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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명언명구]
불분불계(不憤不啓)
괴로워하지 않으면 길을 터주지 않는다
길을 몰라 헤매면서 밤을 지새본 사람은 안다.
적실한 말 한마디는 생명수와 같다는 것을.
한 해의 시작은 1월이다. 하지만 학교의 개강, 프로 스포츠의 개막처럼 3월에 시작하는 것들도 많다. 개인적으로도 봄과 함께 취미와 여가 활동을 준비하는 사람도 많다. 아마도 추운 1월보다는 따사로운 3월이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활짝 열어서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 더 좋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시작과 함께 일이 술술 풀려 가는 사람도 있지만 처음부터 일이 꼬여서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공자도 학생들이 정해진 교과에 따라서 배움을 시작하고 개인적으로 계획과 각오를 다지는 경우를 많이 봤다. 학생들이 의욕과 달리 길을 잃고 서성거리고 힘겨워할 때 공자는 고민을 많이 했다. 당장 헤쳐 나갈 길을 알려줄까, 아니면 혼자 길을 찾을 때까지 격려하며 기다려줄까? 공자는 어느 것이 올바른 길인지 고민 끝에서 답을 내놓았다. 학생이 자신의 모든 힘을 쏟고도 길을 찾지 못할 때 그때 비로소 말을 건넨다는 것이다. 공자는 왜 당장 알려주지 않고 뜸을 들이며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공자의 성격이 괴팍해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깊은 의도가 있었던 것일까?
<논어> 술이(述而)편 8장
— 159번째 원문
무지에 분노하지 않으면 갈 길을 터주지 않고,
표현에 안달하지 않으면 퉁겨주지 않는다.
또 사물의 한 면을 제시해주어
그것으로 나머지 세 면을 추론하지 못하는 이에게는
되풀이하여 지도하지 않는다.
憤 : 분(憤)은 성내다, 화내다는 뜻으로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못하는 것에 대해 화를 내는 상황을 가리킨다.
啓 : 계(啓)는 열다, 가르치다, 알려주다는 뜻이다.
悱 : 비(悱)는 말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알고 있지만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해서 답답해하는 상황을 말한다.
發 : 발(發)은 드러나다, 끄집어내다, 쏘다의 뜻이다.
擧 : 거(擧)는 들다, 오르다는 뜻이지만 여기서 예를 들다, 실례를 제시하다, 실마리를 내보이다는 맥락으로 쓰이고 있다.
隅 : 우(隅)는 건물의 모퉁이, 구석을 가리키지만 여기서 사물의 다양한 측면이나 의미의 여러 가지 계기를 뜻한다.
反 : 반(反)은 되돌리다, 돌아가다의 뜻이지만 여기서 제시된 실마리를 바탕으로 하여 추론하거나 답을 찾아내는 반응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
復 : 돌아오다, 회복하다의 뜻이면 ‘복’으로 읽고, 다시, 다시하다, 되풀이하다의 뜻이면 ‘부’로 읽는다.
기다림의 괴롭힘인가, 성장의 미학인가?
세상에 얄미운 사람이 많다. 특히 비밀을 말해줄 듯하며 말해주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얄밉기 그지없다. 알려줘도 되는데 괜히 비밀을 가지고 사람에게 장난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교육 현장에도 이런 식으로 비밀을 알려주지 않는 선생들이 있다. 선생이 질문을 던지면 학생이 그에 대답을 하고, 선생이 과제를 내면 학생은 그것을 푸는 형식으로 진행되곤 한다. 학생이 선생의 질문에 선뜻 대답을 찾지 못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과제의 해답을 풀지 못하면 답답하고 갑갑해진다. 이때 거꾸로 학생이 선생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선생이 선뜻 실마리를 던져주지도 않고 해답을 말해주지 않으면 학생은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선생이 얄밉게 여겨진다.
공자는 제자가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씨름을 하거나 질문을 하면 자세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공자도 ‘정답’이라는 비밀을 가지고 학생들을 괴롭힌 것일까, 아니면 학생이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끈기 있게 기다린 것일까? 공자는 후자의 유형을 취했다. 그는 왜 그렇게 했을까? 공자는 학생들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는 만큼 배움의 세계에서 내적 성장을 한다고 믿었다. 아울러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것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의 이러한 학습법은 ‘계발술(啓發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의 소크라테스(BC 470-399)는 끊임없는 문답을 통해 상대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거나 질문의 대답을 찾도록 만들었다. 그러한 대화법을 산파술(maieutike)이라고 한다. 무지이든 앎이든 깨달음을 얻는 측면이 아이를 낳는 측면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계발술도 학생이 모르는 문제를 풀어 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고 표현하지 못하는 말을 퉁겨주므로 막힌 생각의 길을 뚫어준다. 이런 점에서 공자나 소크라테스는 같은 교수법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학생들이 몰라 쩔쩔매는 상황을 즐긴 것이 결코 아니다. 그들은 학생들이 남의 말을 듣고서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지성으로 생각을 해내서 내 것을 일구어내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창조의 시간”으로 안내한 것이다. ▶소크라테스 조각상, 루브르 박물관. 소크라테스는 공자 사후에 태어났지만 사람의 재능을 일깨우는 점에서 공자와 닮은 점이 많았다.
