미술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추상표현주의는 크게 두가지 경향이 나타난다. 차가운 추상계열의 색면추상과 뜨거운 추상의 액션 페인팅이다. 액션 페인팅은 잭슨 폴록과 윌리엄 드 쿠닝으로 대표된다.
************ 잭슨 폴록
잭슨 폴록의 회화 세계는 1948년 신화시기를 거쳐 48년 이후 액션 페인팅시기에서 완숙하게 된다. 신화시기는 신화,상징이 주요 개념으로 작용하고 원시미술에 주목을 한다. 집단 무의식을 끌어들이는 원형으로서 미국 인디언 미술세계를 그 제의적 성격과 함께 적극 수용하고 있다. 초기의 작품들은 격렬하고 폭력적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원초적 신화와의 관련성속에 모색되어 온 개인적 투쟁의 산물이였기 때문이다. 원시미술은 미국인으로서의 지각과 주체성, 유럽에 대한 의식 사이의 결정적인 수단이자 요인이다.
1948년에 폴록은 뿌리기 그림들을 최초로 전시한다. 이 그림은 커다란 화폭을 바닥에 깔고 그 주위를 걸어다니면서 깡통의 물감을 붓거나 막대기에 묻힌 물감을 떨어드리는 것이다. 화면의 자국들은 화가의 움직임, 여러방향에서 화면을 향해 다가와서 팔과 손목의 행위의 기록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시간에 행해진 행위 전체의 농촉이자 정지화면이다. 두터운 물감층의 표면성은 이젤페인팅과 벽화의 한계를 넘어서며 자체의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비평가 H 로젠버그는 액션 페인팅이라 명명하고 있다. 신화기의 자기정체성의 불안한 난폭함이 유희적이고 율동적인 우아함을 유발한다. 그것은 단순하 번호나 여름 <아라베스크>의 고요한 느낌의 제목에서도 암시된다. 그는 작업중의 자신의 행위를 무의식적이라고 했으며 자동기술적인 면을 반영한다. 폴록의 회화는 온몸을 통해 실존을 반영하고 직관과 본능에 따라 화면에서 직접적으로 확인하여 주체와 객체의 합일을 시도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회화를 실존의 투쟁의 장으로 부르고 있으며 현대회화의 숭고미와 테러에 가까운 비애를 조장한다.
************** 윌렘 드 쿠닝
윌렘 드 쿠닝은 1948년 흑백회화를 충격적으로 전시하여 등장한다. 드 쿠닝은 자유롭고 거의 광란적인 붓질로써 격정적인 모습의 형상에 집중한다. 그의 유명한 <여인 연작>은 오만하고 비속한 여인을 그린다. 폴록의 회화가 고상한 추상의 고뇌라면 그는 속물적인 근성과 블랙 유머러스한 조소를 담은 형상적인 것을 담는다. 그에게서 형상은 이미 재현을 떠났으며 그는 인체에서 찾을 수 있는 격렬함과 폭력을 형상의 과정적인 붓질로 제시하는 것이다. 인체를 모한한 변이가 가능한 구조 전체로 그는 추상과 비추상적인 작품을 번갈아 제작하며 회화적인 제한과 한계성을 유동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모든 작품에 생생한 표현과 자발성이 두드러지는 표현적인 강렬한 제스쳐가 있다.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
1960년대 초에 미국과 영국에서 등장한 대중적 이미지를 차용한 미술로서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체, 특히 미국을 상징하는 테크놀로지와 매스 미디어의 소산(코카 콜라,마릴린 몬로의 얼굴,미키 마우스..)을 미술의 자원으로 높인다. 팝아트는 현대의 대량생산·소비사회와 그에 따른 대중 문화의 출현등 당시의 도시 환경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출현한 것이다. 팝 아트에서 보이는 대중적 형상의 주요 원천은 미국이며 도시 문화에 밀접하게 접촉한 미국의 미술가들은 그 문화의 특수한 풍조와 속성을 포착하고자 하였다. 이에 비해 영국의 팝아트는 구태의연한 사회질서를 공격하는 사회비판적 의도를 내재하고 있다.
