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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난정뜨락nanjung 원문보기 글쓴이: nanjung
출연; 2월 23일(목) 오후 6시20분
녹음실; KBS 본관 2층 오픈스튜디오
프로그램;내일은 푸른 하늘(FM104.9MHZ)
방송 시간; 2월 23일(목) 오후 6시-7시, 재방송 새벽 2시-3시
인터뷰 시간;20분
MC;범효춘
담당 PD; 박천기
작가; 방귀희
<화제 집중>
요즘 서점가에는 역사 관련 서적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역사를 알면 미래가 보이기 때문이죠.
<작품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이란 책이 발간됐는데요.
박지원의 작품 세계 속에서 18세기 조선 사회를 짐작해볼 수 있는 아주 소중한 자료집이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장애를 갖고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국문학 박사시죠.
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주영숙 외래 교수를 모셨습니다.
1) 만학도로 박사학위를 받고 우리 시간에 나오신 적이 있는데요
연구 활동을 아주 활발히 하고 계시네요?
- 학위 받은 값어치 좀 하느라고요^^
2) 어떻게 연암 박지원에 관심을 갖게 되셨어요?
- 몇 년 전 ‘글쓰기’ 강의를 맡았었는데, 학교 교재를 학생들에게 구입하게 하고는 그 교재로 예습을 하게 되었지요.
책의 앞부분쯤 연습문제에 연암의 산문 하나가 있었는데요.
[소단적치인]이라는 글입니다. (다음의 글은 병법에 비유한 연암의 [소단적치인]이다. 이 글을 읽고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하지만 연암의 글이 대학교재에 소개될 정도로 중요하다는 건 새삼 깨달았지만,
그 ‘번역본’은 도저히 이해불가였습니다.
텍스트를 제가 먼저 이해를 해야만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었기 때문에, 몹시 당황스럽기도 했고요.
결국 그 학기에 ‘교재’를 무시한 수업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 학생은 강의평가에다 이렇게 적었더군요.
‘교재를 구입하게 해놓고는 그 교재로 수업하지 않았다’
기분 참.
그런데 ‘이럴 수가!’
연암처럼 소설도 시도 그림도 시늉이나마 해봤고,
뒤늦게나마 대학에 들어가 제법 박사학위까지 받은 ‘저 자신’이 그 문제를 해결할 적임자 아니겠습니까?
모종의 사명감으로 덤벼들었지요.
3) 연암을 작품을 통해 만나보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연암의 글을 작품으로 만난다. 그건
진정한 한국문학을 만나게 된다는 의미죠.
고전문학의 깊은 맛, ‘오래오래 끓인 곰국 맛’
또
“입에서 밥알이 벌떼처럼 튀어나오고
갓끈이 썩은 새끼줄처럼 끊어질 정도로 웃게 만들 것”이라는
‘약방에 감초 맛’까지 요소요소에서 만날 수 있으니까요.
연암의 글은 오늘날은 물론이고 먼 미래에까지도
본보기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이고 산문이고 편지고 시고, 편편이 작품이거든요.
그래서 연암 연구자들은
‘연암이 작품마다 연금술사의 혼을 집어넣었다’고들 합니다.
4) 연암 박지원은 모르시는 분이 없겠지만
연구자 입장에서 새롭게 조명한 연암은 어떤 인물인가요?
-현재 텔레비전 공익광고에서도 실학자 연암, 공생, 이용후생, 그런 단어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만, 그건 그야말로 연암의 대표 캐릭터이죠. 거기다 하나 더 보태자면 신선의 존재를 실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신선사상’입니다.
<민옹전>에선 민옹의 입을 빌려
“가난한 사람이 바로 신선이다.”라고 하며,
<김신선전>에서는 ‘신선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하고 찾아 헤매다가, 결국 “울울히 뜻을 이루지 못한 자가 바로 신선이다.” 라고 말합니다.
연암은 생김새부터가 신선 같습니다.
