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 2장 11절 – 20절
우리의 신앙은 십자가의 복음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을 이해하는데 있어 그릇된 신앙의 이해가 있습니다. 이 이해는 사단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거짓신앙체계라는 말이 없다고 반박합니다. 당연히 없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그릇된 이해를 질타하는 말씀은 너무나 많고 또한 명백합니다. 그 그릇된 신앙의 이해를 편의상 거짓된 신앙체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신앙과 모양이 너무나 유사하여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거짓신앙체계는 참신앙과 모양이 유사하지만 예수의 생명이 없습니다. 아무런 성령의 역사가 없습니다. 모조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이 거짓신앙체계를 질타하셨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철저하게 이 거짓신앙체계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전하시는 천국복음을 들어도 깨닫지 못했고 천국복음을 철저하게 대적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의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거짓신앙체계에 빠진 자들의 아비가 마귀라고 하시며 그래서 그들은 마귀의 일을 한다고 하십니다. 이 거짓신앙체계에 빠진 자들은 철저하게 성전에서 에배를 드렸다고 하여도 그들은 신앙의 본질인 자비가 없었습니다. 즉 사랑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데는 빨랐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거짓신앙체계에 빠지면 영적분별력이 상실됩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당시 유대인들의 가치체계는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은 죄가 가득하여도 겉으로 의롭게 보이면 의로운 자들이라고 칭한 것입니다. 이 거짓신앙체계는 오염성이 강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너무나 쉽게 이 거짓신앙체게에 이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거짓신앙체계는 율법주의가 대표적이었습니다. 거기에 기복주의와 인본주의가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거짓신앙체계는 하나님의 판단보다도 사람들에게서 받는 판단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옳다라고 하는 칭함을 받기 위해서 사람들 앞에서 위선적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거짓신앙체계를 철저하게 대적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의롭게 되는 것의 중요성을 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자는 의인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에 의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의롭게 되는 길을 그들의 전통적인 신앙의 이해에서 찾았습니다. 즉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접촉하지 않으므로 의롭게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원래부터 의롭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죄인인데 자신들은 의로운 자들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의로움의 근거로 율법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겉으로는 율법의 지키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속은 죄가 가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사람의 공로로 의롭다하심을 입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자가 아니라 의롭다 하심을 입었기에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자신으로서는 의롭다 하심을 입을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면 죽습니다. 그런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입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셔야 됩니다. 그 길이 바로 죄인들을 불러 의인되게 하시는 예수님으로만 되어집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도 그렇듯이 그릇된 신앙이해는 우리에게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릇된 신앙의 이해를 붙잡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켰기에 자신은 의로운 자라고 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이 없는 사단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