1950년대의 극도의 추상성을 지닌 고급 미술로서 추상표현주의가 미국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팝아트가 처음 등장했을때는 평론가들로부터 많은 항의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팝아트의 속성으로 인해 대중에게 쉽게 침투하고 수집가들의 수집 대상이 되었으며 짧은 시간에 팝아트의 주요 작가들의 위치가 확해지면서 성공을 거두게 된다. 팝아트의 선례로 1950년대의 네오 다다를 들 수 있는데, 이는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계승한 것이다. 당시 만연하던 추상표현주의의 양식도 가미하고 있다. 뒤샹은 자신의 반예술과 팝아트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언급하였는데, 다다나 팝아트는 기성품의 발견을 바탕으로 하지만 뒤샹의 경우는 기존의 미학을 좌절시키고자 한것인 반면, 팝아트는 그러한 반미학적 입장을 찾아 볼 수 없고 심미적 미의 관점에서 레디메이드를 찬미하고 있다. 미국의 팝아트 작가들은 기법의 다양성을 보여주어 팝아트의 양식을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게끔 한다.
************* 앤드워홀
미국의 팝아트의 대표라면 앤디 워홀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실크 스크린이라는 대량 복제가 가능한 인쇄 방법을 이용하여 반복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는 광고의 속성을 차용한 것으로 현대의 대중 문화에 걸맞는 예술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워홀은 대중적 이미지뿐아니라 공포의 이미지도 사용하는데 예를 들어 영화 배우와 같은 유명인들,꽃,코카콜라병,또는 전기의자,자동차 충돌 장면,폭풍의 현장등을 캔버스위에 반복적으로 묘사하여 거의 임의적인 색채를 첨가함으로써 미묘한 효과를 보여준다. 워홀의 작품은 대량 생산품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는지 끔직한 장면이나 유명인들에 대한 반응을 마비시키는 등의 결과를 초래한다.
************* 로이 리히텐슈타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경우는 만화의 형식,주제,기법등을 그대로 사용하고 값싼 만화가 인쇄되는 제판 과정에서 생기는 망점을 세밀하게 재현하여 사물을 확대하는데 이용하기도 한다. 그는 또한 하나 또는 여러 개의 넓은 붓자국을 만화양식으로 변형시킨 대규모 연작을 발표하는데 이는 추상표현주의의 과장된 표현방법을 비웃는 것으로 해석된다.
************* 클레스 올덴버그
화가라기보다는 물체를 만드는 작가로서의 클래스 올덴버그는 작품의 크기,재료,질감에서 놀라움을 일으킨다. 1961년에 음식물 모형을 파는 상점을 열었으며 그 후 일상용품을 확대,변형시킨 작품(타자기,욕실용구,선풍기,석고·헝겊으로 만든 대형 햄버거,아리스크림,담배꽁초등)을 제작하였다. 이 작품들이 이례적으로 대규모적이면서도 주제는 상대적으로 무가치한 속성을 드러내어 해학성과 함께 대중 문화·제품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뒤샹의 <샘>
세계대전이 미래파에게 끼친 영향과는 반대로 다다 그룹의 작가와 화가들은 일차대전과 같은 가공할 전쟁을 일으킨 사회의 철학·문화는 철저하게 파괴되어야 한다고 보고, 일차대전 초까지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예술·문학의 일반개념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다다이즘의 기원은 쮜리히와 뉴욕에 있으며(1916년경) 독일(1917)을 거쳐 중부 유렵국가들로 퍼져나가 국제적 문화예술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쮜리히 다다
쮜리히 다다는 시인,극작가 겸 음악가인 휴고 발이 1916년겡에 맥주홍의 주인과 함께 나이트 클럽인 카바레 볼테르를 열고 그곳에서의 공연을 통하여 다다의 핵심 멤버들을 통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다다그룹의 일원으로는 루마니아 화가겸 조각가 마르셀 장코,루마니아 시인 트리스탄 짜라, 알자스 로렌 출신 한스 아르프가 있다. 다다 공연은 문학가와 미술가들이 기존 체제를 벗어나려는 의지와 서구문화에 대한 비판의식을 전달하기위해 대중과 직접 접촉했던 행사이며 여기서 읊어지는 시들은 언어는 유일한 표현 수단이 아니며 파괴될 수 있는 것이다라는 이론을 반영하면서 아프리카 부족의 시, 우연적 순서로 단어를 배열한 시, 음성시 등 원시적이고 지리멸렬한 형태를 연다. 미술가들은 이전의 전위미술을 배척했으나 대부분 견습기간동안 영향받았더 유파(표현주의,입체파)를 오랫동안 답습했다. 장 아르프만이 타예술과 구별되는 자발성과 우연성에 맡겨진 작품을 제작하였다.(반이성의 결과)