그의 꿈 이야기에 응답하는 박수무당의 말을 좀 빌려보죠 (책 239쪽)
“온몸이 덜덜 떨리는구나. 죄받을까 무섭다.……저 바위 밑에 거처하면서 아내와 자식을 다 버리고 친구마저 이별하고, 하루아침에 몸이 가벼워져 어깨에는 도토리 나뭇잎을 걸치고 허리에는 범 가죽을 두른 채, 아침에는 널따랗고 새파란 바다에서 노닐고, 저녁에는 곤륜산에서 노닐다가 그 이튿날 낮이나 저녁이 되어서야 잠깐 돌아오는데, 그 사이에 이미 천 년이 지나기도 하고 혹은 팔백 년이 지나기도 한다. 이토록 오래 사는 것을 이름하여 신선이라 한다. 정말이라면 이제 어찌할 텐가?”
5) 연암은 어린 시절 매우 불우했다죠?
가문은 노론의 명문가로써, 신분제 사회였던 당시의 잣대로는 적어도 남들의 부러움을 살만했습니다만, 그러나 연암은 태어날 때부터 찢어지게 가난하였습니다. 가장인 셈인 그의 할아버지 박필균은 청렴결백과 검소함의 대표 주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여서 도통 집에서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 관심이 없었지요. 고작 100냥도 안 되는 밭과 한양의 30냥짜리 집 한 채가 전 재산이었죠.
연암은 쉰 살이 되어서야 겨우 첫 직장을 가졌는데, 그 이전엔 평생 가난에 허덕였죠.
6) 연암은 말도 행동도 더뎠고 우울증을 갖고 있었다지요?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유년시절의 충격적인 경험에 의한 중압감, 혹은 남들보다 더딘 성장을 들기도 합니다.
성장이 더디다는 것이 육체적인 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테고,
마음이나 정신이 그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증세도 해당되겠습니다.
연암 역시 유년시절에는 남보다 성장이 더뎠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광문자전>을 열여덟 살 때 썼는데, 그 후기를 스물여덟 살 때 쓰면서
도입부에 고백합니다. <민옹전>엔 책 61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 나이 열여덟 때 병을 몹시 앓았다.”
연암은 혼탁한 정치판에 대한 회의와 자신의 앞날에 대한 번민 등으로 청년시절 우울증을 앓았고, 그 치유책으로써 광문자전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잣거리에 떠도는 기이한 이야기 등을 청하여 들었으며,
글씨와 그림, 그리고 음악의 세계를 넘나들며 학문을 닦는 한편 풍류를 즐겼습니다.
그가 그린 국죽도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기도 하죠.
연암은 결혼하고서부터 엄청나게 많은 지식을 받아들이느라 몸에 살이 붙고 어깨가 낙타 등처럼 솟았다고 합니다.
때로는 참 준수하다는 소리도 듣긴 했지만,
사실 다른 이들보다 말도 행동도 더뎠다고 합니다.
속에 든 지식을 그때그때 토해내지 못하여 생기는
알 수 없는 공포감 ‧ 불면증 ‧ 식욕부진 ‧ 거식증 그것들이 종종 엄습했던 것입니다.
그 시대에 비단 연암 홀로 그런 우울증을 겪고 있었던 걸까만,
연암은 유독 죽을 때까지 우울증에 빠져 있었고,
그가 쓴 글들은 모두 우울증을 해결하려는 몸부림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그래서 때론 우울증이라는 그 종기를 깨기 위하여 망치질을 해댔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죠. 그는 깨고 싶었지요.
나이 열여덟 그때부터 뱃속에 배배 꼬인 채로 똘똘 뭉쳐있는 그것들을
토해야만 살 수 있다는 걸 그는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그는 우울증 치료 차원으로 치열한 글쓰기를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산고 끝의 새끼 같은 글의 완성을 위하여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곤 하였습니다.
어쩌다 지쳐 잘 때면
‘마치 세상 어머니들이 아이를 낳을 때 그 산통에 너무도 지쳐서 정신이 가물가물한 상태라고 할까…
누워서 갓난아이 젖을 먹일 때,
만일 잠결에서라도 젖이 아이의 입을 눌러 혹 질식하지나 않을까 싶어
밤중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서는 몸 둘 곳을 몰라 하는 산모의 심정 같다고나 할까…’
하고 술회하기도 합니다. 창작의 고통은 정말 연암의 말대로
“장님이 캄캄한 밤길을 비단옷을 입고 가는 마음”임을 공감합니다.