요즘 대학생들은 남의 글을 자신의 과제에다 옮겨 놓고 아무런 표시 없이 제 것으로 여기거나 대학원에서 남의 힘을 빌려 학위 논문을 작성하는 일이 종종 이슈가 되곤 한다. 현대인은 고대인보다 내 것을 주장하는 권리 의식이 발달해 있다. 하지만 자신이 읽어본 남의 글을 자기 것인 양 취급한다면 이것은 내적 성장이 아니라 절도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우리는 오랫동안 생각해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는 ‘계발술’보다 바로바로 정답을 알려주는 ‘주입식(注入式)’ 교육에 너무 익숙해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기르지 못한 것이 아닐까?
자문(諮問)과 교육의 차이
인간은 아무리 배우더라도 지식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현대인이 고대인에 비해 자연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식의 빈틈이 없을 수 없다. 사람은 이러한 지식의 빈틈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 자문(諮問)과 교육이 무지로 인한 잘못과 부족을 채워줄 수 있다. 자문은 어떤 일을 효율적이고 바르게 처리하기 위해 그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나 기관에 의견을 묻는 것이다. 교육은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 및 바람직한 인성과 체력을 갖도록 가르치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이다. 자문과 교육은 무지의 상황을 극복하게 해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차이를 지니고 있다.
자문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필요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타인의 지식을 빌리는 것이지만 교육은 긴 시간에 걸쳐 실용적인 것만이 아니라 가치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자문은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교육은 앞으로 닥칠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을 기르므로 끝이 없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공자는 제자들에게 자문을 한 것이 아니라 교육을 했기 때문에 답답해하는 학생들에게 선뜻 정답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교육(敎育)이란 말은 맹자가 제일 먼저 사용했지만 19세기 말과 20세기에 이르러 널리 쓰이는 말이 되었다. 맹자는 군자가 누리는 세 가지 즐거움, 즉 삼락(三樂)을 말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지만 (君子有三樂)
세상의 왕 노릇은 그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而王天下不與存焉)
부모님이 모두 살아 계시고 (父母俱存)
형제들도 별 탈이 없는 것이 (兄弟無故)
첫 번째 즐거움이다. (一樂也)
우러러보아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仰不愧於天)
굽어보아 사람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俯不怍於人)
두 번째 즐거움이다. (二樂也)
세상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 (得天下英才而敎育之)
세 번째 즐거움이다. (三樂也) ―<맹자> ‘진심상(盡心上)’
맹자의 말에 나오는 ‘교육(敎育)’은 어원상으로 회초리로 아이를 야단친다는 ‘교(敎)’ 자와 갓 태어난 아이를 기른다는 ‘육(育)’ 자로 되어 있다. 이 때문에 교육에서 ‘사랑의 매’가 불가피하다는 말이 나왔다. 훗날 후한의 문자학자 허신(許愼, 30-124)은 교를 “윗사람이 알려주고 아랫사람이 본받는다(上所施, 下所效也)”, 육을 “아이를 가르쳐 착하게 만든다(養子使作善也)”로 풀이했다. 이러한 풀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교는 본받는다, 따라하다의 뜻, 육은 기르다, 키우다, 자라게 하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종합하면 교육은 앞선 사람을 보고 따라하며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일깨워서 키우게 한다는 뜻이다. ▶허신의 초상화. 허신은 같은 시대 양웅(揚雄)과 함께 한자 사전을 만든 인물로 유명하다. 한자의 자형에 주목하여 어원을 밝히는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지었다. 출처: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교육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education은 라틴어의 educo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이것은 ‘밖으로(e)+끌어낸다(duco)’의 뜻을 담고 있다. 이에 따르면 education은 사람이 자신 안에 있는 자질, 능력을 끌어내서 문제 상황을 풀어낸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은 한자[敎育]로든 영어[education]로든 한마디로 지금 당장 써먹을 지식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을 기르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는 모방, 깨달음, 계발, 성장 등 다양한 측면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공자의 ‘계발술’, 제자를 키우는 비법
<논어>를 읽으면 공자가 제자와 나누는 대화의 내용을 자주 볼 수 있다. 그 대화 속에서 우리는 공자의 인간적인 면을 엿볼 수 있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공부를 마친 뒤에 무성(武城)의 군수가 되었다. 공자는 원래 제자들이 관직보다 학문을 계속 연마하기를 바랐지만 현실 정치의 참여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공자 스스로도 학문적 성취를 거둔 뒤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던 전례가 있었다.