뉴욕 다다
1914년 수많은 유럽 이민자들이 자유로운 미국으로 몰려들어 뉴욕에 있던 전위예술가들의 단체(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화랑, 예술 후원자 월터 콘라스 알젠버그의 살롱)와 급속도로 접촉함으로써 뉴욕 다다가 시작되었다. 유럽은 1차대전에서 문화전통과 과학문명의 합리성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불신을 낳았다. 가난과 재난을 해결할 것으로 믿었던 과학의 발달은 치명적인 전쟁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 근원적인 계기를 준 서구의 합리정신에 대한 깊으 불신이 쌓이게 되었다. 합리정신의 부정은 전통성,기성적 가치등 기존의 체제의 전반에 대해 도전하고 모든 것을 '제로의 상태'에서 다시 시작할 것을 주장하는 소위 '다다'운동을 탄생시킨다. 형식주의를 표방하는 모더니즘의 예술관은 다다이스트가 타파해야할 과제였다. 상아탑의 예술과 예술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예술지상주의를 탈피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모든 요인들, 즉 부르주아의 가치관, 예술 = 미의 관념, 예술의 자율성이 도래한 삶과 분리된 예술에서 삶에 통합된 예술을 꿈꾼다. 특별히 뒤샹은 전위적인 다다이스트로서 어떤 부류에도 매이지 않고 다다정신을 구현한 예술가이다. 반예술로서 예술의 개념을 부르짖고 르네상스이래 삶과 분리된 자율적이고 지고의 가치를 지닌, 신성화를 꾀한 부르주아적 예술의 개념을 부정한다. 뉴욕다다는 근대 회화에서의 미의 추구를 서구 부르주아적 가치관과 맥을 같이 하여 나타난 개성의 신성화,창조의 신성화란 과정을 거쳐 허구화되고 있는 상황을 직시했다고 볼 수 있다.그 대표자로 뒤샹,피카비아,만 레이등이 있다.
************ 마르셀 뒤샹
레디메이드는 오브제 장르 중 하나로서 기성품이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는 별개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최초의 레디메이드는 뒤샹의 <자전거바퀴>(1913)으로서 의자가 조각 받침대의 역할을 하고 잔전거 바퀴는 뒤샹의 말대로 '움직이는 조각 작품'의 기능을 한다(마르셀 뒤샹이 창조해낸 미적 개념으로). 이 외에도 <병걸이><눈삽>등의 레디메이드가 있으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1917년 제작한 <샘>이 있다. 이 작품은 기성품인 변기에 'R.Mutt'라는 작가 서명을 덧붙여 하나의 작품으로서 가리워진채로 출품되었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실제의 물건을 차용하는 방법을 지닌 오브제 미술의 선구로서 기존의 사물들을 예술로 간주하는 태도에서 비롯되었으며 작가가 기계에 의해 대량 생산된 제품을 선택하여 그 본래의 기능을 전도시켜 하나의 미술 작품으로 제시한 것이다. 예술가에 의해 창조되는 기존의 작품 개념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라 하겠다. 이러한 개념은 전후 서구미술 특히 팝아트계열의 작가들과 신사실주의 및 개념미술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뒤샹에 있어 반예술이란 예술 그 자체의 부정이기보다 개성과 창조를 신성시하는 근대적 예술관에 대한 반항으로써의 반예술인 것이다. 즉, 그에게 있어 반예술은 또 다른 예술로 볼 수도 있다. 뒤샹의 예술관 및 작품세계는 합리적 세계와 비합리적세계 양면을 모두 보이고 합리적 세계에 바탕을 둔 그의 지적인 사고는 모든 것을 일단 부정하고 회의하는 데카르트 정신으로 나타난다. 그는 1912년 이후 회화와 멀어지게 되는데 그가 회화를 버린 이유는 '오직 망막에만 호소할 뿐 어떤 의미성을 지니지 않은 근대 되화에 대한 회의', 상업주의에 대한 반발의 결과이다. 상업주의는 지나친 예술주의를 표방하면서 오히려 원작1점주의의 오용된 결과를 일컫는다. 이와같은 신성한 근대미술에 일침을 가하며 등장한 것인 그의 몰개성적인 오브제이다.