안의에 ‘하풍죽로당’을 짓고 ‘공작관’을 짓고 ‘백척오동각’을 지은 그의 속 깊은 곳에는 바로, 평생 지병인 우울증을 깨트려버리고자 하는 열망이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연암은 마치 액세서리처럼 우울증을 자신의 몸에 달고서
그걸 치고 박고 사랑하며 그 재미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보통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평생 신선을 찾아 헤맸고, 스스로가 신선처럼 살고자 했습니다.
그가 가난하지 않았고 아프지 않았더라면 신선이고 이용후생이고 꿈도 꾸지 않았을 겁니다.
‘신선이 산에서만 살라는 법이라고 누가 그랬더냐?’
그의 신선사상이란 바로 실학사상이었으며 이용후생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늘그막에 한 고을 원이 되어 5000호의 중남중녀를 맡아 착실히 기르는 것’도 신선놀음에 해당되었습니다.
그런 한편,
프로이트의 말에서처럼 ‘자신의 예술작품에서만 비로소 내밀한 오르가즘을 느끼는’ 예술가이기도 하였습니다.
연암 박지원이란 사람은 우울증이란 액세서리가 변신하고 둔갑하여 만들어낸 퓨전아티스트,
세기를 넘나드는 진정한 아티스트였던 것입니다.
그는 또 [문학치료]의 선구자였다고도 할 수 있는데요,
중국에서 ‘요술구경’을 하게 된 연암은 소매를 둥둥 걷어붙이고서 정신없이 글을 써내려갔죠. 재미난 이야기를 듣고 쓰고 읽으면 그게 바로 우울증 해소에 효과가 있다는 걸 임상실험까지 마친 연암은, 요술 스무 가지를 우리나라에 가져와 ‘고달프고 우울한 병’에 대한 치료제로 쓰리라 작심하고서 온 열정을 기울여 붓을 휘두른 거였죠. 놀랍게도 그는 요술쟁이의 행동 하나하나를 마치 영상처럼 보이도록 표현했는데, 제대로 읽기만 하면 요술구경을 다 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돕니다. 저는 연암이 ‘스무 가지의 요술’이라 언급했음을 바탕삼아 ‘요술구경’을 20편의 사설시조로 재구성하기도 했지요. 이 책 2권에 모두 소개되지만 1권에서도 한 편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요술쟁이가 한 자 넓이 꽃무늬 자기쟁반 다섯 개를 탁자 위에 놓았다.
가느다란 댓개비 수십 개는 탁자 아래 놓았다. 댓개비는 크기와 길이가 화살을 닮았는데 끝도 모두 뾰족하다. 댓개비 한 개, 그 끝에 쟁반을 얹고 대를 돌리니, 쟁반은 삐뚤어지지도 기울어지지도 않으며 잘도 돌았다. 조금 느리게 돌면 팽이채로 팽이를 때리듯 손으로 슬쩍 쳐서 빨리 돌게 하였는데, 재빨리 도는 바람에 미처 떨어질 새도 없다. 그 쟁반이 지쳐서 조금 삐딱해지면 요술쟁이는 다시 댓개비를 질러 올렸고, 쟁반도 다시 힘을 받아 한 자 넘게 높이 치솟았다가 한 치 어김없이 댓개비에 내려 앉아 팽팽 뺑뺑이를 돌았다. 도는 그대로의 쟁반 얹은 댓개비를 요술쟁이 자기 오른쪽 신발에 꽂으니, 쟁반들 처음 돌아대던 그대로 돌고 돌다가 또 돌았다. 다시 한 개비로 쟁반을 처음처럼 돌리다가 왼편 신발에 꽂고, 또 한 개비로 돌리다가 돌리던 그대로 오른편 옷깃에 꽂더니, 또 다른 한 개비도 돌리다가 도는 그대로 왼편 옷깃에 꽂았다. 온 몸에서 쟁반 네 개가 핑글핑글 돌아가게 해놓고, 그래놓고 한 댓개비 끝에 다섯째 쟁반을 얹어 흔들고 치밀고 핑핑 돌렸다.
이따금 손으로 칠 때마다 쟁반이 쟁쟁 울었다.
