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불의의 재물에 충성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천국 복음, 그 자체입니다.
만약 불의의 재물을 세상 재물이나 부정한 방법으로 축적한 재물이라고 해석하면
예수님의 천국 복음은 사탄의 밥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불의의 재물은 옳지 않은 청지기가 불의하게 사용한 재물,
곧 그 주인의 재물입니다.
예수님은 옳지 않는 청지기 비유를 하면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는 천국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불의한 청지기를 옳게 여긴 주인의 시각은 무엇인가?
이것이 곧 예수님의 관점이었습니다.
소유를 낭비할 때는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소유를 낭비할 때는
청지기 직무를 내려 놓아야 할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귈 때는 소유를 낭비한다고 책망한 것이 아니라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관점과 바리새인의 관점이
확연하게 차이가 났습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물을 주인의 재물로 보았고
바리새인들은 불의한 재물을 자신들의 돈 주머니로 생각하였습니다.
돈을 사랑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비웃는 바리새인들에게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누구인가를 가르쳤습니다.
여기에서 불의한 재물을 주인의 재물로 이해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 복음에 대한 지혜가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공자나 맹자 등
성현들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공생애 사역을 통하여
천국 복음을 말씀으로 계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옳지 않는 청지기의 불의한 행동을 통하여
역설적인 천국 복음을 담았습니다.
주인의 재물을 불의하게 임의대로 사용하였던 청지기를 기뻐한 것은
그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요, 비유를 말씀으로 베푸는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옳지 않는 청지기가 불의하게 사용하였던 주인의 재물은 곧 하나님의 의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는 복음 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옳지 않는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서
오직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야 영원한 처소로 영접한다는 메시야의 정체성을 드러내었습니다.
불의의 재물에 충성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용서를 도용하고 차용하고 뒤집어 쓰는 것입니다.
내 것으로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며 영광 돌리는 것이 하나님의 가치입니다.
나의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불교적인 색채의 기독교 신앙입니다.
부정한 세상 재물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불의의 재물을
공동번역은 세속의 재물이라고 하였고 현대어 번역은 세상 재물이라고 오역하였습니다.
불의하게 사용한 바로 그 재물이......
청기지의 불위한 행동, 그것이 곧 불의의 재물입니다.
소유를 낭비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지혜롭게 직무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주인은 그것을 기뻐하였습니다.
주인은 구두쇠가 아니요.
악덕 업자도 아니었습니다.
돈을 그냥 주지 않고 빌려준 것이
오히려 미안한 그런 주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역설적인 천국 복음을 선포하였으며
돈을 사랑하였던 바리새인들을 천국의 복음으로 가르쳤습니다..
불의의 재물을 주인의 재물로 이해를 하고 주인의 재물은 곧 하나님의 의로 깨닫는 사람은
부자를 지옥의 모델로 나사로를 천국의 모델로 삼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천국 복음으로 받은 주의 참된 성도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사랑하였던 재물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재물, 그 자체가 맘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비교 한 것은
자본의 힘을 믿고 따르는 맘몬 신앙을 경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리새인들처럼 조롱하는 사람들은
오늘날도 탐심의 탈을 쓰고 맘몬 신앙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재물이 많아 날마다 연회를 베풀며 호대광실 높은 집에서 호화호식하였던 부자는
지옥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잣집 대문간의 걸인 나사로는
가난한 자에게 임하는 천국 복음의 메세지가 되어 천국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구원이 무엇인가? 복음이 무엇인가?는
예수님의 시선을 갖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라는 예수님은
그리하면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베푸시는 예수님은
말씀에 순종하는 충성된 성도를 영원한 처소로 영접하는 바로 그 하나님 나라 왕이십니다.
바로 그 복음의 실상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나사로입니다.
걸인으로 천국의 주인공이 된 나사로의 공은
오직 천국에 들어거게 하신 하나님의 의입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물질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함께 공유한 사람들의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을 빙자하여 물질을 사랑하였던 바리새인의 맘몬 신앙은
오늘날 대형 교회를 이룩한 맘몬 신앙, 그 지옥의 모델이 된 바로 그 부자입니다.
옳지 않는 청지기는 불의한 재물, 곧 주인의 재물로
빚진 사람들을 불러 모아 빚잔치를 풍성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용서의 복음입니다.
용서는 나의 의를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나누는 것입니다.
나와 너 사이에 하나님의 의가 공존하는 것이
용서와 관용이요, 또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물로 역설적인 천국 복음을
하나님의 의로 용서하는 놀라운 그 말씀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로 빚잔치를 하면.....
그곳이 곧 예수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재물을 잘 모으고 재물을 잘 쓰는 것은
지옥 간 부자의 경영 마인드요, 사람의 철학이었습니다.
자본주의 경영학으로 쩌들어 있는 세상은
맘몬 신앙의 영화를 누리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에게 전해지는 천국 복음은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였던 나사로를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하였습니다.
누구라도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렌즈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천국 복음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부정한 세상 재물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불의의 재물을
공동번역은 세속의 재물이라고 하였고 현대어 번역은 세상 재물이라고 오역하였고
그 같은 맥락의 설교는 통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한국교회는
요한 계시록의 에베소 교회처럼 촛대를 옮기는 사역의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