앙드레 브로통은 '예술가에 의해 예술품의 지위에 오른 공업 생산품'이라고 칭했으며 뒤샹의 오브제를 레디메이드라고 한다. 레디메이드는 예술가의 손에 의해 창조된 예술품이 아니라는 점, 일상적인 물품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접, 즉 일상과 예술과의 동일성을 산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예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 들여졌다. 특히 레디메이드는 '창조의 개념'의 예술에서 '선택의 개념'으로 획기적인 의식의 전환을 한다. 우연히 선택된 레디메이드는 일상적인 삶의 용도에서 다른 제목이 붙혀지면서 관객에서 제시된다. 이때 선택은 철저히 무목적적이다. 즉, 미적 쾌감에 의해 취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취미가 좋고 나쁨의 상관없이 눈에 비친 반응에 무감각하게 대응한 것이다. 이것은 근대 미술의 창조자의 심미안에 대한 반발을 함축하고 유일성의 결여를 의미한다. 기성품이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오히려 새로운 것을 포함한 모든 예술적 추구에 대한 anti를 표방한 것이고 나아가 그것은 반예술이기에 앞서 예술의 부재, 다시 말해 비예술을 선언하는 경고행위일 수 있는 것이다.
1916년 뉴욕 앙데팡당전에 뒤샹은 <샘>이라는 용변기를 뒤집어 출품했다. 그는 R.Mutt라는 개명으로 출품하고 있다. 어떤 이는 비속하고 부도덕하다고 하고 또 다른 이들은 변소의 단순한 기구에 지나지 않으며 그러한 면에서 실물의 표절이라고 했다. 여기에 대한 변론으로서 뒤샹은 일상의 변기일 뿐이며 그것이 뮤트씨의 손으로 만들었는가는 상관없니 '선택'되었음을 주장했다. 뮤트씨가 생활의 일상품을 선택하여 새로운 제명과 관점에 의해 그것의 실용적 의미가 소실되도록 했으며, 그 물체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만들어냈음을 강조했다.지금에 이르러 뒤샹의 충격은 예술을 아이디어로 오용하는 작가들을 산출했지만 뒤샹이 선택한 반예술로서의 레디메이드는 예술이 어떤 규정화,혹은 자체 함정에 빠져 그 기능을 잊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정신에 복사하는 예술'을 주장했던 바와 같이 적극적인 감화와 삶과 융화할 수 있는 예술로서의 의미를 새겨야 할 것이다.
************* 피카비아
1913년 뉴욕으로 가서 스티글리츠를 만나면서 다다작품을 생산해내는 1915년 기계변형미술이 그 대표적 예이다. 인간의 감성·행위까지 풍자하기 위해 기계형태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 만 레이
만 레이는 <선물>이란 작품에서 가필된 레디메이드를 선보였는데 다리미에 못을 접착제로 붙여 기성 오브제의 용도를 박찰함으로써 작품을 제시하였다.
독일의 다다
1) 베를린 다다
다다 그룹중에서 정치적 성향을 가장 강하게 띤 것으로 다다를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여져서 좌익의 성향을 노골적으로 표방하고 반예술활동을 정치선전 활동에 결부시켰다. 1918년 리하르트 휄젠벡에 의해 결성되며 그와 그의 동료 그로츠,하트필트등은 사회적 이상론을 가지고 세계를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방하였다. 다른 다다운동과 마찬가리도 격렬하게 기존의 미술사회를 공격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전시회뿐 아니라 부조리시를 낭송하고 정치적 토론을 벌이는 행사를 개최하였다.
