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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자기가 웃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를 피우며,
도사는 자기가 도를 행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참을 행합니다.
좋고 나쁨을 구분하려 하지 않고
그냥 사는 것 자체가 아름다움이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만발한 벚꽃은 겨울을 견딘 결과이고
초여름 풍성한 버찌는 열심히 꽃 피운 보람입니다.
사춘기 청년의 때를 잘 견디면 밝은 청춘을 맞게 되고
그 때를 열심히 살고 나면 풍성한 중년을 맞겠지요.
써놓은 글을 정리하면서 얼마 전에 메모해둔 글을 읽어봅니다. 이렇게 기록해두지 아니하면 사실 모두 날아갑니다. 그래서 이제는 침대 머리맡에도 있고 바지 주머니에도 있고 양복 웃옷 주머니에도 볼펜과 함께 조그만 메모지가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생각이 떠오를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순간 기록해두지 않으면 머릿속에서 빠르게 사라집니다. 돌이켜 아무리 생각을 더듬어내려 해도 감감합니다. 아깝지요. 그렇게 몇 번 경험하고 나서는 여기저기 준비해두었습니다. 물론 때로는 생각이 바뀔 때도 있습니다. 당연히 수정합니다. 글도 다듬어집니다.
어느덧 5월도 물러가고 있습니다. 다음 주말에는 새 달을 열어야 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별 감흥이 없다는 것도 나이 덕인지 탓인지 모르겠습니다. 하기야 좋은지 싫은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다리는 것이 있다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ㅎㅎ 복된 주말을 빕니다. ^)^
2023년 5월 27일 김종우 목사 드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에스겔 18 : 23)
<분노의 질주 - 라이드 오어 다이>
개과천선(改過遷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바람직한 일입니까? 인생 살다보면 실수도 있고 실패도 있고 잘못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계기로 인생을 살아오던 방식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꾸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적질만 하다가 감옥을 들락날락하던 유명한(?) 도적이 삶을 바꾸어 목회자가 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변화를 반겨주고 또한 응원도 해주었습니다. 문제는 지속성입니다. 그 변화가 인생 끝날 때까지 유지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렵지요. 물론 제삼자로 손가락질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에게 어떤 사정이 생겼는지는 자세히 모릅니다. 다만 안타까운 마음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사정이라면 그래도 다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당사자는 개과천선할 수도 있지만 이미 막대한 피해를 입은 사람으로서는 그의 변화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받은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치유하기도 전에 그의 변화를 받아달라는 것은 너무 가혹하기도 합니다. 단 하나 자식을 키우며 의지하며 살던 여인이 그 자식을 잃습니다. 유괴당하여 살해됩니다. 충격과 슬픔 그리고 살아가면서 당해야 하는 그 마음의 고통은 무엇으로도 치유가 힘들고 이겨내고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어찌어찌 살아갑니다. 어느 날 믿음의 감동을 받아 그를 용서하려고 교도소로 면회를 갑니다. 그런데 자기는 이미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아주 평안한 마음으로 희희낙락합니다. 다시금 충격을 받습니다. 나는 이렇게 힘든데 저 살인자는 어떻게 저렇게 평안할 수가 있는가?
어찌 보면 과거는 혼자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범죄 집단에서 빠져나온 사람이 오히려 그 집단에게서 집단 폭행을 당하거나 살해를 당하는 일도 생깁니다. 남은 무리에게 이질감을 심어준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속된 말로 ‘그래 너 혼자 잘났다,’ 싶으니 자신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괴감을 느끼고 스스로 분노합니다. 그리고 그 분풀이를 하는 것입니다. 정말 지구 밖으로 도망가서라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끈질기게 쫓아다닙니다. 이런 경우 개과천선이 말은 좋아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혼자서 아무리 노력해도 환경이 따라주지 아니하면 공염불이 되기 쉽습니다. 목숨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10년 세월, 세상도 변하고 시대도 변하고 많은 것들이 변합니다. 더구나 20세기의 십년과 21세기의 십년은 변화속도가 다릅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의 의식입니다. 옛날부터 그래서 많은 이야기들의 소재가 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끕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모두의 의식 속에 깔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쉽게 공감하고 감동하며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 그 어떤 작품 속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즐겨하기도 합니다. 바로 복수심입니다. 피해를 당하고 고통을 당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은 쉽게 이겨낼 수 없습니다.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 살해당한 일이라면 그 사람에 대한 원망과 원한은 오래도록 지속됩니다. 그리고 복수심을 품을 수 있습니다.