7) 글공부는 언제부터 한건가요
-연암은 어릴 때부터 똑똑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공부를 할 여건이 되질 않았어요. 본격적인 글공부는 16세에 결혼하고 나서였죠.
-장인 이보천(맹자) -처삼촌 이양천(사기). -이양천의 친구 이윤영(그림과 주역).
8) 연암의 글 솜씨를 알아채고 지도해주신 스승이 있다지요
그가 하루는 <항우 본기>를 모방하여 <이충무공전>을 지었는데, 스승 이양천이 보고 깜짝 놀랐다 합니다.
“자네에겐 반고와 사마천 같은 글 솜씨가 있는 게야.”
이양천은 유배생활 중에도 연암에게 편지를 보내서 가르침을 전달하였지요.
“글공부란 때가 있는 법. 급물살을 탄 듯 서둘러라!” 하고 말이죠.
9) 연암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은 어떤가요?
연암이 열세 살이던 1749년(영조25년) 극심한 흉년이 든데 엎쳐 전염병까지 돌아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빈곤에 항복하여 자살하는 자들도 속출하였지만, 조정에서는 ‘술을 빚지 말라’는 대책만 내놓았을 뿐이었죠. 쌀이 귀하니 쌀을 술 빚는 데에 허비하지 말라는 취지였지만, 그건 가진 자들의 이야기였고, 가난한 사람들에겐 쌀 한 톨 구경하기가 보석구경보다 어려웠습니다.
연암은 3년 내리 흉년이 들어 궁핍생활이 이어지는 사회 속에서 열여섯(1751)살에 결혼하였습니다. 당시 실록은........
“도성 안에 거지들이 너무 많고 이들이 사람들에게 재물을 억지로 강요하니 그들의 과격함을 막아야 한다.”
“도성 안에 거지들이 가득하고 굶어죽은 시체들이 성문 밖에 백여 구가 쌓였다.”
사회문제가 된 무뢰배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순박한 거지들은 그저 청계천 위아래를 오르내리며 무리 지어 동냥을 일삼는 것이 한계였습니다. 그런 거지들의 지도자 노릇을 한 인물이 바로 ‘광문’이었는데, 연암은 이런 특이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광문자전」이라는 소설에 담아내고자 마음먹었는데요.
박지원의 조부 박필균이 호조 · 병조참판을 역임한 뒤 1754년 대사간으로 재직할 그때 연암은 청렴한 할아버지의 이력에 누를 끼칠까봐 여러 편의 풍자 글을 익명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집안의 늙은 하인에게서 듣게 된 ‘광문’의 이야기를 자칫 놓칠세라 밤새 글로 옮겼죠.
광문은 당시 아주 유명했던 거지의 이름으로, 1742년, 그러니까 영조18년에 나온 [파수록] 등의 야담집에도 당대의 거지 왕초 광문의 행적이 기록돼 있을 정도이죠.
그가 「양반전」을 발표할 당시, 조선의 도덕성은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흉년이 들어 전국에 금주령까지 내렸던 1762년,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참살했지요.
영조는 아들을 죽임으로써 권력을 굳건히 하고자 했으나, 민심을 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임금이 천륜을 저버린 것은 도덕심의 추락이었고, 신하가 감히 임금(사도세자)을 죽이려 갖은 중상모략을 다한 것 또한 신분질서의 붕괴였으니까요.
연암은 정치와는 담을 쌓고 살았지만 시대의 아픔을 풍자적인 글로 표현했습니다. 암담한 정치를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무기로는 문학만한 게 없었고, 그의 풍자적인 글쓰기는 낡은 봉건적 관념, 그 허위의식을 통렬하게 일깨우는 방식이었던 거죠.
10) 이번 책은 소설을 통해 연암을 조명하고 있는데요
어떤 소설들을 연구하셨나요?
지금껏 알려진 연암의 소설 전부 하고 산문에서 몇 편 더 발췌하였지요. 이를테면 <마장전> 후기 삼아서 <나를 찾아서/염재기> <김신선전>의 후기로 <만폭동에 새긴 이름/발승암기>를 소설로 격상시켰습니다.
사실 연암이 “이건 소설이다.”라고 지정해놓은 작품은 없지요.