그로츠는 입체주의와 미래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부정에 대한 적대감, 전반적 인간성에 대한 혐오감을 만화기법으로 통해 강한 시각적 효과로 나타내었으며 하트필트와 협력하여 꼴라주작업을 시작했다. 특히 이들의 꼴라주에는 사진이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하트필트가 이를 포토몽타주라 하였다. 포토몽타주는 사진을 선동의 도구로 사용한 것인데, 병치되고 중첩된 형상들은 명확한 사실성을 가지기 때문에 정치적 선동 메시지를 선명하게 전달 할 수 있다.
2) 하노버 다다
************* 쿠르트 슈비터스
1918년에 최초의 메르츠 회화들을 전시했는데 이는 전통적 재료들을 포기하고 오물더미,쓰레기통,길거리·개천에서 수집한 온갖 종류의 폐품(버스표,병마개,신문조각,걸레,단추,옷감)으로 대체하여 미적 작품을 만듦. 기존 사물을 차용하는 방법을 통해 예술·삶을 결합하고자 함으로써 자신의 개인적 미학을 창조하였으며 우연에 근거를 둔 폐품꼴라주를 통해 예술작품의 표현적 잠재력을 실험하였다.
달리의 <기억의 영속> 마그리트의 <골콘다>
초현실주의는 제 1차세계 대전 직후인 1919년부터 제 2차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의 약 20년정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전위적인 문학·예술운동을 말한다. 추현실주의는 허무적인 다다이즘의 자연스런 결과로서, 당시 1차 세계대전의 참상으로 기인된 인간의 의욕과 문명을 비판하면서 등장했다. 초현실주의의 후반기에는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의지가 정치적 활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다다이즘처럼 극단적인 경향을 보이지 않고 무의식과 꿈의 세계를 지향하여 시각예술에서도 환상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표현의 세계를 창조하였다.
초현실주의의 이론적 기반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이며 앙드레 브로통은 프로이드학설의 방법론이 인간의 정신을 고정관념,존재적 가치체계,일상성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로서 데 키리코(1888 - 1978)를 빼놓을 수 없는데 그는 동생 A.상비뇨,화가 F피시스,G.란디 등이 추구한 형이상학 회화의 주도자로서 미래파의 동적 경황에 대립하여 신비적인 내면 세계의 표현을 시도하였다. 그 수법은 공허한 도시풍경 마네킹,왜곡된 원근,기하학적 형태 등에 의한 철학적 풍경이다.
이와 같은 배경을 지닌 초현실주의는 1919년 앙드레 브르통 (1896 - 1966 ) 이 젊은 시인들과 함께 자동 기술법, 즉 이성에 의한 하등의 통제없이 미학적,윤리적 선입관을 배제하여 이루어지는 사고의 받아쓰기 방법에 의한 시를 담은 '문학지'를 창간하면서 탄생했다. 1924년 10월 브르통이 정식으로 <초현실주의자 혁명>지를 통해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게 되는데 여기서 브르통은 초현실주의를 '예상치 못한 수많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순수한 심리적 자동작용의 무의식적 탐험'으로 정의내린다. 이는 상상력의 우위를 인정하고 과거의 인습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며 꿈과 현실이라는 매우 상반된 두 상태를 초현실이라는 일종의 절대 현실 안에 화합하고자 한 것이다.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과 함께 초현실주의 미술은 에른스트,마송,미로등에 의해 활발히 전개된다. 한편, 1929년 12월 15일 브르통은 제2의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한다. 이는 초현실주의를 단순한 예술사조로 발전시키기보다는 정치,사회와 연결된 혁명으로 전개되기를 바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 미술가들은 이러한 선언과 별개로 자신들의 독자적 성격을 갖고 초현실주의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초현실주의는 꿈,환상, 무의식의 세계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기존의 미학과는 구별되며 인간의 정신의 해방에 따른 보다 폭넓은 예술의 세계를 개척했다고 볼 수 있다.