제자 자유가 관직에 나가자 공자는 가만히 있지 않고 축하 방문을 했다. 무성의 경계에 들어서자마자 공자는 금슬을 타고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공자는 뜻밖이라고 생각했는지 빙그레 웃었다. 공자는 자유를 만나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으려고 하는가?”라고 물었다. 이 말의 뜻은 이렇다. 공자가 강조하는 예악(禮樂)은 한 나라의 차원에서 실시할 수 있는 교육이지 소도시 차원에서 실시할 수 없는 교육이라는 말이다.
자유는 공자의 말을 듣고서 바로 반박했다. “군자가 예악을 배우면 주위 사람들을 아끼고 존중하며 소인이 예악을 배우면 소통하기가 쉽다.” 즉 예악을 배우는 것은 군자든 소인이든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에 해당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나라의 차원만이 아니라 소도시에서도 예악의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자유는 공자의 문하에 있을 때 예악(禮樂)을 갈고 닦았다. 그는 예악을 배우며 ‘앞으로 공직을 맡으면 어떻게 해야지!’라는 나름대로의 포부를 품게 되었다. 그는 무성의 군수가 되자 그 포부를 실천했던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예악을 알려주었던 스승 공자가 예악의 가치를 부정하는 발언을 하는 것이 아닌가? 자유는 깜짝 놀라며 공자의 말을 반박했다. 공자는 자유의 조리 있는 반론을 듣고서 곧바로 “자유의 말이 옳고 자신의 말이 농담이다”라며 사과 아닌 사과를 했다.
물론 공자는 자유의 반응을 의도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공자가 처음에 자유에게 건넨 말은 자유로 하여금 예악의 근본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자유는 예악이 계층과 지역을 떠나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도시의 예악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현장 체험을 통해 절감하게 된다. 이러한 체험은 다시 공자에게로 전해져서 “예악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을 실증하게 만들었다. ◀공자의 제자 자유의 초상화. 자유는 공부를 마친 뒤에 무성의 군수가 되었다. 출처: <사기: 열전>
이렇듯 공자와 제자의 대화는 교실 안만이 아니라 밖에서도 고도의 긴장을 요구했다. 가볍게 건넨 말 한마디조차도 근본적인 의미를 생각해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자 학교’는 남의 것을 내 것으로 착각하는 교실이 아니라 내 것을 일구기 위해 철저하고 치열하게 토론하는 세계였다. 이렇게 선생과 학생이 생산적인 긴장을 유지한 덕분에 공자 학교는 누구라고 오고 싶은 곳이 되었으리라. 공자 학교에 가면 누구라도 내 것을 건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글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2011), <인문학 명강, 동양고전>(공저, 2013), <불혹,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2013), <신정근 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2012), <논어>(2012),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2010)> 등이 있고, 역서로는 <소요유, 장자의 미학>(공역, 2013), <중국 현대 미학사>(공역, 2013),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공역, 2013) 등 30여 권의 책이 있다. 앞으로 동양 예술미학, 동양 현대철학의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인문학과 예술의 결합을 이룬 신인문학 운동을 진행하고자 한다.
첫댓글 좋은 말씀들 공유하여 공부하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행운이 함께하시길빕니다
불분불계(不憤不啓)에서
憤은 마음으로 알아내고 싶어도 그러지 못해 애태운다는 뜻이며,
啓는 그 뜻을 열어 주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 당시에는 성현의 가르침을 접하기가 너무나 어려웠기에,
공자를 대면하는 사람은 공자가 하신 말씀을 한자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던 것 같습니다.
요즈음처럼 학원ㅇ[ 강의 듣는 수준과는 천양지차의 분위기이었던 것 깉습니다.
그래서 한마디라도 얻어들으면
그 뜻을 새기고 새기며 깨닫고자하였던 것이겠죠?
추구하는 것이 간절하고 진실되지 않으면 쉽사리 알려주지 않는다~
요즘은 스맛폰 탓에 너무 쉽게 지식에 지식에 접근하는데 일장일단이 있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