<광문자전> <마장전> <예덕선생전> <민옹전> <양반전> <김신선전> <우상전>은 [방경각외전]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두었으니 소설집이라 할 수 있지만,
<호질> <옥갑야화> <허생전>은 [열하일기]에 따로,
<열녀함양박씨전>은 연암집 1권에 들어있죠.
어쨌든 저는 이 소설 모두를 아주 쉽게 읽히도록 문장을 세밀하게, 소리 내어 중얼중얼 해가며 다듬고 또 다듬었지요.
사설시조 양식을 적용하여 적절한 문단구별도 하였는데,
아무리 한문소설이어도 그 글의 뜻은 순 우리 호흡의 우리 가락이었으니 가능했던 거죠.
2권에서 만날 수 있지만, 어떤 산문에선 연암이
“내 사설 한 편을 짓노라.”하고 서술한 부분이 있기도 해요.
아무튼
결국 독자 입장으로는 연암의 글이 사설시조 양식으로 재구성 된 점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아주 술술 재미있게 읽혀지는, 풍자와 해학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연암문학을 읽었다는 경험을 하게 될 뿐이에요.
요소요소에서 중용 등 사서오경, 공자왈 맹자왈 등등을 마치 순 한글판 삼국지를 읽는 듯한 느낌으로 만나게 되도록 장치해 놓았기도 해요. 그게 연암의 전략이거든요^^
11) 이렇게 방대한 연구를 하려면 준비 기간이 꽤 많이 필요했겠네요
-햇수로 3년 남짓 걸린 셈이에요. 안면몰수, 두문불출..........
12) 장애, 나이, 그리고 만학 이런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는 비결이 뭘까요?
- “이것은 내 매력이야!”
라는, 어찌 보면 궤변적인 발상이 그 비결이라 할 수 있지요^^
-분명한 점은, 저에게 장애가 없었다면 저는 지금 너무나 평범한 60대 노인네로 살고 있을 거라는 점입니다.
-만학, 그 또한 마찬가지에요. 제가 대학입문을 좀은 젊은 나이인 40에 했다고 치면 저는 아마 99년쯤에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을 거고, 지금쯤 더 잘 나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한 성취감을 얻었으면 절대로, [연암박지원]을 연구할 생각까지는 못했을 테죠.
13) 지난해 겨울 대한민국장애인예술상을 수상하셨죠?
-아주 무겁고 너무 황감한 상이었지요.
[작품으로 읽는 연암박지원]을 완성하게 된 힘도 바로 그 상으로부터 생겨났다고 할 수 있는데요.
상 받은 값을 제대로 해내려면 아직 갈 길이 멀었습니다.
14) 장애나 나이 때문에 도전을 망설이고 있는 분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고 싶으세요?
-장애는 시시각각 불편함과 아픔을 주지만, 그 고질화된 아픔을 좀은 잊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필연적으로 하게 만들지요. 유식하게 말해 오히려 승화시켜야겠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거든요.
-장애 때문에 할 수가 없어. 이 나이에 무슨 시작을 하겠어, 라는 부정적인 생각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나는 장애가 있으니까 비장애인보다 더욱 잘해낼 수가 있어. 나는 나이가 많으니까 나이 어린 사람들보다 더욱 풍부한 경험을 토대 삼을 수 있어. 그런 각오로 지금 당장 도전의 날을 세워보세요. 그리고 최선을 다해보세요. …너무 상투적인 말이겠지만…,
아픔을 이겨낸 결실이기에 더욱 빛나는 열매가 되리라는 점을 믿으세요.
15) 연암에 대한 연구가 계속된다지요?
-예, 2권, [작품으로 읽는 연암박지원/산문, 시편]이 3월 말경쯤 모습을 드러내지 싶습니다.
사실 이 2권이 압권인데요.
연암문학의 진수를 체험할 수 있을 겁니다.
연암의 산문은 현대 문인들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보석 같은 작품들이고, 그의 시 또한 현란하기 그지없습니다.
16) 앞으로 어떤 집필 계획을 갖고 계신지요?
-연암 박지원 시대에서 200년쯤 거슬러 오른 시점을 배경으로 소설을 하나 구상하고 있는 중입니다. ^^
네, <작품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을 펴낸 장애인 소설가인 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주영숙 외래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