초현실주의의 기법들
1. 자동주의 automatisme
오토마티즘은 무의식의 세계를 작품에 투영하려는 초현실주의의 의도를 나타낸 대표적 기법으로, 가능한 의식(고정관념,이성들의 영향)이 배제된 상태에서 손에서 자발적으로 흘러나오는 움직임과 형태를 작품화한 것이다. 에른스트가 발견한 프로타주와 오스카 도밍게즈가 작품에 이용한 데칼코마니가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형상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오토마티즘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문학 분야에서의 오토마티즘은 미술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음속에 떠오르는 구절들을 이성의 통제없이 무의식적으로 써내려가는 방법을 말한다. 초현실쥐의 미술의 초기인 1920년대에 이 기법이 주로 쓰였으며 대표적 작가로는 마송과 미로가 있다.
2. 프로타주 frottage
에른스트가 1925년 여름에 마룻바닥의 얼룩을 보고 있다가 거기에서 온갖 환각이 생긴다는 것을 깨닫고 발견한 기법으로, 나무 파편이나 나뭇잎 위에 종이를 대고 연필을 문질러 그림이 떠오르게 하는 수법을 말한다. 이 기법은 우연한 효과를 노리는 것뿐 아니라 몇가지 피사물을 의식적으로 짜맞추는 경우도 있고 혹은 거기에서 나타난 무늬에서 힌트를 얻어 붓을 가하는 경우도 있다. 이미지 자체의 우연성을 중시하는 프로타주로 제작한 초기의 34점의 작품은 에른스트는 박물지(historre naturelle)라는 책자로 출판했는데 여기에 등장한 형상들은 문질러 나타낸 나뭇잎,헝겊 따위가 인간의 머리,괴물,바다 풍경등으로 변모된 것이다.
3. 데칼코마니 decalcomanie 轉寫法
원래는 도기나 유리기구등에 특수한 종이에 그린 그림을 옮겨서 염색하는 기법으로, 회화에서는 미끄러운 성질의 종이에 물감을 칠하고 그것을 접었다가 다시 피거나 또는 다른 종이를 그 위에 대고 눌렀다가 뗄 때 생기는 우연한 효과를 작품에 이용한 것을 의미한다. 이 기법에 따른 우연한 형태 - 산맥, 산림수목, 인간장기 등 - 에 부분적으로 가필을 해서 신비스러운 분위기와 영상을 표출하도록 한다. 1935년 오스카 도밍게즈가 그의 과슈작품에 처음으로 도입했으며 에른스트도 2차세계대전 직전에 종종 이용했다. 예전의 그림붙이기에 사용되었던 것과 근본적으로 달리 즉, 완성된 그림을 전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생기는 우연한 얼굴이나 어긋남의 효과를 이용한 것이다.
4. 데페이즈망 depaysement 轉置,轉位法
어떤 물체를 본래 있던 곳에서 떼어내는 것으로 문학에서 '해부대 위에서의 재봉틀과 우산의 만남'을 이야기하는 로트레아몽의 싯귀는 데페이즈망의 적절한 예라 하겠다. 추현실주의 회화에서는 낯익은 물체를 뜻하지 않은 장소에 놓으므로써 꿈속에서 밖에 없는 화면을 구성했는데, 이는 심리적 충격뿐 아니라 보는 사람의 마음속 깊이 잠재해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키는 역할을 한다. 데페이즈망의 대표적 작가로는 마그리트를 들 수 있으며 꼴라주와 오브제도 일종의 전위라 할 수 있는데 이 방법들은 예술의 새로운 차원을 여는데 기여했다.
5. 레이요그램 rayogram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감광 재료 위ㅣ해 물체를 얹어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명암 속에서 추상적 사진을 찍은 것이다. 포토그램과 같은 것으로 파리에 있던 미국의 초현실주의자인 만 레이가 1923년 블룸이란 잡지 4월호 표지에 발표하면서 이 명칭을 붙였다. 후에 그는 자작집에서 레이요그래프로 고쳐 부르기도 했다. 1921년 자비로 출판의 한정판으로 레이요그램 작품을 트리스탄 짜라의 시와 함께 발표한 바 있다.