못된 짓을 하다가 총격을 받고 죽습니다. 그야 죽을 짓을 했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악한 무리가 그런 의식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제삼자의 과욕일지도 모릅니다. 당사자는 자신의 아비가 죽음을 당한 일입니다. 그리고 아비의 유업을 물려받아 악한 짓을 이어갑니다. 참으로 요지경인 세상이지요. 악한 짓을 하는 사람이 잘나가니 말입니다. 나라를 움직일 만큼 돈과 권력을 쥡니다. 그러니 경찰도 그들의 끄나풀일 뿐입니다. 십년 세월을 마음속에 칼을 갈며 준비해왔습니다. 가공할만한 무기와 치밀한 계획 그리고 그에 따른 막강 군대(?)와 첨단 장비 등등 상상을 초월한 준비를 합니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 싶어 실행으로 옮깁니다. 복수를 위해.
단순한 복수가 아닙니다. 되로 받고 말로 주는 복수입니다. 하기야 사람의 심리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라고 제한합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그 이상으로 복수를 하려는 것이 사람의 심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악당 ‘단테’가 ‘돔’에게 복수하려는 것이 바로 이런 식이라는 것이지요. 내가 당한 그 이상의 고통을 너에게 안겨주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돔의 가족이라 여기는 팀원들을 하나씩 제거하려 듭니다. 기막힌 궤계를 사용해서 팀을 분리시키고 그렇게 하여 각개 격파를 하려 합니다. 첨단장비에 막강한 군사력과 기막힌 계획에 의하여 돔이 계속 위기를 맞습니다. 과연 하나를 헤쳐 나가면 이어 또 다른 함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좀 그럴듯하였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기상천외한 질주가 이어집니다. 이름 그대로 ‘분노의 질주’입니다. 이번이 열 번째입니다. 도무지 있을 법하지 않은 질주가 계속됩니다. 그러려니 하고 보는 것이지요. 회를 거듭할수록 현실성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일반적인 상상을 뛰어넘는 자동차 질주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복수도 악당의 끝장도 마무리되지 않았으니 다음 회가 또 기다려집니다. 굉장한 볼거리로 끝나지 않고 ‘가족’이라는 인류공통의 양념을 가미했으니 있을 법하지도 않은 공상을 희석시켜줍니다. 영화 ‘분노의 질주: 라이드 오어 다이’(Fast X)를 보았습니다.
종교와 기독교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 존재라고 합니다. 사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영적인 존재입니다. 아무리 사람과 비슷하게 생겨도 사람을 따라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예배와 기도입니다. 사람만이 영원한 것을 찾고 추구하며 삽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것을 알고 믿으며 삽니다. 물론 하나님을 부정하고 신을 없다고 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도 신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말을 꺼낼 필요도 없으니 말이지요. 얼마나 오랜 시간 고심을 하였겠습니까? 그러고 나서 결론을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지요. 시 14 : 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마치 아비를 부인하는 자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없이 만들어졌다, 말이 됩니까?
종교가 무엇입니까? 이 낱말을 우선 풀어봅니다. ‘으뜸 종’에 ‘가르칠 교’입니다. 으뜸된 것을 가르치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런데 이 ‘으뜸 종’을 풀어보면 더 깊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의미를 느낄 수 있지요. 이 ‘종’(宗)자는 위에 갓을 썼고 그 아래 ‘보이다’라는 뜻의 ‘시’(示)자가 있습니다. 이 ‘갓’은 지붕이라는 뜻이며 또한 ‘하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종’자는 ‘하늘을 보여준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한 마디로 종교란 ‘하늘을 보여주는 가르침’이란 뜻입니다. 단순한 문자인데 이런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롬 1 :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하나님의 속성이 만드신 피조물 속에 다 드러난다는 뜻이지요.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 속에도 하나님의 하신 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배를 가리키는 ‘선’(船)자를 보면 배 ‘주’(舟)에 여덟 입이 들어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처음 배가 나오는 것은 바로 노아의 방주입니다. 그리고 그 방주를 타고 구원받은 사람은 노아의 여덟 식구뿐임을 압니다. 놀라운 일치 아닙니까?