6. 꼴라주 collage
화면에 인쇄물,천,쇠붙이,나무조각,모래,나뭇잎 등 여러 가지 물질을 붙여 구성하는 기법으로 초현실주의 작품에서도 기성품에 손질을 가하지 않고 전혀 엉뚱한 물체끼리 조합시키므로써 별개의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비유적,연상적,상징적 효과를 노리는 방법으로 쓰인다. 에른스트는 1919년부터 초현실주의적인 꼴라주작품을 시도했는데, 그의 작품은 잡지,카탈로그,삽화등의 그림을 부분적으로 오려 아무 관련성없이 재배치하여 부의식속에 잠재되어 있는 환상의 세계를 일깨운다. 또한 1924년 <두 어린이가 나이팅게일에 놀랐다>라는 작품에서는 문짝,손잡이 등의 사물을 꼴라주하여 초현실주의 사상에 부합되는 이미지의 세계를 창조하였다.
7. 오브제
예술과 관련없는 물견,또는 그 부분을 본래의 일상적 용도에서 떼어내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잠재한 욕망이나 환상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상징적 기능의 물체를 말한다. 발견된 오브제, 환영 오브제, 봉상적 기능의 오브제, 존재적 오브제 등이 있다.
************* 막스 에른스트
1919년 꼴라주 작업을 했는데 이는 무의식에 이르기 위한 최초의 시도로서 여러 가지 기계도면이나 식물학 도판 그리고 옛 판화와 삽화등을 임의로 오려내어 자유롭게 배치한 작품이다. 손과 겹쳐진 눈동자, 얼굴 부분에 독수리 머리 사진을 붙인 누드의 여인, 사람 형태로 변형된 기계 부품등 평범한 이미지들이 콜라주되어 놀라운 상황을 연출한다. 1924년작< 꾀꼬리에 위협받는 두 아이 >에도 작운 문틀등의 오브제를 이용한 꼴라주기법으로써 무의식적 세계를 암시하고 있다. 1925년에서는 프로타주 즉 나뭇결, 나뭇잎 등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연필로 문질러 우연적 이미지를 얻은 기법을 발견하였으며 숲 연작등에 이를 도입하였다.
************* 앙드레 마송
마송이 회화에서 의도한 것은 브르통의 자동기술과 같이 무의식 상태에서 그려지는 자동묘사 그림이다. 주로 드로잉적 회화, 물감·모래를 혼합한 모래 그림 작업을 한다. 브르통과 알게된 직후 1923-24년에 그는 재빠른 선묘에 의한 드로잉 작품을 통해 세상과 우주에 대한 자신의 감성을 격정적으로 나타내었으며 그의 드로잉은 기이한 동물,신화적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 호앙 미로
추상적이며 자동주의적 표현방식에 열중한 작가로서 붓의 미끄러짐,회화적 재질감, 행위와 기호의 유희를 통해 독특한 생물적 형태를 만들어낸다. 밑그림없이 직접 캔버스에 작업을 하여 영혼의 움직임을 즉각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으로 그의 화폭을 자아의 순간적 투영의 장으로 만든다.
************* 살라도르 달리
1930년 편집광적 비평이란 방법으로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가했는데 이 기업은 극사실적 묘사에 의해서 체계를 갖는 망상으로서 내용은 비합리적이나 진실인 것 같이 매우 논리적으로 표현하였다. 이중형상,위치전환,성질전환을 통해서 풍경이나 공간의 공포,변태적 에로티즘,음식에 대한 강박관념등을 소재로 그렸다.
************* 르네 마그리트
마그리트는 벽지 제조회사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1926년 문학가들과 초현실주의 그룹을 형성하고 1927년 이후 파리에서 체류하면서 본격적인 이중이미지의 우연한 만남이나 환상세계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그림은 그려지는 대상의 세부확대, 연관성없는 두 개 사물의 만남, 무생물을 생명있는 미술로 도치, 전혀 다른 모습의 생물체 변형 등으로 제작된다. 그는 서로 다른 의미의 사물들을 하나로 결합시키거나 사물이 갖는 고유의 이미지를 변형시켜 전혀 다른 의미의 초현실 이미지를 화면속에 탄생시키는 면에서 탁월함을 보여준 작가이다.
<참고문헌, 사이트>
http://kdaq.empas.com/kdic/kdic_view.html?sn=57901&sq=%C3%DF%BB%F3%20%C7%A5%C7%F6%C1%D6%C0%C7&sk=di
http://www.arin.pe.kr/west_4_9.htm
박갑영, 청소년을 위한 서양미술사, 두리미디어, 2001.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
뒤샹의 <샘>
마그리트의 <골콘다>
달리의 <기억의 영속>
첫댓글 엑박이네요~발표때 비주얼적인 기대가 큽니다~
기대하겟으.
재밌겠네요..ㅋㅋ
사진을 보여주세요 ㅋㅋ
와~ 미술 좋아해요^^ 마그리트는 얼마전에 전시회도 다녀와서 더 관심이 가네요!
오~ 멋진주제네요 이 수업에서 미술을 알게될줄이야 ^^ 발표기대할게요
엑박인 그림들을 다시 아래에 붙였습니다.
아 이그림 어디서 봤어요 ㅋㅋ
그림좋아요 ㅋㅋㅋ 좋은가?ㅋ
마샬맥루한이 미디어의 이해에서 예술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거기서 예술가들은 시대를 앞선 눈을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현대 예술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세지가 무엇인지, 어렵지만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것이 그들의 힘을 빌어 우리도 세상을 넓고 크게 보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발표 잘들었습니다.
이런 분야는 저에겐 완전 생소한 주제네요. 평소에 약간이라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았을 텐데... 발표 잘들었습니다.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도 돼 누나?ㅋ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생소했던 만큼 유익했습니다.
참신한 주제.....아주 좋았습니다~^^* (하지만 예술이라는 것은 여전히 제게는 너무나 먼 당신 입니다;;; ㅎㅎㅎ)
엘류는 질문하려면 먹을거를 가지고 와라! ㅋㅋ 이주관 학우 역시 유식하군요. 샤방샤방
오우~ 이 방대한 자료들. 멋있어요
"세기 말이래 사회 구조의 격변으로 말미암은 세태의 변모와 자아립, 개성의 주장, 개인자유존중 등으로 나타나는 주관적 표현정신이야말로 현대미술 창조의 원동력이 되었다. 20세기초 에 강력하게 대두되는 야수주의, 입체주의, 표현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추상주의 등등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수많은 유파들의 주장들은 서로를 자극하거나 합되면서 새로운 조형 실험의 야심찬 시도들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순수한 조형성의 실험과 추구는 20세기 미술에 있어 그 추진력이 되었다"현대 예술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세지가 무엇인지, 어렵지만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것이 그들의 힘을 빌어 우리도 세상을 넓고 크게
현대 미술은 정말 색다른 장른거 같아요~
이야.. 정말 끌리는 주제네요 제가 좀 미술을 좋아하죠
방대한 자료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생소한 주제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어서 좋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예술은 말이 통하지 않아도 서로를 가깝게 대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같아요. 여행갔을 때 미대 언니와 같이 돌아다니면서 느꼈거든요. 하지만 저에게 아직 현대미술은 어렵다는거 ㅜ,ㅜ,
저도 은파언니와 같이 모르면 보지말라는 오만함이 있는것 같아서 현대미술에 부정적인 감정이있었어요. 중2때 과천 현대미술관이 처음가본 미술관이었는데 정말 충격이었다는 ..하지만 앎의 즐거움도 있는것같아요 no pain no gainㅎㅎ
다들 미적인 센스가 넘쳐나네. 난 인물화, 풍경화 말고는 감상할 둘 모르는데 ㅋ 추상화만봐도 어리둥절.
주어진 발표 시간을 맞춘다는 건 역시 쉬운 일이 아니네요;; 미술에 대한 관심만 가지고 있을 뿐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요.
현대 미술에 대한 막연한 궁금증과 가끔 접하게 되는 현대 미술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정말 좋은 발표였습니다. 중간에 이상한 질문해서 열심히 준비한 발표를 방해해서 미안하구요. ^^
현대미술은 고전미술처럼 A는 B다라는 해답이 있는것이 아니라 어찌 보면 어렵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해석의 자유랄까? 음, 그런 느낌을 주기도 하네요!ㅎ
와 현대미술 참 관심갖지 못했던 분야인데
좀 어려웠지만, 재미있었습니다..ㅋ
어렵지만 재밌는 주제 .. 제가 좋아하는 주제라 더 좋았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