다시 말하지만 하늘을 보여주는 가르침이 바로 종교입니다. 학문이라고 하면 최고의 학문이지요. 종교는 세상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종교인이라면 하늘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종교요,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하늘을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앙인들이 대부분 어디를 보며 삽니까? 일반 신앙인뿐만 아니라 그들을 가르친다는 지도자까지 하늘이 아니라 땅을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하기야 그들이 그렇게 가르쳤으니 일반 신자들이 따라 하는 것이지요. 교회 안에서 권력투쟁, 금권선거, 세습목회, 성폭력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하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의 짓거리를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게 올바른 종교인이고 신앙인입니까? 골 3 :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성경의 가르침도 잊어버리고 자기 갈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대표적인 종단이 셋이 있습니다. 유교, 불교 그리고 기독교입니다. 그 종교가 각각 바라보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물론 천국입니다. 그러면 불교는 어디입니까? 극락이라고 합니다. 유교는 어디입니까? ‘무릉도원’이라고 하지요. 모두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는 다른 곳입니다. 표현이 다를 뿐 모두 같은 뜻 아닌가요? 한 마디로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여기와는 다른 영적인 곳입니다. 그저 잘 먹고 잘사는 육적으로나 편안한 세상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원이 다른 세계지요. 그런데 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삶을 보십시오. 그런 세계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라고 느껴집니까? 이게 문제입니다. 다른 종교야 어떻든 우리 기독교가 어떤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요즘 교회에 가면 하늘이 보입니까, 땅이 보입니까? 천국이 보입니까, 세상이 보입니까? 이것을 쉽게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이 하고 있는 기도 소리를 들어보면 압니다.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내 일, 내 집, 내 자식, 내 직장, 내 교회, 내 나라 등등 아닙니까? 마 6 :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으며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냥 읽으면 되는 줄 알고 있는데 무엇을 읽는지 모르고 읽는다면 백날 읽어도 깨달음도 없고 믿음의 성장도 없게 됩니다. 눅 10 : 26 “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에 기록된 말씀을 읽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냥 읽으면 되지요.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깨달음이 있는가, 없는가, 구분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데 세상 이야기로 듣는가, 천국의 이야기로 듣는가, 하늘의 말씀으로 듣는가, 땅의 말로 듣는가, 거기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선 이것부터 물어봅니다. 성경은 누구의 말씀입니까? 하나님 말씀입니까, 사람의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땅의 일을 말씀하십니까, 하늘의 일을 말씀하십니까? 성경이 세상 나라의 이야기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입니까? 땅의 일이나 세상 나라의 이야기는 구태여 성경을 보지 않아도 세상에 널려 있습니다. 평생 죽치고 앉아 읽어도 다 못 읽을 책들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거기에 하나 더 보태서 성경에 세상 나라 이야기를 담으셨겠습니까? 우리가 세상 나라 이야기가 궁금해서 성경을 읽습니까?
물론 성경에 세상 나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 나라 이야기를 하고자 하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세상의 일을 빗대어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고자 하심이라는 말입니다. 아담으로 시작하여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등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을 따라 사건이 생기고 역사가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봅니다. 롬 1 :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 속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세상의 이치를 빗대어 하늘의 이치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단순히 세상 이야기로 듣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게 읽는다면 성경이 성경의 역할을 못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마땅히 섭취해야 할 영적인 양식을 먹지 못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성경을 백독 아니라 백번을 쓴다 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나라 이야기하려고 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 주신 이 성경을 하나님 나라의 일로 들으려 하지 않고 세상 나라의 이야기로 보려고 하니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 예를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하루 종일 말씀을 가르치시니 모인 사람들이 배고프겠다, 생각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 먹이십니다. 이 사건 직후에 예수님은 따라온 무리들에게 뭐라고 가르치십니까? 요 6 :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저들에게 양식을 먹이시고 지금 양식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세상의 이치를 가지고 하늘의 이치를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듣는 무리가 알아듣습니까? 깨닫지 못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54 - 5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이 말씀을 듣자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왜 그러죠? 예수님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라는 말씀 아닙니까? 기절할 일 아닙니까? 그러나 깨달아야지요. 예수님은 하늘의 이야기를 하는데 유대인들은 세상의 이야기로 듣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뭐라 하십니까? 63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영을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육으로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주일 날 교회 다니는 것입니까? 그것은 피상적인 일이지요. 하나님 안 믿어도 교회 다닐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장로 직분까지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교회도 다니지 않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렇게 교회를 다닌다면 본인도 좀 힘들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목적이 있다면 모르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교회 다닌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과 세상 사람들이 무엇이 다릅니까? 코가 둘인 것도 아니요 입이 둘인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의 일이요, 하나님 나라의 일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지식을 어디서 얻었습니까? 비로 하나님 말씀, 성경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성경을 읽으면서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보아야 합니다. 땅이 아니라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나라를 알지 못하는 저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본,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해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일을 빗대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 우리가 경험한 것이라고는 이 세상뿐이니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사용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즉 육적인 것을 빗대어 영적인 것을 설명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비유라는 것이고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은 세상의 다른 책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자연의 이치, 세상의 이치를 통해서 하늘의 이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원리를 알아야 하늘나라가 보이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가 성경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부 어려운 것이 아니지요.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잘 아는 대로 성경에는 중요한 4 가지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역사와 교훈과 예언 그리고 그 예언이 이루어진 실상입니다. 그런데 역사와 교훈은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별로 없습니다. 과거의 이야기요 또한 우리네 현재의 삶을 위한 지혜를 주고자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컨대 교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그대로 지키며 살려고 노력합니다. 단지 우리가 연약해서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입니다. 일단 우리는 그 말씀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언이지요. 읽어도 모릅니다. 써도 모르지요. 외워도 모릅니다. 누가 설명해줘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설명해주는 사람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딴에는 안다고 이야기하지만 자기 길로 가는 것뿐입니다. 성경대로 표현한다면 ‘사람의 계명’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멀다는 것이지요.
더구나 말씀에는 초보가 있고 보다 높은 차원의 지식이 있습니다. 히 5 : 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하나님은 우리가 젖이나 먹는 어린아이 신앙인으로 머물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어린아이는 나타난 것만 압니다. 그 속 깊은 뜻을 간파하는 능력이 아직 없습니다. 그래서 비유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비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천국비밀이라고 말씀하시지요. 비밀이기에 직설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잘 아는 대로 마 13장에 천국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모두 비유입니다. 그리고 마 25장에 우리가 잘 아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오지요. 달란트 비유, 열 처녀 비유 그리고 양과 염소를 가르는 비유가 나옵니다. 모두 천국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내용이지요.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종교란 하늘을 보여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종교인이라면 그리고 정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 곧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하나님 나라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자기 아버지도 소개해줄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보입니까? 딤전 6 :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그러니 어떻게 보여주고 어떻게 설명합니까? 요 1 :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보여주고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모른다면 되겠습니까? 더구나 말씀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우리는 이 말씀으로 거듭나고 이 말씀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바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찾게 됩니다. 딤후 3 :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에 들어섰지만 이제 우리는 구원에 이르도록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장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땅의 것이 아닙니다. 세상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육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것, 천국의 것, 영적인 것입니다. 고전 2 :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하나님 말씀을 세상의 일로 알고 믿고 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표면적 유대인이요 단지 교회 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이고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은 없는 사람들입니다. 마 24 : 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난리가 나고 전쟁이 있고 처처에 기근이 있으며 지진이 일어나니 그야말로 아이 밴 자들, 젖 먹이는 여자들은 화를 당하는 겁니다, 이따위로 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어리석은 자들이지요. 하나님은 영을 말씀하시는데 육으로 전하고 있으니 그 말을 하는 자나 그 말을 듣고 아멘 하는 자들이 함께 구덩이에 빠질 것입니다. 왜 그런 말이 나옵니까? 육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롬 8 : 5 - 6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그런데 안타깝게도 자신이 육에 속하였는지 영에 속하였는지조차 모릅니다. 하기야 육에 속하였으니 모르는 것이 당연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참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인이라면 진짜 종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을 보여주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하지요. 그것을 보여준 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주신 성경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을 육적 세상일로 알고 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마귀 짓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따라가면 함께 망합니다. 지금 듣고 있는 설교가 하나님 말씀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마귀가 어디 있답니까? 하나님의 성전(교회)입니다. 살후 2 : 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경성해야 합니다. 마귀가 활동하는 곳을 막연히 세상이라고 생각하면 속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미 자기 손안에 있습니다. 도적이 자기 것을 도적질합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것을 빼앗으려 합니다. 마 24 :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사단의 영이 함께 하는 거짓 선지자, 거짓 그리스도가 택하신 자들을 미혹합니다. 어디서요? 택하신 자들이 주로 어디 모입니까? 교회입니다. 그러니 교회 다닌다고 안심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천국을 이야기하기 앞서 경계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마 13 : 24 - 25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여기 두 가지 씨가 나옵니다. 좋은 씨와 가라지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어디에 있습니까? 좋은 씨는 예수님의 밭에 있고 가라지는 마귀 밭에 있답니까? 아닙니다. 둘 다 같은 밭 곧 예수님의 밭에 있습니다. 뒤에 가면 예수님이 해석해주십니다. 38절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과 마귀의 자식들이 같은 곳, 예수님의 밭에서 자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의 밭 곧 교회에 있다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귀의 자식이 나는 마귀의 자식이다, 그러면서 교회를 다닙니까? 교회에서 가만두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모두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랍시고 교회를 다닙니다. 겉으로 무슨 표가 나는 것도 없습니다. 함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려면 오히려 그들보다 더 열심히 신앙하는 것을 보여줄 필요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자기와 한 무리가 되도록 묶어두는 것이지요.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도록 정으로 묶어두기도 합니다. 교회를 통째로 삼키고는 성도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관리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떠나면 지옥이야, 엄포도 놓을 것입니다.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내가 하늘의 이야기를 먹고 있는지 세상 이야기를 먹고 있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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